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
“이 정도면 된 것 같아요.”
수증기가 제법 걷히고 거품이 가득 생성된 수면이 찰랑찰랑 움직이는 게 눈에 보였다. 그곳에 발끝을 포옥 넣어 휘휘 저으며 온도를 가늠했다. 그리고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자, 파이가 나를 욕조 안에 조심히 앉혀주었다.
조금 뜨거운 것 같긴 한데 시간이 지나면 점점 식을 테니까 이 정도는 괜찮겠어. 따끈따끈한 물이 부드럽게 피부를 감싸는 느낌을 받으면서 기분 좋은 숨을 길게 내뿜었다. 그때 갑자기 격렬하게 출렁거리는 물살이 내 피부를 찰싹찰싹 때리면서 쑤욱 올라왔다.
“욕조를 바꿔야겠군. 너무 좁아.”
뭔가 싶었더니 파이가 또 욕조 안으로 들어와 나를 마주 보고 앉는다. 덩치도 커다란 남자가 자그마한 욕조에 안착하자, 그 부피만큼 수면이 확 상승했다. 덕분에 아까운 물이 욕조 밖으로 줄줄 흘러넘쳤다.
나는 다시 무릎을 접어서 팔로 끌어안아 웅크린 자세를 하고 눈동자를 또르륵 굴렸다. 욕조를 바꾼다는 거 보니까 아무래도 이제부터 나랑 목욕도 같이하려나 보다. 그렇지만 난 이 욕조가 좋은데. 저 커다란 몸을 꾸깃꾸깃 접어서 좁은 욕조에 밀어 넣는 모양새가 참 웃기면서도 은근히 귀여워 보이고.
거품이 물살에 휘말려 절반쯤 빠져나가서 물속에 잠겨있던 오리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아이고, 언니가 미안해? 건져줄게. 자, 이리 와봐.”
뒤집어져서 거꾸로 둥둥 떠 있는 오리들을 하나씩 건져 물 위에 제대로 얹어주었다. 그 순간 파이가 내 앞으로 훅 다가와서 또 흠칫 놀랐다.
“왜, 왜요?”
“이리 와보라며.”
“…파이한테 오라고 한 거 아닌데?”
“나는 그렇게 들었는데. 이제 이 오리들 가지고 놀 시기는 지나지 않았나?”
말하면서 나와 제 앞을 가로막고 있던 노란 새끼 오리를 덥석 쥐어 뒤로 휙 던져버린다. 처음 보는 파이의 행동에 나는 기겁을 하면서 그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거야? 아기들이 다치면 어쩌려고!”
“안 다쳐.”
“물건이든 사람이든 동물이든! 뭐든 소중히 다뤄야 한다고요! 누가 과격한 드래곤 아니랄까봐, 정말 이럴 거예요?”
“내가 소중히 다뤄야 하는 건 너뿐이다.”
“…네?”
순간 머리회전이 잠시 멈춘 것 같았다. 꼭 낯선 나라에 떨어져 파이를 똑 닮은 낯선 남자를 만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무려 다른 사람도 아닌 파이 본인이 저런 말을 했다는 것 자체가 믿어지지 않았다. 그것도 그 소중히 다뤄야 하는 사람의 주체가 나라는 것도.
그러더니 내 얼굴만 한 크기의 커다란 손으로 내 뺨을 감싸 와서 더 깜짝 놀랐다. 그의 손끝이 귀를 스치고 지나가서 또 흠칫 어깨를 바짝 굳혔다.
“다 죽어가던 너의 어미가 내게 남긴 부탁으로 지금까지 너를 키워왔지만, 이제는 나를 위해 보호해야지. 마땅한 신랑감이 없어서 시집을 어찌 보내나 고민되는 건 여전하지만.”
한창 기분이 급격하게 상승하다가 뚝 떨어졌다. 다른 남자에게 나를 시집보낼 생각을 하고 있다는 말에 기분이 착잡해졌다. 저 마지막 말만 아니었어도 혹시나 그가 나와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닐지 기대감에 들떴었는데. 좋아하는 상대에게, 그것도 함께 몸을 섞은 사이임에도 조금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되어 실망스러워졌다.
“시, 신랑감 찾기는 했어요?”
“아카데미에 제법 많은 후계자가 있다고 들어서. 이놈 저놈 살펴봤는데 내 마음에 드는 놈은 단 한 놈도 없었다.”
사실 나도 파이를 좋아하는 만큼 눈길이 가는 사람은 없었다. 내 눈에도 안 보였는데 파이 눈에는 오죽했을까? 사천년이나 산 최고참 어른이자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짐승으로 불리는 드래곤인데. 햇병아리들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게 어찌 보면 당연한 거 아닌가 싶기도 하고. 이 남자하고 같이 살면서 다른 남자가 눈에 들어왔으면 5년간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매달리진 않았을 거다.
…흑, 내 팔자야.
“파이보다 괜찮은 사람은 꽤 많았던 것 같았는데.”
“괜찮은 사람?”
괜히 얄미워서 심술을 부리자 바로 반응을 보인다. 이틀 전의 그였으면 내가 하는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을 텐데.
나는 짐짓 아닌 척 표정을 갈무리하며 내 뺨을 감싸 쥔 그의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떼어내며 눈썹을 휙 들어올렸다.
“저 입학했을 때, 당시 학생회장이었던 리브엘 선배도 인기가 좋았거든요. 그리고 그 변태성벽을 가진 그 남자도 꽤 따르는 여학생들이 제법 되기도 했고요.”
“리브엘?”
“어… 혹시 기억나요? 입학한 그해에 막대과자 사겠다고 가게에서 만났던?”
“아. 손만 대도 다리가 부러질 것 같던 그 비실비실 꼬맹이? 하여간 인간들은 사람 보는 눈이 없는 것 같군. 힘도 못 쓸 것 같은 말라깽이가 뭐가 좋다고.”
…이게 파이의 본심인가? 파이가 누군가를 평가하는 건 또 처음 듣는다. 파이의 친구들이 레어에 놀러 왔을 때도 그냥 한마디 정도로만 평가했었는데.
[변태새끼.]
라든지,
[못생긴 놈.]
이라든가,
[타지도 않는 쓰레기.]
같은 평가 정도? 그러고 보니 여태껏 본 사람 중에서 파이가 좋게 평가한 남자를 본 적이 없다. 역시 자기 스스로가 너무 대단해서 다른 사람들이 자기 아래에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래도 여자는 그렇게 다정한 남자한테 끌린다고요. 나한테 잘해주면 좋은 거지, 뭐.”
나쁜 남자가 더 끌리긴 하지만 그렇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는 없다. 그 나쁜 남자의 대명사가 바로 파이였으니까.
“다정한 남자라면 나를 얘기하는 건가?”
그랬는데 이 남자가 지금 또 이런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를 꺼내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자기가 나한테 다정했던 적이 있었다고 생각하는 거야? 대체 어딜 봐서?
“…뻔뻔해도 너무 뻔뻔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뻔뻔하기로 치자면 내게 하룻밤을 제안한 사람 아닐까? 그리고 멋대로 도망을 쳐버린 쪽은 누구였더라?”
아까부터 투덜거리는데도 그는 그저 좋다고 실실 웃는다. 그러더니 슬금슬금 가까이 다가와서 나를 감싸 안아 저의 단단한 허벅지 위에 앉혀놓는다. 그리고 뜨거운 물을 손으로 가득 퍼서 내 어깨위에 주륵주륵 흘려보냈다.
뭔가 익숙하면서도 낯선 느낌이긴 하지만. 파이가 해주는 게 얄미워 보이기만 하는 건 어쩔 수가 없다.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예요?”
“뭐가?”
“갑자기 왜 이렇게 잘 해주냐고요.”
원래 사람이 한순간 변하면 죽을 때가 다가온 거라고. 아, 아니야. 재수 없는 생각은 하지 말자.
그보다 아까 설명도 듣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말과 앞으로도 끝날 일 없을 거라던 말의 의미를.
“아까 내 질문에 대답도 안 했어요. 궁금하니까 어서 말해 봐요.”
그러나 파이는 한참을 말없이 물속에서 흐트러져있는 내 머리카락을 가지고 손가락에 돌돌 말기만 한다. 아마 할 이야기를 정리하는 중일 거다. 그래서 나는 조용히 그가 입을 열 때까지 기다리며 수면 아래에 담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당분간…….”
“당분간?”
“너의 그 인간이기 때문에 생기는 호기심을 내가 대신 채워주려고 한다. 너를 온전히 맡겨도 되겠다는 놈이 나타나기 전까지, 가능한 너를 도와주려고.”
“…도와요? 나를? 뭘?”
“이성을 향한 욕정, 연애에 대한 갈망. 네게 사내가 필요하다면 내가 그 대신이 되어 주겠다는 뜻이지.”
혹시나 내가 잘못 이해하고 있나 싶어서 혼란스러워졌다. 그래서 그의 얼굴을 똑바로 올려다보며 진지하게 물었다.
“그러니까, 내 가짜 연애 상대라도 되어 주겠다는 거예요?”
“그런 셈이다.”
연애. 바라던 바다. 그와 연애를 하는 걸 오랫동안 꿈꿨으니까.
하지만 지금 저 말은 그저 내게 혼인할 남자가 생길 때까지만 남자친구 노릇을 해주겠다는 뜻이다. 어렸을 때 소꿉장난처럼 역할놀이를 하자는 거네. 그래서 그렇게 다정하게 굴었던 건가?
어쩐지 심란해진다. 연애 상대라니. 나와의 정사를 그렇게나 즐기던 사람이. 혼인도 아니고 진짜 연인이 되자는 것도 아니고. 겨우 내 호기심을 채워주기 위해, 그것도 혼인 상대가 나타나기 전까지 가짜 연애를 하자고?
모르겠다. 가짜든 진짜든 그와 연애할 수 있다는 것에 기뻐해야 하는 걸까? 27번이나 나를 뻥뻥 찼던 남자가, 결코 내 것이 될 수 없을 거라 여겼던 남자가 소꿉놀이처럼 내게 연애하는 척을 하자고 하는데. 마냥 기쁘지만 않은 이 복잡한 감정.
가장 중요한 건 지금이 그와 내가 며칠간 함께 밤을 보낸 이후라는 거다. 그렇다면, 나와의 정사가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는 뜻이다. 단지 내 몸이 좋아서. 그 정사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점점 속상해진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확실한 건, 그의 제안이 달갑지만은 않다는 거다. 마치 내가 필요할 때 가지고 노는 장난감이 된 기분이니까.
“파이.”
“응?”
“정말 지금까지 좋아했던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어요? 가슴을 울리는 그런 사랑 같은 거?”
“…없었던 것 같은데.”
참 할 말이 없다. 확실히 그가 나와는 다른 상식을 가진 별세계 사람이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저 자기만 좋으면 좋은 거라는 생각. 남이야 상처를 받든 말든, 심장이 부서지든 찢겨지든 저에게 피해가지 않으면 뭐든 상관없다는 마음.
가슴이 답답해진다. 아무리 봐도 그 역시 심장이 뛰는 사람인데. 그 사천년의 무료한 시간이 그를 이렇게 만들어놓은 걸까? 살아 숨 쉬는 바위처럼?
그 사이에 파이가 거품기 있는 손으로 내 어깨를 조심히 감싸서 문질러온다. 그 순간 다리 사이가 옴죽거려서 소름이 확 끼쳤다.
“왜 그러지?”
“하, 하지 마요. 윽!”
비눗기가 가득한 피부를 손바닥으로 문지르는 느낌은 솜털이 바짝바짝 곤두서는 것만큼 오싹하게 야릇했다. 방금까지 굉장히 울적하기만 했었는데. 내 몸은 왜 이렇게 솔직한 건지.
“내가 널 도와주겠다는 뜻인데. 나는 네가 기뻐할 줄 알았다. 그런데 반응이 참 요상하군.”
정말 그는 내 상식 밖의 사람이라는 걸 절실하게 깨닫는다. 내가 어떤 생각으로 가출을 결심했는데. 철벽처럼 깨지지도 무너지지도 않는 그의 매정한 모습에 심장이 몇 번이고 갈기갈기 찢어졌건만.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사람은 없다고 해서 언젠가는 내 진심을 이해해줄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포기하지 않고 고백했는데. 죽을 만큼 아파도 꾸역꾸역 참고 견뎌냈는데. 정말 하루하루가 힘겨워서 도저히 버틸 수 없어 마지막으로 하룻밤을 제안한 건데.
“…어서 씻겨줘요. 씻고 나갈래요.”
마음이 싱숭생숭. 갈팡질팡. 아주 조금은 그와의 관계를 조금이나마 진전시킬 수 있겠다는 생각에 벅찼다. 하지만 역시 상처다. 고백하다 차였을 때의 상처와는 다른 통증이었다.
파이가 여자의 몸만 좋아하는 그런 질 나쁜 남자였을 줄이야.
“파이. 곰돌이 타월 어디 있어요?”
나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면서 타월을 찾았다. 갑자기 뽀송뽀송하게 마른 곰돌이 타월이 어디선가 튀어나와 허공을 가로질러 날아왔다.
“입욕제 좀 더 뿌려줘요. 거품이 모자라요.”
나는 욕조의 수면 위에 안착한 타월을 손에 쥐고 물을 잔뜩 묻혀 조물조물 거품을 냈다. 그리고 일부러 더 까칠하게 명령처럼 그를 부려먹었다. 아까 파이가 욕조에 들어오는 바람에 거품이 절반 넘게 탈출해버린 터라 부족한 건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