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화
“아, 내가 늦었네. 일찍 와서 도와주려고 했는데 벌써 정리가 끝났을 줄이야.”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해맑게 웃는 리브엘이 내 앞에 섰다. 더불어 파이의 굳은 얼굴이 점점 가까워지면서 내 얼굴에 핏기가 가셔버렸다.
도… 도망치고 싶다. 지금 당장. 이 자리를 뜨고 싶어.
“아직 식사 전이지? 같이 식사하러…….”
“내가 분명 내 여자에게 접근하지 말라고 경고했을 텐데.”
예상했던 대로 리브엘과 내 사이를 막아선 파이가 서로 노려보며 대립을 펼친다. 파이의 덩치가 워낙 대단해서 리브엘이 조금 주눅이 드는 것 같았지만 그도 결코 굴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그래서… 이 두 사람이 금방이라도 혈투를 벌일 분위기라 눈앞이 까마득해졌다.
‘어떡하지?’
레이라는 내게서 한발 물러나 초조해 했고, 에이든은 그런 레이라의 뒤에서 눈치만 살폈다. 누구도 쉽게 막아설 수 없는 상황이긴 하다. 다행히 리브엘이 타고 온 마차가 가게를 가려주고 있어서 사람들의 이목이 덜 끌렸다. 그러나 이 시간이 길어지면 곤란하다. 지금도 가게 쪽을 흘끔 쳐다보는 어떤 여자와 시선이 마주쳤기 때문에 더 조급해졌다.
“여기서 더 싸우면 둘 다 다시는 안 볼 겁니다. 빈말 아녜요.”
나는 두 사람을 향해 단호한 목소리로 이를 악물고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러자 리브엘이 먼저 파이에게서 시선을 내리깔았다. 파이는 내 쪽으로 더 다가와 나를 리브엘에게서 가리기 급급했다. 하여간 집착이라고 해야 할지, 소유욕이라고 해야 할지. 이제 와 갑자기 나타나서 왜 자꾸 제멋대로 구는 거냐고!
“오늘은 두 사람 다 돌아가 줬으면 합니다. 좀 쉬고 싶으니까 이만 가세요. 레이라, 가자.”
“으응.”
괜한 분란을 조성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피하는 게 해결책은 아니라고 하지만 오늘 너무 엄청난 일을 겪어서 내 몸과 정신이 휴식을 달라고 아우성이다. 육체는 천근만근. 두통이 오려는지 머리도 지끈지끈 쑤시고.
그래서 내가 그 자리를 먼저 떴다. 곧 레이라가 내 뒤를 따랐고, 우리 가게에서 걸어갈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작은 저택으로 들어섰다.
“치즈. 씻고 식사할 거지? 바로 준비하라고 할게.”
“응. 이따 식당에서 봐.”
2층 계단에서 서로의 방으로 각자 흩어지고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드러눕고 싶은 걸 겨우 참았다. 나는 일단 훌렁훌렁 옷을 벗고 욕실로 들어가 욕조에 따뜻한 물을 담았다. 그 안에 과일 향 입욕제를 잔뜩 부어 거품을 한가득 만들어낸 뒤에 욕조 안으로 들어가 앉았다.
아, 따뜻하다.
일은 재미있지만, 꽤 힘든 작업이라서 집에 오면 늘 고단했다. 이렇게 따스한 물에 몸을 담그면 그나마 피로가 가시곤 했었다. 오늘은 평소보다 피로함이 배는 더 쌓인 느낌이라서 일부러 달콤한 입욕제를 풀었다. 기분을 좀 풀어볼까 싶었는데 복잡한 머릿속이 좀처럼 가라앉질 않는다.
[치즈 네가 나를 믿는다면, 내가 내민 손을 잡아주었으면 좋겠다.]
아카데미 시절부터 지금까지, 조금도 변하지 않은 모습으로 다가오는 리브엘. 나와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자는 그 말에 마음이 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만큼 나는 이미 심신 모두가 지친 상태였다.
과거의 나는 외롭다는 기분을 그렇게 크게 느껴본 적이 없었다. 부모님이 존재하지 않았으나 파이가 그 빈자리를 채워줬기 때문에 괜찮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내게는 서로 믿고 의지할 가족 같은 존재가 필요함을 절실히 깨달았다. 내가 이렇게나 의지박약한 사람이었다는 것도 최근 들어서 느끼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리브엘의 진심은 외로운 내 마음을 움직이기 충분했다.
[혼인하자, 우리.]
그러나 뜬금없이, 정말 예상치도 못하게 나를 찾아와 혼인부터 들이미는 파이. 마치 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라도 하고 있던 사람처럼 기가 막힌 순간에 찾아와버렸다. 하나 확실한 사실이 있다면 파이가 내 정신을 헤집어놓는 유일한 존재라는 거다. 지난 반년간 그렇게 파이를 잊으려고 애썼는데, 그의 등장으로 전부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하여간 엉망진창이 되어버렸다. 전부다.
정신이 너무 번다해 최대한 머릿속을 비우려고 노력했다. 목욕을 마치고 식사를 한 뒤에 정원 산책이라도 하면서 마음을 달래야겠다. 예상컨대 파이나 리브엘 둘 다 쉽게 물러설 것 같지 않으니까.
그랬는데…….
“…당신이 왜 여기 있는 거야?”
식사시간에 늦은 것 같아 젖은 머리카락을 대충 말리고 부랴부랴 내려왔건만. 이미 목욕을 마치고 식당에 내려온 레이라와 에이든. 그리고 에이든의 맞은편 자리에 떡하니 앉아있는 파이를 보고 두 눈을 의심했다. 그러나 자리에서 일어나 내가 앉을 자신의 옆자리 의자를 빼내는 파이가 나를 향해 빙긋 웃는다.
“어서 와. 기다리고 있었다. 씻겨주러 들어갈까 했는데 에이든 저놈이 눈치 없게 막아서더군.”
…눈치 없는 건 파이 당신 같은데요?
아주 배짱이 두둑한 모양이다. 반년 전과 전혀 다름없는 태도로 나를 맞이하니 어이가 없었다. 가라앉던 두통이 다시금 밀려오는 것 같았다.
레이라가 나를 향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살짝 으쓱거리는 걸 보아하니 알겠다. 그를 들어오지 못 하게 말렸음에도 불구하고 불도저처럼 제멋대로 우리 저택에 난입했다는 것을. 내가 아는 파이의 성격으로 미루어보아 아예 예상을 하지 못했던 건 아니었다. 다만 설마 했던 일이 실제로 벌어져 당황스러울 따름이다.
당장 여길 나가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막상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은근히 이런 상황이 오기를 기대하고 있었나 보다. 나는 모른 척 그가 빼낸 의자에 앉았다. 그러자 내 의자를 정리해주고 당당히 옆자리에 앉는다. 그리고 나를 빤히 내려다보는 그를 애써 무시한 채 냅킨을 펼쳐 무릎 위에 얹어놓았다.
곧 저택의 사용인들이 식사를 날라다 주었다. 그들은 새로운 사람이 내 옆자리에 있다는 것에 꽤 놀란 눈치였다. 그러더니 그 사용인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여자가 내 앞에 접시를 놓아주며 용감하게 묻는다.
“저분, 아가씨 애인이세요?”
원래 대놓고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아닌데 내 옆에 남자가 있는 게 신기했나 보다. 아니, 몇몇 사용인들이 얼굴을 붉히면서 파이를 힐끔 쳐다보는 걸 보니 잘생긴 남자라서 좋은가보다. 에이든도 꽤 곱상해서 예쁘장한 얼굴인데 에이든한테는 그러지 않더니 왜 파이한테만?
나는 그저 어색하게 웃으며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렸다. 부정도 긍정도 하고 싶지 않다. 감히 파이한테 눈독 들이는 것들이 얄미워서 긍정하고 싶었으나, 그럼 또 파이가 기세등등해질까 봐.
“식사는 꽤 잘 챙겨 먹었나 보군. 잘 먹고는 있는지 매일 걱정했다.”
사용인들이 전부 물러나고 접시에 잘 구워놓은 오리고기를 내려다보며 나이프와 포크를 집었다. 그랬는데 파이가 내 접시를 옆으로 끌어당긴다. 무슨 짓이냐는 얼굴로 그를 쳐다보자, 뻔뻔하게 내 걱정을 뱉어내며 고기를 잘게 썰어준다. 너무 자연스러운 행동에 그대로 굳어버려 작게 썰리는 고기들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이… 이게 아니야!’
버릇이라는 거, 참 무서운 거라는 생각에 식은땀이 절로 났다. 이십 년간 그가 내 먹을거리를 일일이 챙겼던 기억. 그가 먹을 음식을 정리해줄 때까지 기다렸던 몸에 밴 습관에 기가 찼다. 반년간 혼자서 잘 해냈던 일들이었음에도 왜 지금의 나는 멍하니 보기만 하고 있는 건지.
“내가 할 거예요.”
“다 했어. 기다려.”
억울하다. 기다리라는 말에 또 아무 말도 못 하는 내가 너무 한심했다. 은근히 그가 나를 챙겨주는 게 또… 왠지 모르게 기뻐서 더 속이 상한다. 매번 에이든이 레이라에게 정성을 다하는 모습을 은근 부럽게 느끼기도 했었다. 자신의 살점까지 내어주겠다는 의지를 보이는 에이든이 얄밉기도 했다. 그래서 더 스스로를 자책하며 파이를 원망했었는데.
“오리고기보다 닭고기가 더 좋다고 하지 않았나? 네가 좋아할 향은 아닌 것 같은데.”
게다가 내 취향까지 모르는 게 없는 사람이라 왠지 어깨에 힘이 쭉 빠져버린다. 날 너무 잘 아는 사람이라 분해 죽겠다. 또 지난 반년간 파이 없이도 잘만 살아왔던 내가 그의 행동에 예전과 같은 반응을 보이고 있어서 더 화가 난다.
“음식으로 투정 부리던 예전의 내가 아니에요. 이젠 당근도 잘 먹는다고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그래. 뭐든 골고루 잘 먹어야 건강한 법이다. 앞으로 그 고된 일을 하면서 버티려면 가리지 말고 먹어야지.”
“…또 잔소리!”
괜히 빽 소리를 지르고 그에게서 내 접시를 빼앗아 왔다. 그리고 신경질적으로 고기를 포크로 찍어 하나씩 입에 넣고 턱이 부서져라 씹었다. 슬프게도 그의 말대로 질감이나 향이 영 내 취향은 아니다. 주니까 먹기는 하지만… 매번 음식을 먹으면서도 레어에서 먹었던 음식들과 비교를 안 할 수가 없었다. 나름 괜찮은 주방장의 요리 솜씨인데 내 취향은 아니었다.
“맛있기만 한데 뭐. 흥.”
“그새 입맛이 바뀐 건가. 그런 느끼한 소스를 좋아하게 될 줄은 몰랐다.”
생선의 비린 향과 느끼한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다. 부드러운 육질이 아닌 오리고기의 퍽퍽한 살도 사실 싫어했다. 사실 반년 동안 주는 대로 먹으면서 불평불만을 하지 않았는데 오늘은 내 미각의 솔직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게 다 파이 때문이야. 그래서 이 남자랑은 더더욱 안 돼. 버릇이 나빠지잖아?
“레이라. 오늘 판매실적은 어땠어?”
나는 일부러 파이를 무시하고 레이라에게 말을 걸었다. 어쩐지 오늘따라 가벼워진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더 기분이 좋지 못했다. 반대로 레이라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나와 파이를 번갈아 쳐다보며 즐거운 듯 밝은 미소를 짓는다.
“판매실적이야 늘 상승세지. 아까 네가 주문받은 디저트 중에서 절반은 메르틴 후작가에서 열릴 티파티에 사용한대.”
“헉, 정말? 티파티면 귀부인들이 여럿 모이는 자리잖아?”
“그러니까 더 앞으로 바빠질 거야. 아마 치즈 너 혼자서 감당하지 못할걸? 메르틴 후작부인이 청포도 타르트를 무척 좋아한다는 소문이 있어. 네가 만든 걸 먹고 나면 앞으로 매일 디저트는 우리 가게에서 주문할지도 몰라.”
타르트는 내가 가장 자신 있게 만드는 디저트 중 하나였다. 특히 크림치즈를 블랑 제국에서 치즈 장인으로 유명하다는 분께 공수해와 자신 있게 최고급이라고 자랑할 수 있다.
지금도 주문량이 많아서 간당간당한대, 앞으로 더 늘어나면 이젠 정말 직원을 뽑아야 할 거다. 남에게 맡기면 불안해서 최대한 내가 하려고 한 건데. 왕궁에서 주문을 한번 받고 난 뒤로 손님이 너무 많아져서 하루하루가 너무 정신이 없었다. 바빠서 좋기는 해도 몸이 축나니까 가끔은 이러다가 쓰러질 수도 있겠다는 걱정도 들었고.
“큰일이네. 믿을 만한 사람 아니면 직원으로 들이기가 좀 그런데.”
“그건 천천히 생각해보고. 나는 치즈 네 입맛이 변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구나?”
레이라의 뜬금없는 말에 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눈꺼풀을 빠르게 팔랑거렸다.
“그게 무슨 소리야?”
“만날 맛있다고만 해서 미각을 잃었나 싶었거든. 디저트 만드는 걸 보면 꽤 까다로운 입맛인데 식사할 때는 그냥 다 맛있다고 했잖아. 내가 먹어도 그냥 그런 맛인데.”
“…이게 일반적인 식사 아니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