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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랑 한 번만 해요, 그거-42화 (42/132)

♬  #42

내 얼굴을 지그시 쳐다보던 예쁜이가 히죽 웃었다. 저도 부끄러운지 볼을 발갛게 물들인 채 손가락으로 소파 가장자리를 살살 매만지며 목을 가다듬는다.

“일단 나는 네가 강한 마력을 가지고 있다는 게 마음에 들어. 강한 남자의 씨를 받아 아이가 태어나면 우리 루즈 제국의 모든 이들이 좋아할 테고, 더 나아가 우리 두 제국의 사이도 좋아지지 않을까?”

“…아쉽지만 사양하지. 나는 반려가 필요해. 사생아를 만들고 싶지 않아. …무엇보다 내게는 이미 혼인을 약속한 아름다운 여성이 있어서.”

사실 정말 솔깃하긴 했지만 걸리는 게 너무 많다. 지금까지 몇 천 년을 적국으로 여겼고, 크고 작은 전쟁이 수없이 발발했었다. 대부분이 루즈 제국에서 도발한 전쟁이었다. 그 전쟁에 참전해서 희생당한 이들과 그들의 가족들이 과연 평화를 바랄까?

두 제국의 피를 가진 아이가 태어난들 양쪽 제국민들의 축복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우리 블랑 제국의 백성 대부분이 전쟁으로 가족과 아이를 잃었는데, 과연 적국과의 화합을 바라고 있을지.

그러다가 혼인이라는 단어에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7년 전부터 혼인을 결심했던 귀염둥이 치즈. 완전히 잊고 있던 건 아닌데 벌써 7년이 지나가버리다니. 생각보다 세월이 빠르게 흘러서 다행이라고 여겼다.

일단 저 예쁜이의 제안을 거절할 명분이 생겨 안도했다. 또 무엇보다 3년 뒤 치즈가 성인이 되면 떳떳하게 청혼하러 가야하는데 벌써부터 혹을 달수는 없는 노릇이다. 사내가 아랫도리를 간수하지 못하고 아무 곳에나 씨를 뿌리는 건 짐승이나 하는 짓이라고 했다. 특히 어마마마께서 매우 강조하고 당부했던 일이기 때문에 더욱 저 거래를 받아들일 수가 없다.

“혼인할 상대? 블랑 제국의 황제는 남색가라던데?”

“…뭐, 뭐라고?!”

“우리 쪽 첩자에 의하면 그래. 그래서 내가 걸어놓은 마력 때문에 노선을 바꿨나 싶었다고. 블랑 제국에서도 동성혼을 합법화하진 않는 걸로 안다만?”

…어디나 간첩은 있지만 그걸 저렇게 적국 황제의 입으로 듣게 될 줄은 몰랐다. 그나저나 내가 남색가라는 소문이 있을 줄이야. 절망스럽군. 우리 치즈의 귀에 들어가면 곤란해지는데.

“대체 그런 이야기는 어디서 나오는 거지?”

“다 이유가 있으니 그런 소문이 돌지. 그래서 그 혼인약속을 한 아리따운 여자가 누군데? 네게 여자가 있다는 얘기는 금시초문이라 궁금하네.”

“…있어. 우리 블랑 제국 사람은 아니고.”

“타국? 우리 루즈 제국 여자는 아니겠지?”

“돌지 않는 이상 적국의 여성을 비로 들이지 않는다.”

“그럼? 어디 사는 누군데?”

나는 처음 치즈를 만나던 때를 회상하며 얼굴 근육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기분을 느꼈다. 그 앙증맞고 깜찍하던 치즈가 지금쯤이면 꽤 컸겠지? 어떻게 자랐을까? 여전히 귀여울까?

[내 생일? 내 생일은 추운 겨울이 끝나고 따뜻한 바람이 불어오는 때라고 했어요. 얼마 전에도 생일이었고!]

샌드위치를 아주 복스럽고 맛있게 먹던 치즈가 호들갑을 떨었던 그 표정이 아직도 새록새록하다. 자기는 생일이 너무 좋다고, 생일에는 늘 맛있는 음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다고. 매일 생일이었으면 좋겠다고 하면서.

한번 보러가고 싶은데. 성년이 되면 데리러간다고 했으니 서두르진 말아야지. 그 블랙 드래곤이 또 제 구역에 침범하는 걸 무척이나 싫어할 테고.

“아주 안전하게 블랙 드래곤의 레어에서 자라고 있는 내 귀여운 아이가 있지.”

“…설마 치즈 말하는 거야?”

“…네가 치즈를 어떻게 알고?”

깜짝 놀랐다. 예쁜이 입에서 치즈의 이름을 듣게 될 줄은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으니까.

그러자 나만큼 놀란 얼굴로 눈꺼풀을 빠르게 파닥거리던 예쁜이가 혼자 골똘히 생각에 잠긴다. 한참을 그렇게 가만히 앉아 눈동자만 굴리던 그녀가 음흉한 표정으로 기분 나쁘게 웃기 시작했다.

“왜 웃지?”

“그게 가능할까 싶어서.”

“뭐가?”

“혼인.”

“…왜?”

“카르디옌이 제가 곱게 키운 제 새끼를 그렇게 쉽게 남의 손에 넘겨줄까? 그리고 여자의 감으로 봤을 때, 치즈가 카르디옌을 떠날 수 있을지도 의문이네.”

이해할 수 없는 말만 뱉어내는 예쁜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살랑살랑 엉덩이를 흔들며 교태를 부리더니 농염한 시선을 내게 보내와서 또 하체가 욱신거렸다.

“나도 그렇게 급하진 않으니까 잘 생각해봐. 일단 미안하니까 마력은 풀어줄게. 방탕한 놈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순진해서 기특하기도 하고.”

그러면서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내게 접근하기에 피하려고 했지만 그녀가 더 빨랐다.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손을 뻗어 내 소중이를 한 손으로 덥석 쥐어 잡혔다.

“억?!”

또, 또 감히 내게! 내 약점에 손을!

순간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마력이 튀어나와 허공에 생성된 얼음조각들이 그녀를 향해 돌진했다.

“그거 알아? 물과 불은 상극이라는 거?”

내게 얼굴을 들이밀고 손아귀에 더 힘을 가하는 그녀의 등에 불꽃의 날개가 펼쳐졌다. 그 후끈한 열기에 그녀를 향해서 돌진하던 얼음들이 전부 녹아내린다. 공중에서 순식간에 녹아버린 얼음이 마치 빗물처럼 쏟아져서 불로 만든 그녀의 날개도 점점 사그라졌다.

“비린내가 날 줄 알았는데 제법 깨끗한 물이네. 1급수 정도 되나봐?”

둘 다 물을 쫄딱 뒤집어쓴 채다. 나는 벽에 등을 기댄 채 그녀에게 소중이가 붙들려 옴짝달싹도 못 했다.

“그 손, 당장… 놔라.”

“기다려봐. 마력 끊어준다니까? 시간이 조금 필요해서 그래.”

그러더니 손을 조물조물 움직여 마사지하듯 꾹꾹 눌러온다. 아무리 옷 위라고 해도, 아무리 마력을 끊기 위함이라 해도 이건… 날 죽일 셈인가.

타인의, 그것도 여성의 손길이 닿은 소중이가 펄펄 끓어오르는 것처럼 후끈 달아올랐다. 조몰락거리는 그 야릇한 느낌에 심장이 미쳐 날뛰었다. 맹렬하게 솟구치는 쾌감에 호흡이 뜨거워지고 허리가 움찔거리며 들썩거렸다. 척추가 찌릿한 자극에 뻣뻣하게 굳어버리면서 손가락과 발가락이 절로 오므라든다. 목구멍에서 흘러나오는 신음을 흘리지 않으려고 입술을 꾹 다물었으나 자꾸만 힘이 빠져나가 견딜 수가 없었다.

“착하지? 조금만 더 기다려. 내 아이가 어디 숨어있는지 도통 안보이네? 그나저나 네 거 엄청 크다. 단단하기는 또 돌 같고. 대단해.”

정신이 날아가 버리려고 하는 걸 겨우 붙잡고 있는 것도 벅차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낯선 전율이 하체를 타고 올라와 정수리를 사정없이 찔러온다. 이러다가 사정이라도 할까 봐 덜컥 겁이 나 어떻게든 딴 생각을 하려고 노력했다.

“찾았다.”

그때 내 소중이를 옭아매던 그녀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양쪽 손바닥이 땀인지 물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물기에 가득 젖은 채다. 그 축축한 손을 꽉 쥔 채로 달달 떨며 흐트러진 초점을 맞추려고 애를 썼다.

조금만 늦었어도 추한 꼴을 보일 뻔했어. 젠장. 이 못된 예쁜이 같으니라고!

“이제 괜찮을 거야. …도와줬는데 왜 그렇게 노려봐?”

“감히… 나, 블랑 제국의 황제를 상대로…….”

“루즈 제국의 황제를 상대로 발정하는 너는 어떻고?”

저 예쁜이가 자꾸 말문 막히게!

“아무튼 방금 생각난 게 있는데, 우리 거래 하나 할까?”

“…필요 없어. 네 같잖은 수작에 놀아나지 않아.”

나는 숨을 시근덕거리며 혹시 또 내게 위협을 가할지 모를 그녀를 경계했다. 하지만 그녀는 내 말을 듣지 않은 척 제 할 말만 뱉어냈다.

“말했듯 나는 강한 사내의 씨가 필요해.”

“그건 이미 거절한 것 같은데.”

“내 얘기 끝까지 들어. 내가 아는 이들 중에서 강한 사내는 딱 두 명, 너하고 카르디옌이야. 걔가 드래곤 중에서는 그나마 온순한 편이거든. 화나면 가장 미친놈으로 변모하지만.”

“…드래곤이 인간과? 그게 가능해?”

“한번 해보는 거지. 일단 카르디옌에게서 치즈를 해방시키는 게 내 목적이야. 그러려면 치즈가 성인이 되어야 해. 성인이 될 때까지만 키우기로 했다고 했으니까.”

악마와 인간의 혼혈이 있다고는 들어봤지만 드래곤과 인간의 혼혈이 존재한다는 얘기는 못 들어봤는데. 그게 가능한 일인 건가?

“그러기 위해서는 네 도움이 필요할 것 같아. 너는 어떻게 해서든 치즈와 카르디옌을 갈라놓으면 돼.”

“서로 차지하자?”

“그렇지.”

나쁜 조건은 아닌지라 수긍했다. 어차피 치즈와 카르디옌을 떼놓고 싶은 건 나 역시 마찬가지니까. 드래곤은 언제 폭주할지 모른다. 위태로운 드래곤 옆에 두었다가 우리 치즈가 잘못될까봐 그게 제일 걱정이거든.

그렇게 협상타결을 마치고 예쁜이가 떠났다. 나중에 내 서재가 물벼락이 된 것을 본 시종이 세상 무너지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래서 나는 그저 시종의 어깨만 토닥토닥 두드려주었다.

그녀가 걸어둔 마력이 정말 사라졌는지 이제 여성들이 다가와도 아프지가 않았다. 그래서 마음이 조금 편해졌을 때에 또 루즈 제국의 황제에게서 밀서가 날아왔다.

최근에 치즈가 마세티앙 제국의 아카데미에 입학을 했다고 하네. 알아두고 있으라고.

“…마세티앙 제국? 아카데미?”

치즈가 안전한 레어를 두고 밖으로 나온다고? 그것도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지내게 해?

내가 치즈에게 접근하는 것도 경계하던 카르디옌이 아카데미에 다니는 걸 허락했다는 사실이 제법 놀라웠다. 당시 치즈가 그 들꽃밭에서 놀 때도 벌레나 각종 짐승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결계를 쳤던 놈인데. 더군다나 넘어져서 다칠까 봐 눈을 떼지도 못했었다. 치즈에게 보호마력이 담긴 장신구를 착용하게 했고 입고 있던 드레스도 방어마력이 있었다. 그것을 알았기 때문에 드래곤의 마력이 상상 이상이라는 것을 깨달아 절대 덤비면 안 되겠다고 다짐했었다.

아무튼 카르디옌이 아카데미에 다니도록 허락했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는다. 내 눈으로 직접 확인을 해보지 않으면 믿을 수가 없어서 직접 마세티앙 제국을 몰래 찾아갔다.

나름 변장한다고 가발도 쓰고 모자도 쓰고 안경도 쓰고. 아카데미 원복이라는 걸 새로 구입해서 입었다. 학생증도 필요하다고 해서 그것도 대충 제작했다. 아카데미 방비가 어찌나 철저하던지. 이러니까 카르디옌이 허락했나 싶을 정도였다.

겨우 보완을 뚫고 아카데미 안으로 들어와서 치즈를 찾기 위해 몇 시간을 헤맸다. 지도도 없고 위치도 몰라서 상당히 헤매다가 지쳐서 야외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랬는데 갑자기 주위가 웅성웅성 시끄러워졌다. 혹시 내 정체가 들통났나 싶어 바짝 긴장했는데 주위에 있던 모든 학생들의 시선이 한 곳을 향했다.

“오, 왔다, 왔어! 쟤야, 쟤.”

“최근에 입학한 아카데미의 새로운 여신이라던 걔?”

그 말에 나도 고개를 돌려 모두의 시선이 향한 곳을 쳐다봤다. 곧 한쪽 구석에서 밀빛 머리카락을 곱게 정리한 아리따운 여성이 조신한 걸음걸이로 지나간다. 초록색 눈동자를 수줍게 내리깔고 조금 긴장한 듯 얼굴을 굳힌 것이 누가 봐도 치즈다. 멀리서 봐도 내가 아는 치즈가 확실하다. 그러나 직접 두 눈으로 보고 있음에도 믿을 수가 없었다.

‘정말 치즈잖아? 진짜였네? 아니, 그보다 쟤 왜 저렇게 예쁘게 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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