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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랑 한 번만 해요, 그거-39화 (39/132)

♬  #39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나한테 하는 말인 줄 알고 움찔거리면서 파이를 쳐다봤다. 그런데 아닌가 보다. 그는 그저 부드럽게 웃으면서 내 뺨에 쪽, 입을 맞춰주기만 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은 에이든에게서 들려왔다.

“루즈 제국에서 선전포고를 던졌어. 조만간 전쟁이 시작될 것 같아서 네 힘이 필요해.”

순간적으로 파이의 눈빛이 눈에 보일 정도로 가라앉아 살벌한 기색을 띄웠다. 그리고 천천히 눈동자를 굴려 에이든을 쳐다본다. 나 역시 전투라는 말에 두 눈을 크게 뜨고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면서 또 눈치만 살폈다.

“이유는?”

“어떤 정신 나간 놈이 우리 제국에 침입해서 내 여동생을 데리고 도망을 치려다가 붙잡혔어. 잡아보니 루즈 제국 황제의 오라비더군.”

“왜지?”

“낸들 아나? 그 장본인 둘 다 묵언 수행 중이야.”

“…곤란하군.”

뭐야? 뭔데? 둘만 알고 나는 모르는 이야기라니!

잔뜩 궁금함을 담아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파이를 쳐다봤다. 하지만 파이는 그저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딸기 주스를 먹여주기만 했다.

“그래서 내가 도와야 한다는 건가? 치즈를 여기에 혼자 두고?”

“정 불안하면 치즈를 우리 제국에 데려가면 되잖아. 내가 책임지고 맡아줄게. 나는 어차피 전선에서는 제외되니까.”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격이로군.”

“어허, 이거 왜 이러시나? 나를 믿지 못하겠다는 거야?”

“치즈.”

파이가 또 에이든의 말을 통으로 무시하고 나를 불러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내가 한동안 자리를 비워야 하고, 일이 언제 끝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니까… 짜증이 나는군. 아무튼 나와 같이 가겠어? 아니면 레어에……?”

“파이랑 같이요. 레어는 싫어.”

아무렴! 파이가 없으면 파이가 올 때까지 레어에 혼자 갇혀있어야 하는데 그건 나더러 죽으라는 이야기지. 원래 전쟁이라는 게 한번 발발하면 몇 달 몇 년은 훅 간다고 했다. 오, 그건 절대 사양이야! 아마 말라 죽을지도!

나는 단호하게 파이의 말을 뚝 자르고 함께 가겠다고 대꾸했다. 그러자 파이는 꽤나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으로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또 에이든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웃음을 참지 못하고 히죽거렸다.

“자, 그럼 결정이 된 것 같으니까 우선 가지. 당장 급하다고.”

“지금 당장이요? 옷은? 내 짐은?”

“내가 다 알아서 준비해줄 테니까 마음 편하게 가져. 아마 마음에 들 거야. 이런 지저분한 동굴과는 차원이 다르거든.”

꽤나 자신만만하게 어깨를 으쓱거리는 에이든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파이의 표정은 썩은 고기를 먹은 것처럼 잔뜩 일그러진 상태다.

정말 괜찮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또 블랑 제국은 얼음으로 지어진 성이라고 들어서 호기심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다. 그곳은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곳이라고 했다. 그래서 더욱더 가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본능이자 참을 수 없는 호기심이다.

“어서 가요, 파이! 나 그 블랑 제국에 굉장히 가고 싶어졌어!”

새로운 세계로 여행을 떠나는 건 언제 해도 즐거운 일이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짜증으로 무장한 파이를 재촉했다. 별수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난 파이가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바로 이동할 테니까 눈 감아.”

그 말에 나는 방긋 웃으며 눈을 꾹 감았다.

* * *

우리 블랑 제국은 오래전 태초부터 탄생한 나라로, 일명 얼음 왕국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리고 우리와 적대관계에 있는 불의 나라 루즈 제국은 우리 블랑 제국이 생긴 이후에 탄생하게 되었다.

문서에 기록된 역사에 의하면 우리 블랑 제국은 신이 만든 창조물이고, 루즈 제국은 악마에 의해 탄생했다고 한다. 불은 악마를 상징한다고 하니까.

“그래서 우리 블랑 제국에 사사건건 시비를 걸어오는 건가?”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황태자 전하. 악마의 습성을 닮아서 더욱더 악랄한 놈들이지요.”

지금으로부터 십 년 전, 그날도 나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역사 수업을 나름 열심히 경청하고 있을 때였다. 퍽이나 지루하고 재미없긴 하지만 황족으로서 필수과목인지라.

“그 루즈 제국은 무조건 여제 세습이라며?”

“맞습니다. 루즈 제국을 세운 악마가 암컷이었다는 소문도 있고. 아무튼 여성인권이 높은 제국이라 저희 블랑 제국과는 또 다른 체제를 가지고 있지요.”

“문화 자체가 상당히 문란하다던데.”

“…어, 어디서 그런 이야기를 들으셨습니까?”

“블랑 제국의 백성들이 전부 다 아는 사실을 내가 모를 거라 생각했나?”

황태자인 내 정보망을 우습게 보는 건지. 하여간 꽉 막힌 저놈은 정직하게 책에 나온 이야기만 설명해서 재미가 없다. 저러니 아카데미에서도 저 교수 수업은 지루하다고들 하지.

나는 책을 덮으며 책상에 두 팔꿈치를 얹고 손깍지를 꼈다. 그리고 그 위에 턱을 얹어놓고 눈을 치떴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흠칫 놀라는 역사학 교수를 향해 나는 삐딱한 미소를 지었다.

“역사학은 이미 질릴 만큼 들었다. 내가 알고 싶은 건 그게 아니야. 지금까지 그 루즈 제국의 황제를 실물로 본 적이 있나?”

“그, 그림으로만…….”

“쯧쯧. 역사학 전공한 놈이 타국의 여제를 그림으로만 봤다니. 그래서 그림으로 봤을 땐 어떻지? 몸매는? 가슴은 좀 크던가? 엉덩이는? 가장 중요한 건, 예뻐?”

“전하…….”

“어허. 한창 자라나는 지금 내 나이 때 가장 듣고 싶고 궁금해 하는 건, 상대 제국의 과거가 아니라 현재란 말이다. 어서 말해봐.”

소년의 티를 벗어나 청년으로 변모해가는 때의 사내는 한창 발정기인 짐승이나 다름없다고들 한다.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황태자이자 블랑 제국 역사상 최고의 미남으로 손꼽히는 내게 마음을 뺏기지 않는 여성도 없지. 내 눈웃음 한 번이면 와인에 취한 것처럼 다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곤 했으니까.

“베르만 교수. 어서 불어.”

“대대로 루즈 제국의 여제는… 아,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다고 합니다.”

“나만큼?”

“…여성의 아름다움과 남성의 아름다움은 조금 차이가 있다고 생각됩니다만.”

“그렇기야 하겠지. 그리고 그런 식으로 두루뭉술하게 말하지 말고, 아 이거 답답해서 안 되겠네. 그 그림 어디 있지?”

“예……?”

“그대가 보았다던 그 그림말이다. 루즈 제국 황제의 초상화.”

“그, 그것이… 중앙박물관에…….”

“가지.”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방을 빠져나왔다. 공부는 직접 눈으로 보고 피부로 겪어야 하는 것이 내 신조다. 백날 듣기만 하면 귀만 무거워진다.

그래서 베르만 교수를 끌고 황태자궁을 나왔다. 마차를 타면 또 번거로워져서 그냥 말을 타고 황궁을 벗어나 중앙박물관으로 향했다.

“황태자 전하?”

“황태자 전하께서 방문하신다!”

직위가 높은 사람이 외모가 뛰어나서 아쉬운 게 있다면 잠행을 할 수 없다는 거다. 얼굴을 가려도 후광이 비춰서 금방 들통이 나버리니. 그냥 대놓고 돌아다니는 것이 속 편하기도 하다.

따로 전언 없이 방문한 중앙박물관이 시끌벅적해졌다. 황궁 밖에만 나가면 이렇게 떠들썩해지는 것도 이젠 놀랍지도 않다. 그래도 어마마마께서 아바마마처럼 철딱서니 없는 행동을 하지 말라고 당부하셨으니 조심해야지. 오만한 행실은 득보다 실이 더 크다고 하셨으니까.

“루즈 제국의 황제 초상화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왔다. 그것을 보려고 왔으니 안내해.”

“아, 예! 이쪽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저하.”

땀을 뻘뻘 흘리면서 연신 공손하게 허리를 굽실거리는 남자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한산한 박물관 안에서 조용하게 관람하던 이들의 놀란 숨소리와 작은 비명이 실내에 울려 퍼진다. 파도처럼 나를 향해 깊이 허리를 숙이는 사람들이 알아서 터주는 길을 따라 걸었다.

곧 안쪽에 루즈 제국과의 전쟁 이후 얻은 전리품이나 물품을 진열해놓은 곳에 걸려있는 초상화 앞에 멈춰 섰다.

“이것이 4년 전에 계승한 루즈 제국의 황제 초상화입니다.”

“…뭐야. 어리잖아? 황제라기에 나이 든 할머니쯤 되는 줄 알았더니.”

어마마마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훨씬 젊어 보인다. 어려 보인다는 말이 맞을 거다. 청소년기와 성인의 중간쯤에 놓인 앳된 얼굴은 나와 비슷한 나이쯤으로 보였다. 어딘지 거만해 보이는 표정으로 담긴 그림은 생각보다 아름답긴 했다. 아까 베르만 교수가 루즈 제국의 여제가 아름답다고 한 말이 거짓은 아니었다.

정말 예쁘긴 무척이나 예쁘네.

우리 블랑 제국에서도 저만큼의 미모와 굴곡이 선명한 몸매를 가진 여성을 본 적이 없다. 아마 그런 여성이 있었으면 내가 먼저 진작 구애를 했을 거다. 반려라면 어느 정도 내 미모와 비슷한 수준이길 바라서 지금까지 누구도 고르지 못했으니까.

그나저나 황제의 초상화인데 드레스가 아니라 승마복이라니. 눈은 즐겁다만 어딘지 고집도 제법 있어 보이기도 하다.

“아쉽군. 아쉬워. 눈으로 보는 것만 즐겁겠어. 제법 성격도 있어 보이는 것이… 상대하면 피곤할 것 같기도 하고.”

“아예 면전에 대고 욕을 하지그래?”

초상화를 눈으로만 관람하며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사이에 등 뒤에서 날카로운 여성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내 주위를 지키고 있던 호위 기사들이 검을 뽑아드는 날카로운 마찰음이 귀를 어지럽힌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봤다. 기사들의 검 끝이 향한 여성은 방금 보았던 초상화의 여인과 매우 닮아있었다.

…초상화를 닮았다고?

붉은 머리카락을 한데로 모아 질끈 묶은 채로 삐딱하게 서 있는 여성. 품질이 좋은 적포도주가 생각나는 맑고 투명한 눈동자가 그 그림과 똑같다. 날카롭게 보이는 눈꼬리는 도도한 고양이 같았고, 그림보다 갸름한 얼굴선은 잘 다듬어진 조각 같았다. 몸에 달라붙는 승마복이 군더더기 없는 완벽한 몸매를 매우 도드라지게 만들고 있었다. 양손에 가득 들어찰 것 같은 적당한 크기의 풍만한 가슴과 잘록한 허리 아래로 섹시한 엉덩이까지.

“성격을 제외하고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한 내 이상형이야. 그런데 루즈 제국의 황제가 단신으로 이곳까지 무슨 일이지?”

그녀는 누가 봐도 루즈 제국의 황제가 분명하다. 실제로 보니 그림보다 실물이 훨씬 또렷하고 아름다운 인형 같았다. 성숙미에 관능적인 몸매 때문인지는 몰라도 사내들의 시선을 휘어잡는 무언가가 느껴지기도 한다. 저 건방진 표정이나 태도는 영 거슬리지만.

그나저나 적국의 황제가 왜 이곳에 와 있는 건지.

“너희 블랑 제국의 황제에게 볼일이 있어서 온 거니까 그런 재수 없는 눈으로 쳐다보지 말아 줄래?”

“아바마마께서? 그런 얘기는 못 들었는데. 무슨 일로?”

“낸들 알아? 감히 나더러 오라 가라, 건방진 블랑 제국 놈들 같으니.”

“그럼 그 말을 어떻게 믿지?”

내 물음에 콧방귀를 뀌는 그녀가 손가락을 가볍게 휘젓는다. 그 행동에 나는 몸을 바짝 굳히고 경계했다.

우리 블랑 제국과 루즈 제국이 유명한 이유는 황족의 피에 마력이 섞여 있기 때문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강한 마력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 후계자가 된다. 나 역시 형제들 중에서도 아바마마에 맞먹는 힘을 가졌기 때문에 서열싸움 없이 황태자 자리를 거머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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