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하지만 역시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다.
잠시 들떠 보이던 그들은 금세 다시 경계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듣고 왔는지는 모르겠다만, 그런 입 발린 소리에 넘어갈 우리가 아니지."
"그럼. 하지만 첫인사치고는 나쁘지 않았어."
"조용히 해, 이 자식아!"
"크흠, 흠…."
한 편의 콩트를 보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다.
어느새 바위산 내부에 있던 병력들이 모두 이곳에 도착했다.
그 수는 이제 도합 서른에 가까워졌다.
물론 서른 명이라고 해서 내가 겁을 먹었다는 건 아니다.
그냥 그렇다는 사실을 언급한 것뿐이다.
'당연히 나도 저 한마디로 저 녀석들이 경계심을 풀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
"말해라. 어디에서 무슨 이야기를 듣고 온 거지? 혹시 마법사 놈들이 보낸 첩자인가?"
그때 누군가가 말했다.
마법사의 숲은 마법사들이 주류다.
그리고 이 땅에서 가장 숭상받는 학문과 기술은 모두 마법에 관련된 것들.
이방인인 플레이어들에게는 별 제약이 없지만, 이곳의 원주민들에게 마법적 재능이 없다는 건 큰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다.
그중에서도 마법은커녕 학문도 제대로 깨우치지 못하고 몸뚱이로만 맨땅에서 구르는 야만인들은 마법사들이 가장 혐오하는 족속 중 하나였다.
그 때문에 북부를 떠도는 야만인들은 마법사의 숲이라는 세계의 변방에서 떠돌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러니 이들이 마법사들을 경계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럴 리가. 나 역시 당신들만큼이나 마법을 쓰는 족속들을 경멸하고 있습니다."
"음…?"
그 말에 잠시 흔들리는 툰테른 일족들.
여기에서 조금 더 치고 나가야 한다.
"나도 알고 있습니다. 당신들이 내 말을 믿지 못한다는 걸 말입니다. 하지만…."
나는 품 안에 들어있던 다이아 등급의 신분증을 꺼내들었다.
다이아 등급의 신분증을 본 순간, 툰테른의 일족들이 흠칫 놀랐다.
저들 역시 다이아 등급의 신분증 정도는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을 테니까.
그리고 순식간에 적개심을 드러낸다.
신분증은 곧 마법사들이 발급해 준 증표.
저들은 마법사들을 혐오하는 존재이지 않던가.
당연히 그 사실을 알고서 꺼내든 것이다.
이 행동을 위해.
"가져가십시오. 내게는 필요 없습니다."
신분증을 툰테른들에게 건네며 말했다.
어차피 내게 저 신분증은 더 이상 필요가 없다.
이들에게서 적당한 임무를 받고, 마법 명가만 박살 내면 마법사의 숲에 더 머무를 일도 없다.
다른 플레이어들에게 다이아 등급의 신분증을 뽐낼 생각도, 마법사의 숲 여기저기에서 원주민들에게 호화로운 대접을 받을 생각도 없다.
"……?"
"이거 뭐지?"
"또라이거나, 아니면 정말로…."
역시 내 예상대로 다이아 등급의 신분증을 건네자 툰테른들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원한다면 내 손으로 이걸 없앨 수도 있습니다."
나는 두 손으로 신분증을 붙잡고 힘을 줬다.
신분증이 조금 휘어지기 시작했다.
"어, 어…?"
툰테른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만약 내가 가지고 있는 신분증이 아이언이나 브론즈.
혹은 실버, 잘 해봐야 골드였다면 저들도 저런 반응은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다이아다.
무려 최고 등급의 신분증이었고, 마북쪽 땅에 처박혀 살고 있는 툰테른들도 알아볼 정도의 가치를 지닌 신분증.
끼긱- 끼기기
신분증이 더욱더 휘어지며 곧 부러질 것처럼 괴상한 소리를 일으켰다.
'효과가 있다.'
시늉만이 아니라 정말 부러트릴 생각이다.
말했듯, 이제 내게는 필요가 없으니까.
그때.
"그만."
가장 앞에 있던 툰테른 한 명이 나를 멈춰 세웠다.
"우선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는데. 사실 미치지 않고서야 제 발로 여길 걸어 들어 올 놈이 얼마나 있겠으며. 게다가 모험가들이 목숨처럼 여기는 신분증을 스스로 박살 낼 미친놈은 많지 않을 텐데 말이다. 너희 생각은 어떻지?"
"맞습니다. 만약 마법사 놈들의 첩자라면 이렇게 제 발로 입구로 걸어 들어오지는 않았을 테죠. 아니, 사실 마법사 놈들이 우리에게 관심이나 있겠습니까, 첩자를 보낼 정도로…?"
"…그건 그렇지."
그의 말에 다른 툰테른들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는 그 말에 대해 마지막 한 마디를 날려줬다.
"이런 툰테른 일족을 두고 세상에 누가 야만인이라고 떠드는 것인지. 나는 정말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내 말에 툰테른들의 얼굴에 미약하게나마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
이들은 나를 바위산 내부의 중앙으로 이끌어 가고 있었다.
'크게 다르지 않군.'
바위산 내부의 풍경은 내가 전생에 봤던 그대로다.
아무래도 오랜 시간 폐쇄적인 환경에서 살아오고 있는 이들이었으니 변화의 속도도 느린 것이 당연하겠지.
바위산 내부의 분지는 꽤 커다랬다.
마을보다는 훨씬 큰 규모에 작은 도시라고 생각될 정도의 크기다.
이 정도 규모가 되니 마법사의 숲을 한 번에 클리어할 정도의 임무를 부여할 수도 있는 것이고 말이다.
그리고 저 앞에 커다란 막사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부족의 현자가 사는 곳이다.'
부족사회를 이루며 살고 있는 만큼, 그들은 가장 경험이 많고 나이가 많은 이들을 자신들의 정신적 지주로 삼고 있었다.
무력의 중심인 부족장과 함께 이들 툰테른이라는 집단을 이끌어가는 또 하나의 축이었다.
'그의 말이라면 툰테른들은 나를 신뢰하기 시작할 거다.'
일종의 통과 의례인 셈이다.
만약 부족장이 나를 적으로 간주한다면, 순식간에 툰테른들은 나를 향해 무기를 내밀게 될 것이다.
'그래서는 곤란하지.'
물론 이들이 다 내게 덤벼들어도 나는 일족 전체를 파괴할 정도의 힘을 기지고 있다.
내가 곤란하다는 건, 다치거나 죽을까, 라는 걱정 때문은 아니다.
'마법사의 숲을 프리패스나 다름없이 통과할 수 있는 기회를 날려버리는 셈이니까.'
물론 다이아 등급의 신분증이 있으면, 굳이 이 녀석들이 아니라도 임무를 받아내기는 어렵지 않을 테지만.
적어도 이 북부 땅에서 그런 의뢰를 받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동선이 낭비될 수밖에 없다는 말이지.'
최대한 이 북부에서 할 일을 끝마치고 빠르게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가야 한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게임에 진입하게 될 테지.'
현재 탑의 최정상인 60층대.
탑의 최전선에서 싸우고 있는 위드와 화랑, 그리고 명가들.
그 싸움에 내가 본격적으로 참여하기 위해서는 한시라도 빨리 마법사의 숲을 클리어해야 만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운이 좋으면….'
이번 마법 명가와의 싸움에서 새로운 능력을 또 포식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제 곧 내 레벨은 70이 될 것이고, 포식 슬롯이 새로 열리게 되리라고 예상하고 있는 중이니까.
'마법 명가의 능력을 포식할 수 있게 된다면 이제 검술 명가와의 싸움도 충분히 해볼 만하다.'
그러니까 이번 마법사의 숲이 나의 진로에 있어서 큰 변곡점 중 하나라는 뜻이다.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던 중.
"현자시여.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나를 이끌고 있던 툰테른 한 명이 커다란 막사를 향해 외쳤다.
"들어오라고 하십니다."
저 안에서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족의 현자를 옆에서 보필하는, 일종의 후계자다.
부족장의 자녀이며, 어릴 때부터 부족의 현자로부터 이런저런 교육을 받으며 부족장이 되기 위한 교육을 받는 셈이다.
'이게 다른 야만인들과의 차이지.'
무조건 힘만을 숭상하는 야만인들과는 달리, 이들은 문명과 학문에 대한 존중을 품고 있는 것이었다.
"따라오시오."
그때 툰테른 한 명이 나를 이끌고 막사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막사 내부 역시도 전생에서 봤던 풍경 그대로다.
"우선 장비를 모두 내려놓아야 할 것이오."
툰테른은 나를 보며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갑옷과 검, 그리고 공격 수단이 될 만한 모든 물건들을 장착 해제했다.
"당신도 함께 들어갈 거요?"
내가 장비를 벗고 있던 중, 툰테른이 몰른에게 물었다.
"그럼요오."
몰른은 그렇게 답하며 급히 자신이 가진 피리와 류트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몰른에게는 딱히 이렇다 할 공격 무기가 없었으니, 그것으로 끝이 났고.
나와 몰른은 부족의 현자가 앉아있는 중심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저벅, 저벅
부산스러웠던 밖과는 달리 막사 내부는 한없이 조용했다.
발자국 소리가 민망하게 느껴질 정도로.
현자는 전생의 현자와는 다른 사람이었다.
현자 옆에 앉아있는 앳된 청년은 현자의 귓가에 무언가 속삭였다.
현자는 눈이 안 보이는 모양이다.
소년의 말을 들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뿐이었다.
마침내 그의 앞에 다가간 나와 몰른은 천천히 무릎을 꿇고 앉았다.
현자가 눈을 뜨고 나를 바라봤다.
그의 동공은 초점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내 예상대로 앞을 보지 못하는 게 확실했다.
"강인한 전사로군."
현자가 말했다.
마치 나를 보고 있다는 듯이.
"육체뿐만이 아니라 마력 역시 고강하군. 마법사들에게도 버금갈 정도로 훌륭한 마력이야."
"……."
이 사람.
전생에 만났던 현자보다도 더욱더 신비로운 무언가가 느껴진다.
"많은 한이 느껴지는구나."
그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내게 어떤 질문도 쏟아내지 않았고, 보이지도 않는 눈으로 내 깊은 속을 꿰뚫어 보는 것만 같았다.
그러는 중에도 현자 옆의 소년과 나를 이끌고 왔던 툰테른은 나를 노려봤다.
당연히 그 뒤에도 많은 툰테른들이 서 있었고, 언제라도 나를 향해 공격을 쏟아낼 기세였다.
하지만 나는 태연하게 무릎을 꿇고 있을 뿐이다.
꿀릴 것이 없지 않은가.
그 이후로도 현자는 한참동안 내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속에 많은 증오가 담겨 있어. 무거운 외로움에 짓눌려 있구나."
솔직히 나도 놀랐다.
내가 전생에서 만났던 현자보다 훨씬 더 뛰어난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다.
대체 어떤 능력으로 나의 모든 것을 이렇게 꿰뚫어 볼 수 있는 것인지 소름이 돋을 지경이다.
그리고 그런 말이 나온 순간 뒤쪽에서는 스멀스멀 살기가 느껴지기도 했다.
많은 증오가 담겨 있다는 말을 내뱉은 타이밍부터였다.
하지만 오히려 현자는 손을 들어 올렸다.
나를 공격할 필요가 없다는 제스쳐다.
"흐음…."
철커덕
순식간에 살기가 사라졌다.
현자가 툰테른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지 한눈에 확인해 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리고 현자가 한 마디를 뱉어냈다.
"이 자라면 우리를 위협하는 이들을 없애 줄 수 있을 인재로구나."
"흠?"
"……!"
뒤쪽에서 터져 나온 짧은 신음과 현자 옆에 서 있는 앳된 소년의 눈빛이 묘하게 흔들렸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위협하는 이들?'
그게 누구인지 명확하게 알 수는 없었으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벌써 의뢰가 떨어지겠군.'
"그 말씀이라면… 혹시…."
앳된 소년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래. 저 전사에게서 느껴지는 증오란, 우리를 위협하는 그들에게 향해 있는 것 같구나."
"아……!"
나를 바라보던 앳된 소년의 표정이 한층 누그러졌다.
그렇게까지 나오니 나도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말 저 현자가 나를 꿰뚫어 본 게 맞다면, 이들을 위협하고 있는 세력은 단 하나뿐이지 않은가.
"혹시 툰테른을 위협하는 것이 사악한 흑마법사들인 것입니까."
흑마법사.
마법 명가를 가리키는 말이었고.
내 말에 현자의 하얗게 센 두꺼운 눈썹이 꿈틀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