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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먹거리면서 아랫입술을 삐죽거리고 투덜대자 파이가 손을 멈추고 내 피부를 빤히 내려다본다. 얼마나 살을 문질러댔으면 마치 바늘로 콕콕 새긴 것처럼 피부 전체가 붉은 점들로 가득했다.
“…피를 전부 갈아버리는 방법에 대해서 연구를 좀 해봐야겠어.”
…진짜 내 몸에 흐르고 있는 낯선 피가 굉장히 마음에 안 드나 보다. 돌덩이처럼 굳은 얼굴로 붉게 쓸린 팔뚝을 노려보는 눈빛이 예사롭지가 않아서 침을 꼴깍 삼켰다.
뒤이어 다시 씻겨주는데 아까처럼 살갗을 벗겨낼 정도로 문지르진 않아서 긴장이 전부 풀어져버렸다. 걱정했던 게 무색해질 정도로 다시 섬세한 목욕을 마친 뒤에 외출준비까지 완벽하게 끝냈다. 그리고 바로 나를 품에 조심히 안은 파이가 이동마법을 사용했다.
오랜만에 외출! 인데 여기는 제국 수도가 아닌 것 같다.
“파이?”
“일단 네 냄새를 좀 빼야겠어. 조심조심 숨을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쉬고.”
그런다고 체내의 피 냄새가 바뀌는 거야?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곳은 깊은 숲 안쪽의 넓은 공터였다. 조금 어이없긴 하지만 얼마나 싫었으면 이렇게까지 하려고 하나 싶기도 하다. 파이의 말대로 숨을 코로 크게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쉬면서 주위를 둘러봤다.
아, 기억났어. 여기는 어릴 때 자주 놀던 공터였다. 열 살 이전에만 놀던 곳이라 하마터면 몰라볼 뻔했다. 예전에는 나무들이 되게 커 보였는데 지금 보니까 어쩐지 거인이 된 기분.
“괜찮아, 치즈?”
“네. 아주 멀쩡해요. 그런데 여기 진짜 오랜만이네요. 십 년만인가요?”
“잊은 줄 알았는데 기억을 하는군.”
“물론이죠. 나 머리 좋다니까? 저기쯤에서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게 마지막이었을걸요? 그 뒤로 여기 안 왔던 것 같아요. 맞죠?”
“응.”
역시 내 기억은 정확해. 이곳 둥근 공터는 늘 봄과 가을에만 뻔질나게 다녔었다. 여름엔 덥고 벌레도 많아서, 겨울에는 추워서 파이가 데려다주지 않았고. 무엇보다 봄과 가을에 공터 전체를 감싸듯 핀 들꽃이 한가득 있어서 내가 엄청나게 좋아했던 장소였다.
다만 그때 파이가 방심했을 때, 무서운 것도 모르고 뜀박질을 하다가 넘어진 뒤로는 오지 못했다. 그리고 그때도 꽤 오래 레어에 처박혀서 못 나왔던 것 같은데.
하여간 레어는 진짜 감옥이다. 그렇게 가둬두기만 하니까 내가 레어를 좋아할 수가 없어! 바깥이 이렇게 공기 좋고 깨끗하고 밝은데! 하여간 파이는 음침해! 음흉하고!
“확실히, 네 피가 원래대로 돌아오기는 하는 것 같다. 어제보다 오늘이 더 네 본래의 향기가 짙어진 걸 보면.”
“그래요? 나는 잘 몰라서요.”
“섞이고 있는 과정에 심각한 문제가 없어서 다행이다. 초반에는 자다가도 괴로웠는지 숨을 헐떡거려서 걱정이 많았는데.”
“제가요? 자다가?”
처음 듣는 말이다. 그리고 내 기억에는 전혀 없는 일이라서 더 놀랐다.
어? 그러고 보니 요새 되게 꿀잠이네. 원래 그렇게 깊게 잠드는 편이 아니었는데 요즘은 꿈도 꾸지 않고 굉장히 잘 자는 기분이다. 심신에 안정이 와서 그런가? 아니면 신의 눈물 때문에? 그도 아니면… 파이가 날 너무 안달 나게 해서 심신이 지쳐 푹 잠이 드는 걸까? 아아, 의심 가는 게 너무 많아서 못 고르겠어.
열심히 머리를 핑핑 굴리는 사이에 파이가 은근슬쩍 내 허리를 감싸던 팔에 힘을 준다. 나를 더 바짝 끌어안아 밀착하는 그가 손가락 끝으로 내 뺨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내 피와 네 피가 충돌해서일 경우도 있다고 했으니까 그것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열매의 부작용이 아직 남아있었던 걸 수도 있고.”
“그런 이야기를 꼭 이렇게 붙어서 해야겠어요?”
무엇보다 서로의 하체가 너무 진하게 들러붙은 상태다. 무엇보다 내 배에 아직도 단단하게 세워진 그의 남근이 꾹 눌려 왔다. 덕분에 허리와 허벅지에 살짝 힘이 들어가 버린다.
그러거나 말거나 파이는 아무 느낌도 없다는 듯 평온한 표정을 유지했다.
“네가 이렇게 내게 앙칼지게 구는 건… 네가 먹었다던 신의 눈물 때문이라고 생각해.”
“내가 언제 앙칼지게 굴었어요? 금시초문이네?”
파이가 신경 쓸 정도로 삐딱하게 구는 걸 인지하고는 있었지만, 괜히 모르는 척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러자 그의 선홍빛 눈동자에 살짝 그늘이 지면서 표정이 어두워진다. 그가 내 뺨을 쓸어내리던 손가락을 아래로 내려 쇄골을 가볍게 문질러 와서 조금 긴장했다. 살갗에 닿을 듯 말 듯 손가락 끝을 댄 채로 도드라진 뼈를 따라 솜털을 쓸어내리듯 문지른다. 피부 아래로 스며드는 야릇한 자극에 순간 또 두 뺨이 화끈 달아올랐다.
“…파이?”
“자꾸 도망가지 마. 밀어내지도 말고. 네게 혼인할 상대가 생기기 전까지 내가 널 도와준다고 하지 않았나. 내가 그렇게 싫어? 내가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이 드래곤이 또 왜 이렇게 극단적으로 말하는 거람?
갑자기 분위기가 너무 심각해져서 당황스러워졌다. 어딘지 모르게 애잔함이 담겨있는 표정에서 가슴이 찌릿할 정도로 슬픔이 묻어 나와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설마, 아까 내가 에이든이 자기한테 시집오라고 한 말 때문에 상처받은 건 아니겠지?
“왜 갑자기 그런 무서운 말을 해요? 사람 간 떨리게…….”
“에이든 그놈은 절대 안 돼. 그건 절대 허락할 수 없다. 네가 날 떠나 그놈에게 가겠다고 해도 나는 절대 보내주지 않을 거다.”
나보다 본인이 더 상처받은 것처럼 조금 괴로워하는 얼굴로 감정을 호소한다. 그 가슴이 시큰한 모습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인정하는 놈이 아니면 혼인은 생각도 하지 마.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을 뱉으면서까지 날 괴롭힐 생각이면 차라리 죽여. 심장을 찌르라고.”
전에도 몇 번 내가 그를 곤란하게 만들기는 했었다. 그때는 두근거리는 사랑 고백을 뱉어내며 나를 유혹했었는데. 이번에는 마치 쌓였던 감정이 폭발하듯 간절한 목소리와 표정으로 호소를 하니까. 어딘지 모르게 내 심장 한구석이 욱신거려왔다.
이러면 내가, 괜히 미안해지잖아!
“아니 나는… 그런 뜻이 아니고…….”
그냥 좀, 사실 아직도 혼란스럽다. 분명 파이의 끝없는 애정을 듬뿍 받고 있다는 걸 피부로도 여실히 느껴지기는 하는데. 서로의 감정이 어딘지 모르게 이가 맞지 않는 톱니바퀴처럼 위태위태하게 어긋나는 게 느껴지기도 한다.
대체 문제가 뭘까? 그와 내가 자꾸 왜 이렇게 어긋나는 걸까?
“파이. 우리 진지하게 이야기를 좀……,”
그 순간, 고막이 찢어질 것 같은 괴상하고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와 어깨를 바짝 모아 움찔거렸다. 그리고 눈앞에 얇은 섬광이 지나가면서 쾅! 하고 바닥이 진동할 정도로 커다란 굉음이 들려왔다. 동시에 바로 내 앞에 있던 파이가 사라졌고, 오른쪽 뺨이 화끈 달아오르면서 뜨거운 액체가 주륵 흘러내렸다.
뭐지?
그렇지 않아도 정신이 하나도 없는데 갑자기 벌어진 어리둥절한 상황에 심장이 철렁했다. 몸이 빳빳하게 굳어버려서 겨우겨우 팔을 올려 손끝으로 뺨에 묻은 액체를 닦아내서 보니까… 이건, 피?
새빨간 색의 약간 진득한 느낌의 액체는 분명 피다. 자각하고 나니 뺨이 욱신거리기까지.
“파이?”
“안녕, 치즈야? 잘 있었니?”
바로 코앞에 있던 파이가 없어져서 고개를 돌리자마자 조금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큼발랄하고 톡톡 튀는 높은 톤의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안다. 파이를 아는 사람 중에서 그녀가 유일한 여자였으니까.
나를 향해 친한 척 반갑게 인사를 하는 그녀가 붉은 머리를 휘날리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너무 갑작스레 벌어진 일에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나를 덥석 품에 안았다. 그러더니 제 얼굴을 내 뺨에 대고 강아지처럼 비벼왔다.
“치즈는 언제 봐도 너무 귀엽다. 우리 너무 오랜만이지? 나 안 보고 싶었어?”
“아윽!”
상처 난 오른쪽 뺨에 닿아 문질러지는 따끔한 통증에 움찔거리면서 작게 비명을 질렀다. 그러자 친한 척 굴던 여자가 깜짝 놀라서 두 손으로 내 얼굴을 답삭 쥐었다.
“어머! 다쳤어? 미안. 어머, 어떡하지? 살짝 스치긴 했는데 그래도… 예쁜 얼굴에 상처가 나버렸네. 하여간 조심하라니까.”
확실히 그녀는 전에 몇 번 본 적 있는 그 예쁜 언니였다. 내가 어렸을 때! 파이하고 키스하던 그 언니!
예전에는 조금 어려서 동글동글 귀여운 얼굴이었는데. 못 보던 새에 지금은 완전한 어른인 성숙미가 철철 넘쳤다. 하나로 질끈 묶은 진한 붉은 머리카락은 그때나 지금이나 화려한 물결을 그려내고 있었다. 성숙한 아름다움을 뽐내는 날카로운 턱선과 맑은 핏빛을 띤 요염한 눈빛도 여전했다.
피가 배어 나오는 내 뺨의 상처를 보며 쯧쯧 혀를 차던 그녀가 내 뺨에 코를 가까이 대고 킁킁 냄새를 맡았다.
“그런데 못 본 새에 쑥쑥 자란 우리 치즈가 더 맛있어졌네? 카르디옌에게 사랑을 많이 받고 있어서 그런가?”
혀로 제 입술을 핥으면서 입맛을 다시는 그녀가 파이보다 더 진한 빨간색의 눈동자를 반짝거린다. 지난번 봤었던 아나콘다의 눈빛과 비슷해서 소름이 돋아나 또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저, 저, 저기? 이상한 취향 있는 건 아닐 거라 믿어요? 나는 먹는 음식이 아니라고!
“파, 파이는요?”
내 얼굴이 붙잡혀 있는 상태라 불안하게 바들바들 떨면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기만 했다. 그러자 붉은 머리의 여자가 싱긋 미소를 짓다가 표정을 확 굳히며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나 역시 그녀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마자 숨을 멈췄다.
그러나 붉은 머리의 여성은 저 참극을 두 눈으로 보고도 아무렇지 않게 콧방귀를 뀌었다.
“여전히… 자비 따위 없다 이건가? 너무하네, 카르디옌. 하여간 짐승새끼 아니랄까봐.”
“내 아이에게서 손 떼라, 하유르.”
저 멀리에서 우리를 향해 걸어오는 파이가 얼굴의 절반과 온 몸에 피 칠갑을 한 채로 으르렁거렸다. 그리고 파이의 손에 무언가 들린 채로 질질 끌려오는… 사람?! 온통 피로 얼룩진 새빨간 사내 하나가 정신을 잃은 것처럼 팔다리를 축 늘어뜨린 상태로 파이에게 잡혀있었다.
파이가 이유 없이 누군가를 공격하는 드래곤은 아니다. 분명 먼저 공격을 했으니까 파이가 방어를 한 걸 테지. 아까도 파이는 나와 대화중이었고, 누군가와 시비가 붙을 시간은 없었으니 확실하다. 어쨌든 파이가 이겨서 다행이긴 하지만…….
파이의 이마에 주륵 흘러내리는 붉은 피가 너무 아파보여서 얼굴이 절로 구겨졌다. 파이 역시 성난 눈빛으로 붉은 머리의 여자 하유르를 강렬하게 노려보다가 나와 시선이 마주쳤다. 내 뺨에 생긴 상처를 본 파이가 으르렁 거리면서 날카롭고 뾰족한 송곳니를 드러냈다. 또 목과 뺨에 검은 비늘이 돋아나기까지.
헉! 어, 어, 어떡해?
“파이, 파이! 파이 잠깐만!”
드래곤이 폭주하면 재앙이 닥쳐오는 거나 마찬가지다. 자연재해만큼 무서운 거니까. 사람들에게 드래곤이 무서운 존재라는 것을 다시 각인시켜주고 싶진 않았다. 파이가 다른 사람들에게 욕먹는 건 싫어. 파이를 욕하는 건 나로 충분해!
그래서 나는 내 뺨을 붙잡고 있는 하유르의 손을 냅다 쳐내고 치맛자락을 말아 쥔 채 파이에게 뛰어갔다. 그러자 파이가 손에 든 사내를 짐짝 던지듯 휙 던져버린다. 동시에 달려드는 나를 품에 꽉 끌어안은 뒤에도 하유르를 경계하면서 이를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