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
그리고 내 어깨에 있는 짐을 재빨리 뺏어든다. 정말 큰일이다. 뭐라고 둘러대야 할지 모르겠어서 눈동자를 또르르 굴리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일단 침착한 표정을 유지한 채 내 애마인 릴리에게 걸어가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입을 열었다.
“외출 좀 하려고. 누구 좀 만나야 해서.”
“누구를요? 주인님과 함께 하지 않으시고요?”
“…아카데미 동기에게 빌린 것이 있었거든. 돌려주려고. 파이한테 허락받고 가는 거야. 파이는 일이 있어서 어디 갔다고 들었는데?”
“아, 그렇습니까? 그럼 제가 같이 가드리겠습니다.”
그럼 곤란하지. 릴리의 안장에 내 짐을 얹어두어 묶어주는 청년을 향해 나는 두 손을 재빨리 휘저으며 고개까지 휘휘 저었다.
“아니야. 그럴 필요 없어. 내 친구가 낯을 많이 가려서 누가 같이 오면 불편해할 거야.”
“그래도 어떻게 아가씨 혼자 마차도 아니고 말을 타고 가십니까? 그걸 주인님께서 허락하셨다는 것도 못 믿겠습니다만?”
“파이가 귀걸이 줬어. 방어마력이 담긴 귀걸이. 나 정말 괜찮아. 혼자 다녀올 수 있어.”
나는 꼭 누굴 대동하고 가셔야 한다는 청년의 부탁을 완곡히 거절하면서 말 위에 재빨리 올라탔다.
“정말 혼자 가시려고요? 전 좀 불안한데…….”
“괜찮아. 아직 시간이 이르기도 하고.”
“쩝. 알겠습니다. 극구 반대하시니 어쩔 수 없네요. 봄이라 도적떼가 슬슬 활동할 시기라 위험하니 더욱 더 조심하셔야 합니다.”
“걱정 고마워. 그럼… 다, 다녀올게.”
잘 있어. 라고 말하려다가 참았다. 그렇지 않아도 내가 혼자서만 밖에 나간다는 것을 불안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청년을 안심시켜주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 그리고 말고삐를 넘겨잡고 마구간을 나와 저택 앞에서 잠시 멈춰 섰다.
삼년간 내가 머물던 곳. 아마 평생 잊을 수 없을 거다. 한적한 숲속에 자리 잡은 이곳에서 파이와 쌓았던 추억은, 더더욱 기억에 오래 남겠지. 이제 다시는 그를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져 발걸음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나와 파이는 언젠가 헤어지게 될 운명이었으니까. 그게 조금 빨라진 것뿐이라고, 그러니까 미련 갖지 말자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이제 진짜 안녕이야, 파이.”
나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릴리의 등에 올라타 천천히 말을 몰았다. 넓은 저택의 정원을 지나자, 커다란 철문을 지키고 있던 하인이 놀란 표정으로 문을 열어주었다.
“어디 가십… 아가씨?!”
무심히 지나치는 나를 향해 하인이 크게 외쳤다. 그러나 나는 조금의 망설임 없이 그 저택을 빠져나왔다.
우선 수도로 가서 이 제국을 빠져나가 치치르자 왕국으로 가면 된다. 유일하게 아카데미에서 나를 지지해주던 레이라가 탈출에 성공하면 자기네 저택을 찾아오라고 했으니까. 가는 여정은 이미 레이라에게 배웠고, 지도를 달달 외우기도 했다.
우선 수도로 가자. 제국 수도에 세워진 아카데미 기숙사 뒤편에 오백년 산 고목나무가 있다. 그 아래 레이라와 함께 묻어놓은 지도를 찾아 다시 떠나면 될 것이다.
“릴리. 우리는 이제 자유야. 너도 갑갑했지? 이제 더 좋은 곳으로 갈 수 있어. 수도로 가면 맛있는 풀을 먹게 해줄게.”
고맙게도 내 말을 알아들었다는 듯 투레질을 한다. 나는 릴리의 회색 갈기를 쓰다듬다가 고삐를 단단히 쥐었다. 그리고 옆구리를 툭 치자 바람처럼 달리기 시작한다.
그래도 파이와 함께 말 타는 법을 배웠으니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가출은 생각도 못했을 거다. 파이는 승마도 위험하다며 가르쳐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 파이를 억지로 설득시켜 겨우겨우 배워놨던 건데.
…아니야. 벌써부터 파이를 그리워하면 안 돼. 스스로 떠나자고 마음먹은 거니까 자각 좀 하자, 치즈.
그렇게 한참을 길을 따라 달리는데… 그러다가 알게 되었다. 내가 길을 아예 모른다는 것을. 저택에서 아카데미까지 매번 마차를 타고 다녀서 한 번도 바깥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사실 매번 파이의 얼굴을 탐색하느라 주변 풍경을 눈여겨보지 않기도 했고.
“…워, 워!”
우선 신나게 달리던 릴리를 멈춰 세우고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우리 저택은 수도에서 한 시간이나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것도 완전 숲 속이라 엄청 외진 곳이고 주변은 정말 그냥 나무와 풀뿐이다. 그리고 나는 지금 세 갈래로 갈라진 길 앞에 멈춰 서서 머릿속이 멍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이건 생각도 못했다. 길이 하나만 나있는 줄 알았지? 이렇게 갈림길이 있을 줄이야.
“어, 어떡하지? 정말 큰일이네. 당장 지도도 없는데.”
이럴 때 필요한 건 역시 여자의 감이지. 나는 그 세 갈림길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오른쪽 끝 길에서 시선을 멈췄다.
좋아 이쪽이다. 그런데 릴리는 내 선택을 거부한다는 듯 투레질을 하며 뒷걸음을 쳤다.
“왜? 여기 아닌 것 같아?”
가래도 안 간다. 뭔가 기운이 좋지 않은가?
“그럼 어디로 갈래? 어디가 길인 것 같아? 어디로 가면 수도가 나올까? 너의 선택에 맡기마!”
그러자 릴리는 왼쪽 끝 길을 선택해 그곳으로 달렸다. 역시 릴리는 똑똑해. 내 말을 참 잘 이해하는 것 같단 말이지?
나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커다란 나무가 줄 지워 세워진 좁은 길을 달리면서 숲 공기를 마구 들이마셨다. 청명한 하늘에 푸르른 숲. 그리고 향기가 좋은 풀과 나무내음과 들꽃향기.
“음, 너무 좋아. 역시 나오길 잘했어!”
나는 애써 목소리를 밝게 꾸몄다. 안 그러면 불쑥불쑥 치고드는 파이의 생각을 멈출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랴!”
생각을 털어버리기 위해 릴리를 재촉했다. 그리고 오늘 안에 수도를 벗어나 다른 마을의 여관에 도착해야 한다. 그때 그동안 쌓아뒀던 울분을 마음껏 털어내며 펑펑 울어버릴 생각이다.
아직은 울면 안 돼.
다시 코끝이 찡해지는 느낌이라 코를 훌쩍거리면서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한참을 달렸다가 엉덩이가 너무 아파서 잠시 걷기도 했다. 달렸다가 쉬기를 반복하다보니 어느새 눈에 익은 장소가 시야에 들어왔다. 제대로 찾아왔나보다. 저 언덕 아래로 내려가면 수도가 분명하니까.
“아까 그 오른쪽 길로 갔었다면 큰일 날 뻔했다, 그치, 릴리? 역시 릴리는 대단해. 예뻐.”
긴 시간을 엉덩이 아파가며 온 보람이 있었다. 언덕 아래로 보이는 수도는 마치 장난감처럼 자그마했다. 그 익숙한 풍경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기분 좋게 웃으며 릴리의 옆구리를 발로 다시 찼다.
“…응?”
그런데 릴리가 직진을 하지 않고 갑자기 뒷걸음질을 친다. 그러더니 방향을 확 틀어서 왔던 길을 되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어? 릴리! 그쪽 아니야! 반대로 가야지! 야!”
하지만 내 외침이 들리지 않는다는 듯 릴리는 멈추지도 않고 달린다.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 말이다.
순간 뒤에서 들려오는 커다란 늑대의 하울링 소리에 소름이 오싹 돋아나 어깨를 바르르 떨었다. 고개를 돌려 우리를 쫒아 달려오는 늑대 무리들을 보고 기함을 질렀다.
맙소사! 이 야생늑대들은 다 뭐야?
훤한 대낮에 추격전이 펼쳐졌다. 릴리가 워낙 튼튼하고 발이 빠른 말이긴 해서 달리는 데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쫒아오는 야생늑대의 숫자가 너무 많다. 게다가 막 침까지 질질 흘리고 날카로운 이빨을 번뜩거리면서 달려들어 온 몸이 달달 떨려왔다.
저 이빨에 물리면 피가 엄청 나겠지? 막 내 몸을 고기 뜯듯 갈기갈기 찢겨버리면 나는 죽는 걸까? 아직 죽는 건 생각해보지 못했는데. 어, 어떡해?
“릴리! 조금만 더 힘내!”
나는 상체를 조금 더 확 낮춰서 릴리의 등에 찰싹 들러붙고 고삐 대신 목을 감싸 매달렸다. 매달리면 더 위험하다고는 했는데 바람의 저항을 덜 받게 하려면 이 자세가 나을 거다. 그리고 다리를 릴리의 몸통에 감아 떨어지지 않도록 달라붙었다.
무서워.
겁이 잔뜩 난 나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이를 악물었다. 가출한 첫날에 이 무슨 봉변인가 싶다.
이러다가 산에서 뼈만 남고 죽어버려서 아무도 모르는 거 아니야? 행여 파이까지 죽은 나를 못 찾아 줄까봐 있는 걱정 없는 걱정 다 하며 입술을 잘근 씹었다. 어느 순간 갑자기 릴리가 뜀박질을 멈추고는 거친 숨을 고르며 투레질을 뱉어냈다.
“릴리?”
얘가 죽으려고 작정했나 싶어서 눈을 뜨자마자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깊은 숲속. 키가 높은 나무들이 빼곡하게 들어찬 곳의 한 가운데에는 나와 릴리뿐이었다. 분명 훤한 대낮인데 그곳은 제법 어두운 저녁 같았다. 오래된 나무가 우거져 나뭇잎이 풍성한데다가 빛이 제대로 들어오지 않아서 더 그랬다.
우리를 잡아먹을 듯 달려들던 야생 늑대들은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다. 그 이유를 알게 된 것은 저 어둠 속에서 드러난 샛노란 눈빛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는 3년 전. 내가 아카데미에 다녀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나서 사람 하나 없는 이 숲속에 머물게 되었을 때. 파이에게서 들었던 경고를 다시금 떠올렸다.
[이 숲은 길들여지지 않은 사나운 맹수들이 제법 많이 서식하고 있어서 혼자 다니면 위험하다. 그리고 인간쯤은 간단히 한입에 삼키는 커다란 아나콘다의 영역이기도 하고.]
[아나콘다?]
[겨우 천년 묵은 꼬맹이 아나콘다라지만 인육을 매우 좋아한다고 하니 되도록 접근하지 않는 것이 좋다. 숲에 함부로 돌아다니지 마라.]
[움, 그래요?]
그 말을 마치 오늘 날씨에 대해서 설명하듯 단조롭게 말해서 여태까지 한 번도 다시 되새겨본 적 없었다. 숲을 혼자 다닌 적도 없었고 늘 파이가 나와 함께 다녔으니까.
“아나콘다…….”
내 목소리에 반응하듯 쉭, 쉭, 거리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질질 끌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바닥에 떨어진 나뭇가지들이 부러지는 소리도 들려와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천년 먹은 뱀. 뒷골이 찌릿찌릿 울릴 정도로 서늘한 분위기에 몸이 바들바들 떨려온다. 순간 숲이 전체적으로 더 짙은 어둠에 휩싸여버렸다.
“리, 릴리. 어서 도, 돌아가자. 응?”
느릿하게 다가오는 샛노란 두 개의 눈동자가 점점 더 가까워져 울상을 지어보였다. 그 모습을 얼음처럼 굳은 채로 보던 나는 달달 떨리는 손으로 고삐를 쥐고 흔들었다. 그러나 릴리는 그 자리에서 서성거리기만 할 뿐, 도망칠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
“왜이래? 이러다가 우리 둘 다 죽는다고. 응? 가자, 응? 릴리! 아이 정말, 왜 이러는 거야! 진짜?”
얘가 죽으려고 작정했나 싶어서 울상을 지어 보이면서 애걸복걸해도 듣질 않는다. 몰랐는데 릴리도 파이랑 똑같아! 하여간 못된 것만 배웠나 봐!
나는 다급히 말 등에서 폴짝 뛰어내리고 고삐를 쥐어 뒤로 끌어당겼다.
“빨리! 빨리 가자, 응? 제발 부탁이야, 릴리! 제발! 움직여!”
막 고삐를 당기면서 뒷걸음질을 치는데 릴리가 버티는 힘이 워낙 대단해서 끌려오질 않는다. 저 노란 눈동자는 점점 가까워지지, 릴리는 말을 듣지 않지, 뒤쪽에서는 늑대의 커다란 하울링 소리가 연신 들려오지. 거의 패닉에 빠진 상태로 그 자리에 얼어버린 나는 어깨를 축 내리고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아 버렸다.
나, 이대로 죽는 거야? 늑대는 아니지만, 저 천년 먹은 뱀에게 한입 꿀꺽 삼켜져 뼈도 남기지 않고 죽게 되는 걸까?
참았던 눈물이 펑펑 쏟아지기 시작해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고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