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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랑 한 번만 해요, 그거-38화 (38/132)

♬  #38

갑자기 왜 이렇게 상냥하게 구는 건지 모르겠지만 상관없다. 어쨌든 일촉즉발의 위기에서 벗어난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전에 파이가 아까처럼 또 한쪽 팔로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그리고 몸을 돌려 세워 동굴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어, 이봐? 카르디옌! 우리 얘기 아직 다 안 끝났는데!”

“눈 감아.”

뒤에서 에이든이 다급히 외쳤으나 파이는 가볍게 무시했다. 그리고 명령처럼 뱉은 그의 말에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자 가벼운 바람이 휭 지나가는 느낌과 함께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슬쩍 눈을 떠보니 익숙한 레어의 식당이 시야에 들어왔다. 식탁은 비어있었고 확실히 오래 쓰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듯 뽀얀 먼지가 쌓여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3년 전에 레어를 나간 이후로 여기는 처음 들어왔으니까.

물론 그 먼지는 파이의 마력 한 번에 어디론가 사라지면서 식탁이 깨끗하게 변했다.

“파이. 식사보다는 화장실부터 가야 할 것 같은데?”

“그냥 싸도 돼.”

…이 문외한 드래곤 같으니라고. 내가 암만 배움이 짧다고 해도 나는 지성인이라고! 아직도 내가 무슨 기저귀를 차고 있는 어린 아기인 줄 아나?

괜히 심통이 나서 콧등을 잔뜩 일그러트리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인간이길 포기하라는 거예요? 정말 파이는 가끔 보면 되게… 인정이 없어. 드래곤한테 인정을 바라는 것도 웃기긴 하지만.”

“치즈의 말이 맞아. 인정도 없고 배려는 더더욱 없지. 그래서 짐승이고.”

내 말을 툭 자른 건 등 뒤에서 들려오는 에이든의 목소리였다. 어떻게 알고 여기까지 들어왔는지 아주 자연스럽게 걸어와서 식탁 의자에 앉는다. 그리고 한눈에 반할 정도로 예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넘기고 있었다.

뭔가… 전부터 느꼈지만 파이의 친구 중에서 친화력이 가장 좋은 남자인 것 같다. 그래서 가장 마음에 드는 친구 중 하나였지만.

그 대신 눈치는 조금 많이 부족한 듯?

“에이든. 여기까지 어떻게 알고 들어왔어요?”

“마력의 기운을 찾으면 어디든 따라갈 수 있어.”

“아니, 레어에 결계가 있다고 했는데…….”

“이런 저급한 결계 따위, 나처럼 대단한 마력을 가진 사람에게는 안 통하니까.”

어렸을 땐 깊게 생각 안 했었는데 에이든이 굉장한 능력을 가진 인간이라는 걸 지금 다시 느낀다. 일단 에이든의 나라는 여기에서 아주아주 먼 곳에 위치한 블랑 제국이라는 곳이다. 일명 얼음왕국이라는 칭호로 불리고 꽤 유명하다는 것도 안다. 대대로 마력을 가지고 태어난 후계가 제왕의 자리에 오른다고. 그래서 당시 에이든이 황태자인 이유가 바로 마력을 가졌기 때문이라는 걸 새삼 깨닫는다. 또 십 년 전에 에이든이 그랬었지.

[나한테 시집오면 제국의 황후가 될 수 있어. 우리 블랑 제국은 드래곤의 레어 따위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훨씬 근사하고 살기 좋을 거다.]

황후. 오, 그러고 보니 진짜 황후가 될 수 있는 상황인 거잖아? 게다가 하루 만에 왕세자와 황태자에게 고백을 받게 되다니.

“그런데 에이든은 아직 혼인하지 않은 거예요?”

“혼인? 네가 성년이 되면 데리러 온다고 했잖아. 설마 기억 안 나는 건 아니지?”

“…그 말 진짜였어요?”

“블랑 제국의 황제를 이름으로 부를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나는 이미 십 년 전부터 치즈 너에게 내 이름을 허락했는걸?”

“황제?”

“아바마마께서 십 년 전에 돌아가셨어. 그래서 너를 만났던 그 시기에 황제가 되었고. 그렇지 않아도 후계문제로 말이 많아서 말이야. 더는 지체할 수가 없겠더라고.”

…현재 블랑 제국의 황제가 약간 미치광이에 남색가라는 소문이 있던데. 그게 에이든이었단 말인가.

난 그 소문의 주인공이 그의 아버지인 줄 알았지? 그런데 왜 미치광일까? 행동이 특이한 걸 빼고는 딱히 미쳐 보이진 않는데.

“듣기로 블랑 제국 황제는 남색가라고 하던데요?”

“어허! 그런 못된 소문은 귀담아 듣는 게 아니야. 그리고 나는 여성을 좋아해. 그런데…….”

눈썹을 휙 들어 올리는 에이든이 아까와 다르게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끝을 길게 늘였다. 그리고 식탁 위에 팔꿈치를 기댄 채 손가락으로 턱을 감쌌다. 그러더니 말랑한 자신의 연분홍빛 아랫입술을 검지로 슥슥 문지르며 나와 파이를 번갈아 가면서 쳐다본다.

그 눈빛이 어쩐지… 묘하게 야릇한 느낌이기도 하고. 뭔가 좀 쑥스러워져서 눈가에 뜨끈한 열기가 몰렸다.

“그쪽 둘에게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말이야.”

“묻고 싶은 거요?”

“왜 치즈 네 몸에서 카르디옌의 체취가, 그것도 이렇게 골이 울릴 정도로 진하게 느껴지는지 궁금해.”

조금 냉정해진 에이든의 짙푸른 눈동자가 날카로운 빛을 띤다. 순간 눈앞이 아찔해지는 건 물론이요. 다 알면서 확인사살을 당하는 느낌이다. 덕분에 심장이 콩닥콩닥 뛰면서 손바닥에 식은땀이 맺혔다.

내 몸에서 파이의 냄새가 나는 건가? 나는 잘 모르겠는데.

어깨에 코를 박고 킁킁거렸으나 내 코에는 익숙한 사과향 입욕제 냄새가 전부다. 그때 에이든이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설마… 음, 아니겠지. 무려 사천 년을, 남녀노소 불문하고 누구든 가까이 다가가기만 해도 치를 떨면서 질색했다던 블랙 드래곤 카르디옌이 설마, 치즈를 상대로 발정을……?”

그러나 나한테도 다 들릴 정도의 성량이었다.

아니 그보다 파이가 그 정도였어? 파이가 이성에게 관심이 없는 이유가 사천 년 동안 너무 많이 만나서 그러는 줄 알았거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고 파이의 눈치만 봤다. 파이는 에이든을 그냥 무시하기로 작정했나 보다. 그저 아무것도 못 들은 척, 옆에 없는 척 그쪽에는 눈길도 주지 않는다. 오로지 나만 보인다는 식으로 내 머리카락을 귀 뒤로 꽂아 넘겨주며 생글생글 웃기만 했다.

곧 땡, 하는 종소리가 들려오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허전하던 식탁이 음식으로 가득 채워졌다.

“우와! 오! 치즈파이다!”

달착지근하면서도 뜨끈뜨끈한 향기를 흠뻑 머금은 크림치즈파이가 접시 한가득 크게 담긴 채다. 그 옆에는 각종 빵과 꿀, 생크림, 딸기잼이 옹기종기 놓여있었다. 그리고 역시 내가 좋아하는 딸기 주스도 함께.

그 장면에 군침을 삼키자 배에서 꼬르륵, 배꼽시계가 길게 울려 퍼졌다. 파이랑 단 둘만 있으면 모르겠는데 손님이 와계신 자리라 민망함에 뺨을 붉혔다. 그 사이에 파이가 작게 웃으면서 식탁의자에 앉아 나를 제 오른쪽 허벅지 위에 앉혀두었다. 그러면서 마력을 이용해 둥그런 크림치즈파이를 조각조각 잘라내 한 조각을 내 앞 접시에 옮겨놓는다.

“자. 아, 해.”

파이가 직접 포크를 들어서 콕 찍어 내 입에 쏙 넣어준다. 어차피 나는 이불에 몸이 돌돌 말려있어서 손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아니, 화장실이 먼저라고. 그러다가도 배가 고프니까 주는 대로 꼭꼭 씹어서 먹기는 하지만.

“오, 그거 맛있겠다. 나도 좀 먹을…….”

펑!

에이든이 크림치즈파이를 향해 손을 뻗자마자 갑자기 작은 폭발음이 울려서 깜짝 놀랐다. 동시에 해저만큼이나 깊고 낮게 가라앉아서 무시무시한 파이의 음성이 귀에 푹푹 꽂혀왔다.

“손대지 마라. 쓰레기에게 줄 음식 따위 없어. 당장 꺼지라고 했다.”

“치사하네, 정말. 네가 지금 나한테 그렇게 나오면 곤란하지, 카르디옌. 우리는 계약관계로 맺어진 사이라는 걸 망각하면 어쩌나? 자꾸 내 성질 건드리면 확, 다 소문내버린다?”

헉! 둘이 친구 관계가 아니라 갑을관계였어? 에이든이 저만큼 건방지게 유세를 떠는 거 보면 정말 말도 안 되게 파이가 을인 것 같은데?

의외의 사실을 알게 된 나는 입에 머금은 크림치즈파이를 오물오물 씹으면서 눈동자만 데구루루 굴렸다.

아아, 체하겠어. 이런 무거운 분위기라니. 이럴 때는 혼자 있고 싶으니까 다 나가줘!

“너야말로. 일부러 결계를 건드린 이유가 뭐냐, 에이든? 고작 그딴 말이나 꺼내려고 여기까지 몸소 행차할 정도로 한가하던가?”

“레어가 비어있어서. 외출이라도 했나 싶어 불러내려고 그랬지. 행여 어디 가서 포악한 성정을 이기지 못하고 무고한 인간을 괴롭히고 있나 싶었거든.”

무고한 인간? 여기요! 여기 있습니다! 제가 바로 그 무고한 인간이랍니다! 여기 시도 때도 없이 발정하는 드래곤 좀 말려주세요!

“웃기는군. 고작 그런 이유로? 할 말 있으면 제대로 하고 제국으로 돌아가. 사천 년 만에 얻은 즐거움을 방해하지 말고.”

“즐거움? 뭔데? 그런 건 혼자 즐기지 말고 같이 공유하지 그래?”

“꺼져. 손대면 죽인다.”

씨근덕거리는 파이의 목소리에 진짜 살기가 담겨있어서 나까지 움찔 떨었다. 그러나 파이가 다시 포크로 조각난 크림치즈파이를 찍어서 내 입에 넣어준 뒤에 딸기 주스까지 먹여주었다. 마치 언제 화를 냈었냐는 듯 부드러운 미소를 입가에 띄운 채 말이다.

“맛있어? 저번처럼 꿀을 넣으라고 했다. 부족하면 따로 꿀을 찍어줄게.”

“으응, 괜찮아요. 이것도 달아.”

“주스는 어때? 얼음 대신 딸기를 설탕에 절여서 얼려놓은 거라고 했으니까 입맛엔 맞을 거다. 녹아서 싱거워지는 거 싫어했잖아.”

“딱 좋아요.”

여전히 내 입맛을 잘 아는 파이다. 그래서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크게 두 번 끄덕여주고 다시 턱을 열심히 움직여 꼭꼭 씹어 먹었다.

요즘 이렇게 살뜰히 챙겨주니까, 파이와 애틋한 부부사이가 되면 이런 느낌일까 싶다. 예전에는 무조건 건강식으로만 먹어야 한다고 맛없는 것만 잔뜩 먹여주었는데. 이러다가 진짜 모든 음식에 꿀을 넣어서 줄 것 같은 느낌이다.

물론 나는 좋지만.

입안 가득했던 음식물을 목구멍으로 꼴깍 넘겼다. 그러자 파이가 다시 내 입에 부드러운 다른 빵에 생크림을 찍어서 넣어준다.

“오호? 설마 했는데… 내 예상이 진짜였나? 이런, 이런. 드래곤이 인간을… 으음, 정말 큰일이야. 참, 난감하네.”

그때 뒤에서 에이든의 음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나는 얼굴을 확 붉히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오물오물 거렸다. 파이는 신경에 거슬린다는 듯 얼굴을 확 구기면서 뾰족한 송곳니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좋은 말로 할 때 꺼지라고 했다, 에이든…….”

“아니, 뭐 다른 것보다 그냥 좀 아쉬워서. 네 놈이 치즈의 수발을 전부 들어주면서 보살필 때부터 짐작은 했지만. 생각 외로 진도가 빠르네.”

바로 꼬리를 내리는 에이든이 입맛을 다시며 모른척 눈동자를 굴린다. 그러더니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댄 채로 아쉽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에이든은 파이랑 싸우면 이기지는 못하는 것 같긴 하다. 십 년 전에도 파이가 방심한 틈을 타 공격했는데도 심각한 부상을 당한 쪽은 에이든이었으니까.

아무튼 에이든이 백기를 든다는 듯 두 손바닥을 들어 올린다. 그러자 그렇게 경계의 날을 세우던 파이도 아까보다 확 누그러져서 평온한 기운을 흘려보냈다.

아, 다행스럽게도 체하진 않을 것 같다. 그래서 나는 기분 좋게 크림치즈파이의 달콤하면서도 시큼한 맛을 음미했다. 그 행복한 맛의 향연에 콧노래를 가볍게 흥얼거렸다.

맛있어! 달아! 최고야!

그렇게 한참을 내가 음식 먹는 소리만 들리던 식당에 파이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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