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랑 한 번만 해요, 그거-26화 (26/132)

♬  #26

“왜지?”

“내가 다른 남자한테 시집을 갔어야 아쉬운 걸 알았겠죠. 그랬다면 다시 시집간 나를 되찾으러 왔을지도 모를 일 아니겠어요? 없어져봐야 소중함을 안다고.”

“뭐?”

“그랬으면 내가 또 아주 그냥 보기 좋게 뻥! 차버렸을 텐데. 후회해봐야 늦었다고 으름장도 놓았을 걸요?”

“아니. 그대로 시집보내 버렸으면 미련 없이 등 돌렸을 거다.”

…하여간 저 나쁜 남자 같으니! 정말 정이 똑 떨어지지, 아주!

속이 타서 먼저 죽어버릴 것 같은 건 늘 내 쪽이다. 기분이 확 나빠져서 애꿎은 드레스 치맛자락을 파이의 머리카락이라 생각하고 꾸깃꾸깃 말아 쥐었다.

“그래도 장기적으로 봤을 때 내게 하룻밤을 제안해줘서 심히 고마울 따름이야. 나 역시 덕분에 생전 처음으로 연애라는 것을 해보게 되겠군. 은근 기대가 돼.”

달콤하게 들리는 그의 목소리에 주먹을 말아 쥐던 손에 힘을 풀어 구겨진 드레스를 손바닥으로 슥슥 펴줬다. 괜히 수줍어져서 얼굴이 빨개지는 건 덤.

겨우 그 말 한마디에 이렇게 녹아내리다니. 분명 굉장히 기분 나빠야 할 말이긴 한데 화를 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내가 그를 정말 좋아하고 있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하아, 정말 내가 너무 한심하다.

“알면 나한테 잘해요. 파이는 나한테 진짜 잘해줘야 해! 내가 바로 위대한 드래곤과 연애를 해주는 유일한 인간이란 말이죠.”

“서로 돕는 사이라고 하지.”

“그, 그렇다고 오해는 하지 마요. 이 연애의 끝은 내게 달려있다는 사실도 명심해요!”

“알았다. 우선 드레스부터 입어야지. 마차를 타려면 밖으로 나가야 하니까.”

꽁해있는 나를 부드럽게 타일러서 빠르고 익숙하게 속옷들을 갖춰 입히고 드레스까지 챙겨 입혀주었다. 정말 놀랄 정도로 가볍고 산뜻한 드레스의 무게에 또 감탄했다. 치렁치렁한 패티코트를 입지 않아도 되어서 날아갈 것 같았다.

이 정도면 온종일 드레스를 입고 있어도 피곤하지 않겠네.

머리도 빗어내려 단정하게 가라앉혔지만 내 머리는 워낙 구불구불하기도 했다. 그게 또 자연스러워서 따로 꾸미지 않아도 괜찮을 정도였다. 그래서 그냥 예쁜 핀을 양쪽으로 꼽기만 해도 봐줄만 했다.

“알아보니 레이라의 저택이 꽤 멀리 떨어진 왕국이더군.”

“응. 그… 파이가 삐쩍 말랐다던 학생회장하고 같은 왕국에 산다고 했어요. 거기는 아카데미에서도 조금 먼 곳이라고 했으니까.”

단장을 마치고 난 뒤, 요리조리 움직이다가 빙글빙글 돌면서 사라락 퍼지는 드레스를 구경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아직 남아있는 근육통이 욱신거리기는 했지만 참을 만했다.

“우선 연통을 보냈으니 답신을 받아오는데 시간이 조금 걸릴 거다. 이르면 오늘 정오에 오겠군.”

“빨리 왔으면 좋겠다.”

“레이라에게 줄 답례선물도 구매해야지.”

“앗! 그렇네요? 나 너무 받을 생각만 했어! 뭘 사지? 레이라가 뭘 좋아하더라?”

나는 손뼉을 짝 마주치며 무슨 선물을 사야 할지 고민을 했다. 잔뜩 들뜬 머리를 굴리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걸 지켜만 보고 있던 파이가 피식 웃으면서 내게 다가와 뒤에서 내 허리를 감싸 밀착해왔다. 순간 또 흠칫 놀라서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나는 치즈 안에 묻히고 싶어. 그게 내가 가지고 싶은 선물인데.”

정수리에 입을 맞춰오면서 속삭이듯 중얼거려 뜨거운 숨결이 두피에 내려앉아 소름이 돋아났다. 어깨를 바짝 움츠리고 몸을 바르르 떨자 그가 큭큭 웃으며 더 진득하게 밀착을 해온다.

과연 이것이 연애놀이의 연기란 말인가? 도저히 연기로 보이지가 않는데. 마치 작정하고 나를 유혹하려는 것 같아서 괜히 심장이 콩닥콩닥 뛰어댔다.

이상하게 아까부터 틈만 나면 이렇게 달라붙는 것이 낯설어 죽겠다. 예전에 내가 이렇게 들러붙긴 했지만, 그때는 순수한 마음으로 정말 그냥 그가 좋아서 그랬다. 그의 품에 안겨있는 것이 행복해서 그랬던 건데. 파이는 수상하다. 나만큼 순수하지 못한 느낌이 너무 강했다. 특히 하체를 밀착해서 내 등허리 아래쪽으로 꾹꾹 눌리는 그것의 정체를 나는 알지.

그래서 얼굴이 또 화끈거렸으나 나는 모르는 척 목을 가다듬고 바짝 마른 입술을 혀로 핥았다.

“파, 파이는 생일도 없다면서요. 생일도 없는데 생일 선물 같은 게 필요할 리가 없…….”

“오늘이 내 생일이야.”

“…나한테는 생일 없다고 했잖아요?”

“오늘 생겼어.”

원래 이런 유치한 남자였어?

꼭 말 안 듣는 다섯 살 꼬마아이처럼 떼를 쓰는 파이의 새로운 모습에 할 말을 잃어버렸다. 게다가 등 뒤에 밀착된 묵직한 살덩이가 꿈틀거려 움찔 놀랐다. 그 사이에 농염한 손길로 드레스 위를 살살 문지르던 그의 손이 서서히 가슴으로 올라왔다. 그러더니 가슴을 한손에 가득 감싸 쥐어 뺨에 솜털이 오스스 돋아났다.

“파이. 그… 빠, 빨리 외출을 해야 서, 선물을 사죠! 이, 이것 좀 놓고!”

또 아까처럼 속옷이 눅눅해지는 기분이 들어 재빨리 그의 손을 밀치고 그의 품에서 빠져 왔다. 다행히 파이가 손에 힘을 풀어줘서 벗어나긴 했는데… 아무래도 뭔가 잘못되었다. 이상해도 너무 이상해! 사람이 변해도 너무 변했어!

“어서… 흠흠, 어서 가요. 이러다 늦겠어.”

“점심을 먹으려면 시간이 좀 많이 남았는데. 먹고 싶은 것이 있나? 아니면 네가 좋아하던 소시지 핫도그나 에그 베네딕트 어때?”

“그래요. 소시지 핫도그가 좋겠어요.”

뭐든 나쁠 거는 없다. 맛있는 건 진리니까. 특히 그가 말한 음식 종류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들이라 늘 밖에 나가면 꼭 하나씩 맛을 보고 돌아오곤 했었다.

아무튼, 우선 여길 빠져나가야겠어. 자꾸 파이가 이상한 분위기를 만들어서 머리가 빙글빙글 도는 기분이었다. 밖에 나가면 적어도 여기보단 안전할 거야.

내 옆에 그가 나란히 서서 단단한 근육질의 팔로 내 어깨를 조심히 감싸 안았다.

“바로 이동할 테니 눈 감아.”

레어에서 바깥으로 이동할 때는 늘 이렇게 이동마력을 사용했었다. 이게 생각보다 심하게 어지러워서 가끔 멀미하기도 했다. 그래서 파이가 그 이후로 꼭 내 눈을 감게 했었다.

속이 불편해지는 멀미를 겪는 건 싫어!

나는 그의 말에 따라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한 손으로 그의 옷깃을 답삭 잡아채서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었다. 순간 기묘한 바람이 온몸을 스치고 지나가는 감각을 느끼면서 더 눈을 꽉 감았다.

“이제 됐어요?”

“고개 들어봐.”

아직 멀었나 싶어서 눈을 감은 채로 바들바들 떨리는 목을 움직여 얼굴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내 턱을 손끝으로 가볍게 잡아 위로 더 들어 올리는 감촉에 놀라서 두 눈을 번쩍 떴다.

설마?

그러나 이미 파이의 입술이 내 입술 위로 지그시 내려앉은 뒤였다. 말랑한 입술이 가볍게 닿았다가 쪽, 하고 떨어져나간다. 덕분에 내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라 잘 익은 토마토처럼 변해버리고 말았다.

나를 내려다보는 파이의 얼굴에 또 잔잔한 미소가 번져서 심장이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뽀뽀할 때는 눈을 감아야지.”

게다가 비웃듯 타박까지 하는 그가 얄미워서 콧등을 확 구기고 콧방귀를 뀌었다.

“자, 자기 마음대로 기습이나 하고. 정말 못됐어!”

“왜? 네가 좋아하는 뽀뽀잖아. 그렇게 해달라고 매달리더니 이제 마음이 바뀌었나? 싫었어?”

“…시… 싫은 건 아니지만…….”

“이제 자주 해줄 테니까 기분 풀어. 또 해줄까?”

아주 잠깐 갈등했다. 전에도 파이가 먼저 뽀뽀를 해주진 않았다. 늘 내가 먼저 입술을 들이밀어야 마지못해 해주곤 했다. 그런 그가 기껏 해주겠다는데 받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아주 잠깐 고민했다.

아니지. 이 연애놀음에 깜빡 속아 넘어가면 곤란해.

“흥. 됐거든요?”

아주 약간 남아있는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파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아쉬워하는 기색이 하나 없어 보여서 괜히 싱숭생숭해진다.

문득 들꽃의 진한 향을 가득 품고 다가오는 봄바람이 뜨거워진 뺨을 스치고 지나간다. 여기가 레어를 벗어난 야외라는 걸 깨닫기 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는 적당히 건조한 공기가 흐르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익숙한 곳. 여기에서 조금만 걸어가면 바로 레어와 가장 가까이 있다는 프리센 왕국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다.

“이 드레스 입고 걷자니 분위기가 너무 안 어울리는데.”

하고 말을 채 다 꺼내기도 전에 갑자기 말 한 필이 나타났다.

“어? 릴리잖아?”

익숙한 회색 갈기와 다갈색의 커다란 눈동자. 깨끗한 얼굴의 한가운데 별 모양 문양이 자리 잡은 것까지 확인하고 보니 확실히 릴리다.

나는 두 눈을 둥그렇게 뜨고 릴리의 턱을 쓰다듬으면서 반가움에 미소지었다. 그러다가 릴리가 나를 놓고 도망갔던 기억이 떠올라 표정을 확 굳히고 정색했다.

“잘 만났네, 릴리? 우리 할 얘기가 있었지? 너만 살면 나는 상관없다는 듯 도망을 갔으니까 나한테 변명할 일이 필요할 텐데? 그렇지?”

눈을 가늘게 뜨면서 나직하게 협박하자 릴리가 뒷걸음질을 치려고 한다. 그래서 고삐를 단단히 쥐고 씨익 웃었다.

어딜 빠져나가려고? 이 귀여운 것.

“파이. 릴리는 팔지 않았나 봐요?”

“요즘 말고기가 맛있다더군. 그래서 비싼 값에 팔려고 잠시 보류 중이야.”

“어머? 그럼 우리 릴리 식용으로 잡아먹히는 거예요? 우리 릴리 어떡하지? 응? 이러다가 사람들한테 냠냠 씹혀서 뱃속으로 들어가 버리겠어!”

내가 호들갑을 떨면서 오두방정을 떨자, 릴리도 투레질을 하면서 발을 동동 굴렀다.

흥, 그러니까 나한테 잘해야지. 주인을 잘 모셔야 너도 평안하게 지낼 수 있는 거란다.

“우선 어서 올라타라. 날씨가 제법 춥군.”

이제 막 겨울이 물러난 터라 바람이 쌀쌀하긴 했다. 그래서 파이가 내 전용 망토를 꺼내 내 어깨에 둘러주었다. 그리고 나를 번쩍 들어 말 위에 올라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옆 안장이라 불편해. 중심 잡기가 조금 어렵기도 하고 허리가 비틀려져서 마음에 안 들지만 어쩔 수 없다.

내가 안장의 손잡이를 꼭 잡아 쥐는 걸 확인한 파이가 고삐를 바짝 말아 쥐었다. 그리고 릴리에게 작게 속삭였다.

“떨어지지 않게 움직임에 신경 써라, 릴리. 마지막 기회다.”

나직하게 경고하는 파이의 목소리에 릴리의 몸이 바짝 굳어지는 게 느껴진다.

오, 역시 같은 짐승이라 통하는 건가?

그리고 조심조심 걷기 시작한 릴리의 등 위는 생각보다 많이 흔들리진 않았다. 속도가 느려서인 것 같다.

곧 왕국 수도로 들어가는 성문을 지나쳐 안으로 들어왔다. 줄지어 출입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지나친 파이가 왕궁 기사들에게 작은 패를 보여주었다. 그러자 그 자리에 있던 기사들이 표정을 바짝 굳힌 채 다급히 허리가 직각이 되도록 숙였다. 깍듯이 예를 갖추는 기사들을 뒤로하고 우리는 유유히 그 자리를 벗어났다.

이럴 때 보면 파이가 이 왕국에서 대체 무슨 직위로 있는지 궁금해진다. 몇 번 물어봐도 대답해주지 않았었는데… 속는 셈 치고 한번 물어볼까?

“파이.”

“응?”

“진짜 여기 왕국에서 파이의 정체가 뭐예요? 방금 보여준 게 뭔데 기사들이 저렇게 파이만 보면 무서워서 벌벌 떨어?”

“프리센 왕국이 소속되어있는 제국에서 특별히 만들어준 자유 출입증이다. 어느 왕국이든 검문 없이 지나갈 수 있도록 해달라고 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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