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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랑 한 번만 해요, 그거-11화 (11/132)

♬  #11

이럴 줄 알았으면 파이한테 한 번만 더 자달라고 그럴 걸 그랬어. 그리고 차라리 마구간지기의 말대로 마차를 이용해 나갔다가 거기에서 도망치는 게 더 나았을 것 같아. 이제 와 후회한다고 달라지는 것도 없지만. 이제 진짜 파이와 영영 이별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굉장히 서러워졌다.

“흐앙, 파이…….”

아까 마지막으로 얼굴이라도 볼 걸 그랬다. 그냥 얼굴에 철판 깔고 그와 죽을 때까지 함께 지낼 거라고 투정이라도 부려볼걸. 그럼 은근슬쩍 그곳에 평생 눌러살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다 보면 그하고 또 밤을 지낼 수 있는 기회가 생길지도 모르잖아.

하필이면 이런 순간에서도 떠오르는 사람이 파이뿐이다. 그래서 그가 더욱더 보고 싶어졌다. 마지막으로 파이를 한 번 더 보고 싶어…….

“그만 기어 나와. 치즈 기겁하는 거 안 보이나?”

순간 파이의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려와 흠칫 놀랐다. 너무 듣고 싶었던 나머지 환청을 듣는 건가?

그랬는데 또 기괴한 목소리가 그에 대답하듯 숲에 울려 퍼졌다.

「그럼 내 영역에서 데리고 꺼져. 누군 새끼 없어서 이거 서러워 살겠나.」

“주선해도 분위기 망치는 놈이 새끼 타령하기는. 적어도 암컷을 대하는 배려 정도는 길러야지. 하여간 수준 낮은 뱀 새끼.”

「어쭈, 이 드래곤 새끼가 지금 내 성질 돋우냐? 네 아이가 숲을 헤매는 것 같아 무사히 돌려보내려고 도와줬건만. 이 배은망덕한 드래곤 놈이 은혜를 원수로 알아? 한번 해보자는 거냐?」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싶다. 그나마 익숙한 파이의 목소리가 들려와 순간 안심이 되어 기운이 쭉 빠져 버렸다. 그러다가 갑자기 으르렁거리는 무시무시한 소리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번쩍 들었다.

“…으아아악! 괴물이다! 꺅!”

근처까지 나온 커다란 아나콘다가 붉은 혀를 날름거리면서 샛노란 눈동자를 번뜩거렸다. 정말 나를 한입에 꿀꺽 삼키고도 절대 티도 안 날 것 같은 크기의 뱀이었다.

나는 기겁을 하며 내 옆에 서 있던 파이에게 냅다 달려들어 안겨버렸다. 그러자 파이가 움찔거리면서 표정을 살짝 굳히더니 나를 한쪽 팔로 꽉 끌어안았다. 동시에 등 뒤에서 얼빠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인간 계집이 지금, 나한테 괴물이라고 한 거냐? 그래? 허어… 당장 내 영역에서 나가! 이 바퀴벌레 같은 놈들!」

“그렇지 않아도 갈 거다. 저택 또한 오늘 당장 처분할 테니 앞으로 영영 만날 일은 없을 거고. 앞으로 주선은 없다.”

「…하여간 쪼잔한 드래곤 같으니. 알았다. 잘 먹고 잘살아라. 에잇, 퉤!」

연신 혼자 중얼중얼 투덜대던 아나콘다가 점점 멀어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고 한참 뒤 숲은 다시 고요해졌다. 나도 점차 안정을 되찾아가는 심장 소리를 들으면서 안도의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물론… 이제부터가 제일 문제라는 것도 깨달았고 말이다. 아니, 그런데 파이가 여길 어떻게 알고 왔지?

“그래. 치즈. 혼자 숲을 돌아다니니 좋던가?”

그의 품에서 떨어져 나오기가 무서워 계속 붙어 있으면서 입술을 잘근 씹었다. 그랬는데 정수리에 그의 낮은 음성이 내려앉아 흠칫거리며 어깨를 움츠렸다. 소름이 돋아날 만큼 살벌한 목소리라서 더 그랬다. 정말 화가 많이 났다는 듯.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어… 어, 어떻게… 알았, 어요?”

내 목소리가 바들바들 떨려 나왔다. 작정하고 가출을 했는데 몇 시간도 되지 않아 걸려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더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도 없었단 말이다!

“다 아는 수가 있지. 나는… 치즈가 곰 인형으로 변하는 마법에 걸린 줄 알았다.”

나를 내려다보는 파이의 입가에 미소가 걸리긴 했는데 눈은 웃고 있질 않았다. 이십 년 동안 그를 봐왔지만 저런 표정은 처음 본다. 꼭, 덫에 걸린 토끼를 발견한 사냥꾼 같은 냉소였다.

“덕분에 무려 이십 년 만에 본체화 할 정도로 분노를 느꼈다고 하면……. 우리 치즈가 내 기분을 이해할 수 있을까?”

순간 어깨에 서늘한 기운이 내려앉아 어깨가 부르르 떨렸다. 그 사이에 릴리가 격한 투레질을 하면서 저 혼자 도망쳐버린다.

아니, 아까는 그렇게 가자고 해도 안가더니! 저 배신자가?

“어쨌든 무사하니 다행이다. 아무래도 인간들과 어울리게 한 것이 후회스러워. 이럴 줄 알았으면 허락하지 않았을 거다. 오늘부터 레어로 돌아가지.”

“악! 레어 싫어! 갑갑하단 말이에요!”

레어라고 불리는 드래곤의 둥지는 정말 미로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거기에서 몇 번이나 길을 잃고 헤맸는지 모른다. 물론 그때마다 파이가 구세주처럼 나타나 나를 다시 내 방으로 돌려보내 줬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신기하네. 내가 길을 잃은 그 장소를 무슨 수로 그렇게 귀신같이 잘 찾아온 걸까?

“네가 이 숲을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아서 당분간 더 머물게 하려고 했었다. 네가 원하는 만큼. 하지만…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너 스스로가 더 잘 알아라 믿는다.”

파이가 화나면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지금까지의 경험으로도 충분히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그의 노기가 단 한 번도 나를 향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지금, 식은땀이 줄줄 흐른다. 왜 파이 친구들이 그가 화나면 뒷걸음질을 쳤는지 이제야 좀 이해가 갔다.

내가 바보같이 잠자는 드래곤의 코털을 건드린 꼴이로구나.

“얌전히 따라와라. 치즈.”

낮은 목소리로 음산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그에게 저항할 수가 없었다. 흑, 이대로 또 레어에 갇혀 지내야 하는 거야? 그건 싫어! 싫다고!

파이의 레어는 저 지하 동굴 깊숙한 곳 안이어서 햇빛이 조금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 숨 막히는 공간에 오래 있다 보면 가끔 호흡곤란이 오기도 했다. 파이가 공기를 끊임없이 정화해주긴 했지만, 그것과는 별개다. 내가 하도 밖에 나가고 싶어 해서 파이가 매일 두 시간씩 나를 데리고 바깥 산책을 해주긴 했다. 하지만 겨우 그 정도로 만족할 내가 아니다.

그래서 나는 이 저택을 정말 마음에 들어 했다. 기숙사는 더 행복했다. 물론 파이를 볼 수 없어서 많이 아쉽기도 했지. 하지만 그 당시만 해도 하도 차여가지고 그를 보기 민망하던 시기이기도 했었고.

그런데 다시 그 레어로 돌아가겠다니! 이러다가 영영 햇빛도 못 보고 죽을까 봐 걱정이 된다.

“시, 싫어요.”

“싫다면 어쩔 생각이지? 지금 이곳을 너 혼자 벗어나면 근처에 굶주린 늑대들의 먹잇감이 될 거다. 그래도 가겠다는 건가?”

“레어로 돌아가느니 늑대에게 잡아먹히는 게 나아요!”

일부러 더 오기를 부렸다. 그러자 내게 한 발 더 다가온 파이가 나를 지그시 내려다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가까이에서 마주한 그의 눈빛에 전신의 떨림이 더 잦아졌다.

“지금, 내가 이렇게 신사적으로 굴 때, 얌전히 말 들어. 이 이상 내 화를 돋우면… 나도 내가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굉장히 다정한 목소리이긴 한데. 응. 목소리만 다정하다. 선홍색의 눈동자가 마치 얼음처럼 서늘하게 굳어버려 순간 냉기가 내 몸을 휘어 감는 것 같았다.

“손발이 묶인 채로 감금당하고 싶지 않으면, 내 말에 순응하도록 해. 이 모든 것이 다 너를 보호하기 위함이라는 것도 알아두고.”

내 뺨을 가볍게 매만지는 파이가 삐뚜름한 미소를 지어 보일 때, 나는 봤다. 가끔 그가 화나면 등장하던 뾰족한 송곳니가 그의 입술 사이로 삐죽 튀어나온 것을.

결국, 나는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다. 반항조차 꿈도 꾸지 못하고 잔뜩 주눅이 든 채, 파이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파이의 손에 의해 레어로 돌아가게 되었다.

* * *

방문 옆에 먹으라고 뒀던 빵을 담은 바구니가 그대로 있다. 손도 대지 않았는지 내가 놓은 그대로.

치즈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맛있는 음식을 먹지 못하는 것과 굶주린 상태라고 했다. 그만큼 먹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였다. 무엇보다 치즈는 군것질, 그중에서도 만들지 얼마 되지 않은 따끈한 빵을 좋아했다. 만들기가 무섭게 눈을 빛내며 족족 먹어치웠었는데.

그런데 먹지 않았다, 라?

똑똑.

“치즈. 치즈?”

방문 너머가 고요하다. 잠이 들어버린 건가?

나는 왼쪽 손등을 들어 새끼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내려다봤다. 아직은 본래의 하늘색을 유지하고 있는 작고 둥근 보석. 이것은 균형 감각이 보통 이하인 치즈를 위해 만들어 준 귀걸이와 같은 보석이다. 보호 마법이 걸려 있어서 착용자의 상태를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귀에 착용하고 있으면 보석 안에 든 마법이 발동하기 시작해 빛이 났다. 또한, 착용한 이의 기분에 따라 색이 변하기도 한다.

맑은 하늘색이 조금 칙칙한 회색빛과 함께 어우러지는 걸 보니 어딘가 울적한 것 같은데.

분명 지금 귀에 차고는 있긴 하다. 아무래도 전날의 일에 제법 충격을 받은 것 같다. 아침부터 상태가 영 좋지 않아 보이더니.

외출하다가도 걱정이 되어 다시 돌아와 버렸다. 뭐가 이렇게 불안한지. 마지막으로 식당에서 봤던 치즈의 표정이 뇌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사라져 버릴 듯 아련한 얼굴은 미련이 뚝뚝 떨어져 강을 이루고 있었다.

‘어제 무슨 문제가 있었나?’

처음엔 부끄러워서인 줄 알았다. 하지만 치즈는 내내 눈을 마주치지 않고 나를 피했었다. 거기에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꽤나 복잡한 생각에 잡힌 듯 말조차 없었다.

늘 재잘재잘 입을 쉬지 않고 수다를 떠는 건 치즈의 버릇이었다. 꿈을 꾼 내용이라든지, 창가에서 나비가 날아들어 왔다든지, 바닥이 미끄러워서 넘어질 뻔했다든지. 아주 사소한 내용도 늘 내게 말해주곤 했었다.

오늘처럼 조용하고 얌전히 있던 적이 없었다. 그게 불안해서 넌지시 말을 걸어봤지만 대꾸가 영 심상치 않긴 했다.

상처를 받은 건가? 어째서? 하룻밤을 보내면 포기하겠다고 한다는 뜻이 이런 거였나?

“치즈. 할 말이 있다. 들어가마.”

설마 혼자 울고 있나 싶어서 마음이 불편해진다.

어제의 관계는 내게도 꽤 충격적이었다. 그 작은 체구 안에 들어선 내 하체에 전해지는 감각조차 생경했다. 그 행위가 그렇게 나를 미치게 만들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또 내가 주는 쾌락에 취해 예쁜 목소리로 우는 치즈의 모습에 심장이 뻐근하게 조여들기까지 했다.

늘 안전하게 보호해줘야 한다고 스스로를 세뇌시켰다. 조금만 방심해도 넘어지고 쉽게 다쳐 상처가 나는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에.

무엇보다 우리 드래곤은 살아 움직이는 생물이라면 닥치는 대로 먹어치웠다. 그것이 인간이든 동물이든 가리지 않고 전부. 그래서 혹시라도 내가 치즈를 해칠까봐 걱정이 되기도 했다. 어린아이의 말랑하고 쫀득한 살을 보고 있으면 군침이 돌았던 게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물론 어제를 기점으로 아주 조금 남아 있던 치즈를 향한 식욕이 뚝 떨어지기는 했다. 대신 다른 의미로 치즈에 대한 욕구가 생겨버렸다.

너무 아쉬웠다. 매우. 많이. 아마 치즈가 중도에 힘들다고 칭얼거리지만 않았다면 더 했을 텐데. 하던 도중에 치즈가 기절하는 바람에 끝까지 가지 못한 것이 어찌나 아쉬운지. 그래서 깨어나길 기다렸다가 다시 밀어붙였지만 결국 또 사정하지 못했다. 마음 같아서는 식탁 위에 치즈를 벗겨놓고 범하고 싶었었다. 몇 번이고, 만족할 때까지.

하지만, 그렇게 매정하게 선을 그어버릴 줄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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