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돈 냄새가 난다니. 저 새끼는 알다가도 모르겠어."
"냅둬라. 하루 이틀이냐."
강민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는 야만인들이 저 멀리 보이는 두 개의 점을 향해 걸으며 이야기했다.
그들은 야만인이라고 하기에는 꽤나 고급스러운 장비들을 두르고 있었다.
날이 잘 갈린 검과 도끼.
윤택이 나는 갑옷.
그리고 영양상태도 나쁘지 않아 보이는 얼굴과 탄력 있는 몸매까지.
"하기야. 저 새끼 코에 귀신이라도 씐 건지 돈 냄새는 기가 막히게 맡으니까요."
"다들 닥치고 따라오기나 하쇼. 나 아니었으면 다들 어디 가서 늑대 밥이나 됐을 양반들이."
말 그대로다.
그들 무리는 북부 땅을 종횡하며 겁도 없이 북부에 발을 내디딘 모험가나 도망쳐 온 범죄자, 혹은 상인들을 약탈해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도무지 사람이라고는 보기 힘든 북부의 땅에서도 무리를 이끄는 야만인은 그들이 이르는 '돈 냄새'를 기가 막히게 맡아냈다.
다른 야만인들이 서로를 약탈하거나 간신히 짐승을 사냥하며 삶을 이어가는 것에 비해, 그들은 풍족한 삶을 이어가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세력을 형성하지 않는 건, 당연히 그들이 북부에서도 꽤 강한 축에 속했기 때문이다.
잘 먹고, 좋은 장비를 두르며 다른 집단과의 격차는 점점 더 벌어졌고.
그럴수록 그들은 더욱더 강해졌다.
늘상 굶고 삶이라는 싸움에 찌들어 있는 다른 이들에 비해서 몸과 마음에 여유가 넘쳤으니 말할 것도 없으리라.
그리고 야만인 무리는 점점 두 점.
아니, 두 사람과 가까워졌다.
그리고 두 사람과 가까워질수록 그들은 가장 앞선 야만인이 맡아낸 돈 냄새가 정확하다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이건 대언데?'
'때깔이 다르구먼.'
그들도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서 상대가 가진 돈의 액수를 파악할 수 있는 눈을 길러냈으니까.
그런 경험에 미루어 봤을 때, 저 두 남자는 많은 돈을 가지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내가 뭐랬수? 저것들 잡으면 앞으로 한참은 놀고먹을 수 있을 거라니까? 으헤헤헤!"
가장 앞에 선 야만인이 양손에 도끼를 꺼내 들었다.
"그래. 너 이 새끼. 내가 존나게 사랑하는 거 알지?"
"내가 더 사랑한다고. 까불지 마!"
"징그러운 소리들은 집어치우고 얼렁 저것들 조지고 술이나 퍼마시러 갑시다!"
"좋지, 좋아! 으하하하하!"
결국 야만인들 모두가 양손에 흉측한 무기들을 꺼내들었다.
손잡이 부분은 얼마나 많은 피를 묻힌 것인지 이미 붉게 물들어 있었다.
한눈에 봐도 저들의 손에 죽어간 사람의 수를 셀 수도 없을 것만 같았다.
"뭐야, 저거."
하지만 정작 그들 앞에 서 있는 남자, 강민은 태연했다.
무기를 꺼내지도, 겁을 먹거나 소리를 지르지도 않았다.
다만 입을 다물고 깊은 동자를 굴리며 야만인들의 면면을 살피고만 있을 뿐.
"가오 잡는 거 보게? 아니면 쫄아서 꼼짝도 못 하는 건가? 으하하하!"
그때였다.
묵묵히 지켜만 보던 강민의 입이 열렸다.
"아니군."
긴말은 없었다.
그저 아니군, 이라는 한 마디만 내뱉으며 강민의 손이 천천히 허리에 차 있는 검으로 향했다.
"뭐라는 거야?"
"아니라고? 뭐가 아니라는 거지?"
"몰라, X벌! 그냥 조져!"
야만인들이 강민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강민의 옆에 있던 몰른은 어느새 저 먼 곳에 떨어져 있었다.
그 순간.
철컥!
강민의 검이 검집에서 몸체를 드러냈다.
그리고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움직임과 함께 허공에 뽑혀든 강민의 검.
그의 검이 한 번 움직였다.
파직!
"……?!"
야만인들은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강민의 손에 들린 검은색의 검신 뒤에 붉은색 액체가 번져가고 있다는 사실만 어렴풋이 알 수 있었을 뿐.
다시 강민의 몸이 움직였다.
간결했고, 유연했으며 거침이 없었다.
파득!
또 한 번 허공에 튀어 오르는 붉은 액체가 칠흑 같은 검신 위에 뒤덮였다.
"어, 어어…?"
야만인 한 명이 자신의 몸통을 내려 봤다.
잘려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떨어져 내린다.
"이게 뭔…?"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도 못한 그는.
풀썩!
몸이 두 동강 난 채로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두 명의 야만인의 몸이 베어지는 데 걸린 시간은 1초도 채 되지 않았으니.
"뭐야! 뭐야아아아아!"
그제야 자신들의 동료 두 명의 숨이 끊어졌다는 사실을 알아챈 야만인들이 괴성을 내질렀다.
"이, 이 미친 새끼가아아아!"
만약 이성적인 판단이 가능했다면 진즉에 도망쳐야만 했다.
그들이 결코 어찌할 수 없다는 사실은 이미 자명해졌을 것인데도.
지금의 이 상황은 그들의 머리를 거쳐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기에는 너무 갑작스러웠다.
그들은 반사적으로, 혹은 본능적으로 강민을 향해 달려들었다.
불속으로 뛰어드는 불나방을 보는 것만 같았으니.
파직! 파득! 콰지이이익!
칠흑색의 검신이 허공을 휘저을 때마다 무언가 잘라지고, 쪼개진 채 바닥에 떨어졌다.
허공에 튀어 오른 붉은 액체는 어느새 아무것도 없던 얼음 벌판을 붉게 물들였다.
"커어억…."
쿠우웅!
결국 마지막 한 명의 야만인 역시도 작은 경련과 함께 고꾸라지고 말았다.
꿈(?)에 부풀어 있던 열 명의 야만인이 그들의 짧은 생을 마감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혹시 했는데, 아니었군.'
내가 찾고 있던 그 녀석들은 아닐까.
아니면 마법 명가의 실험체들은 아닐까.
잠시 그런 생각을 했었지만, 아니었다.
만약 그 둘 중 하나였다면 일이 훨씬 빠르게 진행되었을 텐데, 조금은 아쉽게 됐다.
'어쩔 수 없지.'
그렇다고 해서 소득이 없다고 할 수는 없었다.
이 녀석들의 짐 보따리 안에는 북쪽 땅에서 살아가기 위한 준비물들이 꽤 많이 비축되어 있었다.
고기와 몸의 추위를 녹일 수 있을 만한 약간의 술.
그리고 대장간에서는 구할 수 없었던 방한용품들까지.
'상태도 꽤 좋은데.'
이 정도 장비라면, 앞으로 더 빠르게 목적지를 향해 움직일 수 있으리라.
아무래도 평범한 야만인들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내가 알 바는 아니다.
나는 놈들이 가지고 있는 것들 중 쓸만한 물건들만 골라 꺼냈다.
그리고 몰른이 있는 방향을 돌아봤다.
"가자, 몰른."
배도 채웠고, 나름의 수확도 얻어냈으니 이제는 다시 발걸음을 재촉할 때다.
***
"그만 일어나라, 몰른."
"죽을 것 같아요오오…. 주인님 저를 버리고 가세요오…."
몰른은 침낭에 몸을 박아 넣은 채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처음 북부 땅에 발을 디딘 지 벌써 며칠째.
그동안 먹는 시간과 자는 시간만을 제외하고는 쉬지 않고 목적지를 향해 꾸준히 걸어왔고, 이제 내가 기억하는 그곳까지는 고작 몇 시간의 거리밖에는 남겨두지 않은 상태에 몰른이 결국 파업을 선언했다.
이걸 진짜 두고 갈 수도 없고.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모든 투정을 받아 줄 수는 없는 노릇이지.
나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고, 몰른을 뒤에 둔 채로 걷기 시작했다.
당연히 연기다.
솔직히 말해서 몰른은 지금 내게 꼭 필요한 존재기도 하다.
단순히 버프 때문만은 아니다.
전생에서 느끼지 못했던 동료에 대한 소중함을 일깨워 주기도 했다.
늘 혼자 드넓은 탑을 종횡해야 했고, 늘 혼자 싸우고 먹고, 자야 했던 내게 누군가가 옆에 있다는 감정을 느끼게 해준 인물이니까.
몰른이 사라진다고 해서 내가 나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할 이유는 없지만.
아마 나도 많이 심심하게 되지 않을까.
"그래. 혼자 잘살아 봐라. 그동안 고마웠다, 몰른."
내가 말한 순간.
"어, 어어어어!"
뒤쪽에서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같이 가요오오오오! 죄송해요! 제가 잘못했어요오오오!"
다급히 달려오는 몰른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하여간 미워할 수 없는 녀석이다.
그렇게 몰른은 내 옆까지 다가와서 자신의 침낭을 건넸다.
"조금만 가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다. 거기에 가면 따뜻하게 잠도 자고 맛있는 음식도 먹을 수 있을 거야. 조금만 참아라."
내 말에 몰른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다시 목적지를 향해 걷기 시작한 지 대략 4시간 정도가 지났을 무렵.
'보인다.'
저 먼 곳에 내가 찾던 그 장소가 눈에 들어왔다.
성이나 마을이 아니다.
그보다는 커다란 바위.
정확히 말하자면 커다란 바위로 둘러싸인 분지 지형이다.
'저 안에 그들이 살고 있다.'
얼핏 본다면 그저 평범한 바위산이라고 생각하고 지나치기 쉬운 풍경이다.
나 역시 전생에서 저곳에 사람이 산다고 생각하지 못했고, 그저 다른 이들의 습격을 피해 몸을 숨기려는 생각으로 걸음을 옮겼었지.
이 북쪽 땅에서 정착해서 살고 있는,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유일한 집단이다.
그리고 그만큼 외부인에 대해서 배척하는 경향이 큰 것도 사실이다.
'엄밀하게 따지자면 저들도 야만인들과 같은 계통이긴 하지.'
하지만 다른 야만인들과 똑같이 생각해서는 안 된다.
저들은 자신들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으며, 다른 야만인들과 똑같이 생각하는 것에 대해 크게 분노하곤 했다.
'그리고 그 점이 바로 저들의 환심을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지.'
만약 다른 이들이 저들을 처음 만난다면 야만인이라고 생각하고 경계하고 적개심을 품게 될 것이다.
그랬다가는 저들에게 호의를 받거나 임무를 받기는커녕 말도 붙이지 못하고 쫓겨날 게 뻔하다.
'사실 저기까지 찾아갈 플레이어가 얼마나 되겠냐마는.'
조금 더 걸어 나와 몰른은 커다란 바위산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바위산 근처를 돌기 시작했다.
입구를 찾기 위해서다.
'여기 이쯤 어디였는데.'
입구는 당연히 평범하게 알고 있는 문 따위가 아니다.
그보다는 작은 동굴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적절하리라.
그렇게 잠시 후.
'저기군.'
바위산 한쪽에 뚫려 있는 작은 동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여기부터가 진짜다.'
나는 초감각을 활용하여 동굴 내부를 살폈다.
그 내부에는 몇 명의 장정이 서 있었다.
내부로 들어가는 입구를 지키고 있는 이들이다.
'전생에선 여기부터 꽤나 고생했었지.'
저들이 누구인지, 어떤 습성을 가지고 있는지 전혀 몰랐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몰른. 이제부터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조용히 있어야 한다."
몰른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고.
저벅
동굴 안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무슨 소리 못 들었어?"
"무슨 소리?"
"발자국 소리였는데?"
그 안에서 내 걸음 소리를 알아챈 문지기들의 대화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나는 그들이 가장 좋아하던 단어를 떠올리며 어둠 속을 향해 한 걸음 더 내디뎠다.
저벅
발걸음 소리가 작은 동굴 벽에 부딪치며 메아리를 울렸고.
"누구야! 손들어!"
"무기를 내려놔라! 당장 거기에서 멈춰!"
문지기들이 나를 향해 자신들의 무기를 치켜들며 소리쳤다.
그들의 외침은 동굴 내부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이들의 외침은 순식간에 바위산 내부로 전해질 것이며.
쿵! 쿵! 쿵!
순식간에 저 먼 곳에서부터 일단의 무리가 다급히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손을 들어 올렸다.
싸울 의사가 없음을 나타낸 것이고.
"당신들의 소문은 잘 들어왔습니다. 초원의 일족이며 혹한의 어머니인 툰테른의 자식들이여."
순간 전신에 소름이 돋고 손가락과 발가락이 접혀 들어가는 것 같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저것을 보라.
"으으음?"
"아니, 그런 걸 어떻게 알고오…."
"허헛…."
괜시리 얼굴을 붉히는 툰테란 일족의 전사들 말이다.
'…두 번 다시는 못 해 먹을 일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