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824화
한 번 기회를 잡은 아키서스 포병대들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쏴라!
두 백작은 이를 갈며 부하들을 멀찍이 후퇴시켰다. 계속 여기 있다가는 밤까지 되기도 전에 죽을 것 같았다.
“백, 백작님. 저런 놈들과 정말 협상을 해야 합니까?”
부하 중 하나가 그렇게 말했다. 스카비오 백작은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참았다.
“두고 봐라. 내가 저놈들을 속이고 말 테니까!”
* * *
“와! 백작들이 도망간다!!”
그 대단한 핏빛 군도의 백작들이 뭘 해보지도 못하고 도망치자 플레이어들은 환호했다.
물론 두 백작이 도망친 데에는 복잡한 사정이 있었지만, 플레이어 눈에는 그냥 태현이 겁이 나서 도망친 것으로 보일 뿐!
“백작이라고 거들먹거리던데 별거 아니잖아?”
“맞아! 맞아!”
백작쯤 되는 NPC면 얼굴 한 번 보기도 힘들었다.
그런 백작이 이렇게 도망치는 건 하나의 쾌감이었다.
신이 난 플레이어들은 더 나아갔다.
“우우! 스카비오 백작! 돌아와라!”
“이런 모욕을 받고서도 도망치면 넌 뱀파이어의 수치다!”
[명성이 오릅니다!]
[경험치를 얻습니다!]
[스카비오 백작이 당신의 이름을…]
[……]
경험치와 각종 보상이 들어오는 대신, 스카비오 백작이나 안달토 백작이 네 이름을 기억했다는 메시지창이 떴다.
평소라면 무서웠겠지만 이번에는 아니었다.
태현이 있으니까!
“흥. 어디서 협박이야!”
“맞아. 우린 이제 여기서 플레이할 거야!”
시설도 거의 없는 곳이지만 충성도는 무한 수준!
백작들이 저 멀리 도망친 걸 확인한 플레이어들은 우르르 태현에게 몰려왔다.
“김태현! 김태현! 김태현!”
“김태… 현?”
“??”
달려온 플레이어들은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분위기가 좀 이상했던 것!
“뭐야? 무슨 일이야?”
“어떻게 된….”
마치 초상집 같은 침울한 분위기였다. 태현 일행은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죄송하게 됐습니다. 저희가 잠시 가봐야 해서….”
“아니, 대체 무슨 일로요? 같이 싸우기로 한 거 아니었어요?!”
새로 도착한 플레이어가 당황해서 외쳤다.
같이 싸우기로 했는데 이걸 버려두고 갈 일이 있나?
“이제 곧 결승전에 참가해야 해서요.”
“…….”
아…!
그런 거라면 어쩔 수 없지…!
* * *
‘아니 결승전 몇 시간 전인데 여기서 이러고 있는 사람이 있냐??’란 말도 나왔지만, 사람들은 어떻게 막을지 이야기를 나눴다.
태현이 잠시 자리를 비웠지만 기사단과 아키서스 포병대는 그대로 남아있는 상황.
전력은 충분했지만….
그래도 불안하다!
제대로 된 리더가 있는지 없는지의 차이는 생각보다 컸다.
늑대가 이끄는 사자 무리보다는 사자가 이끄는 늑대 무리가 더 나은 법!
자리에 모인 플레이어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어쩌지?”
“그래도 성벽 멀쩡하고 저기 기사단도 있으니까 괜찮지 않나?”
“김태현 없어서 불안한데 도망쳐야 하지 않을까?”
두려움이란 건 무서웠다.
충분히 단결하면 막을 수 있는 상황인데도 겁을 먹고 도망치게 만들었다.
게다가 전염까지 되었다.
적은 멀리 후퇴하고 공격도 시작하지 않았는데 벌써 도망치려고 하는 사람들이 나올 정도!
그걸 본 블라디는 깨달았다.
이대로 가면 진짜 죽는다!
저기 있는 플레이어들은 도망쳐도 백작들이 쫓지 않겠지만, 블라디는 무조건 쫓아올 것이다.
-다른 놈은 몰라도 넌 죽인다, 개자식!
아직도 백작들과 그 부하들의 눈빛이 눈에 선했다.
저들을 남겨둬야 했다.
“크크크… 들어라! 이 나약한 흡혈귀들아!”
블라디는 최대한 그럴듯하게 보이기 위해 애쓰며 성벽 위에 올라섰다.
연기에 실패하면 죽는다!
“김태현 폐하께서는 나한테 전권을 맡기고 가셨다. 내 명령에 따라라! 이 진정한 흡혈귀 블라디 님이 너희들을 승리로 이끌어 줄 것이니!”
“블라디?”
“걔가 누구야? 나 처음 들어보는데.”
“근데 김태현이 믿고 맡길 정도면 괜찮은 NPC 아닐까?”
“안 알려진 전설 NPC 같은 건가?”
알아서 좋게 해석해 주는 뱀파이어들!
블라디가 핏빛 군도 해안가에서 잘 모르는 뱀파이어들 상대로 뽑기 사기 치던 늙은 뱀파이어라는 걸 눈치채는 플레이어는 없었다.
블라디에게는 천만다행인 일이었다.
“싸워라! 싸워라! 싸워서 놈들의 피를 마셔라! 저놈들은 별거 아니다!”
“와… 와아아!”
블라디가 분위기를 띄우려고 노력하자 어느 정도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블라디는 더 분위기를 띄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 목적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저놈들을 발라내고 저놈들의 영지까지 쳐들어가자!”
“와아아!”
“저놈들의 영지를 뺏어서 너희들에게 나눠주겠다!”
“와아아아아아아!”
“근데 그게 진짜 가능해?”
“뭔가 믿는 게 있으니까 저러는 게 아닐까?”
“와. 김태현 진짜 대단하다. 핏빛 군도 영주 정도는 이길 수 있다 이건가?”
“김태현 정도라면 그런 자신감을 가져도….”
* * *
흡혈성에서 같이 싸우기 vs 결승전 현장에서 직접 보기.
에반젤린은 후자를 선택했다.
‘어쩔 수 없었어!’
손에 들린 표.
이 표 하나를 사기 위해 그녀가 얼마나 괴로웠던가.
‘그저 이 표 하나가 갖고 싶었습니다…!’
“에반젤린. 울어?”
“아, 아니야. 안 울어.”
“김태현 선수랑 친하다고 하던데, 김태현 선수가 결승전에 올라와서 우는 거구나!”
“그건 진짜 아니야.”
“미, 미안.”
에반젤린이 정색하자 친구들은 움찔했다. 아니었어?
방송에서는 되게 친해 보이던데…?
“와아아아아아아아아!”
귀청을 찢는 듯한 거대한 함성.
그 함성에 에반젤린은 선수들이 들어오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대단해!’
마치 세상이 떠나갈 것 같은 뜨거운 열기.
단순히 판온의 던전을 공략하는 대회에 이만한 사람들이 모일 줄이야.
지금 판온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게임이었고, 가장 대단한 스포츠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김태현은 거기에서 가장 유명한 선수고.’
그렇게 생각하니 새삼 태현이 대단해 보였다.
맨날 옆에서 인성을 폭발시킬 때는 ‘아오 저 사악한…!’라고 생각했었는데….
판온에서 ‘나름’ 유명한 플레이어들은 꽤 있었지만, 태현처럼 독보적인 위치에 선 플레이어는 많지 않았다.
에반젤린도 캐나다 대표로 초대를 받을 정도였지만 태현과 비교한다면 민망할 수준!
“김태현! 김태현! 김태현!”
친구들이 옆에서 태현의 이름을 부르며 환호하고 있었다.
‘그래! 지금 이럴 때가 아니지.’
에반젤린도 대회의 열기에 몸을 맡겼다. 그리고 양손을 들어 올리며 외쳤다.
“이세연! 이세연! 이세연!”
“…….”
친구들은 당황한 눈으로 에반젤린을 쳐다보았다.
진짜 안 친한가 봐!
* * *
“흠. 지금 잠깐 캡슐 들어가서 흡혈성 어떻게 굴러가나 확인만 하고 오면 안 되나?”
“안 됩니다. 미스터 김.”
대회 주최 측은 단호하게 말했다.
행사의 간판이 어딜 가려고!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
“앗. 적이다.”
“우우! 물러가라! 물러가라!”
“…….”
생각보다 더 유치한 반응에 이세연은 아연실색해졌다.
지금 이게 몇천만 명이 볼 대회의 결승전을 앞둔 선수가 할 반응이야?
“카메라… 돌아가고 있는데….”
“걱정 마. 작게 말해서 남들이 보면 화기애애하게 대화하고 있는 줄 알 거야.”
실제로 그랬다.
-아, 두 팀의 주장이 만나서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의외로 화기애애한 모습인데요?
-저렇게 보이지만 사실 두 선수의 관계는 아주 역사가 깊습니다. 무려 판온 1까지 올라가지요.
-아, 그런가요? 둘이 친한 줄 알았는데! 실제로 판온에서도 같이 플레이하는 모습이 종종 보였고 말입니다.
-친할 땐 친하지만 싸울 땐 또 칼같이 싸우는 게 프로 아니겠습니까!
해설자와 캐스터들은 태현과 이세연이 눈만 마주쳐도 호들갑을 떨었다.
한 명만 있어도 흥행이 보장되는 선수인데 그 둘이 이렇게 모여 있다니!
-그런데 오늘 경기가 어떻게 진행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아. 정말 예상이 많았죠. 제가 본 예상만 해도 수백개가 넘은 거 같습니다.
해설자 마누엘은 진중하게 입을 열었다.
E-스포츠에서 명 해설자로 이름 높은 마누엘은 온갖 경기를 깊이 있게 분석하고 예측하는 능력으로 이름이 높은 사람이었다.
팬들은 마누엘을 ‘예언자’라고 부를 정도!
-네! 팬들은 양 팀이 숨겨놓은 기상천외한 비책을 꺼내기를 기대하고 있었죠.
-하지만 전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아… 그런가요?
어떻게 보면 기대를 깨는 마누엘의 말이었지만 캐스터들은 당황하지 않고 받았다.
-네. 그렇습니다. 기책이나 숨겨왔던 비장의 한 수 같은 건 모든 팬들이 좋아하지만, 사실 어디에서든 그런 걸 보기 힘듭니다. 왜냐하면 프로들은 언제나 전력으로 플레이하기 때문입니다.
마누엘의 목소리에는 설득력이 있었다.
-게다가 판온 같은 경우는 기본적으로 선수들이 모두 판온 안에서 엄청나게 오랫동안 활동합니다. 노출이 안 될 수가 없어요. 어떤 퀘스트를 하든 영상에 한 번쯤은 잡히기 마련입니다. 자, 그러면 봅시다. 대회에서 비장의 수를 쓰려면 일단 여기까지 올라오는 경기에서도 쓰지 않고 참아야 합니다. 참고로 이 대회는 상대와 맞붙는 게 아니라 던전에 들어가서 혼자 싸우는 경기입니다. 만약 아껴뒀다가 지면 정말 아무한테도 말을 할 수가 없는 겁니다. 거기서 끝이 아닙니다. 게임 내에서도 쓰지 않고 참아야 합니다. 한 번 썼다가 영상이 올라오면 그대로 분석될 테니까요.
판온은 정보 공유나 분석이 엄청나게 빨랐다.
실제로 판온 대회에 나오는 선수들은 집요할 정도로 분석당했다.
게임에서 딱 한 번 쓴 스킬 영상이 남아서 분석된 적이 있을 정도로!
각 프로게임단 전력분석팀들이 가만히 놀고먹는 게 아니었다. 그 사람들은 밥 먹고 이런 것만 했다.
-그러니까 마누엘 해설자님은 그런 기상천외한, 아무도 모르는 스킬들이 튀어나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네. 그렇죠. 약간 실망스러운 말일수도 있지만, 이제까지 알려진 전략들 사이에서 조합한 견실한 싸움이 될 거라 봅니다.
마누엘은 자신만만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서로 상대방한테 한 대 먹여주기 위해서 결승전까지 스킬을 숨긴다니.
그게 말이나 되나?
* * *
초청 가수들의 화려한 무대, 홀로그램 쇼(거기에는 태현 일행이 같이 드래곤을 레이드하는 모습도 있었다), 사전 인터뷰, 사전 인터뷰 (2), 사전 인터뷰 (3), 사진 촬영….
이런 걸 좋아하는 최상윤도 진이 빠질 정도였지만, 태현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끝냈다.
최상윤은 놀라웠다.
‘아니, 불평 한마디도 안 하네?’
보면 볼수록 신기한 변화!
“야… 괜찮냐?”
“응? 아. 물론이지.”
최상윤은 움찔했다.
태현의 눈빛에서 진지한 불꽃이 튀고 있었던 것이다.
벌써부터 속으로 싸우고 있었다!
‘이세연을 얼마나 이기고 싶어하는 거야?’
“애들아. 이제 곧 경기 시작이다.”
-아! 김태현 선수가 다른 선수들을 불러 모으네요. 마지막으로 다짐을 하나 봅니다.
-저런 것도 주장의 역할이죠! 훈훈합니다!
“여기까지만 온 것도 잘한 거다.”
케인은 태현의 말에 순간 감동했다.
“…라고 하는 놈들은 헛소리하는 거니까 무시해라. 그건 다 의미가 없어!”
“…….”
“…….”
“의미는 이세연을 이기는 것에 있다. 이겨야 해! 쟤를 이겨야 의미가 생겨!”
“아, 아니. 준우승도 잘한….”
“개소리 하지 마! 준우승은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아!”
케인은 시무룩해져서 조용해졌다.
“패배할 수도 있지. 하지만 그게 이세연이면 안 돼!”
“…….”
“후. 내가 기본적으로 친절하긴 하지만….”
“????”
????
“…지면 좀 사람 성질이 더러워질 수도 있을 거 같다.”
케인은 기겁했다. 그럼 이제까지는 친절하고 부드러운 태현이었다는 건가?
“이기자!”
‘이겨야 한다!’
케인은 절박하게 생각했다.
야 이거 지면 진짜…!
그리고 그 비슷한 대화가 반대쪽에서도 일어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