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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랑 한 번만 해요, 그거-64화 (64/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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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꺼지지 않으면 죽일 수도 있어. 다시 한번 더 내 눈앞에 나타나면 그땐 이 정도로 끝나지 않을 거다, 하유르.”

“으응. 물어볼 게 있어서 온 것뿐이야. 화내지 말고. 지금 화나는 쪽은 네가 아니라 나거든?”

콧소리를 내면서 까칠한 목소리로 투덜거리는 하유르가 파이에 의해 바닥에 던져진 사람 쪽으로 걸어갔다.

…코피 터지겠네. 부러울 정도로 아름답고 완벽한 몸매라서 자꾸 눈길이 간다. 승마복이 저렇게 잘 어울리는 여자는 처음 본다.

잘빠진 다리에 철썩 달라붙은 가죽 바지에서 어딘지 퇴폐미가 느껴졌다. 무릎 아래까지 올라오는 부츠가 그 관능미를 더 끌어올려 줄 정도다. 풍성한 상의는 남성들이 즐겨 입는 커다란 셔츠이긴 한데 매우 얇아서 몸매가 전부 드러날 정도로 속이 다 비쳤다. 그래서 가슴이 도드라지는 건… 조금 많이 부러웠다. 물론 내 가슴도 어디 가서 기죽지 않을 정도이긴 하지만.

앞으로 운동을 좀 열심히 해야겠어. 몸매는 가꿀수록 빛이 난다고 했으니까.

아무튼, 하유르가 기절한 듯 바닥에 엎어져 있는 사내의 머리통을 발끝으로 툭툭 건드려서 내가 더 놀랐다.

“일어나, 이 멍청아. 선제공격해놓고도 지면 앞으로 내 발닦개가 된다고 했지? 약속은 지켜.”

그러자 엎어져있던 사내가 끙끙거리며 꿈틀거리기는 하는데 일어날 정도의 기력은 없는 것 같았다.

어쩐지 불쌍하네. 발닦개라니. 그래서 자고로 사람은 입조심을 해야 하는 법.

일단 저쪽보다 파이가 더 우선이다.

“파이. 괜찮아요? 피가 너무 많이 나……. 많이 다친 거예요?”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그의 몸을 여기저기 매만지면서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한참 대답을 하지 않고 물끄러미 나를 내려다보던 파이가 고개를 천천히 주억거렸다.

“어. 아파. 많이 다쳤어. 죽을 것 같아.”

…요즘 들어 정말 어리광인지 꾀병인지 약한 척을 너무 잘하신다. 표정은 하나도 안 아파 보이는데. 전 같았으면 모기에 물려 간지러울 정도라고 했을 거다. 그래서 조금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그의 눈을 마주 봤다. 그러자 뒤에서 하유르가 깔깔대고 웃기 시작했다.

“와, 저 놈이 이제는 약도 파네? 치즈, 속으면 안 돼. 능글맞은 뱀 새끼라 아주 영악한 놈이거든.”

아… 정답. 언니 잘 아시네요. 진짜 저 언니는 돗자리 까셔야 할 듯.

“일단 피부터 닦아내야겠어요. 레어로 돌아가요, 파이.”

그래도 머리 쪽에서 자꾸 피가 줄줄 흘러나오는 걸 보니 크게 다치긴 한 것 같다. 그의 피가 내 손과 드레스에 잔뜩 묻어나서 엉망진창이기도 하고.

그러자 파이가 나를 한쪽 팔로 끌어안아 품에 가둔다.

“눈 감아.”

나직하게 중얼거리는 말에 나는 두 눈을 꾹 감았다. 그리고 아까보다 조용해진 느낌에 눈을 떴다.

지금까지 몇 번 와본 적 없는 파이의 방, 드래곤의 공간이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천장이 뻥 뚫려있는 커다란 공간의 깊은 동굴 속. 마치 드래곤 한 마리가 가득 들어차고도 남을만한, 거의 마을 하나의 크기라서 개미가 된 느낌이기도 한다. 한눈에 들어오지도 않을뿐더러 끝과 끝이 너무 길고 넓어서 적응이 좀 안 되는 곳이라 잘 안 오던 곳이기도 하고.

“여기 앉아있어요. 물수건 가져올게.”

일단 나는 구석에 장난감처럼 있는 널찍한 침대용 소파에 파이를 앉혀놓았다. 그리고 그 근처에 있는 욕실로 들어가 수건에 물을 적셔서 가지고 나왔다.

그랬다가 잠시 멈칫거렸다. 파이가 앉아있는 그 소파 옆자리에 하유르가 앉아 파이와 밀착하고 있어서. 게다가 파이를 향해 아주 매혹적인 눈빛을 보내와서 그랬다.

뭐야, 저 야릇한 분위기는?

꼭 작정하고 파이를 홀리려는 저 야릇한 시선도 그렇고 왜 저렇게 가까이 달라붙어 있느냐고. 남들이 보면 오해하겠네!

어쩐지 속이 울컥거리는 느낌이다. 나는 젖은 수건을 꽉 쥐고 그 묘한 분위기를 탐색하기 바빴다. 행여나 내 남자에게 손가락이라도 대려는지 두 눈을 부릅뜨고 눈치를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사이에 하유르가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파이의 뺨을 조심스레 쓸어내리면서 히죽 웃는다.

저, 저 언니가 왜 내 남자한테 막 손을 대는 거야?

순간 예전에 보았던 두 사람의 키스 장면이 머릿속을 점령하면서 기분이 확 나빠졌다. 속이 부글부글 끓는 기분.

“실망이야, 카르디옌. 내가 도와달라고 할 때는 중립을 고수하더니 나 정말 깜짝 놀랐다니까?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그 치졸한 놈들 편에 붙었을까?”

“내가 그것까지 네게 보고해야 할 문제였던가?”

“그건 아니지만 네가, 그 이기적인 블랙 드래곤이 말이야. 우리와 척을 지고 있는 블랑 제국 편에 서서 전쟁의 선두에 설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거든.”

내 귀가 쫑긋거렸다. 이야기를 듣자 하니, 저 언니가 루즈 제국의 사람인 듯했다. 게다가 마법사인 게 분명하다. 드래곤의 레어 안으로 결계를 뚫고 들어오려면 어느 정도의 마법이 필요하니까.

‘잠깐. 마력을 가지는 건 소수 황족들만 가능하다고…….’

두 눈이 순식간에 커졌다. 그렇다면 저 언니가 루즈 제국의 황족?

하지만 파이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굉장히 무심한 얼굴로 코웃음을 친다.

“나는 여전히 중립이야. 이번 일은 너희 쪽에서 먼저 일을 저질렀으니 블랑 제국을 도운 것뿐이고.”

“그러니까 그게 이상하다고. 네가 누굴 도울 놈은 아니잖아? 숨 쉬니까 어쩔 수 없이 사는 거라더니… 설마 우리한테 아직도 악감정이 남아있어?”

“내가 어느 편에 서든 무슨 상관이지? 너야말로 네 아랫놈들 단속이나 잘 시켜. 이런 귀찮은 일에 휘말리지 않도록 관리 좀 해.”

“전쟁을 뭐 내가 일으키나? 우리 루즈 제국 사람들은 전쟁광이라 말릴 수가 없는 걸? 이미 심사가 비틀린 놈들이라 구제가 안 돼. 너처럼, 말이야.”

이번에는 손가락으로 파이의 새까만 머리카락을 꼬아 감아댔다. 그리고 손가락에 감긴 그 까만 머리카락에 입을 맞춘다.

으윽, 나도 아직 못해본 건데! 먼저 선수를 치다니!

뭔가 괜히 속에서 울분이 치솟아 오르는 걸 꾹꾹 누르느라 호흡이 가빠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하유르는 한탄스럽다는 말투로 느릿하게 말을 잇는다.

“나는 사실 블랙 드래곤이 출몰했다는 소식을 믿지 못했었거든. 그것도 반대편 진영의 선두에 서서 우리 제국민들을 사정없이 사살했다는 말도.”

“그들은 드래곤이 눈앞에 있는데도 전혀 피할 생각을 하지 않더군.”

“그야 물러설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그보다 너는 너와 관련되지도 않은 일에 먼저 나서는 놈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 저들에게 무슨 약점이라도 잡혔어?”

약점?

두 사람의 이야기를 더 엿듣고 싶기는 한데, 두 사람이 너무 밀착해있어서 기분이 점점 더 나빠진다. 나는 소리 없이 뒷걸음질을 쳐서 다시 욕실 입구 안쪽으로 들어와 벽에 바짝 기댔다.

하유르가 루즈 제국의 황족이라는 건 확실히 알겠다. 그리고 두 사람이 지금 진지한 주제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것도. 그래서 언제 모르는 척 나가서 자연스럽게 끼어들까 고민을 했다.

“치즈.”

“네, 네?”

그랬는데 바로 옆쪽에서 파이의 목소리가 들려와 심장이 철렁 내려앉을 정도로 깜짝 놀랐다. 아, 순간 함정으로 파놓은 구멍에 뚝 떨어지는 기분이었어.

“여기서 뭐 해?”

“…눈치작전 중이랄까? 진지하게 대화하는데 방해할까 봐 조금 이따가 나가려고 했어요. 얘기 다 끝났어요?”

“어. 이리와. 치료해준다며.”

말하면서 내 팔뚝을 잡아 끌어당긴 파이가 욕실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서 기다란 의자에 털썩 주저앉는다. 두통이 오는지 미간을 살짝 좁힌 채로 평소와 다르게 조금 거친 숨을 뱉어내고 있었다.

뭔가 정신력으로 겨우 버티고 있는 느낌이다. 아프다는 말이 거짓말은 아니었던 건가?

일단 나는 물에 적신 수건으로 그의 얼굴에 잔뜩 묻어난 핏자국을 닦아냈다. 머리카락에 덕지덕지 달라붙은 붉은 핏물은 어떻게 해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그사이에 따가운 시선이 느껴져 눈동자를 굴렸다.

“왜… 그렇게 봐요?”

나를 빤히 올려다보는 파이의 선홍빛 눈동자가 오늘따라 왜 이렇게 애처롭게 보이는지 모르겠다. 소름이 오스스 돋아날 만큼 피부가 간질거리고 심장이 발작하듯 뛰어 정신이 하나도 없다. 그러더니 파이의 눈동자가 내 오른쪽 뺨으로 옮겨지고 나서는 눈빛이 확 변했다. 작은 불씨가 갑자기 커다란 불덩이로 변한 것처럼 그의 눈동자에 뜨거운 열기가 휘몰아쳐서 조금 놀랐다.

“아까 그 새끼를 죽였어야…….”

“아이고, 드래곤님. 고정하시지요? 그냥 살짝, 아주 살짝 스친 거라서 금방 아물어요. 죽을 만큼 다친 것도 아닌데.”

“귀걸이를 채웠어야 했는데 방심했어.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조금 더 강화해야겠다.”

저 말이 꼭, 나한테 오리하르콘으로 된 갑옷이라도 입게 할 생각인 것 같아서 조금 겁이 났다.

사실 아프지 않다고는 말 못한다. 살갗이 찢어져서 피가 나는데 안 아플 리는 없지. 하지만 아픈 척을 할 수가 없었다. 나보다 그가 더 많이 다치기도 했고. 무엇보다 아프다고 징징거리면 아까 파이를 공격한 그 남자 목이 댕강 잘릴 것 같거든.

“머리 괜찮아요? 피가 좀 많이 나는 것 같아서… 이건 치료가 필요할 것 같은데.”

“지혈해두면 괜찮아.”

말하면서 갑자기 옅은 바람이 나를 스치는 느낌과 함께, 파이의 얼굴에 흐르던 피가 멈췄다.

가만… 이 남자 마력으로 혼자 몸도 씻을 수 있는 사람이잖아? 그런데 왜 내가 닦아주길 기다리고 있던 거지?

“파이. 그 마법 쓰는 거로 피 닦으면 되잖아. 왜 찝찝하게 그냥 둬요?”

“아까 하던 얘기나 마저 하지.”

“하던 얘기라면…….”

그러고 보니 아까 대화를 나누던 사이에 갑자기 파이를 공격한 누군가 때문에 끊기긴 했지. 순간 파이가 마지막에 뱉어낸 말이 아주 생생하게 떠올랐다.

[내가 인정하는 놈이 아니면 혼인은 생각도 하지 마.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을 뱉으면서까지 날 괴롭힐 생각이면 차라리 죽여. 심장을 찌르라고.]

지금까지 늘 그가 내게 감정을 호소할 때마다 자꾸 내 안에서 반항심이 번져서 괜한 오기를 부리곤 했었다. 물론 나도 파이도 둘 다 속으로만 안절부절못하고 그저 모른 척 버릇처럼 붙어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 이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는 이미 수명이 잔뜩 늘어난 채인데. 앞으로 몇 십 년만 사는 게 아니게 되었으니 우리 사이, 특히 그 가짜연애에 대한 의견조율도 필요하지 않을까? 무엇보다 내가 이제는 인간과 혼인할 수 없는 몸이 되었으니 말이다.

“일단 깨끗하게 정리부터 해요. 나 옷도 엉망이고 파이는 머리카락에 이 피부터 제거해야 할 것 같아요. 저쪽 바깥일도 좀 먼저 해결하고 나서… 진지하게 이야기 좀 해요, 우리.”

“들었지? 그 애송이 데리고 꺼져, 하유르.”

언제 들어왔는지 욕실입구 쪽 벽에 등을 기댄 채로 팔짱을 끼고 코웃음을 치는 하유르가 어깨를 으쓱거린다.

“나와의 이야기도 아직 안 끝났잖아? 일단 내가 먼저야. 그러니까 내 물음에 순순히 대답해. 네가 그놈들 편에 선 이유.”

어쩐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서 자리를 피해줘야 하나 싶어서 몸을 들썩거렸다. 그런 나를 힐끔 쳐다본 파이가 내 팔을 잡아당겨 제 옆자리에 앉혀두었다. 덕분에 나는 그 두 사람의 기묘한 눈싸움을 피하지도 못하고 지켜보게 되었다.

부, 불편해.

“하유르.”

“왜?”

“나는 이천 년 전의 일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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