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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랑 한 번만 해요, 그거-9화 (9/132)

♬  #9

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물론 얼굴이 살짝 발개지는 것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그러자 파이의 붉은 눈동자가 살짝 흔들린다.

정말 그냥 미세하게 흔들렸을 뿐인데 내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워낙 저런 모습을 보여주지도 않을뿐더러, 내가 그의 반응 하나하나에 신경을 곤두세우던 것이 버릇이어서. 정말 진심 해로운 버릇이야.

“어제… 그래. 그랬지. 한번 자주면 귀찮게 하지 않고 나를 포기한다고 했었던가.”

순간 울컥 눈물이 새어나올 뻔했다. 내가 한 말이긴 했지만 그의 입으로 듣게 되니 심장이 무참하게 찢어져 피가 왈칵 새어나오는 기분이다.

입맛이 뚝 떨어진다. 그래서 나는 포크를 소리 없이 내려놓고 냅킨으로 입가를 정리하면서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네. 맞아요. 그랬어요. 왜요? 걱정돼요? 내가 또 생각 없이 달라붙을까봐?”

“…치즈.”

“걱정 마요. 난 내가 뱉은 말에 책임을 질줄 아는 사람이자 성인이에요. 어린애가 아니라고요.”

“이상하군. 갑자기 왜 그렇게 삐딱하게 구는 거냐. 나는 널 탓하려고 한 말이…….”

“잘 먹었어요. 아침이라 별로 입맛이 없네. 나머지는 이따가 점심에 먹을게요. 내 방에 늘 두던 곳에다가 두세요.”

이대로 있다가 진짜 추하게 울지도 몰라.

나는 다급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면서 속사포로, 그러나 아주 침착하게 조곤조곤 말을 꺼내고 몸을 돌려세웠다. 그랬는데 식당을 나서려는 순간, 날 따라온 파이가 내 손목을 덥석 잡아 당겼다.

“내 말 들어, 치즈. 내가 그 이야기를 꺼낸 건 너를 믿지 못해서가 아니다.”

“그럼요? 왜?”

행여 눈물이 비집고 나올까 눈을 부릅뜨며 그를 노려보자, 그가 상당히 당황하기 시작했다. 늘 부드러운 미소를 짓거나 감흥 하나 없는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그였다. 그랬던 사람이 당황해서 입술을 달싹거리니까 그게 또 심히 낯설다.

그래서 그런지 이제와 조금 무서워졌다. 저 입에서 ‘잘 알았으니 앞으로 네가 한 말을 꼭 지키도록 해라.’ 라는 말이 나올까봐.

그건 싫어. 그런 확답은 어제 들었으니 충분하다. 오늘마저 확인사살 당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오늘 떠날 거다. 기왕 가는 거 그와의 좋은 기억만 가지고 떠나고 싶다. 괜히 가슴에 상처를 더 얹고 싶지 않았다. 그동안 그의 얼굴은 열심히 내 눈에 새겼으니 됐어. 잊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잊으면 더 좋고. 그게 언제일지는 몰라도.

“할 말 생각나면 그때 해요. 나 좀 피곤해서 쉬고 싶거든요? 이따 저녁에 얘기해요. 그때까지는 내 방에 얼씬도 하지 말아요.”

다행히 목소리가 떨려 나오진 않았다. 그렇게 말하고 나니 내 손을 붙잡은 그가 천천히 손아귀의 힘을 풀었다.

그 틈에 나는 재빨리 그에게서 내 손목을 빼내고 식당 문을 활짝 열어 빠른 걸음으로 내 방에 도착했다. 그리고 쾅! 소리가 나도록 문을 닫고 그 방문에 등을 기대고 떨리는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의 손에 잡혔던 손목이 저릿저릿하다. 그렇게 다급히 내 손을 잡았던 적이 여태 한 번도 없었다. 길을 가다가 넘어지려던 것도 마력을 붙잡아서 나를 제 자리에 세워두는 게 전부였다. 늘 정중하게, 마치 나를 예쁜 도자기 인형 다루듯 섬세한 손길로 보듬어주기만 했었다.

파이 힘이 센 거야 잘 알고 있지. 맨손으로 단단한 자갈쯤은 우습게 부수는 사람이었으니까. 덕분에 하마터면 손목이 나갈 뻔했어. 정말이지 오늘따라 조심성하나 없네.

“이럴 때가 아니야.”

나는 그와의 추억을 곱씹던 머리를 휘휘 흔들고 나서 다급히 옷장으로 향했다. 이제부터 떠날 준비를 해야 한다. 이건 아카데미를 졸업하기 전부터 미리 계획하고 준비를 완벽하게 해둔 것이다. 우리 릴리가 부디 소리 없이 나를 따라주기만 하면 더 완벽할 텐데.

마구간에서 릴리를 꺼내오는 것이 제일 큰 문제다. 어차피 파이는 자기 방이나 서재에서 꼼짝 않고 있을 테니까.

똑똑.

“치즈.”

“헉!”

쾅!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나는 심장이 갈비뼈 밖으로 튀어나오는 기분을 느끼며 옷장 문을 열다가 황급히 닫았다.

“드, 들어오지 마!”

진짜 깜짝 놀랐다. 몰래 일을 꾸미는 만큼 긴장백배.

나는 혹시 몰라 다급히 방문 쪽으로 뛰어가서 문손잡이를 꽉 잡았다. 내 방문은 잠금장치가 없단 말이다. 그리고 지금 그를 마주하고 싶지 않아!

“알았다. 들어가진 않으마.”

한숨 섞인 목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와 또 심장이 욱신거렸다. 찌릿찌릿한 감각이 심장에서 퍼져 나와 온 몸을 간질거리게 했다.

목소리만 들은 건데도 자꾸 왜 이렇게 눈물이 나려고 하는 거야?

“구운 빵을 가져왔는데… 여기 놓고 가마. 굶지 말고 끼니는 챙겨라.”

“어, 어련히 알아서 챙겨 먹으려고? 별 걱정을 다하네요.”

“…잠시 다녀올 곳이 있어서 외출을 좀 하려고 한다. 혹시 나를 찾을까봐 미리 말해두고 가는 거다. 저녁식사 전에는 돌아오겠다. 귀걸이 꼭 차고 있어.”

아, 귀걸이. 맞다. 그거도 차고 가야지. 다치는 건 싫으니까.

“아, 알았으니까 다녀와요. 나 지금부터 쭉 잘 거니까 깨우지 마요. 알았지?”

뜻밖의 기회가 생겼다. 파이가 집에 머물지 않으면 일이 더 쉬워지지. 역시 신은 내 편인가 봐. 도망가라고 아예 길을 터주는걸 보면.

또 한편으로는 어차피 안 될 사이니 빨리 떨어져버리라는 것 같기도 하고. 떠나기로 마음먹은 것과는 상관없이 어딘지 씁쓸한 감정이 자꾸 덧입혀져 침울해졌다. 가슴이 텅 빈 것처럼 시리기도 하고.

“그래. 다녀와서 얘기하지. 쉬고 있어.”

“…응. 안녕.”

다녀오면 또 다른 내가 당신을 반겨줄 거야. 잘 있어요. 키워줘서 고마워요, 파이. 나중에 당신을 잊게 되면, 좋은 남자 만나서 혼인이라도 하게 되면 그때 소식을 전할게.

어차피 이곳에 있어도 이제 성인이니 다른 혼처를 찾아 시집을 보낼 것이다. 그럴 바에는 적어도 혼인 상대는 내가 결정할 거다.

방문 너머로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점점 멀어져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나는 멈췄던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리고 다시 옷장으로 후다닥 달려갔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옷장 깊숙한 곳에 보관하던 커다란 보따리를 두 손으로 낑낑 거리며 꺼냈다. 바닥에 놓고 재빨리 끈을 풀어 펼치자 갖가지 준비물들이 한가득 들어있었다.

우선 내 머리카락하고 똑같은 색의 가발과 내 얼굴크기만한 작은 곰 인형. 그 곰 인형에 가발을 씌워 침대 이불을 걷어내 베개 위에 놓고 가발 한 올 한 올 정리를 해 자연스러워 보이게끔 연출을 했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베개를 아래 세로로 길게 놓고 그 위에 이불을 덮어 살짝 구깃구깃하게 모양을 잡았다.

이정도면 되나? …나 이렇게 뚱뚱하지 않은데.

아무리 봐도 너무 부자연스러워서 다시 이불을 걷어내 베개 대신 옷장에서 드레스를 두벌 꺼냈다. 그리고 이리저리 뭉쳐 내 몸체를 만들고 이불을 덮자, 이번에는 그래도 좀 자연스럽다.

좋아. 이정도면 꽤 오래 속일 수 있을 거야.

손바닥을 탁탁 털고 만족스럽게 웃으면서 다시 보따리를 뒤적거렸다. 그 안에는 아카데미 시절 입었던 지정원복과 외출 시 두르는 망토, 그리고 학생신발까지 고이 모셔두었다. 졸업은 했으나 아카데미 학생이면 혜택이 꽤 많거든. 우선은 이 원복 하나가 당분간 나를 버티게 해줄 것이다.

나는 잠옷을 훌렁 벗고 주섬주섬 원복을 착의했다. 그리고 커다란 가방에 속옷과 잠옷하나, 그리고 갈아입을 원복 셔츠와 얇은 드레스 두벌을 곱게 개서 넣어두고… 아, 생리대도 챙기고. 아! 돈 주머니도!

몇 년간 쌓아둔 용돈도 탈탈 털고 파이가 사준 보석도 몇 개 주머니에 집어넣고 주둥이를 꽉 묶자 제법 묵직하다. 일할 곳은 정해져있으니까 그 전까지 요긴하게 쓸 수 있을 거다. 더 필요한 건 나가서 사면 돼.

이것저것 집어넣어 가방 하나를 가득 채우자 이번에는 단추가 잠겨 지지 않았다. 그래서 또 낑낑거리며 오두방정을 떨다가 짐을 억지로 꾹꾹 눌러 겨우 단추를 채울 수 있었다.

후, 땀나. 힘들어. 다했나? 또 뭐가 있더라……? 아! 귀걸이!

묵직한 가방을 방문 앞에 내려놓고 옷장 옆에 있는 책상으로 후다닥 달려갔다. 책상 위에 놓인 옅은 하늘색의 동그란 귀걸이. 귓불에다가 얹기만 해도 찰싹 달라붙는 이 귀걸이가 바로 파이가 만들어준 보호마력이 담긴 것이었다. 몇 번 사용하다가 제 마력이 다하면 저절로 부서지는 거지만 당분간은 꽤 쓸모가 있을 것이다.

나는 재빨리 양쪽 귀에 귀걸이를 착용한 뒤에 책상 위에 놓인 백지를 빤히 내려다봤다.

편지를 남겨야 하나? 아니야, 굳이 그럴 필요는 없어. 침대의 인형이 내가 아닌 걸 알면 내가 작정하고 가출한 걸 알 테지.

나는 고개를 휘휘 젓고 머리카락을 손으로 그러모아 그가 작년 생일 선물로 사다준 토끼모양 머리핀으로 고정했다.

자, 이제 준비가 끝났으니까 탈출을 시도해보자!

발뒤꿈치를 세워 쪼르르 방문으로 달려가 문틈사이에 귓구멍을 찰싹 붙이고 복도를 탐색했다. 발걸음 소리가 전혀 없는 걸 보니 현재 복도는 비어있는 것 같다.

나는 근처에 놓았던 가방을 낑낑거리며 들어서 넓적한 끈을 어깨에 걸쳤다. 그리고 소리 나지 않게 조심조심 방문을 열어 얼굴만 빼꼼 내밀었다.

밖은 아주 조용했다. 사용인들도 없고.

좋아. 지금이야!

두근거리는 심장을 다스리며 방에서 나와 복도 가장자리에 철썩 붙어 소리 없이 걸음을 옮겼다.

“흡?”

그러다가 복도 저 끝에 두 사람의 인영이 보여서 흠칫 놀랐다. 자세히 보니까 사용인 둘이 꽤 열정적으로 아주 진한 키스를 나누고 있었다.

아이고, 놀래라. 어머, 쟤들은 여기서 저렇게 불타오르고 있으면 어떡하자는 거야? 하려면 숨어서 해야지!

순간 다리 사이가 확 조여들어 허벅지가 움찔거린 건 비밀이다.

후, 정말 해로워, 해롭다고.

간밤의 기억이 또 물밀 듯 밀려와 얼굴이 뜨거워졌다. 쩝. 정말 낯 뜨거워서 못살겠네. 그래도 나한텐 다행이었다. 운이 따라주는 듯했다.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다시 복도를 나서서 계단을 내려갔다. 그러다가 지나가는 집사가 시야에 들어와 다시 숨을 흡! 들이마시고 반대쪽 벽에 숨었다.

아이고, 내 심장.

다른 사람은 몰라도 집사가 나를 발견하면 곤란하다. 나는 지금 방에 처박혀 자는 중이라고 알고 있을 테니 말이다.

집사의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확인한 뒤에 나는 다시 가방끈을 고쳐 맸다. 혹시라도 또 누가 나타날까 이리저리 눈치를 살피면서 아주 무사히 현관 앞에 도착했다. 관리를 잘해서 소리 없이 열리는 현관을 조심히 열고 바깥으로 나갔다.

오! 날씨도 매우 좋다. 해가 쨍쨍하고 구름이 많이 껴서 화창한 날씨다. 이제 막 봄이 오던 찰나라 바람이 조금 서늘하긴 했지만 빛이 워낙 따뜻하니 견딜 만했다.

다행히 저택 바깥에도 사용인들이 다니질 않아 고요하다. 나는 저택의 뒤쪽으로 최대한 발소리가 나지 않게 빨리 뛰어서 마구간으로 들어섰다.

“어? 아가씨 오랜만에 뵙네요?”

…망했네. 마구간지기를 잊고 있었어.

나를 향해 방긋 웃는 선량한 얼굴의 청년이 내게 반가움을 표하자마자 정말 아차 싶었다. 생각해보니 지금 말들 목욕하는 시간이긴 하다. 그 사실을 잠시 망각했다. 그리고 그 청년의 눈이 내 몸만큼 커다란 짐을 보고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내게 다가왔다.

“이런 짐을 왜 아가씨께서 들고 오십니까? 하인을 시키지 그러셨어요? 이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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