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될놈이다 823화
공성전은 꼭 힘으로 우직하게 밀어붙이는 것만 있는 게 아니었다.
성을 점령하는 게 목적이라면 그래야 하겠지만, 안에 있는 무언가가 목적이라면 혼란을 틈타 훔치기만 해도 됐다.
그리고 뱀파이어 종족은 도둑질에 최적화된 종족!
안개로 변신하거나 박쥐로 변신하거나 기타 등등으로 변신해서 성 안으로 들어올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심장을 훔쳐가지 못하도록 최대한 대비해야 했다.
“뱀파이어 놈들 생각이야 뻔하지.”
“역시 폐하!”
“역시 폐하!”
[기사단이 당신의 전략에 감탄합니다!]
[기사단 내 평판이 오릅니다!]
[기사단이 당신 곁에 머무르는 시간이 늘어납니다!]
태현은 흐뭇하게 웃었다.
‘응?’
시간이 늘어난다고?
‘아니… 적당히 하고 보내야 하는데. 얘네 언제까지 쫓아올 거지?’
원래라면 성과를 못 내고 뺑뺑이만 돌아서 ‘아니! 폐하랑 더 이상 같이 못 다니겠습니다!’라고 하면서 떠나야 했다.
그런데 태현이 워낙 오자마자 팍팍 성과를 내고 있으니 기사단도 ‘역시 폐하! 대륙의 영웅!’ 하면서 대만족하고 있었다.
뱀파이어들 쓸어버린 것부터 시작해서 그들의 성까지 점령하다니!
지금 뱀파이어들과 같이 손을 잡고 성을 지키는 것도 더 많은 언데드들을 처형하기 위한 전략이겠지?!
물론 태현에게 그런 생각은 없었다.
‘얘네 어떻게 쫓아 보낸다?’
* * *
태현이 오지 않을 습격을 대비하며 심장 주변을 경계하고 있는 동안, 두 뱀파이어 백작은 부하들을 이끌고 빠르게 나타났다.
속전속결!
-블라디란 놈이 흡혈성을 완전히 장악하기 전에 쳐야 한다!
덕분에 규모는 좀 작아 보였지만, 한 명 한 명이 정예였다. 뱀파이어 플레이어들은 금세 알아봤다.
“와. 저거 복장이… 기사들인가 본데?”
“백작 호위 기사들 아냐? 백작이 직접 왔어!”
“살다 살다 백작을 직접 보네.”
대륙에서도 영주 얼굴은 쉽게 보기 힘들듯이, 핏빛 군도도 마찬가지였다.
공을 세우거나 그만한 위치에 올라가지 않는 한 쉽게 만날 수 없는 게 귀족 NPC!
플레이어들은 신이 나서 백작과 기사단을 관찰했다. 이번 기회가 아니면 언제 보겠냐!
“사진 좀 찍어보자. 각도 좋네.”
“야. 내 뒤 배경으로 잡히게 잘 찍어줘.”
태연한 플레이어들!
원래라면 겁을 먹어야 하겠지만 아무도 겁을 먹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 뒤에는 태현이 있었으니까!
“…저놈들 왜 저러지?”
“미친놈들인가 봅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스카비오 백작이 찜찜해하자 부하들이 달랬다.
“그보다 지금 문제는….”
스카비오 백작과 기사단이 반대쪽에서 달려오는 무리를 보고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안달토 백작의 기사단이었다.
그랬다.
흡혈성을 갖고 싶어하는 건 스카비오 백작 혼자뿐만이 아닌 것!
“그리고 공격을 하더라도 놈이 토끼를 눈치채지 못하게 해야 한다.”
“걱정 마십시오. 백작님. 놈은 그게 얼마나 중요한 건지도 모를 겁니다. 아마 다른 보물들에 눈이 팔려 헤헤거리고 있을 테니….”
* * *
“토왕아. 엎드려!”
-카릉!
“뛰어!”
-카르릉!
“전광석화!”
-카릉?
“…뭐하냐??”
케인은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물었다.
태현이 저렇게 쓸데없는 짓으로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니!
“아. 얘 레벨 못 올리나 확인해 보고 있었지.”
레벨 1은 정말 숨만 쉬어도 레벨이 오르는 수준이었다.
그런데도 레벨이 안 오르다니.
‘아예 레벨 1로 고정인가?’
보통 레벨 1로 고정되어 있다는 건 저주를 받았거나, 아니면 다른 능력들이 너무 사기적이라 레벨 1로 제한되는 페널티를 갖고 있거나였다.
‘…저주?’
아무리 생각해도 전자 같은데?
[저주는 없다고 카르바노그가 말합니다.]
‘그러면 그냥 단순하게 불쌍한 토끼인가?’
* * *
“…그래도 공격은 조심히 해야 한다. 혹시라도 토끼가 있는 곳에 공격이라도 맞으면….”
“걱정 마십시오. 백작님.”
“주의해서 공격할 겁니다.”
부하 기사들은 자신들만 믿으라는 듯이 가슴을 두드렸다.
그들이 누구인가.
스카비오 백작의 친위 기사들 아닌가!
각종 검술과 전투뿐만 아니라 마법까지 익힌 뱀파이어 마검사!
성벽 위에서 뱀파이어들이 버티고 있다지만 우스울 뿐이었다.
다그닥다그닥-
“…?”
그러는 사이 안달토 백작 쪽에서 사신이 왔다.
“무슨 일이냐?”
“주인님께서 스카비오 백작님을 뵙고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십니다.”
“감히 건방지게…!”
“아니. 아니다.”
스카비오 백작은 부하들을 말렸다.
안달토 백작과 만나 이야기하는 건 평소라면 거절할 일이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좀 달랐다.
일단 중요한 건 토끼였으니까!
“좋아. 만나보도록 하지.”
스카비오 백작과 안달토 백작은 호위 몇 명만 데리고 중앙으로 모였다.
흡혈성 위의 플레이어들은 그걸 신기하게 쳐다봤다.
-우와! 귀족 NPC들이 회의한다!
-무슨 이야기하는 거지?
“이렇게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백작님.”
“피차 바쁘니 할 이야기만 하지. 원하는 게 뭔가?”
“잘 아시잖습니까? 백작님도.”
‘이놈도 토끼를 원하고 있군.’
스카비오 백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저는 백작님께서 그걸 가져가셔도 납득할 수 있습니다.”
아무도 믿지 않을 소리!
‘웃기는 소리를 하는군.’
“그렇지만 저 블라디란 놈은 아닙니다! 어디서 나온지도 모르는 건방진 놈이 감히 내가 보낸 사신을 공격하다니!”
스카비오 백작은 그 말을 듣고 안달토 백작이 사신을 보냈다는 걸 깨달았다.
‘이런 치사한 놈이…?’
그새 손을 잡으려 들어?
다행히 블라디란 놈이 포악하고 건방져서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둘이 손을 잡을 뻔했다!
“어떻습니까, 백작님? 토끼를 손에 넣을 때까지 서로 손을 잡는 게?”
“으음….”
스카비오 백작 입장에서는 손해 볼 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스카비오 백작은 안달토 백작보다 훨씬 더 노회하고 교활하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동맹을 맺더라도 이용해 먹을 자신이 있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군. 토끼는….”
“…저 블라디란 놈을 끝장내고서 누가 가질지 정하도록 합시다!”
안달토 백작은 씩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젊은 뱀파이어 백작다운 패기였다.
스카비오 백작은 그 손을 붙잡았다.
* * *
“응? 너희 뭐하냐?”
“예?”
심장 근처 주변에 기사단을 배치한 태현은 성벽 위로 올라왔다.
그리고 신기한 장면을 보았다.
뱀파이어 백작 둘이 당당하게 성 아래 평원에서 회담 진행 중!
“쏴야지! 쏘기 좋게 앉아 있네!”
“어, 귀족들이 회의하는 중 아닙니까?”
귀족 NPC들은 기본적으로 대우를 받았다.
귀족 NPC들이 만나서 회의를 하면 그게 설령 적진 앞이라도 ‘음… 그래도 저걸 공격하는 건 좀 불명예스러운 일이니까….’ 하고 참는 게 보통!
“아키서스 교단에서는 그런 거 없다!”
“아…! 그런…!”
아키서스 포병대는 감탄했다.
그렇구나!
귀족들의 규칙 같은 건 신경 쓰지 않는 너무 멋진 아키서스 교단!
[아키서스 포병대가 경험치를 얻습니다.]
[스킬이 상승합니다.]
“발사!”
콰콰콰쾅!
악수를 하던 두 백작은 뭔가 날아오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저 먼 성벽 위에서 포탄이 날아오고 있었다.
“?!!”
그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사정거리가 긴 아키서스 포병대!
설마 ‘이 거리를 바로 때리지는 못하겠지’라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귀족들이 회의하는데 설마 이걸 무시하고 치겠어? 라고 생각한 것도 사실!
그러나 태현도 아키서스 포병대도 그런 건 신경 쓰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블라디의 악명이 오릅니다!]
[귀족들의 규칙을 깼습니다! 핏빛 군도의 뱀파이어 귀족들이 블라디에게 분노합니다!]
[……]
[……]
페널티는 상당했다.
귀족들이 회의하는 걸 무시하고 선빵을 갈긴 것에 대한 분노!
가만히 있다가 덤터기를 쓴 블라디는 울상을 지었다.
“우리 친구 블라디를 협박하다니! 용서할 수 없군. 더 쏴라!”
“블라디를 위해!”
아키서스 포병대는 신이 나서 포탄을 갈겨댔다.
설마 이런 공격을 받을 거라고 생각지 못한 뱀파이어 기사들은 급하게 허둥지둥 도망칠 뿐이었다.
“그만 쏴! 개 같은 놈들아!”
“블라디를 위해! 블라디를 위해!”
“뭘 날 위해서야!”
블라디는 애타게 외쳤지만 포병대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각자 자기 주인들을 데리고 도망치던 기사들은 이를 갈며 블라디를 저주했다.
“블라디! 피의 이름을 걸고 네 목을 잘라주겠다!”
“블라디…! 앞으로 핏빛 군도에서 네놈이 보이는 순간 널 죽여 버리겠다!”
“…….”
블라디는 털썩 주저앉았다.
내가 어쩌다가…!
태현은 그런 블라디를 위로했다.
“괜찮아. 밖에 안 나가고 성 안에만 있으면 되지. 성 관리 잘하고 좋겠네.”
“…….”
위로에 탁월한 재주가 있는 태현!
태현은 그 재주를 제대로 발휘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위로뿐만 아니라 도발에도 재주가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태현은 앞으로 나섰다.
“하찮은 두 놈들아! 블라디 님께서 너희들 같은 쓰레기들이 도망치는 모습을 보니 하찮아서 더 이상 볼 가치도 없다고 하신다!”
“!”
“!!!”
“너희들한테는 백작 자리도 아깝다! 블라디 님한테 사신을 보내서 굽신거리던 놈들이 이렇게 건방지게 오다니, 블라디 님께 용서받고 싶으면 당장 군대를 물리고 제대로 된 사과를 해라!”
“저런 개자식이….”
“네놈의 핏방울 모두를 빨아 먹어주마!”
“잠깐…?”
이를 갈던 뱀파이어 기사들은 뭔가 이상한 걸 깨달았다.
“백, 백작님.”
“왜 그러느냐?”
“저, 저놈 어깨 위에…?”
두 백작은 눈을 가늘게 뜨고 노려보았다. 성벽 위에 있는 인간 놈 어깨 위에 뭔가….
“토… 토… 토끼?!”
“저놈이 어떻게?!”
두 백작은 기겁했다. 아무리 봐도 그들이 찾아 헤매던 그 토끼가 맞았다.
태현이 그걸 찾아낸 것도 놀라웠고, 아무런 구속 장치나 마법 장치 없이 토끼를 데리고 다닌다는 것도 놀라웠다.
크네마 백작이 아닌 이상 저 토끼를 데리고 다닐 수가 없을 텐데!?
“가… 가짜 아닌가? 우리를 혼란시키려고….”
“가짜치고는 너무 그럴듯한데….”
“게다가 가짜라고 하더라도, 그렇다면 놈이 정말로 찾은 게 되잖나!”
뱀파이어 기사들이 떠들어대자 태현은 의아해했다.
쟤네 왜 도망가다 말고 저러고 있지?
“다시 발사.”
“예이!”
포병대는 신이 나서 장전했다. 누구 명령이라고 거역할까!
스카비오 백작은 무릎을 쳤다. 그제야 상황을 깨달을 수 있었다.
“블라디, 이 무서운 놈 같으니…!”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백작님?”
“블라디 그놈도 알고 있었던 거다! 우리가 크네마 백작의 토끼를 노리고 있었다는 것을! 놈은 그걸 알고 먼저 성으로 들어가 토끼를 손에 넣은 거지. 저것 봐라! 저건 협박이다. 우리가 치고 들어갈 경우 토끼를 파괴할 수도 있다는 협박!”
-카르릉.
태현 어깨 위에 있던 토왕이가 불편하다는 듯이 꿈틀댔다. 그러자 태현은 토왕이를 양손으로 잡고 내려놓았다.
그걸 본 스카비오 백작은 손가락질했다.
“저, 저것 봐라! 놈이 토끼의 목을 조르려고 하고 있다! 이런 사악하고 더러운 놈 같으니…!”
스카비오 백작은 전율했다.
오랫동안 살아오면서 온갖 더럽고 비열하고 치사한 뱀파이어들은 다 만나왔지만, 블라디는 그걸 뛰어넘었다.
뱀파이어 중 가장 영악하고 비열한 뱀파이어!
“일단 물러선다!”
“하,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지.”
스카비오 백작은 목소리를 낮췄다.
“저놈과 몰래 협상을 할 수밖에.”
“…!!”
방금 손을 잡았던 안달토 백작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태도!
그러나 부하들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뱀파이어 귀족들 사이에서 배신은 일상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그러면….”
쾅! 콰쾅!
“그래. 밤이 되면 몰래….”
콰쾅! 콰콰콰쾅!
“아, 이 저주받은 놈들아! 그만 쏘지 못해?!”
진짜 집요하게도 쏴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