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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랑 한 번만 해요, 그거-98화 (98/132)

# 98화

내가 무어라 말할 새도 없이 제 할 말만 던져놓는 그가 나를 끌고 그 자리에서 빠져 나왔다. 리브엘은 여전히 그 자리에 앉은 채 굳은 얼굴로 파이의 뒤통수를 노려보기만 했다.

“파이, 파이! 이거 놓지 못해요?!”

그의 손에 잡힌 손이 너무 아프다. 손뼈가 전부 가루가 되어버릴 것 같아서 빼내려고 당겼으나 그는 절대 놓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끌어당겨 품에 안고는 반대 손으로 내 눈을 가렸다. 곧 옅은 바람이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그가 이동마법을 사용했다는 걸 알았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납치하다니. 이 못된 드래곤이……!”

“치즈.”

아까와는 다르게 다디단 생크림처럼 부드러운 목소리에 실린 내 이름이 너무 낯익었다. 늘 그리웠던 음성. 매일 밤 내 몸을 달아오르게 했던 이 단단한 품속의 아늑한 느낌.

내가 얼마나 그를 애타게 기다렸는지 이제 좀 알 것 같았다.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와 내 눈두덩을 덮은 그의 손바닥을 전부 적셔버렸다. 그러자 파이가 두 손으로 내 뺨을 감싸 쥐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애써 마음의 정리를 할 필요도, 내가 아닌 다른 이와 긴밀한 관계를 상상할 필요는 없다. 그토록 나를 잊으려 애를 쓸 필요가 있던가? 내가 보고 싶었다면 돌아오지 그랬나. 굳이 네가 오는 걸 막지 않았을 텐데.”

“누, 누가 보고 싶다고 했어요?!”

“아니어도 상관없다. 중요한 건, 감히 내가 버젓이 살아있는데 네가 그 흡혈귀 놈과 나 몰래 긴밀한 사이가 되려고 했다는 거다.”

어디서부터 무슨 말을 어떻게 전해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내게 처한 상황들을 전부 아는 것 같았다. 그보다 지금 이 남자 참 웃기네. 마치 내가 다른 사람과 바람난 것을 추궁하는 느낌이다.

“그게 파이하고 무슨 상관이에요? 파이하고 나는 이미 헤어졌어요. 내가 반년 전에 파이에게 헤어지자고 했잖아요?”

“글쎄? 기억나지 않는군. 그리고 네가 그런 말을 했다 쳐도 나는 수락한 기억이 전혀 없는데?”

이럴 줄 알았다. 은근슬쩍 자기 합리화. 상대방의 기분 따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저 못된 심보!

“반년이에요. 만약 파이 말대로 우리가 연애 중이었다 하더라도, 반년을 서로 만나지 않았다면 그건 헤어진 거나 다름없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서로 간의 시간을 갖자고 한 건 치즈 너다. 그리고 나는 아직 네가 내 사람이라는 생각엔 변함이 없다.”

“내가 분명 마음이 바뀌지 않는 이상 찾아오지 말라고 했…….”

갑자기 내 뺨에서 손을 거둬낸 그가 내 앞에 한쪽 무릎을 세워서 앉는다. 그러더니 내 오른손을 조심스레 잡아당겨서 손등에 가벼운 키스를 남긴다. 덕분에 나는 뒷말을 다 잇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렸다.

파이가, 내 앞에서… 무릎을 꿇었어?

“치즈 네가 원하는 것, 다 들어줄 생각이다. 혼인도, 네가 하고 싶은 일도, 전부 지지해주려고.”

“…네?”

“혼인하자, 우리.”

너무 당황한 나머지 줄줄 흐르던 눈물이 쏙 들어가 버렸다. 분명 오늘치 주문량을 마치고 내일 재료를 준비하기 전에 리브엘과 담판을 지으려고 했었다. 많은 고심 끝에 리브엘만 괜찮다면 시간을 조금 더 두고 서로를 알아가는 건 어떻겠냐고 말할 참이었는데. 느닷없이 나타난 파이가 너무 갑작스럽게 혼인을 운운해서 머리가 다 어지러워졌다.

무려 반년이 넘도록 나를 찾아오지 않던 이다. 어느덧 계절이 두 번 바뀌었고, 곧 내 스물한 번째 생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내 생일 전에 오지 않으면 이제 진짜 끝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막상 이렇게 그가 나를 찾아온 것도 믿어지지 않는데, 혼인하자는 이야기를 듣게 되니 현실성이 뚝 떨어졌다.

“뭐… 방금 뭐라고……?”

너무도 듣고 싶었던 말이었지만, 기대하고 바라던 상황이었으나 기쁘다기보다는 의구심이 든다. 코빼기 한번 비추지 않던 그가 왜 갑자기 마음이 한순간 바뀌었을까? 그것도 반년이 지나도록 소문 한 자락 없다가 내가 리브엘에게 고백을 받은 이 시점에?

“네가 그토록 원하는 혼인을 못 할 이유는 없겠더군. 네 말대로 서류에 사인만 하는 그 관계가 어려운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 조건을 하나 두려고.”

“조건?”

“혼인서약서 내용을 한 줄 추가했으면 한다. 만일 상대가 이성과의 관계에서 오해할만한 상황이 닥칠 때 반려자의 결정에 군말 없이 따르도록 한다, 고.”

…아아, 알겠다. 그가 혼인을 빌미로 나를 가둬놓을 작정이라는 것을. 아마 내가 에이든을 향해 미소만 지어도 그걸 트집 잡아 레어에 감금시키고도 남을 작자다. 그의 지독한 집착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는 있으니까.

“싫어요.”

이대로 저 못 된 드래곤의 마음대로 나를 요리하게 놔두지 않을 거다. 반년간 쩍쩍 갈라져 부서져 버린 심장에 폭우가 쏟아진 것만 수백 번이다. 물기를 머금은 흙이 단단해지는 것처럼 나는 이미 과거의 내가 아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처럼 휩쓸리지 않을 거다.

나는 굳게 결심한 마음을 다잡아 그를 똑바로 올려다보며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내 의견을 전했다.

“마음을 정리하지 못했다는 건 아직 누구를 만날 마음의 준비가 되지 못했다는 뜻이에요. 오해하지 마요. 당신 때문이 아니니까요.”

내 앞에 반쯤 앉은 채 굳어버린 그의 선홍색 눈동자가 잘게 흔들린다. 그런다고 흔들릴 내가 아니다. 나는 조금 더 턱을 치켜들고 당당하게 콧대를 드높였다.

“그리고 혼인에 대한 결정은 당신이 아니라 내가 해요.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진다고요. 당신 멋대로 내 인생을 이래라저래라 하지 말아요, 알았어요?!”

그의 손에 잡힌 내 손을 빼내고 팔짱을 끼며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자 파이가 비틀거리면서 엉거주춤한 자세로 자리에서 일어난다. 꽤나 당황한 티가 역력했으나 개의치 않았다. 그렇다고 아예 신경이 안 쓰이는 건 아니었지만.

“나 일하던 중이에요. 어서 돌려보내 줘요.”

“…혼인은?”

“조건을 거는 혼인 따위 필요 없어요. 그러려고 혼인해달라는 뜻이 아니었으니까. 나중에 얘기하고 어서 돌려보내 줘요. 나 바쁜 몸이라고요!”

빨리 보내 달라고 두 눈을 감으며 고개를 팩 돌렸다. 그러고 나서 한참 뒤에야 미약한 바람이 불어왔고, 멀리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와 눈을 떴다. 주위를 둘러보니 우리 디저트 가게의 뒤편이다.

사실 파이가 제안했던 혼인을 허락하기 전까지 나를 돌려보내지 않을 줄 알았다. 그는 그러고도 남을 인사였으니까. 그래서 걱정했건만 다행히 내 의견을 존중해주는가 싶어 아주 조금 마음이 동했다. 하지만 그런다고 그런 어이없는 조건까지 내건 혼인을 받아들일 내가 아니지. 나는 아쉬울 게 하나도 없다고.

“할 얘기 있으면 이따가 일 끝나고 해요. 뭐,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을 것 같긴 하지만요.”

일부러 더 퉁명스럽게 대꾸하며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몸을 돌려서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더 쾅! 소리가 나도록 문을 닫고 문 뒤에 등을 기댄 채 호흡을 가다듬었다.

손과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온다. 두 눈을 질끈 감고 곤두세워진 신경을 가라앉히려 노력할 때, 내 심장이 얼마나 세차게 뛰는지 느껴졌다.

오늘 이 상황이 전부 다 꿈은 아니겠지?

“치즈? 무, 무슨 일이야?”

조리실 안쪽으로 들어온 레이라가 나를 발견하고 한달음에 다가온다. 레이라의 목소리에 어쩐지 안심이 되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게 다 현실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괜찮은 거야? 응? 공작 각하와 이야기한다고 나갔다가 네 그분이 오셨다는 얘기는 들었어.”

“괜찮지 않은데 나쁘지도 않아. 그냥 조금, 혼란스러워서…….”

“그렇지 않아도 방금 가게 주문 마감했어. 뒷정리는 폐하께 맡겨놨으니까 일단 돌아가자. 너 상태가 매우 안 좋아 보여.”

“정말 괜찮아. 아직 정신은 말짱해. 내일 치 주문 들어온 거 재료는 준비해야지.”

“…알았어. 내가 도와줄게. 어서 하자.”

재료를 정리하면서 생각보다 금방 안정이 되었다. 숙성이 필요한 반죽을 미리 만들어 보관실에 넣어두고, 구입해야 할 과일과 부족한 물품목록을 꼼꼼하게 확인했다. 그 사이에 레이라는 정산을 마치고 에이든과 함께 뒷정리를 마쳤다. 그리고 나는 레이라에게 찰싹 달라붙어 있는 에이든을 흘겨보며 뾰로통하게 물었다.

“황제라는 사람이 바쁘지도 않은가 봐요? 요새 너무 자주 온다는 생각 안 해요?”

“치즈 너야말로 요즘 괜히 시비가 늘었거든? 욕구불만을 그렇게 풀면 곤란해.”

“요, 욕구불만이라니! 누, 누, 누가 욕구불만이라는 거야?!”

괜히 얼굴이 화르르 달아올라 새빨개진 상태로 삿대질을 하자 에이든이 음흉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런 반응을 보이니까 더 수상하다? 아니면 아닌 거지 왜 그렇게 흥분하고 그래?”

“하여간 폐하도 짓궂게… 치즈한테 그러지 마요! 그렇지 않아도 심란한 애한테!”

레이라가 에이든의 등짝을 후려치며 구박하자 에이든이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입술 끝을 쭉 내린다. 나는 그런 에이든을 향해 꼴좋다는 듯 비웃어주었고 더 새초롬한 표정으로 가게를 마감했다.

“치즈. 저기.”

가게 문을 잠그는데 레이라가 작은 목소리로 나를 부른다. 고개를 돌려 레이라가 가리키는 곳을 보고는 흠칫 놀랐다. 가게 반대편에 세워져 있는 커다란 나무 기둥에 등을 기대고 서 있는 파이와 눈이 마주쳐버렸기 때문이다.

준비하는 데 거의 두세 시간은 걸렸을 거다. 설마 그동안 저기에서 계속 기다리고 있던 걸까? 펄떡거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다시 가게의 문을 잠그는데 손이 떨려와 애먹었다. 보다 못한 레이라가 대신 잠가주었고, 내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려주었다. 그리고 땀에 젖어 엉망인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정리해주며 한숨을 쉬었다.

“아마 쉽게 돌아갈 것 같지는 않아 보여. 저분, 할 얘기가 매우 많아 보이는 눈치거든.”

“우선은 씻고 싶은데…….”

“그럼 저택으로 초대하는 건 어때?”

“그래도 될까?”

“물론이지. 어차피 식사도 아직이잖아. 저녁도 챙겨 먹어야 하니까. 가능하면 식사도 같이하고. 오랜만에 만났으니 쌓인 회포도 풀어야지.”

같이 지내는 레이라가 불편해할까 봐 그 말을 차마 하진 못했다. 그랬는데 레이라가 먼저 제안해줘서 참 고마웠다. 레이라도 반년간 나를 찾아오지 않은 파이에 대해서 실망했다고 했었다. 하지만 리브엘을 탐탁지 않게 여겨서인지 지금 이 상황에 파이가 찾아와 은근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고마워, 레이라. 그리고 미안해. 너까지 신경 쓰게 해서.”

“무슨 그런 섭섭한 소리를 해. 나야말로 네가 행복해지길 바라는 사람 중 한 명이라고.”

내 손을 조심스레 꼭 잡고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세상에 의지할 곳이라고는 파이밖에 없던 내게 새로운 삶을 만들어준 내 소중한 친구. 가족보다 더 나를 아껴주는 레이라가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그럼…….”

저 멀리에 서 있던 파이가 내 쪽으로 걸어오는 동시에, 낯익은 마차 한 대가 가게 앞에 멈췄다. 우리는 동시에 마차를 쳐다보면서 눈꺼풀을 빠르게 끔뻑거리기만 했다.

“리브엘.”

마차에서 내리는 녹색 머리카락의 그가 영롱한 초콜릿 눈동자를 반짝거리며 나를 향해 미소를 그린다. 갑작스런 파이의 등장에 잠시 잊고 있었다. 파이가 나타나기 전에 리브엘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다가 혼란으로 뒤덮였다. 이 엉망진창인 상황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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