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아룬든에 도착했습니다요!"
아룬든에 도착한 순간, 마부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그 말대로 내 눈앞에는 아룬든이라는 북부의 작은 성의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당연히 전생에도 한번 와 본 적 있는 마을이다.
아룬든.
이곳은 마법사의 숲에서 북쪽 끝에 위치한 작은 성이다.
아룬든을 넘어 북쪽으로는 공식적으로 사람이 살고 있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정말로 사람이 살지 않는 것은 아니다.
말 그대로 '공식적'일 뿐.
이 북쪽에 살고 있는 이들의 대부분은 도망자, 혹은 사연이 있는 자들.
그렇지 않으면 날 때부터 북쪽 땅에서 나고 자란 흔히 야만인이라고 불리는 이들이다.
'그 녀석들도 야만인의 일종이었지.'
전생에서 내게 임무를 줬다던 집단을 말하는 것이다.
그들이 머무는 곳은 아룬든보다 더 북쪽으로 가야 했고, 이 드넓은 마법사의 숲을 떠돌고 떠돌던 나는 천신만고 끝에 그들을 만나 의뢰를 받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고생했다."
나는 마차에서 내려 마부에게 말했다.
마부는 마차에 실려 있던 짐들을 하나씩 꺼내기 시작했다.
"하하. 자리도 불편하셨을 텐데. 아무래도 사람을 태우는 것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하기 쉽지 않아 이 북쪽 땅을 오가며 물자를 수송하고 있습니다요."
묻지도 않은 말을 내뱉는 걸 보면 저 스스로도 조금은 찔렸던 모양이다.
나야 뭐 크게 신경 쓰지 않았지만.
"헤헤. 혹시 또 필요하면 불러주십시요!"
그렇게 말하며 마부와 나는 작별을 나눴다.
'우선 움직이기 전에 방한 용품을 조금 사야겠어.'
벌써부터 한기가 뼛속 깊이 파고들고 있었다.
내가 이럴 지경인데, 몰른의 상태는 말할 것도 없다.
"으어어어… 어으어어…."
몰른은 안색이 창백해진 채로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따라와, 몰른."
"예, 예에에에… 오으어으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모습으로 몰른은 간신히 내 뒤를 따랐다.
나는 몰른을 이끌고 아룬든 내부에 위치한 작은 공방에 도착했다.
"음? 모험가인가?"
대장장이가 나를 보며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방한용품을 좀 사고 싶은데."
"저쪽에 있으니 한번 둘러보시오."
대장장이가 구석 한켠을 가리키며 말했다.
'괜찮군.'
최북단에 위치한 아룬든인 만큼 다른 장비는 몰라도 방한용품에 있어서는 흠잡을 데가 없었다.
나는 대충 몸에 두를 만한 망토와 얼굴을 가릴 얼굴 가리개 정도만 골랐고, 옆에서 몰른은 껴입을 수 있을 만큼 잔뜩 집어 몸에 두르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대장장이에게 가서 골드 몇 개를 건넸다.
"잔돈은 됐다."
어차피 돈이야 넘쳐난다.
잔돈 받아봐야 보관하기만 귀찮다.
대장장이는 눈이 휘둥그레진 채로 골드를 챙겼고, 나는 몰른과 다시 대장간 밖으로 나왔다.
'자, 이제는.'
나는 북동쪽 방향을 바라봤다.
내 기억대로라면, 그들은 아룬든에서 북동쪽으로 걸어서 며칠을 꼬박 가야 할 만큼 먼 곳에 살고 있었고.
'꽤 힘든 길이 되겠군.'
춥기만 하다면 다행일 거다.
이 위로는 길도 제대로 나 있지 않을뿐더러 자는 것도, 먹는 것도 모든 것이 최악의 환경뿐이다.
게다가 저 위쪽을 떠도는 야만족이나 북쪽 땅으로 숨어든 범죄자들까지 생각해 본다면, 저 위로 가는 건 미친 짓이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겠지.
어느덧 나와 몰른은 북쪽의 성벽에 도착했다.
거기에는 경비병 두 명이 서 있었다.
그들은 나와 몰른을 훑어보고는 미간을 좁혔다.
"이 밖으로 나갈 생각이오? 웬만해서는 추천하지 않는데…. 모험가들도 이 북쪽으로는 나가길 꺼려하오."
"상관없다."
나는 그렇게 말하며 신분증을 꺼내들었다.
경비병은 그 와중에도 계속해서 말을 이어가고 있었고.
"허허. 젊은 사람이 목숨을 소중히 여겨야… 엉?"
신분증을 본 순간 경비병의 눈이 커졌다.
자신이 무언가 잘못 본 건 아닌지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내 신분증을 다시 살폈고.
"이럴 수가. 내가 큰 실례를 했군."
그러더니 황급히 성벽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
"설마 다이아 등급의 신분증을 내 눈으로 보게 될 줄이야."
문을 여는 도중에도 그런 말들을 중얼거리고 있는 경비병.
"이것 참. 내가 살다 살다 이 북쪽 땅에서 다이아 등급의 신분증을 보게 될 줄이야. 놀랍군. 정말 놀라워."
"시끄러워요오…."
몰른은 내 귀에 작게 속삭였다.
그리고 경비병과 눈이 마주치자 흠칫 놀라며 몸을 떨었다.
"됐소. 지나가도 좋소."
그렇게 나와 몰른은 아룬든을 벗어났고, 지금 우리 눈앞에는 황량하고 드넓은 얼음 벌판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하늘에서는 눈이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고된 길이 될 거다."
그렇게 말하며.
저벅
얼음 벌판 위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고된 길이 될 테지만, 이 끝에는 놈들이 기다리고 있어.'
박승균.
그리고 마법 명가의 잔당들.
놈들을 끝장낼 순간만을 고대하며 나는 계속해서 앞으로 걷고, 또 걸었다.
***
그 무렵, 탑에서는 다시 놀라운 소식에 플레이어들이 잔뜩 들떠 있는 상태였다.
"들었어? 검술 명가가 63층 돌파했대."
"역시 검술 명가다. 가슴이 웅장해진다. 이거 실화냐…."
"아무리 명가들이 죽 쑤고 있다고 해도 검술 명가는 검술 명가야. 근본이다, 근본이야."
"와아…. 미쳤다. 62층 돌파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63층이야? 이러다 진짜 곧 70층 뚫겠는데?"
플레이어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는 여지없이 검술 명가에 대한 감탄사가 끊이질 않았다.
거기에는 요새 검술 명가가 조용히 숨죽이고 있었다는 게 크게 제 몫을 한 것도 사실이다.
다른 명가들이 추한 모습을 보이며 모략과 정치질을 일삼고 있을 때, 오직 그들만은 탑의 등반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으니까.
덕분에 검술 명가에 대한 호감도는 더욱더 커져 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은 위드 길드 역시 이미 알고 있었다.
63층 돌파 소식이 세상에 알려지기도 전에 위드도 63층을 돌파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쏟아붓고 있던 중이었으니까.
"한발 늦었어요."
"어쩔 수 없었어. 우리가 정보를 가지고 있는 건 맞지만, 정보보다도 우리 실력이 부족했던 거니까."
위드 길드의 중역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로서는 아쉬울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63층을 돌파할 수 없었던 건, 클리어 방법을 몰라서가 아니었다.
말 그대로 다 된 밥을 눈앞에 두고서 실력이 부족해 검술 명가에게 넘겨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실망할 것 없다. 이번에 빼앗겼다고 해도 그다음 기회가 남아있어. 64층은 반드시 우리가 뚫어낸다. 다들 긴장해."
"물론이죠. 저는 지금도 긴장 빠싹하고 기다리고 있거든요?"
한동희가 히죽대며 말했다.
"야, 이 자식아. 이번에 너만 똑바로 했어도 우리가 63층 먹는 거였잖아!"
김민희가 소리쳤다.
"에이, 그게 왜 나 때문? 그건 아니죠!"
"그만. 누구의 잘못도 아니야. 다만 검술명가가 너무 뛰어났을 뿐이다."
"……."
박명철의 한마디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말했다시피 강민 씨는 이미 마법사의 숲에 진입했어. 이제 곧 여기까지 치고 올라 올 거야. 그 전까지 우리가 층 하나 정도는 더 돌파해 놔야 해. 그래야 면이 서지 않겠어?"
"하…."
"정말로…."
그 말에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탄성들.
"다들 조용히 해. 절대 이 사실을 밖에 알리면 안 돼. 강민 씨도 현재 자신의 존재를 숨기기 위해 노력 중이니까."
"알죠, 알아."
"명심하겠습니다."
길드원들은 진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부터 64층 돌파를 위해 우리의 전력을 쏟는다."
박명철이 말했다.
그는 사활을 걸 생각이다.
현재의 위드를 있게 만들어 준 강민에게 보답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또 한 편으로는 정말로 탑의 정상에 서고 싶다는, 한 길드의 수장으로서의 욕심으로.
'반드시 해 낼 거야.'
박명철은 다짐했다.
'지금은 화랑의 꼭두각시라는 말을 듣고 있는 중인 것도 사실이다. 나 역시 어느 정도 인정할 수밖에 없고. 하지만 언제까지 그렇게 있을 수는 없지.'
만약 이번에 위드 길드가 64층을 돌파하게 된다면, 화랑의 꼭두각시라느니.
낙하산 타고 내려와 랭킹 3위에 안착했다느니와 같은 말들은 탑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되리라.
"그럼 바로 움직이자."
박명철의 말에 길드의 중역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벌써 몇 시간 째 끝도 없는 벌판을 걷고 있었다.
풀도, 나무도, 생명체도 보이지 않는 허허벌판이다.
그럼에도 길을 잃지 않는 건, 역시나 전생의 경험 덕분이었다.
나침반 없이 방향을 잡는 법 정도는 이미 진즉에 익혀 놨으니까.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 속도야.'
한참 전부터 초감각을 활성화해 둔 상태였다.
그리고 역시나 초감각의 범위 내에 그 어떤 생명체의 움직임도 포착되지 않았다.
"잠시 쉬었다 가자."
나는 몰른을 바라보며 말했다.
몰른은 온몸에 방한용품을 두르고 난 뒤로 상태가 많이 괜찮아졌다.
그럼에도 내 말에 몰른이 눈을 번뜩였다.
나는 인벤토리에서 전투 식량 두 개를 꺼내 몰른에게 하나를 나눠줬다.
조금 더 움직일 여력은 있지만, 최대한 체력을 비축해 놔야 한다.
이 극한의 땅에서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측할 수 없으니까.
게다가 지금은 괜찮다고 생각할지라도 혹한의 추위에서는 저도 모르게 피로가 누적되기 마련이다.
앞으로 한참 동안은 제대로 씻지도, 자지도, 먹지도 못할 테니까.
몰른과 나는 전투 식량을 개봉하고 배를 채우기 시작했다.
꽤 고급스러운 전투식량이다.
탑의 저층에서 오직 배를 채우기 위한 목적으로 먹던 전투식량과는 퀄리티 면에서 차이가 컸다.
"맛있어요오오."
전투식량을 빠르게 먹어치우며 몰른이 말했다.
확실히 맛도 괜찮다.
얼음 벌판에서 이 정도 식사라면 충분한 호사다.
"밥을 먹고 바로 움직일 거야."
"알겠어요오!"
오래 앉아있을 수는 없다.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체온이 빠르게 내려갈 테니까.
물론 잠을 잘 때를 대비해서 침낭을 구비해 온 건 맞지만, 밥 먹을 때마다 침낭을 꺼내 두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게 나와 몰른이 전투식량을 거의 다 먹어가고 있을 무렵.
"……."
초감각이 닿는 범위 끝부분에서 작은 움직임이 포착됐다.
'뭐지?'
아직 섣부르게 판단할 수는 없다.
너무 먼 곳이라 동물인지, 사람인지 정확하게 파악되지는 않았다.
어쩌면 그냥 스쳐 지나갈 수도 있으니 나는 전투식량을 삼키며 초감각의 포착 능력에 조금 더 신경을 기울였다.
'다가오고 있다.'
의도된 것인지, 아니면 우연히 우리가 있는 방향으로 다가오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아직 육안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먼 곳에 떨어져 있었으니까.
'그래도 탁 트인 곳이라 곳 시야에 들어올 거야.'
나는 초감각이 경종을 알리는 방향을 바라봤다.
'인간이다.'
아직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초감각을 통해 파악할 수 있었다.
역시나 계속해서 이쪽 방향으로 다가오고 있었고.
'보이기 시작했어.'
저 땅끝에서부터 한 무리의 인간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나는 곧 그들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야만인들.'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는 건, 이 혹한의 땅에서 살아가는 야만인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