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
너무 놀라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또 빠르게 지나가는 치즈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생각보다 더 아름다워진 모습에 심장이 발작하듯 정신없이 뛰어댔다.
확실히 어렸을 때의 그 모습 그대로 귀여우면서도 예쁘게 자라난 모습이다. 그렇게 정성들여 키워놓았을 카르디옌을 칭찬해주고 싶을 정도다.
잘 자랐네. 기특하군. 예상외로 너무 예쁘게 자라서 큰일이야. 흐뭇하기도 하고.
그러다가 나와 마찬가지로 치즈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남자아이들의 대화에 귀가 쫑긋 세워졌다.
“맞아. 쟤. 그래서 로티아나가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다잖아? 자기 자리 뺏겼다고 아주 칼을 갈던데?”
뭐라? 로티아나? 누군데 감히 내 귀염둥이에게 칼을 갈아? 죽고 싶은가 보군.
“그렇다더라? 그런데 쟤 정체가 아직 확실하지 않아서 건들지 못하고 있는 거지. 누가 봐도 고위 귀족으로 보이잖아? 왕족일지도 모르고.”
“마녀일지도 모른다고 접근하면 죽을 수도 있대.”
“매일 데리러오는 남자가 또 엄청 잘생겼다고 난리던데? 혹시 그거 아니야? 흡혈귀? 그 남자 눈이 피처럼 빨간색이래.”
빨간 눈의 남성이라면 카르디옌이 직접 데리고 다니는가보군. 세상에 아직도 흡혈귀가 빨간 눈을 가지고 있다는 걸 믿고 있다니. 아직 애들은 애들이군 그래. 흡혈귀가 인간과 악마의 혼혈로 태어난 불완전한 존재라는 걸 알고는 있나?
일단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치즈가 향한 곳으로 뒤쫓아 갔다. 점심시간인지 아카데미 건물 안에 학생들이 많아서 다행히 내게 시선을 두는 이는 없었다.
이번 변장은 좀 먹혀서 다행이야. 가발을 쓰길 잘했어.
학생식당으로 들어간 치즈가 식권판매대 앞에 선다. 그리고 두 눈을 반짝거리며 메뉴판에 빨려들어갈 정도로 집중해서 살펴본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학생들이 치즈와 반경 1미터 정도 거리를 두고 있었다. 대부분이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치즈의 눈치만 살피기 바빴다.
“아, 치즈! 벌써 왔네?”
“레이라!”
방어마력을 펼치는 것처럼 치즈의 주변에 생긴 빈 공간을 서슴없이 뚫고 들어서는 여학생이 있었다. 청회색의 밝으면서도 탁한 머리카락과 푸른 눈동자를 가진 여학생의 이름이 레이라인가 보다.
혹시 치즈에게 해가 되지 않을까 매의 눈으로 지켜봤지만 두 사람의 분위기는 말랑한 마시멜로 같았다. 긴장으로 굳어있던 치즈의 표정이 사르르 녹아내리고 자연스럽게 웃기 시작했다. 레이라라는 여성 역시 아카데미의 생활이 서툰 치즈에게 이것저것 알려주며 친절한 모습을 보였다.
“치즈. 꿀을 그렇게 많이 먹으면 입이 달 텐데?”
꿀을 보자마자 두 눈을 빛내며 그릇 한가득 꿀을 퍼 담는 치즈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러더니 레이라와 함께 자리에 앉아 비장하게 빵조각을 들어 꿀이 잔뜩 담긴 그릇에 푹 담근다. 보기만 해도 달게 느껴지는 그것을 한입에 가득 넣어 오물오물 씹는 치즈가 두 주먹을 꽉 쥐고 바르르 떨었다.
“으으응! 맛있어! 역시 꿀이 최고야!”
“…나는 너무 달면 머리가 띵하던데.”
“레어… 아, 아니 저택에서는 꿀을 못 먹었거든. 내가 꿀 진짜 좋아하는데 이 썩는다고 못 먹게 해서 얼마나 슬펐다고.”
저런. 카르디옌이 다 퍼주기만 할 줄 알았더니 그건 아니었나보군. 나름 건강을 생각해서 단 음식은 자제시킨 것 같은데, 그런 것 치고 치즈의 표정이 너무 처연하다. 누가 보면 먹을 것도 제대로 안주는 집에서 자란 아이같이 보일 정도로.
“아, 여기 있었네? 잠깐 실례해도 될까?”
“리브엘? 너도 식사하러 왔어?”
“난 이미 식사 끝냈어.”
치즈가 앉아있는 긴 식탁에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고 있는데 녹색 머리카락의 남학생이 친근하게 다가갔다. 이미 세 남녀는 서로 안면이 있는 사이인지 친분이 있기는 하지만 뭔가 어색한 분위기가 느껴지기도 했다.
웬 사내놈이 내 귀염둥이에게 접근하나 싶어 잔뜩 날을 세워 경계했다. 그러자 그 리브엘이라 불린 남학생의 눈동자가 나와 딱 마주쳐서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진한 고동색의 기묘한 눈빛이 왜 이렇게 소름이 돋던지. 카르디옌 만큼이나 사나운 눈빛을 보이는 리브엘이 치즈를 훔쳐보는 주변 남학생들을 전부 훑었다. 그러자 그 눈빛을 받던 남학생들이 전부 고개를 돌리거나 그 자리를 피한다.
제2의 카르디옌인가. 그나저나 아카데미 학생이면 아직 성인이 되지 못한 나이일 텐데. 저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살벌한 눈빛이 영 거슬린다.
“그럼 나한테 무슨 볼일이라도 있는 거야?”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묻는 치즈의 귀여운 목소리에 주변을 노려보던 리브엘의 표정이 순식간에 변했다. 악귀처럼 포악하던 얼굴이 언제 그랬냐는 듯 부드러운 미소의 순진한 청년으로 돌변한다.
아무래도 저놈 목표가 치즈인 것 같단 말이지. 감히 내 귀염둥이를……. 건방지게!
“곧 봄 체육대회를 개최하는데 치즈 너의 도움이 필요할 것 같아서. 괜찮다면 우리 학생부를 좀 도와줬으면 하는데.”
“내가? 나는 이제 막 입학해서 아무것도 모르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아서.”
“크게 힘든 일도 아니고 그냥 내 옆에서 보좌만 해주면 돼. 간단한 일이라 쉽게 할 수 있어.”
“…그런 거면 다른 임원 시키면 되지 않아?”
“다들 정신없이 바쁘거든. 일손이 좀 많이 부족해.”
“아……. 그런 거라면 해야지. 방과 후 시간은 낼 수 없지만, 점심시간은 여유로우니까 내가 해야 할 일을 그때 알려줘.”
“선뜻 수락해줘서 고마워. 그럼 잘 부탁할게.”
수상하다. 저 희대의 바람둥이처럼 생긴 놈이 치즈를 상대로 다정하게 눈웃음을 치는 꼴이 너무도 수상했다. 다행히 치즈는 대수롭지 않게 웃어넘기며 먹는대 집중한다. 아직은 저 놈보다 먹을 게 더 마음에 드나보다.
그건 참 다행이군.
혹시 몰라서 점심시간과 오후 수업을 듣는 치즈의 주변을 맴돌며 탐색을 했다. 춘곤증 때문인지, 치즈는 점심식사 이후에 듣는 수업시간에 꾸벅꾸벅 졸면서 흐느적거렸다. 혼자 몸을 가누지 못해서 이리저리 흔들리는 모습이 또 왜 이렇게 귀여운지. 침을 흘려도 예쁘고. 졸다가 깨서 한껏 풀린 눈으로 입맛을 다시는 모습도 사랑스럽고.
하아, 당장 우리 제국으로 데려가고 싶다. 아니지. 그랬다가는 성년이 될 때까지 기다리다가 내가 먼저 숨넘어갈지도.
아무튼 카르디옌 품에 있을 때가 가장 안전해서 믿고 맡겼건만. 이렇게 뒤통수를 칠 줄은 몰랐군 그래. 이런 늑대소굴에 귀여운 어린 양을 밀어 넣은 카르디옌은 대체 무슨 생각이지?
다행히 치즈에게 쉽게 접근하는 사람은 없었다. 나처럼 멀리서 치즈를 보고 입맛만 다시는 놈들이 수두룩했을 뿐. 치즈와 친분이 있는 사람은 레이라와 리브엘이라는 두 학생이 전부였다. 레이라는 친구로서 다가간 느낌이지만 리브엘 그 녀석은 아무리 봐도 흑심이 있다. 그리고 그 녀석에게서 뭔가 기분 나쁜 냄새가 폴폴 풍겨온단 말이지.
카르디옌은 이 상황을 알고 있는 건가?
마지막 수업이 거의 끝나갈 무렵. 밖에 나와 정문 쪽에서 숨어 있다가 카르디옌이 마차에서 내리는 것을 확인하고는 다가갔다.
“어이, 카르디옌.”
“…네가 여긴 어떻게 왔지? 아카데미에 입학할 수 있는 나이는 아니지 않나?”
보자마자 나인 줄 알아채는 카르디옌이 굉장히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좁힌다. 그래서 나는 팔짱을 낀 채 콧방귀를 뀌며 대꾸했다.
“너야말로 대체 무슨 생각이지? 치즈를 저런 늑대무리에 풀어놓은 이유 말이다.”
“…알 거 없다. 그만 꺼져.”
“리브엘, 이라는 이름 알아? 아무래도 수상하던데. 은근슬쩍 경계를 풀게 만들어서 서서히 접근하는 느낌이 영 좋지 않아서 말이야.”
“…리브엘? 학생회장이라는 놈 이름이 그렇다는 얘기는 들었다만.”
“그렇게 두 손 놓고 있을 때가 아니라니까 그런다! 인간에 대해 이렇게 무지하다니. 넋 놓고 있다가 치즈 목덜미를 물고 도망치는 걸 구경만 할 참인가?”
그제야 카르디옌이 사태의 심각성을 눈치챘는지 그의 선명한 눈동자가 시뻘건 용암처럼 들끓어 올랐다.
“나는 아카데미 내에 출입할 수 없다. 방문목적이 확실하지 않은 이상 가족의 출입도 허락하지 않는 곳이라서.”
“그래서 늑대무리인지도 모르고 풀어놓았다는 거군.”
“…별수 없지. 에이든 네가 좀 도와야겠다. 치즈에게 접근하는 놈들을 모두 정리하도록. 일단 내가 마세티앙 제국에 협조를 요청할 테니 블랑 제국의 사람을 몇 명 들여보내.”
“그건 어렵지 않지만… 대신 치즈를 보호하는 대가로 블랙 드래곤께서 우리 블랑 제국을 좀 도와주지 그래?”
“뭘 도와달라는 거지?”
“루즈 제국과의 전쟁이 발발되면 우리 편을 도와주는걸로.”
“좋다.”
그냥 한번 던진 말인데 의외로 카르디옌이 흔쾌히 허락해서 조금 놀랐다.
“진심이야?”
“그건 왜 묻지? 설마 농으로 던진 거라면…….”
“아니! 네가 너무 쉽게 수락해서 놀란 것뿐이야.”
어쩐지 루즈 제국의 황제가 조금은 안쓰러워지기도 한다. 그 예쁜이가 카르디옌을 마음에 두고 있는 것 같던데. 물론 그녀가 원하는 건 드래곤의 씨일 뿐이지만.
“그럼 협상타결. 치즈의 안위는 우리 블랑 제국에 맡겨. 책임지고 무사히 졸업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
이것이 바로 꿩 먹고 알 먹고. 도랑 치고 가재 잡고. 치즈를 지키면서 치즈의 학창시절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으니 내게는 나쁠 것이 전혀 없었다.
“실패하면 블랑 제국 전체를 지도상에서 없애버리는 수가 있다. 그러니 치즈에게 접근하는 놈들을 죄다 처리하도록 해.”
“걱정하지 마시지. 우리 블랑 제국의 저력을 얕보면 곤란해.”
그래서 나는 블랑 제국에서 황족의 피를 이어받아 어느 정도 마력을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을 고르고 골랐다. 각 학급에 학생으로 들어갈 수 있는 아이들과 교수 자리에 앉을 수 있는 역량을 가진 성인들 몇 명.
카르디옌이 마세티앙 제국이 협조하겠다는 문서를 받아내 그것을 들고 몰래 아카데미의 이사장을 만났다.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아카데미 내부에 블랑 제국의 사람들을 눈에 띄지 않게끔 집어넣는 데 성공했다.
덕분에 치즈가 3년간 아무 탈 없이 아카데미에서 지내고 졸업하는 데 성공했지만. 다른 문제가 생겨버린 거지.
“뭐, 뭐라? 루즈 제국의 누가 뭐를 어째?”
“송구합니다, 폐하. 저희도 이런 일은 처음인지라…….”
유일하게 내 밑으로 여동생 하나가 있었는데, 웬 사내놈이 여동생을 데리고 국경을 빠져나가려다가 붙잡혔단다. 잡고 나서 보니 루즈 제국의 황족이라는 증표를 지니고 있었다고. 심문한 결과 그가 루즈 제국 황제의 오라비였고, 여동생은 울며불며 그분을 풀어달라고 하소연까지. 아카데미에서 만난 자신의 정인이라나 뭐라나.
알고 보니 그 루즈 제국 황제의 오라비가 이미 졸업한 아카데미 학생으로, 어느 교수의 조교로 일하고 있었단다. 마침 여동생을 아카데미에 들여보내던 그때, 어쩌다 서로 첫눈에 반한 거라고.
…설마 이런 일이 발생할 거라고는 조금도 상상하지 못했다. 하필 루즈 제국의 사람을.
결국 루즈 제국에서 선전포고를 던졌고, 무려 십 년간 이어졌던 비밀의 평화협정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마침 성인이 되었을 치즈를 데리러 가야 하는 찰나기도 했다. 더불어 카르디옌을 전쟁에 투입시켜야겠다는 생각으로 레어에 찾아간 것이다.
[루즈 제국에서 선전포고를 던졌어. 조만간 전쟁이 시작될 것 같아서 네 힘이 필요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