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
이천 년 전의 일?
“그 어떤 일이 있어도 너희 루즈 제국과 두 번 다시 엮이지 않겠다고 했던 말 역시, 내 생이 끝나는 날까지 절대 바뀌는 일이 없을 거다.”
그러자 하유르가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터트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너 설마, 아직도 그 일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거야? 그 여자는 이미 죽었어. 네가 말한 이천 년 전에.”
“너 역시 그 여자의 핏줄이다. 특히나 루즈 제국의 황제인 너는 그 여자와 똑같은 얼굴에 똑같은 짓을 하고 있지.”
“어머? 무슨 그런 섭섭한 소리를 해? 난 적어도 그 여자처럼 너에게 수면제를 먹이고 너를 겁탈할 생각이 전혀 없다고.”
“아예 없다고는 말하지 못할 텐데?”
…지금 나, 무슨 말을 듣고 있는 거람?
분명 내 귀로 똑똑히 들었다. 그 들은 말에 의하면 저 언니가 루즈 제국의 황제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천년 전, 루즈 제국의 당시 황제라는 이가 파이에게 수면제를 먹이고 겁탈했다는 이야기고.
저 믿을 수 없는 말이 정말 사실일까?
“그래, 뭐. 그건 그렇다 쳐. 하지만 카르디옌, 네가 굳이 블랑 제국을 도울 이유도 없었다고 생각해. 그들에게 빚을 졌다면 모를까. 말 돌리지 말고 확실하게 말해.”
“…네가 알 필요 없고, 내가 네게 털어놓을 이유도 없어.”
“혹시 치즈 때문이야?”
움찔.
가, 갑자기 하유르의 입에서 내 이름이 나와 깜짝 놀랐다. 그녀의 질문에 파이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내 어깨에 팔을 감아 더 꽉 끌어안았다.
그러자 하유르의 눈빛이 조금 날카롭게 빛났다. 그 붉은 눈동자를 데굴 굴려 나를 쳐다보면서 음흉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파이와 비슷한 눈동자 색이지만 파이와 전혀 다른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저 언니 쪽이 더 능글맞고 조금 더 예리하게 날이 선 느낌이다.
“맞나보네. 블랑 제국에 치즈의 안위를 맡기고 그 대가로 돕기로 했나 보지?”
“알았으면 이제 그만 돌아가. 하유르.”
“내가 알기로는… 블랑 제국 황궁의 지하에는 불사의 육체가 될 수 있는 특별한 열매가 있다고 들었는데.”
루즈 제국의 황제라더니 적국의 비밀까지도 알고 있는 것 같다.
“…어떻게, 알아요, 그걸?”
파이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어서 내가 대신 하유르를 향해 물었다. 그랬더니 갑자기 그 자리에서 휙 사라졌던 하유르가 갑자기 내 옆에 짠 나타나서 또 심장이 벌렁벌렁.
아, 좀! 나는 평범한 인간이라 그런 마법 쓰는 거에 면역이 없다니까 그런다!
“궁금하니, 우리 치즈?”
“…그럼 당신의 적국인 블랑 제국의 비밀을 알고 있다는데 궁금하지 않겠어요?”
“겁먹은 주제에 할 말은 다 하네. 누가 카르디옌이 키운 아이 아니랄까 봐.”
삐딱한 미소를 지으면서 코웃음을 치는 하유르가 내 옆자리에 엉덩이를 비집고 들어와 앉는다. 욕실 안, 그것도 기다란 나무 의자에 세 남녀가 나란히 앉아있는 모습을 상상하니 또 조금 웃기기도 하다. 게다가 양쪽에 드래곤과 루즈 제국의 황제라는 대단한 여자 사이에 끼게 되어서 어쩐지 기가 죽는 느낌.
꼭 여기에 이렇게 앉아있어야 하나? 넓은 바깥 공간 놔두고?
“우리 루즈 제국은 블랑 제국에 대해서 모르는 게 없어. 이미 사천 년 전부터 황제들에게만 내려오는 비서에 블랑 제국에 대한 내용이 전부 적혀있거든.”
“비서요?”
“응. 루즈 제국의 황제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비밀의 방이 있는데, 거기에는 루즈 제국의 탄생 비화부터 시작해 사천 년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있지.”
“…그런 이야기를 저한테 막 이렇게 말해줘도 돼요?”
“치즈에게 권력욕이 있었던가? 그런 이야기는 듣지 못했는데?”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모르겠다. 칭찬인지, 아니면 내가 만만해 보인다는 뜻인지.
“아무튼, 그곳에는 블랑 제국이 건국되었던 때의 일화가 전부 담겨있어. 블랑 제국의 황족들이 아는 내용은, 우리 루즈 제국의 황제가 될 이에게만 전해져 내려오지.”
“거기에 그 열매에 대한 내용도 적혀있어요?”
“응. 사천 년 전에 신이 어떤 사내를 시험했어. 곧 혼인할 반려와의 평생 행복하게 사는 것과 인간으로서 가장 위대한 위치에 오를 황제의 자리, 둘 중 무엇을 가지겠냐고 물었지.”
사랑이냐 권력이냐 그것이 문제로군.
“그래서요?”
“사내는 자신의 반려에게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했어. 자신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면 널 데리러 오겠다고.”
어딘지 나른해 보이는 하유르의 표정은 그 이야기의 결말이 좋지 않다는 것을 짐작하게 해준다. 그래서 나는 입을 다물고 하유르의 말을 경청했다.
“하지만 사내는 황제가 되기 위해 전쟁을 펼쳤고, 그에 몰두하느라 완전히 잊어버린 거지. 그의 반려가 기다리다 못해 사내를 찾아갔을 때는 이미… 황후를 비롯한 정부를 차고 넘치도록 뒀다고 해.”
“…나빴네요. 그 사람.”
“그 사내가 세운 제국이 바로 블랑 제국이야. 그의 반려는 배신당한 치욕을 갚기 위해 루즈 제국을 세웠어. 그리고 블랑 제국과의 전쟁을 사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쭉, 이어가고 있는 거지.”
“그런데 블랑 제국에 관한 이야기는 어떻게 알고 있는 거예요?”
“두 제국의 초대 황제들은 원래 신의 아이였대. 블랑 제국의 초대 황제에게 얼음나무와 물의 속성마력을 주었고, 우리 루즈 제국의 황제에게는 불의 대지와 불의 속성마력을 주었다고 되어있어.”
연인이었던 이들의 운명이 어쩌다가 그렇게 되어버렸을까?
“아무튼 블랑 제국이 가진 얼음 나무에는 백 년에 한 번씩 열매가 맺히는데, 그건 선악과를 뜻해. 함께 나눠 먹으면 약이 되는데 혼자 욕심을 내면 피와 뼈까지 전부 태워버려.”
그 말에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주룩 흘러내렸다. 몸속의 피가 역류하면서 죽음의 문턱에 다다랐던 기억이 떠올라버려서.
“그리고…….”
소름이 돋아서 어깨를 바르르 떨고 있는 나를 향해 하유르가 싱긋 웃는다. 그러더니 손으로 내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면서 파이를 힐끔 쳐다봤다.
“최근에 그 얼음 나무의 열매가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블랑 제국의 그 바보가 멀쩡히 살아있는 걸 보면, 다른 누군가가 그 열매를 먹었을 것 같거든.”
목구멍이 바짝 말라왔다. 나는 방황하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파르르 떨리는 손가락을 숨기기 위해 주먹을 꽉 쥐었다.
“원래 그렇게, 적국의 황실 정보를 다 막 알 수도 있고 그러는 거예요?”
“우리 루즈 제국이야 워낙 방비가 철통같아서 힘들겠지만, 블랑 제국은 그렇지 않거든.”
하여간 블랑 제국은 황제의 인성부터 시작해서 문제가 많아 보인다. 그래놓고 사천 년 동안 국가를 어떻게 유지한 건지 모르겠다. 단지 황족들이 마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 걸까?
“듣기로 한 달 전에 블랑 제국의 황궁에서 백금발의 초록 눈동자를 가진 아름다운 여성이 며칠 머물렀다던데. 딱 치즈 너 같지 않니?”
“누군지 몰라도 보는 눈은 있나 보네요. 제가 좀, 흠, 아름답기는 해요. 언니도 예쁘지만.”
“카르디옌이 너를 레어에 두고 블랑 제국에 갈 리는 없었을 테니까. 내 짐작이 맞았구나? 그 얼음 나무의 열매, 네가 먹었지? 그리고 카르디옌의 피를 마신 거니?”
“…그걸 어떻게 알아요?”
“드래곤의 피를 마시면 영원을 살 수 있다는 이야기가 우리 루즈 제국의 비서에 적혀있거든.”
대체 그 비서에 없는 내용이 뭔지 궁금해진다. 블랑 제국도 모르는 이야기까지 전부 다 알고 있는 만능박사인 듯.
“사실 이천 년 전에 당시 루즈 제국 황제가 카르디옌에게 반해서 쫓아다녔는데, 카르디옌이 거들떠보지도 않았대. 그래서 홧김에 수면제를 먹이고 드래곤의 피를 마셨어. 어떻게 되었게?”
“어떻게… 되었어요?”
“피를 마시는 순간…….”
“순간……?”
“펑!”
“으악!”
갑자기 얼굴을 확 들이밀면서 크게 외치는 바람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눈물도 찔끔 나온 것 같고.
그러더니 내가 놀란 것을 보고 흐뭇하게 웃는 하유르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농담이야. 우리 치즈 반응은 언제 봐도 귀엽네?”
전에도 느꼈지만 이 언니는 파이보다 더 질이 나쁜 것 같다. 내가 뾰로통한 얼굴로 코를 훌쩍거리며 하유르를 노려보자 파이가 작게 웃었다.
“하유르. 쓸데없는 소리 지껄일 심산이면 이제 그만 눈치껏 자리를 비켜주지?”
“미안하지만 내 볼일은 아직 시작도 안 해서 말이야.”
“너와의 볼일은 없다. 지금도 앞으로도 없을 예정이니…….”
“치즈가 영생을 가졌다면, 내 도움이 꼭 필요할 텐데?”
“…무슨 말이지?”
파이는 하유르의 말을 경계했고, 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하유르를 쳐다봤다. 정말 눈치가 빠른 사람인 것 같다. 에이든하고는 다르게 황제의 자리에 참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열매의 부작용은 신수와 신목에 의해서 치유할 수 있어. 치즈가 열매를 먹고도 이렇게 살아있다면, 얼음 나무와 드래곤의 피를 먹었겠지?”
“떠보지 말고 대답이나 해.”
“우리 루즈 제국의 초대 황제가 신의 선물로 받은 것이 바로 불의 대지야. 그곳에서는 죽은 사람도 회임을 할 수 있는 열매가 맺혀.”
블랑 제국은 인간을 죽이는 열매라더니, 루즈 제국은 인간을 탄생시키는 열매를 가지고 있구나. 두 제국의 관계가 매우 오묘함을 띠고 있다는 걸 느낀다.
“그 열매가 바로 ‘히아루르’라는 이름의 보석이야. 여성이 그 보석을 갈아서 먹고 짐승과 교합을 해도 임신이 가능하다고 해.”
윽, 짐승과의 교합이라니.
나는 그 보석이라는 거 참 대단하다고 생각해서 꽤 흥미롭기만 한데, 파이는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아주, 굉장히, 불쾌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면서 하유르를 죽일 듯 노려본다.
“결론만 말해.”
“나는 카르디옌 너의 씨가 필요해. 너의 아이를 가져야 할 이유가 있거든.”
…아, 아니. 지금 저 언니가 뭐라는 거야?
“대신 그 보석, ‘히아루르’를 카르디옌 네가 원하는 만큼 줄게. 아마 지금의 네게는 꼭 필요할 거야, 그렇지?”
파이에게 아이를 잉태를 할 수 있는 보석이 왜 필요한 걸까?
여우처럼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하유르가 짓궂은 미소를 지어보이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나와 파이를 번갈아 쳐다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개인적으로 두 사람, 정말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 나는 두 사람이 영원히 행복하기를 바라. 물론 내가 카르디옌 너를 좋아했던 건 진심이었지만.”
음, 역시 예상대로 하유르가 파이한테 딴 맘을 품은 것 같다. 저번에 키스할 때부터 알아봤어. 가끔 레어에 놀러올 때마다 파이 곁에 찰싹 달라붙어서 어쩔 수 없이 파이와 떨어진 적도 있다. 파이의 저 굵직한 팔뚝에 커다란 가슴을 비비면서 유혹하는 것도 봤고.
그런데 파이는 정말 아무런 감정이 없었던 걸까? 저렇게 예쁜 언니가 좋다고 쫒아 다니는데도?
“쓸데없는 소리 지껄이지 말고 당장 돌아가. 그리고 다시는 레어에 오지 마라.”
어. 없었나 보다. 그렇다고 해도 저렇게 단칼에 잘라내 버리다니.
그나마 나한테는 이렇게까지 못되게 굴지는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한편으로는 좋아하는 사람에게 이런 무지막지한 말을 듣는 하유르가 안쓰러워지기도.
“매정하기도 해라. 그게 네 매력이긴 하니까. 하지만 내가 좀 급해서 오래는 못 기다려. 반년, 그때까지 내 제안을 받아들이겠다면 루즈 제국으로 찾아와. 나는 언제든 환영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