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화
멍청한 얼굴로 되묻는 내 물음에 레이라가 포크를 내려놓고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나도 지금까지 몇 번이나 주방장을 바꾸고 싶은 걸 겨우 참았다고. 그래서 솔직히 걱정됐어. 음식을 맛으로 먹어야 한다고 했던 네가 이제는 그냥 허한 마음을 채우기 위해 먹는 게 아닐까 해서.”
괜히 속마음이 들킨 것 같아서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저 그런 음식을 내가 맛있다고 하니까 레이라도 차마 내게 말하지 못하고 억지로 식사를 했다는 생각에 미안해지기도. 나 때문에 레이라의 미각도 고통받고 있었다는 생각에 차마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매번 빵을 너무 많이 먹어 입맛이 없다는 말을 하면서 음식을 남겼던 거구나.
“그, 그랬구나……. 진작 얘기하지. 나야 먹을 음식을 끼니때마다 챙겨 먹는 것만으로도 감사했을 뿐이야. 굶주리는 것만큼은 피할 수 있었으니까.”
“하여간 치즈 너도 참. 그런 얼굴로 맛있다고 해봐야 누구도 믿지 못해. 진작 솔직하게 털어놓으라고 할 걸 그랬네. 나는 또 네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버렸지 뭐야?”
“미안해, 레이라.”
잔뜩 주눅이 들어 어깨를 축 내리며 사과를 했다. 그러자 레이라가 냅킨으로 입가를 정리한 뒤에 자리에서 일어난다. 덩달아 에이든도 식기를 내려놓고 일어나 레이라의 의자를 뒤로 당겨주었다.
“식사 아직 다 안 했는데 어디 가려고?”
“자리를 피해주려고. 두 사람 할 말이 많은 것 같은데 우리는 나가서 데이트 좀 하고 올게.”
그러더니 파이를 쳐다보며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정중하게 말을 이었다.
“치즈에게 맛있는 식사 부탁드려요. 부디 좋은 시간 보내세요.”
그렇게 레이라는 나를 이 못된 드래곤에게 맡겨버리고 에이든과 홀랑 밖으로 나가버렸다. 나는 레이라가 나가버린 문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파이의 손이 내게 뻗어오는 것을 느끼고 움찔거렸다.
“머리카락을 제대로 말리지 않으면 머릿결도 두피도 상한다. 가서 제대로 말리고 나가지.”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부드럽게 파고드는 그의 단단한 손가락이 두피에 닿는다. 익숙한 촉감이지만 오랜만에 느끼는 감각에 소름이 오스스 돋아나 버렸다.
“레어에는 안 가요.”
“레어에 가자는 말이 아니다. 어서 일어나. 맛없는 식사를 억지로 할 필요는 없다.”
“이거 다 먹을 때까지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을 거예요.”
괜히 더 오기를 부려 식탁 위에 놓인 오리고기를 두 점이나 한꺼번에 입속으로 밀어 넣었다. 맛보다는 일단 배를 빨리 채우고 방으로 돌아가 잠이나 자야겠다는 생각이 컸다. 오늘은 너무 피곤해서 쉬어야 했다. 내일 아침에 일어나서 구매할 목록을 다시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꾸역꾸역 고기를 흡입했다. 옆에서 내 얼굴이 뚫어져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면서.
“잘 먹었습니다.”
평소에는 입맛이 없다는 핑계로 식사를 남기는 게 대부분이었지만 오늘은 남기지 않았다. 그건 이제 어떤 음식이든 알아서 잘 먹으니 내게서 신경을 꺼줬으면 한다는 무언의 신호였다.
억지로 다 먹은 뒤 포크를 내려놓고 냅킨으로 입가를 정리한 뒤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파이가 덩달아 일어나더니 내게 손을 내민다.
“데려다줄게.”
한숨이 절로 나온다. 그가 내게 손을 내미는 행동에 은근히 설렜다. 그냥 손만 내밀었을 뿐인데 내 심장이 왜 반응을 보이는 거냐고!
“필요 없으니까 그만 돌아가요. 오늘은 파이 별로 보고 싶지 않아요.”
“네가 안전하게 방으로 돌아가 잠드는 걸 내 눈으로 확인해야겠다.”
“…대체 왜 그래야 하는데요?”
“네가 말했지. 마음이 바뀌면 찾아오라고. 나는 이미 너와 혼인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러니 앞으로 너와 다시 함께 생활하는 건 당연하지 않은가.”
“뭔가 빠진 게 있지 않아요?”
“빠진 거라니?”
나는 두 눈을 치켜뜨며 그의 가슴팍을 손가락으로 콕콕 찔렀다.
“당신 마음이 바뀌어 나를 찾아왔다 한들, 내 마음이 변해서 당신을 원하지 않으면 우리 사이는 완전히 끝난 거라고 했잖아요? 그러니 나를 원망하지 말라고 했던 말을 나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요.”
“딱히 네 마음이 변한 것 같진 않은데?”
“…그건 당신 생각이고! 나를 다 아는 것처럼 굴지 말란 말이에요!”
얄미워. 얄미워 죽겠다. 그가 없을 때는 스스로가 놀랄 정도로 늘 차분한 감정을 유지했었다. 그런데 그가 나타나고 나서는 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그야말로 난장판이 따로 없다. 멋대로 발작하듯 뛰어대는 내 심장이 제어되질 않는다. 그야말로 혼돈의 도가니탕이 되어버린 머릿속이 멀쩡해질 생각도 하지 않았다.
이건 재앙이다. 그의 존재 하나에 모든 신경세포와 감각들이 살아 움직여서 한순간에 모조리 점령당한 기분이었다. 자연재해로 치면 대홍수 급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난데없는 물난리에 허우적거리는 것 같았다.
“아무튼, 나는 그 혼인, 절대 허락하지 않아요. 당신 계략에 더는 놀아나지 않을 거라고요. 말했듯 결정은 내가 하니까…….”
“천천히 결정하도록 해. 나 역시 급하지 않다. 네가 그간 쌓아두었던 감정을 해소하려면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아.”
하여간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다. 일방통행만 고집하는 저 나쁜 남자 같으니.
나는 들은 척도 안 하고 코웃음을 치며 식당을 빠져나가려고 했다.
“다만, 너무 오래 걸리면 나도 내가 널 어떻게 할지 몰라. 나도 너와 마찬가지로 감정이 있는 짐승이니 말이다.”
“지, 지금 협박이라도 하는 거예요?”
“글쎄?”
가볍게 코웃음을 치는 그의 얼굴이 짓궂은 웃음기로 가득 차올랐다. 장난인지 진심인지 모를 대답에 서늘한 기운이 등줄기를 타고 느리게 흘러내리는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도 애써 모른 척하면서 식당 문을 거칠게 열고 큰 소리가 나도록 세게 닫았다. 방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발을 일부러 더 소리 나도록 바닥을 쾅쾅 내리쳤다. 발바닥이 얼얼해서 나중에는 침대에 엎어져 발 마사지를 해줘야 했지만 말이다.
‘아, 몰라. 몰라! 모르겠다!’
내가 아는 파이라면 순순히 돌아갈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일단 커튼을 죄다 치고 방 문고리도 걸어 잠갔다. 그리고 침대에 앉아 입을 꾹 다문 채 두 주먹으로 애꿎은 베개만 팡팡 내리쳤다.
이 나쁜 놈! 못된 놈! 혼인해달라고 백날 빌고 빌어봐라! 내가 그 어이없는 조건이 붙은 혼인 따위 허락할 성싶어?!
한참 베개에 화풀이하다가 금세 지쳐서 침대에 대자로 누워버렸다.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아서 속으로만 비명을 지르며 온몸으로 짜증을 풀어냈다.
“…힘들어.”
일할 때보다 더 많은 체력을 소비하고 나서야 피곤함이 물밀 듯 몰려온다. 아직 해가 완전히 지지 않아서 붉은 노을빛이 커튼 너머로 새어 들어왔다. 일찍 자면 새벽에 눈을 뜰 것이 분명하다. 요즘 들어 깊은 잠에 빠지지 못해서 오래 잠들지 못했다.
자면… 안 되는데…….
하지만 내 뇌는 빨리 쉬길 바라는 듯 급격하게 졸음이 몰려왔다. 결국, 나는 일단 뒷일은 모르겠다는 생각으로 엉금엉금 기어서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 갔다. 그리고 정말 베개에 머리를 기대자마자 순식간에 잠들어버렸다.
* * *
“치즈. 아직 자니?”
노크 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레이라의 목소리에 몽롱하던 정신이 서서히 제자리로 돌아온다. 얼마나 깊은 잠에 취해있던 건지 눈꺼풀이 서로 붙은 듯 잘 떨어지지도 않았다.
“으응……. 레이라?”
“지금 준비해야 늦지 않게 장을 보고 출근할 수 있어.”
“…출근?”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꾸역꾸역 눈꺼풀을 들어 올려서 겨우겨우 시야를 트이자 정말 날이 밝았는지 닫힌 커튼 사이로 아침햇살이 쏟아져 들어선다. 주섬주섬 몸을 일으켜 침대에 앉아 기지개를 켜면서도 갸우뚱했다.
아침이 올 때까지 한 번도 깨지 않다니. 오랜만에 푹 잠든 것 같아.
“치즈? 일어났어?”
“응. 금방 준비하고 나갈게!”
“알았어. 그럼 나는 준비하고 있을게.”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들어갔다가 거울을 보고 또 갸웃했다. 내가 어제 잠옷을 갈아입고 잤던가? 분명 홈드레스를 입은 채였는데?
지금 나는 늘 입고 자는 잠옷을 입고 있었다. 새벽에 깨면 갈아입어야겠다고 생각하다가 잠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싶었다. 혼란과 의심을 뒤로하고 일단 세수를 한 뒤에 미용수와 크림을 발라 피부 정돈을 했다. 그리고 외출용 드레스를 갈아입고 챙이 넓은 모자를 꾹 눌러쓴 채 방문을 열었다.
“좋은 아침.”
그랬는데 열린 문밖에 서 있는 거대한 장벽에 흠칫 놀라 그대로 멈칫했다. 고개를 들자 파이가 나를 향해 기분 좋은 미소로 아침 인사를 건넨다. 나는 그를 보자마자 그대로 얼어붙었다.
장인이 열정을 다해 만든 조각상보다 더 아름다운 남자가 단정하게 다듬은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어 올린다. 어제는 조금 어정쩡한 길이의 머리였는데 하룻밤 사이에 정리를 했는지 꽤 차분해져 있었다. 실크처럼 고운 머리카락이 그의 손에 한껏 흐트러지다가 다시 제 자리를 찾아 나풀거리며 가라앉았다. 꼭 등 뒤에서 꽃잎이 휘날릴 것 같은 모습이었다. 꽤나 정중한 태도로 나를 맞이하는 그 모습이 너무 낯설었다. 정말 내가 아는 파이가 맞는지 의심이 될 정도로.
아무튼 너무 놀라서 심장이 바닥으로 툭 떨어지는 줄 알았다. 그러다가 나도 모르게 방 안으로 뒷걸음질 치면서 방문을 쾅 닫았다.
‘…아, 심장이야. 숨이 멎는 줄 알았어.’
어제의 기억이 용솟음치듯 순간적으로 떠오르면서 또 한 번 심장이 폭발하듯 뛰어댔다. 떨리는 손을 가슴에 얹자, 손바닥에 거친 심장박동이 새겨질 정도다.
“치즈. 지금 출발해야 한다는데 어서 나와야지. 늦장 부리면 가게 여는 시간도 늦어진다. 주문 들어온 디저트를 전부 만들려면 시간이 촉박하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지 않아도 가슴이 진정되질 않는데 바로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파이의 웃음기 어린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버렸다.
아니, 내가 왜 놀라야 하지? 내가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거람?
방금 그 느낌은 평범한 인간세계에 잘 적응하고 있던 평범한 인간이 신을 마주했을 때와 비슷하다. 눈부신 광채에 눈이 멀어버릴 것 같았다. 또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낯선 상황에 뚝 떨어진 느낌.
나는 그 혼란에 휩싸인 감정을 애써 꾹꾹 누르고 호흡을 골랐다. 그리고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유지하며 문을 다시 열었다. 나를 향해 눈웃음까지 살살 치고 있는 그를 찌릿 노려보고는 일부러 그를 지나쳐 복도로 향했다. 그리고 계단 아래로 내려와 마차 앞에 서 있는 레이라에게 달려갔다.
“기다렸지? 미안해. 너무 푹 잤나 봐. 나 네가 깨우지 않았으면 못 일어났을지도 몰라.”
“그렇지 않아도 사용인들이 쑥덕거리더라. 새벽마다 몽유병 걸린 사람처럼 저택을 돌아다니던 네가 오늘은 보이지 않아서 무슨 일이 있나 싶었대.”
“뭐? 몽유병? 그게 무슨 말이래?”
“처음에는 유령인 줄 알았다던데 뭐. 이제 와 하는 말이지만 너 반년 동안 정말 심각하긴 했었어. 오죽했으면 내가… 아니다. 일단 가자.”
본인에 대한 소문은 가장 늦게 접하게 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레이라가 그동안 얼마나 걱정했었는지 이해가 간다. 그래서 매우 미안해졌다.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했던 건데. 혹시나 내 신경을 쓸까 봐 더 조심했던 거였는데 그게 오히려 더 걱정을 끼치게 만들 줄은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