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
그러자 또 커다란 입욕제 통이 둥실둥실 다가와 뚜껑이 열리고 욕조 위로 벌꿀향의 액체를 쪼르륵 부었다. 동시에 입욕제가 내려앉은 수면 아래로 작은 소용돌이가 만들어진다. 마치 생크림이 잔뜩 생성되는 것처럼 새하얀 거품들이 수면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우와……!’
평소 내 앞에서 마력을 잘 사용하지 않던 그다. 혹시나 내가 자기처럼 마력을 가진 줄 알고 착각할까 봐 쓰지 않았다고. 사천 년의 세월 동안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서 쉽게 살았을 텐데. 그런 그가 나를 위해 20년간 귀찮아도 직접 몸을 움직였다는 뜻이지. 그렇게 생각하면 또 조금 기특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파이. 이 타월도 마력으로 움직일 수 있지 않아요? 굳이 손을 이용해서 힘들게 씻겨주는 것보다는.”
“정신력을 소비하는 것보다 몸이 고달픈 게 나아.”
“마력을 쓰면 정신이 고달파요?”
“…비슷해.”
조금 뜸을 들이면서 대충 얼버무리는 걸 보니 거짓말 같은데?
“알았어요. 뭐 그렇다면……. 어서 씻겨줘요. 손가락이 벌써 쪼글쪼글해지기 시작했어.”
내가 하고 싶지만 나는 몸이 아픈 병자니까 움직일 수 없어. 라는 표정을 담아 그를 빤히 쳐다봤다. 그러자 내 손에 쥔 타월을 받아들고 턱 아래부터 꼼꼼히 구석구석 닦으면서 내려갔다. 울적하긴 해도 일단 목욕을 마친 뒤에 뒷일을 생각해보도록 하자.
거품을 잔뜩 펴 발라서 둥글게 마사지를 하듯 뽀득뽀득 씻겨주는 시원함에 몸이 나른해졌다. 더위에 푹 퍼져있는 동물처럼 늘어져 있으니 잠이 오려고 한다.
“치즈. 졸면 안 돼.”
“안 졸아요.”
졸릴 뿐이지. 입이 쩍 벌어지도록 하품을 하자 눈물이 찔끔 나서 눈꺼풀이 살짝 젖었다. 그러자 그가 섬세하게 쇄골을 닦던 타월을 겨드랑이로 쑥 집어넣는다. 그 바람에 또 활어처럼 파닥파닥 거리면서 몸을 비틀었다.
“꺄하! 간지러워!”
첨벙첨벙 발장구를 치다가 욕조 턱에 정강이가 세게 부딪혀서 찌릿찌릿했다. 덕분에 또 눈물을 찔끔 흘렸다.
“괜찮아? 잠은 제대로 깼겠군.”
도대체가 위로하는 건지 비웃는 건지. 그가 애매한 웃음을 뱉어내면서 내 정강이를 손으로 문질러줬다. 일부러 이렇게 간지러움을 태운 건 처음이라서 그저 어이가 없을 뿐이다.
그래도 두피마사지는 아주 마음에 쏙 드니까 이번엔 그냥 넘어가주겠다.
평소보다 더 오랜 시간 공들여서 목욕을 마치고 나오자 그나마 살 것 같았다. 특히 이번 마사지는 두 눈이 또랑또랑해지고 정신이 확 들 정도로 굉장히 좋았다. 이번에는 목과 어깨까지 풀어줘서 그런가?
물론 그런다고 기분이 퍽 좋아지지는 않았지만.
“셔벗 먹을래요.”
자기는 마력으로 세척과 건조를 1초 만에 끝내버린 파이가 순식간에 옷을 차려입고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전용 수건으로 몸을 감싸고 테이블 의자에 앉아, 미리 준비된 달콤한 레몬셔벗을 티스푼으로 떠먹었다. 산뜻하고 시원한 맛이라 정신이 개운해지는 기분이다.
한껏 늘어져있던 찰나에 활력이 돌아 기분이 좋아졌다. 그 사이에 파이가 내 머리카락을 틀어 올린 채 싸매고 있던 작은 수건을 풀어냈다. 그리고 새 수건을 가져와 젖은 머리를 꾹꾹 누르고 비벼서 말려줬다.
“딸기셔벗보다는 레몬셔벗을 더 좋아하는 것 같은데, 그게 더 맛있어?”
“둘 다 좋은데 딸기는 역시 잠자기 전에 먹어야 좋고, 레몬은 아침에 먹는 게 좋아요.”
“그럼 나는 언제 먹는 게 좋지?”
나는 작은 숟가락을 입에 머금은 채 그대로 멈추고 두 눈을 끔뻑거렸다.
뭘 얘기하는 거지? 파이가 셔벗 먹는 거 한 번도 못 봤는데? 혹시 셔벗이 먹고 싶은가?
“파이도 셔벗 먹어보고 결정해요.”
“아니. 그거 말고 나 말이다. 치즈 네가 내 것을 맛있게 먹고 싶은 시간을 물어본 건데?”
“파, 파이… 거라면…….”
두 눈이 빙글빙글 돌았다. 그리고 얼굴이 또 화끈 달아올라 손바닥으로 뜨거워진 뺨을 감쌌다.
연애상대가 되어 주겠다는 게 이런 뜻이었나. 이런 야한 농담도 주고받는 아주 가까운 사이가 되겠다는 것? 서로의 쾌락만을 추구하자는 그런 뜻?
조금 전 욕실에서 씻겨 주는 사이에도 몇 번이나 당황했는지 모른다. 그의 다리 사이에 매달린 남근이 단단하게 세워진 채 덜렁거려서. 그 물건을 보려고 하지 않아도 마주 보고 있으니까 피할 수가 없어서 입이 바짝 마르곤 했었다. 모르는 척, 안본 척하느라 힘들었는데.
욕조에 앉아있을 때도 자꾸 껄떡거리는 살덩이가 내게 닿아 민망해 죽는 줄 알았다. 하지만 파이의 얼굴은 조금도 변하질 않았다. 오히려 내가 반응을 보이면 나만 이상한 사람이 되는 것 같아서 꾹 참았다.
그런데 아까부터 왜 나한테 자기께 맛있냐는 둥, 맛있게 먹고 싶은 시간이 언제냐는 둥. 이런 민망한 말들로 나를 곤란하게 하는 이유가 뭐람?
오물오물 숟가락을 쪽쪽 빨면서 무슨 대답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고민을 했다.
“내가 그렇게 어려운 질문을 던졌나?”
젖은 머리카락 사이사이에 옅은 바람을 집어넣어 말려주던 파이가 피식 웃었다. 어딘지 모르게 질척거리는 느낌의 목소리였다. 그게 심장이 쫄깃해질 정도로 야하게 들려와서 괜히 고개가 아래로 수그러들었다.
“대, 대답하기 난감한 질문… 이랄까요?”
“나는 언제라도 치즈 네게 먹히고 싶은데. 어디에서나, 언제라도, 시간과 관계없이, 매일매일.”
이, 이 남자가 정말?
손으로 머리카락을 만지면서 고개를 앞으로 숙여와 귓가에 대고 나직하게 속삭인다. 그게 또 막 유혹하는 느낌이라 몸이 훅 달아오르고 얼굴에 피가 쏠려서 터질 것 같았다.
“누, 누, 누구 마음대로?”
“내 마음이 그렇다는 거지. 물론 선택은 치즈가 하는 거니까.”
부드럽게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는 길쭉한 손가락이 귀를 스치고 지나간다. 어째 일부러 이러는 것 같기도 하다. 귀에 닿는 손길에 흠칫 놀라 어깨를 살짝 움츠리는데도 아랑곳 하지 않는 걸 보니. 묶지도 않을 머리카락을 자꾸 뒤로 그러모으는 것도 수상하다. 간간히 뒷목을 스치는 것도 그렇고.
그게 평소 느끼는 간지러운 자극이 아니라는 것쯤은 나도 안다. 자꾸 허벅지 안쪽 근육이 짜릿하게 꿈틀거리고 다리 사이가 묘하게 간질거리는 느낌. 손가락과 발가락이 꿈틀거리면서 절로 오그라들며 힘이 바짝 들어가 버렸다. 뽀송뽀송했던 속옷이 약간 찝찝해지는 그런 이상한 기분이 그렇게 좋지는 않았다.
“으… 파이 잠깐만!”
그냥 무시하면서 가만히 있으려고 했는데 안 되겠다. 이러다가 뭔 사달이 날 것 같아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물론 갑자기 근육을 움직여서 허리가 찌릿한 통증에 휩싸여 그대로 얼어버리고 말았지만.
“머리 덜 말렸는데. 앉아있어.”
“돼, 됐어요! 그보다 나, 레이라를 좀 만나러 가고 싶어요!”
“레이라? 레이라……? 아. 그 아카데미 동기라던?”
“네.”
“왜지?”
“…보, 보고 싶으니까! 친구가 보고 싶어요! 내가 생일 지나고 찾아갈 거라고 미리 말해서 날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요.”
물론 가출에 성공했을 때의 이야기이긴 했지만. 이미 레어에 갇힌 이상 가출은 물 건너갔다. 하지만 그의 변덕스러운 마음이 언제 식어버릴지는 모르지. 만약 그렇게 된다면 굳이 그와의 인연을 이어갈 이유가 없으니까 그 전에 나 혼자서라도 살아갈 길을 다져놔야 한다. 파이에게 버림받기 전에, 내가 먼저 파이를 떠나야 하니까. 그래야 덜 상처를 받을 테니까.
“레이라가 선물도 준비해둔다고 했으니까 받으러 가야 한단 말이에요. 기껏 준비했는데 연락도 없이 증발하면 서운해할 지도 몰라요.”
“그래. 그럼 드레스를 준비해야겠군. 시간도 이르니 오늘 점심은 외식으로 하고, 우선 레이라의 저택에 방문한다는 연락도 해야 하니 여기서 잠깐 기다려라.”
그런데 생각보다 너무 가볍게 허락하는 파이가 내 이마에 입을 맞추고 바로 방을 빠져나갔다. 그래서 조금 어리둥절하기도 했다.
절대 나를 밖에 내보내지 않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간단히 외출을 시켜준다고?
녹아내리는 셔벗을 바닥까지 싹싹 긁어 다 먹고 나니 파이가 돌아왔다. 한쪽 팔에 엄청 화려한 연분홍색 드레스를 들고.
“그 드레스는 어디서 났어요?”
“네 신랑감을 찾으면 처음 대면할 때 입히려고 미리 준비해왔던 거다.”
진짜 날 시집보낼 생각이 있긴 하구나. 어쩐지 가슴이 시려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꾹 참았다. 그냥 한눈에 봐도 치맛단이 평소 입는 드레스들과는 확실히 달랐다. 아카데미에서 매년 학년 말 졸업파티 겸 진행하던 무도회 때 입었던 드레스만큼 화려하다고 할까?
물론 나는 그 무도회에 딱 한번 참석해봤다.
보통 아카데미에서 인기 많은 여학생의 경우, 남자 선배들의 파트너로 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나도 매년 참석할 기회는 있었다. 하지만 1학년 때는 아카데미로 출퇴근을 하던 때라서 참석하지 못했다. 파이가 늦은 밤에 진행하는 행사를 허락하지 않아서 어쩔 수 없었다.
그것도 당시 학생회장이었던 리브엘이 나한테 파트너 신청을 했었는데. 사정을 말하니 엄청나게 아쉬워하긴 했었다.
그리고 2학년 때는 모든 준비를 완벽하게 해놓고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랬건만 내 파트너였던 선배가 갑자기 본국으로 귀국해야 하는 일이 벌어졌다. 덕분에 눈물을 머금고 홀로 기숙사에 처박혀있기만 했다.
그래서 마지막 3학년 때만 참석할 수 있었다. 하도 많은 남자가 파트너 신청을 해와서 그중에 하나를 대충 골랐다. 그랬더니 그때 파트너 얼굴도 기억나지 않아. 그 파트너가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던 데다가 말주변도 없어서 입을 다물고 있었거든. 처음부터 끝까지 얼굴이 새빨갰던 것만 기억한다.
그 이외에는 그냥 재미있게 놀았던 기억밖에 없다. 무알코올 주스를 먹고 혼자 분위기에 취해서 드레스에 주스를 쏟았던 것 같기도 하고.
“드레스가… 굉장히 예쁘네요.”
나는 씁쓰름한 기분을 최대한 숨기려고 노력하면서 밝게 대답하려고 애를 썼다. 가까이에서 자세히 보니까 진짜 고위귀족들이 거금을 들여 만든 무도회용 드레스와 비슷했다. 그때 내가 입은 드레스도 만만치 않게 화려했지만.
그래서 아마 다들 나를 더 수상한 눈빛으로 쳐다본 걸지도 모른다. 평소 나한테 캐묻지 않던 레이라도 그때만큼은 내 숨겨진 신분을 궁금해 했다.
[설마 내가 너한테 반말을 했다고 목이 뎅강 잘릴 만큼의 위치에 있는 건 아니겠지? 나중에라도 모욕죄로 막 소리소문없이 끌려가는 거 아니야?]
라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웃으면서 얘기했을 정도였으니까. 아무튼 그때 그 드레스보다 더 풍성해서 속에 무거운 패티코트를 입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게다가 하늘하늘 가벼워 보이고 반짝반짝한 가루가 흩뿌려져 눈이 부실 정도.
“언제 준비한 거예요? 최신 디자인인데?”
“졸업파티 드레스 제작할 때 한 벌 더 주문했지. 생일만 지나면 바로 시집을 보낼 생각이었으니까.”
정말, 얄미워서 저 괘씸한 파이를 몇 대 때려주고 싶은 마음을 겨우 꾹꾹 눌렀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하룻밤 자달라고 괜히 말했네요. 흥.”
침대 가장자리에 풀썩 주저앉아 치맛자락을 들썩거리면서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자 테이블을 정리하던 파이가 우뚝 멈추고 고개를 돌려 나를 빤히 쳐다본다.
“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