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그럼."
나는 곧바로 몸을 돌렸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반군을 택할 플레이어는 없어 보였으니까.
그렇다면 의미 없이 여기에서 시간을 낭비하고 있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조금은 매정할지도 모르게 몸을 돌렸지만, 누구도 나를 붙잡지는 않았다.
그리고 내가 저들에게 해줄 수 있는 건 다 해 준 셈이다.
나는 전장 한복판을 가로질렀다.
역시나 빛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땅이었지만, 31층과는 많이 달랐다.
31층은 이어진 좁은 동굴을 쭈욱 따라 걷는 느낌이었다면.
내가 지금 걷고 있는 곳은 땅속 깊은 곳. 그 안에 있는 벌판 같았다.
그리고 플레이어들을 위한 작은 배려인지, 햇빛도 없는 이곳에 아주 간간이 횃불이 걸려 있었다.
그리 밝은 불빛은 아니었으니, 고작 반경 1m 정도를 밝혀 주는 게 전부였지만.
저 정도만 해도 다른 플레이어들에겐 망망대해의 등대와 같은 한 줄기 희망이다.
횃불의 불빛 아래로 개미들의 시체가 비쳐 보였다.
사방에 깔려 있는 개미들의 시체는 인상을 절로 찌푸리게 만들 정도였다.
당연히 나는 횃불과는 관계없이 이곳의 광경을 훤히 꿰뚫을 수 있었다.
초감각 덕분이다.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마력이 200이 되면서 초감각의 범위는 훨씬 더 넓어졌고, 초감각이 포착해 내는 장면은 더욱더 섬세하고 뚜렷해졌다.
'이 근방에서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곳은 없다.'
덕분에 나는 더 속도를 높일 수 있었다.
싸움이 벌어지고 있어도 사실 큰 문제는 없다.
너무 큰 싸움이라면 피해 가면 그만이고.
그렇지 않다면 싸우면 되니까.
내 뒤를 따르는 플레이어는 한 명도 없었다.
'차라리 저들로서는 옳은 선택을 한 셈이지.'
괜히 나를 믿는다는 알량한 생각으로 반군을 택했다가는.
그중에 반도 채 살아남지 못할 테니까.
측정 불가 난이도.
지금까지 늘 그랬듯, 나 역시도 전생에서는 엄두도 내지 못했던 선택지였다.
당연히 내 전생에서는 '반군'이라는 선택지는 없었다.
개미굴의 역사는 계속 흐르고, 선택지 역시도 시대에 따라서 변하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건, 난이도와 보상.'
그러니 내가 망설임 없이 반군을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보상에 대해서 알지 못했으면 나 역시 반군이 아닌, 적당한 난이도의 선택지를 택했을 지도 모른다.
그렇게 조금 더 걸었을 무렵.
'….'
또 시체가 보였다.
하지만 개미의 시체가 아니다.
'플레이어.'
나보다 먼저 32층에 도착했을 이름 모를 플레이어다.
싸늘한 시체가 된 플레이어들이 어디로 향하고 있었을지는 모른다.
자신이 선택한 진영으로 향하고 있던 중이었을 수도.
혹은 이미 진영을 선택하고 탑을 클리어하기 위해 싸우고 있던 중이었을 수도 있다.
'안타깝군.'
그 이상의 감흥은 없다.
어쨌든 나 역시도 앞으로 개미뿐 아니라 플레이어들과도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불가피한 일이다.
32층에 있는 플레이어들은 자기 진영을 승리하게 만들기 위해서 상대 진영과 싸워야 할 것이고.
각 진영에는 역시 다양한 플레이어들이 속해 있으니까.
'말 그대로 전쟁이다.'
개미들의 전쟁.
그리고 그 안에 휘말린 플레이어들의 전쟁.
물음표로 표시된 개미굴의 클리어 조건은 각 진영의 여왕개미에게 인정을 받는 것.
다만 여왕의 요구가 천차만별이기에 물음표로 표시된 것뿐이다.
인정.
다양한 의미가 존재하지만 여기가 전쟁터라는 사실을 떠올려 본다면, 그 함의는 쉽게 좁혀진다.
'많은 적을 처치하고, 조금이라도 더 많은 영토를 선물하는 거지.'
결국 다시 싸움으로 귀결된다는 뜻이다.
다시 나는 속도를 높였다.
싸움이 벌어지는 장소는 최대한 피했다.
우선은 반군의 아지트로 가는 게 우선이니까.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장소를 피해 열심히 달리기를 대략 1시간.
'저 앞이다.'
나는 반군들의 아지트에 도착할 수 있었다.
***
"상황이 너무 어렵게 되었습니다. 현재 다른 진영에서는 꾸준히 모험가들이 유입되며 전력을 보강하고 있으나 우리 측에 지원하는 모험가는 지난 몇 달간 한 명도 없었습니다."
"지원한 녀석들마저도 쓸모없는 것들 뿐이었지. 애초에 나약한 인간 따위에게 도움을 청한다는 게 어불성설입니다!"
개미들이 모여 있다.
하지만 그들의 모습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개미와는 많이 달랐다.
온몸에는 털이 북슬북슬했고, 얼굴은 개미보다는 호랑이 쪽에 가까웠다.
개미라고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입가의 턱과 더듬이, 그리고 두 쌍의 팔과 한 쌍의 다리 덕분이리라.
심지어 온몸에 불끈거리는 근육은 개미들의 위압감을 몇 배나 가중시키고 있었다.
"……."
대략 열 명의 개미들이 모여 있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상석에 앉아있는 여성형 개미가 바로 이들의 수장인 여왕개미였다.
"여왕님! 이대로는 어떤 희망도 없습니다. 어서 어떤 수를 강구해야만 합니다!"
"그렇습니다. 여왕 후계 서열에서 밀려 반군이라는 낙오가 찍혀버린 이상…. 우리는 이제 벼랑 끝에 몰린 것이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장군 개미들이 여왕개미에게 읍소했다.
그걸 모르고 있는 여왕개미가 아니다.
다만 상황이 너무 최악이었으니, 여왕개미라고 해도 이렇다 할 방도가 없을 뿐.
그때였다.
저벅
발소리가 들려왔다.
"급히 전할 말이 있습니다."
밖에 있던 개미 한 마리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냐."
"모험가가… 찾아왔습니다."
"모험가?"
"그렇습니다."
"수는?"
"인간 두 마리입니다."
"……."
순간 장군 개미들의 시선이 집중되었으나, 큰 동요는 없다.
애당초 모험가.
즉, 플레이어들에 대한 기대치가 바닥을 치고 있는 상황이었으니 인간 두 명이 왔다고 해서 놀랄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으니까.
"제가 나가서 처리하고 오겠습니다."
"처리라니?"
"쓸모없는 놈이면 죽여버려야지. 더 이상 인간 놈들은 믿지 않아."
끼긱
장군 개미 한 마리가 몸을 일으켰다.
저벅
그리고 그가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
"……."
개미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솔직히 말해서 저걸 개미라고 불러도 될지 헷갈리기는 하다만.
어쨌든 반군들은 '호랑 개미'로 이루어진 집단인 듯했다.
'모든 개미 중 가장 호전적이고 신체의 밸런스가 가장 잘 잡혀 있는 개미지.'
그래도 전투력으로는 꽤 상위 티어에 랭크 된 개미종이다.
하지만 녀석들은 내 전생에선 사실상 멸망한 채로 소수 부족생활로 전락했던 개미 집단이다.
그렇다는 건, 지금 반군이라 불리는 호랑 개미들이 이번 사건을 이후로 몰락했다는 뜻이리라.
'내가 해야 할 일은 멸망을 앞둔 녀석들의 상황을 역전시키는 것이겠지.'
측정 불가라는 난이도가 조금 더 또렷하게 와 닿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녀석들의 아지트에 와서 주변을 살펴봤지만, 군대라고 부르기에도 처참한 수준이었다.
이미 다른 세력들은 '왕국'이라는 칭호를 달고 어엿한 국가의 모습을 이룩해 놓았을 것인데.
'그에 비하면 이 녀석들은 산적 무리에 불과한 수준이야.'
그때.
"네놈이냐."
모습을 드러낸 개미가 말했다.
장군 개미다.
개미들 중 여왕개미 다음으로 전투력이 강한 녀석들.
당연히 이쪽 반군의 참모중 하나일 것이다.
"우리를 찾아왔다는 인간인가?"
"허약해 보이는데?"
"실망이군."
나를 둘러싸기 시작한 호랑 개미의 개미들이 수군대기 시작했다.
대부분이 병정개미와 전투 개미로 이루어져 있었고.
간혹은 전사 개미나 기사 개미 같은 상위종도 보였다.
제 놈들이 할 말인지 조금 우습기는 했지만 굳이 대꾸하지 않았다.
'그래도 내가 생각했던 것보단 수가 많군.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점점 더 모여드는 개미들은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생겼다는 듯 술렁이기 시작했다.
사실 정확히 표현하자면, '말'은 아니다.
말했듯, 탑의 개미들은 공명을 통해서 대화하고.
저 개미의 공명이 탑의 시스템을 통해 언어로 내게 번역되어 들리는 것 뿐.
그마저도 내가 반군을 택했기 때문에 저들의 공명을 들을 수 있는 것에 불과하다.
다른 진영 개미들의 공명은 내게 그저 공명으로만 들리기에 알아들을 수는 없다.
"대답해라. 네가 우리 세력에 가세하겠다고 찾아온 인간이 맞느냐."
"그래."
내가 답했다.
내 말도 번역되어 저 개미에게 전해질 것이다.
"딱 봐도 쓸모없어 보이는군."
"……?"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이들의 상황에서 플레이어 한 사람, 한 사람이 귀중하리라는 건 뻔한 일인데.
뭐가 이렇게 당당한지 조금 이해가 되질 않았다.
"네놈 따위가 정말 우리를 승리로 이끌 수 있다고 착각하는 건가? 너 같이 허약한 인간 따위가? 꿈도 꾸지 마시지!"
알겠다.
그러니까 이 녀석들은 지금 압도적인 무력감에 빠져 있는 거다.
저들도 승산이 없다는 것쯤은 진즉에 눈치챘고.
플레이어 한, 두 명이 가세한다고 해도 달라질 게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는 거다.
"그거야 지켜보면 될…."
"닥쳐! 너 같은 인간은 벌써 몇 번이나 왔다 갔다. 다들 그러더군. 지켜보라고. 자신은 다를 거라고. 하지만 결과가 어땠는 줄 아는가?"
"……."
"나약하더군. 인간이라는 종은 나약하기 그지없어! 너 역시 마찬가지겠지!"
놈은 내 말을 끊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네 개의 주먹.
그리고 근육이 불끈대는 팔뚝.
개미는 본래 자기 체중의 60배 이상의 무게를 들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내 눈앞의 개미는 최소 100kg은 훌쩍 넘을 테니, 놈의 힘이 얼마나 강할지는 사실 짐작조차 되질 않는다.
그런 녀석이 나를 향해 주먹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어처구니가 없군.'
놈의 모습을 보며 나는 코웃음을 쳤다.
대체 얼마나 조직이 망가져 있으면, 자신들을 돕겠다는 사람을 향해 다짜고짜 주먹을 내지른다는 말인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이 태산이다.
그건 그거고.
휘익!
나는 발을 움직였다.
힘은 나보다 셀지 몰라도, 속도는 아니었다.
나는 놈의 주먹을 어렵지 않게 피해냈고.
콰직!
"……?!"
툭
놈의 팔 하나를 잘라냈다.
오러 블레이드가 4단계에 올랐으니, 놈의 팔을 잘라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잘려 나간 놈의 팔이 힘없이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무, 무슨!"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아무래도 놈들이 바라는 게, 내 힘의 증명인 것 같으니.
팟!
다시 발을 내디뎠고.
검을 휘둘렀다.
어두운 허공에 푸른빛이 뿜어지며 놈의 얼굴이 얼핏 비쳐 보였다.
녀석의 턱이 부르르 떨려왔다.
콰직!
나는 놈의 남은 팔 두 개를 더 베어냈다.
"허, 헉!"
"자, 장군님!"
"장군님의 팔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개미들이 다급히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크아아악!"
장군 개미 역시 괴성을 내질렀다.
그럼에도 멈추지 않았다.
이번엔.
휘이익!
놈의 턱을 베어내기 위해 검을 휘둘렀다.
죽이지만 않을 정도로 짓밟아 줄 생각이다.
오러 블레이드가 놈의 턱을 향해 지척까지 가까워진 순간.
"그만!"
저쪽 어디선가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거기엔 열이 조금 넘는 개미들이 서 있었다.
한눈에 봐도 평범한 개미들은 아니다.
열 마리 정도 되는 장군 개미들과 가장 앞에 서 있는 여성형 호랑 개미.
'여왕이다.'
이 무리의 우두머리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