§ 나는 될놈이다 1735화
사실 힘을 조절하면서 패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특히 그 상대가 초보자도 아니라 같은 랭커라면 더더욱.
하지만 태현은 스스로의 컨트롤에 자신이 있었다. PVP만 따지면 판온에서 정말 손꼽힐 정도로 많이 했던 사람 아닌가.
상대의 반응이나 메시지창만 봐도 아슬아슬하게 HP 5% 정도에서 딱 멈출 자신이 있었는데….
‘젠장!’
언령 마법이 풀린 다음부터 전투력이 얼마나 올라갔는지 정확하게 파악이 덜 된 탓에 이런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태현은 반성했다.
실수 때문에 애꿎은 플레이어 하나가….
‘애꿎진 않군.’
태현은 표정을 관리하며 고개를 들었다. 다른 굶주린 혼돈 플레이어들이 벌벌 떨며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봤나? 내 명령을 거역하는 놈은 이렇게 된다.”
“…힉!”
굶주린 혼돈 플레이어들은 완전히 겁에 질렸다.
솔직히 그들은 태현이 퍼소프를 이렇게 빨리 죽일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던 것이다.
퍼소프가 이렇게 무기력하게 당할 줄 몰랐다.
최소한 김태현 상대로 공격 좀 방어하면서 협상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그냥 무슨 말도 한 마디 못하고 죽어버렸다.
무섭다 진짜!
“전부 다 전투선 위로 올라가라! 허튼 수작을 부리는 놈이 있으면 모두 저놈처럼 죽여주마!”
“히… 히이익.”
굶주린 혼돈 플레이어들은 겁에 질려서 전투선 위로 올라갔다.
“지금부터 무슨 퀘스트를 하고 있었는지 밝혀라. 머뭇거리면 죽는다!”
“예, 예!”
* * *
30분 후.
“…….”
자신이 생각보다 서쪽으로 엄청나게 멀리 왔다는 걸 깨달은 태현은 인상을 찌푸렸다.
게다가 여기는….
‘예전에 왔던 원시의 섬 지역 아닌가?’
왕국 반역자 1왕자를 쫓다가 도착한 적 있는 서쪽 원시의 군도.
온갖 거대화한 몬스터들이 있는, 흉폭한 자연 그대로의 섬이었다.
나중에 태현이 레벨 500, 600쯤 되고 퀘스트 깰 거 없을 때 레벨업 하고 싶으면 오기 좋은 곳이었지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절대 오고 싶지 않았다.
‘저번에도 그 고생을 해서 간신히 빠져나왔는데….’
어지간한 위험한 곳들은 다 다녀본 태현이었지만 원시의 섬은 정말 끔찍한 곳이었다.
간신히 1왕자 목을 챙겨서 나와서 망정이었지….
[카르바노그가 굶주린 혼돈이 원시의 섬도 정복하려는 거 아니냐고 묻습니다.]
굶주린 혼돈은 자신의 영역에서 수많은 부하들을 내보내며 대륙을 위협해 왔다.
그러나 그런 부하들도 영원하지는 않은 법.
계속되는 싸움으로 부하들은 소모되었고, 굶주린 혼돈은 언제나 새로운 부하를 찾아 헤맸다.
대륙을 괜히 정복하고 새 부하들을 모집하는 게 아닌 것이다.
그런 점에서 봤을 때 원시의 섬에 있는 강력한 거대 몬스터들은 쓸 만한 괴수들이었다.
부릴 수만 있다면 완벽한 굶주린 혼돈의 괴수 군단이 되지 않겠는가.
하지만….
‘힘들지 않을까 싶은데.’
에스파 왕국의 고대 수인족 부족도 딱히 굶주린 혼돈을 따르진 않았다.
굶주린 혼돈은 어디까지나 힘으로 정복하는 놈이었지, 닥치는 대로 다 꼬드길 수 있는 아키서스 교단 같은 곳은 아니었다.
원시의 섬 몬스터들을 설득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던 것이다.
‘흠. 방해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 되는군.’
안 끼어들어도 그냥 망할 것 같으면서도, 괜히 내버려 뒀다가 만약 성공하면 골치가 아파질 것 같은 이 불길함.
태현은 물었다.
“일단 배를 동쪽으로 돌려라. 대륙으로 돌아가고 나서 생각하자.”
“저, 그게….”
“?”
“저희 혼자만 온 게 아니라서요….”
“야, 말대꾸하면 어떡해!!”
“너 때문에 우리까지 같이 죽게 생겼잖아!!”
굶주린 혼돈 플레이어들은 동료의 멱살을 붙잡았다. 태현은 그걸 말리고 물었다.
“혼자 온 게 아니라니? 다른 배들도 더 있나?”
“예.”
“얼마나?”
“저도 다 모를 정도로 많이… 이게 퀘스트 규모가 상당히 커서 다들 많이 참가했거든요….”
“…….”
태현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수평선 끝에서 작은 점들이 하나둘씩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고 있었다.
아마 굶주린 혼돈의 플레이어들이 각자 타고 온 함선이 분명했다.
‘아… 이거 복잡해지는데.’
태현은 생각에 잠겼다. 굶주린 혼돈 플레이어들은 갑자기 태현이 침묵하자 더 겁을 먹고 벌벌 떨었다.
이러다가 갑자기 칼 휘두르는 거 아니야???
“…일단 상황 확인만 하고 가자. 서쪽으로 돌려라.”
태현은 만약 상황이 안 좋다 싶으면 다른 놈들 함선 모조리 바닥 박살 낸 다음 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 * *
보스턴 타이거즈 선수, 빈체로는 원시의 섬 해안가에 임시로 만든 캠프에 들어갔다.
굶주린 혼돈 플레이어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불을 쬐고 있었다.
그 모습은 휴식이라기보다는 난파선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우울하게 모여 있는 모습에 가까웠다.
‘이 자식들 정말 도움 안 되게 생겼군.’
서쪽 원시의 섬에 도착해서 굶주린 혼돈의 위대함을 알려주어라!
…란 거창한 퀘스트 내용과 별개로, 이 퀘스트는 시작부터 좌초 직전이었다.
일단 상당히 많은 플레이어들이 원시의 섬으로 오다가 길을 잃거나 침몰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륙 서쪽의 대해가 그렇게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게다가 경험 많은 선원이나 낚시꾼 플레이어들은 모두 굶주린 혼돈에게 이를 갈며 대륙으로 올라가서 숨어버렸으니….
바다에 익숙하지 않은 선원들과 배를 데리고 나온 만큼 이런 결과는 예정되어 있었다.
빈체로는 한숨을 쉬며 파티원한테 물었다.
“역시 그냥 랭커들은 믿을 게 안 돼. 선수급은 되어야 한다고.”
“하지만… 선수들은 찾기가 힘들잖습니까. 게다가 요즘 다들 눈치 보여서 굶주린 혼돈 가입한 것도 숨기고.”
“나도 알아. 돌레로 그 자식도 갑자기 굶주린 혼돈 가입한 거 반성한다고, 나한테 같이 나오자고 하더라고. 뉴욕 라이온즈 잘나가는 게 뻔히 보이는데 그런 소리가 나와?”
“아무래도 이미지도 있으니까요.”
“이미지는 배부른 소리지. 일단 이기고 유명해져야 뭘 이미지를 신경 쓰지… 일단 퀘스트에 퍼소프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곧 도착하겠지.”
뉴욕 라이온즈 선수, 퍼소프.
좋아하진 않았지만 실력은 확실했다. 빈체로는 놈이 오면 협력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베이징 파이터즈하고 상하이 팬더즈 선수들도 있다던데.”
“진짜 참가했답니까?”
“걔네는 어차피 더 망가질 이미지도 없잖아. 중국 팬들은 뭘 해도 밀어줄 거고.”
“중국 팬들도 한계가 있을 텐데요….”
“어쨌든 빨리 이곳저곳에 연락해서 접촉해 봐. 여기 이 패잔병들 데리고 무슨 퀘스트를 해.”
빈체로는 캠프를 가리키며 말했다.
배를 잃어버린 플레이어들은 우울한 표정으로 모닥불을 쳐다보며 말하고 있었다.
“내 배는… 굶주린 혼돈의 축복도 받아서 정말 멋지고 아름다운 배였는데… 그놈의 파도가… 크흑….”
‘미친놈들 진짜.’
둘러보단 빈체로는 배 한 대가 또 해안가에 도착하는 걸 보았다.
본 적 없는 얼굴들이 우르르 내리는 걸 보니, 또 이름 없는 랭커들이나 고렙 파티가 도착한 모양이었다.
‘별 거 아니겠군. 젠장. 선수들은 언제 오는 거야?’
최소한 상위권 랭커들이나 선수급 정도는 되어야 같이 무슨 퀘스트를 할 텐데….
뿌우우우우우우우!
[원시의 울음이 터져나옵니다!]
“온다!! 온다!!”
“뛰쳐나와!!”
“????”
도착한 지 얼마 안 되는 플레이어는 감을 잡지 못하고 당황해하고 있었지만, 도착한 지 좀 된 플레이어들은 새파랗게 질려서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 섬들을 지배하고 있는 놈들이 오고 있는 것이다!
쿵쿵쿵쿵쿵쿵-
[황금고릴라가 <세계를 울리는 포효>를 사용합니다!]
[황금고릴라가 <원시의 힘>을 사용합니다!]
[황금고릴라들의 힘이 공명합니다! 더욱더 증폭됩니다!]
[섬에 흐르는 신비로운 기운이 더욱더 강하게 만들어줍니다!]
[황금고릴라들이 <원시의 브레스>를 사용합니다!]
“다들 싸… 크악!”
[HP가 0이 되어 로그아웃…]
앞에서 그나마 기운 좋게 외치던 플레이어 하나가 브레스를 잘못 맞고 사라져 버렸다.
거인 정도는 꼬마처럼 다룰 덩치의 고릴라들이 나타나자 플레이어들은 대경실색했다.
심지어 도착한 지 좀 된 플레이어들도 엄청나게 놀라고 있었다.
“고릴라잖아?!! 저런 놈들도 있었어?!”
“말도 안 돼! 여긴 기껏해야 원숭이 정도만 나타났는데!!”
‘이 자식들 아직 고릴라를 못 만나봤구나.’
뒤늦게 도착한 태현은 해안가에 모인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 깨달았다.
이 원시의 섬에 온 지 얼마 안 된 만큼, 안에 있는 몬스터들을 얼마 못 만난 게 분명했다.
그러니까 저런 반응이 오지!
‘차라리 잘 됐다.’
태현은 혼란에 빠진 캠프를 보고 미소 지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태현의 목적을 달성하기가 더 쉬웠다.
“화력 강화. 함정 강화. 은밀 강화.”
[폭탄을 사용합니다.]
[언령 마법으로 추가 효과가…]
[드워프의 금속 마법을 시전합니다!]
[시한폭탄 함정이 장착됩니다!]
[마법 스킬이 높습니다!]
[화술 스킬이 높습니다!]
[기계공학 스킬이…]
[…]
[…]
[함선 흘수선에 함정이 장착됩니다!]
[기계공학 스킬이 오릅니다!]
착착착착착착착-
태현은 은신 스킬을 켜고 언령 마법과 기계공학 스킬을 사용해 미친듯이 함선에 함정을 뿌리기 시작했다.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 태현의 기술을 꿰뚫어 볼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기계공학 스킬은 물론이고 대장장이 기술 스킬도 없으니….
‘너무 쉽군. 이래서 파티에 대장장이들을 데리고 다녀야 한다니까.’
이런 파티에 대장장이들이 있을 리가 있나.
태현은 흐뭇해하며 해안가 함선 구멍 작업을 해나갔다.
“거기 너!!”
“!”
태현은 깜짝 놀랐다.
웬 랭커 한 놈이 태현을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 너! 넌 좀 달라 보인다.”
‘뭐라는 거지?’
뭐가 달라 보인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첩자 같다는 뜻인가?
“운 좋은 줄 알아! 우리 파티에 합류해! 여기 있다가는 다 죽겠다!”
“같이 온 놈들이 있는데.”
“같이 온 놈들도 데리고 와! 특별히 허락해 준다!”
빈체로는 다급히 외쳤다.
원래라면 태현처럼 이름도 모르는 플레이어를 파티에 끼워 줄 일은 없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분노한 고릴라들의 습격으로 인해 캠프가 박살 나기 직전이었던 것이다.
복구나 방어는 이미 물건너갔고, 그냥 최대한 챙길 수 있을 만큼 챙기고 튀어야 했다.
그런 와중에 태현은 제법 침착하게 주변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야. 이게 얼마나 대단한 기회인지 모르는 모양인데, 난 원래 이름 없는 랭커는 파티에 안 껴줘! 네가 침착한 게 기특해서 넣어주는 거야!!”
“…….”
“…….”
태현 뒤에 있던 굶주린 혼돈 플레이어들은 빈체로를 미친놈 보듯이 쳐다보았다.
저 새끼가 뭐라고 주절대는 거야!?
‘김태현 빡쳐서 칼 뽑는 거 아니지?’
‘변, 변장했으니까 참지 않을까?’
그들은 갑자기 혈투가 벌어질까 봐 조마조마했다.
그러나 태현은 싱긋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군. 그래. 참가하도록 하지.”
“잘 생각했다! 그러면 빠져나가자! 달려! 캠프 박살 나기 전에!!”
빈체로와 파티원들이 먼저 숲속으로 달려 나가고, 태현은 그 뒤를 쫓았다.
굶주린 혼돈 플레이어들은 태현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죽일까요??”
“아냐.”
“그럼 반쯤 죽일까요?”
“왜 자꾸 죽이려고만 하지?”
태현은 의아하다는 듯이 되물었다. 그 질문에 굶주린 혼돈 플레이어들은 더욱 당황스러워했다.
그야….
네가 김태현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