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아이들이 자라는 만큼 어른들도 열심히 살아가고 있었다.
스톨과 엔나, 기르만에서 이주해 온 백성들은 신도시 건설에 열을 올리고 있었고, 아렌달의 원주민들은 산업의 역군으로서 연방을 위해 일하고 있었다.
그들은 돌아오는 휴일마다 문화생활을 즐기며 스트레스를 풀고, 도시의 소비를 증진 시키며 건강한 경제 상황을 만들어 주고 있었다.
"이번에 상인 길드에 새로운 상단들이 들어온다고 하더군."
"이번에는 어떤 상단들이 들어와서 새로운 아이템들을 보여 줄지 기대되네."
"듣기로는 남대륙에서 물건을 가지고 오는 상단도 있는 것 같던데?"
"나르비크 왕국 때문에 남대륙과는 사이가 틀어졌던 것 아니야?"
"나르비크 왕국이 침공하긴 했지만, 별다른 소득도 없이 돌아왔잖아.
그러니까 감정이 크게 상하지 않은 것 같아."
"그럼 아렌달의 상품들도 다시 남대륙에 보내지겠네. 항구가 다시 바빠질지도 모르겠는데."
신문이나 라디오를 통해 뉴스를 접하는 아렌달의 백성들은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며 자신들에게 어떤 영향이 있을지 이야기했다.
바로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옆 마을에서 일어나는 일도 잘 몰랐던 백성들이었다.
그런데 다른 대륙의 일에도 관심을 가지고, 그 일이 자신들의 삶에 어떤 영향이 있을지 이야기하고 있으니, 과거에는 정말 상상하지도 못할 일이었다.
"나르비크 왕국에서 먼저 발을 뺐으니 아스타나 왕국도 곧 발을 빼겠지?"
"아스타나 왕국은 나르비크 왕국보다 더 큰 손해를 보고 있지 않습니까?
계속해서 손해를 보고 싶은 마음이 없다면 이만 전쟁을 멈추고 돌아오겠죠."
나르비크 왕국에 이어 아스타나 왕국의 원정군까지 동대륙으로 돌아오게 되면 베르겐 왕국에서도 계속해서 브레튼과 대치를 이어 나가기 어려울 것이다.
자칫하다가는 두 왕국에서 돌아온 병력을 베르겐 왕국으로 돌려 버릴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이걸로 동대륙도 다시 안정되겠네."
"다른 왕국들의 혼란 덕분에 이득을 본 것도 많았는데 말이죠."
"안정되면 안정되는 대로 이득을 보는 것도 있으니까 괜찮겠지."
결국, 아스타나 왕국도 중앙대륙에서 손을 털고 동대륙으로 돌아왔다.
나르비크 왕국은 원정 초반에 남대륙에서 약간의 자원이라도 털어 왔지만, 아스타나 왕국은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이 병력과 물자만 손해 보고 돌아왔다.
덕분에 아스타나 국왕은 스트레스로 인한 화병으로 쓰러졌다. 원래부터 나이도 많았던지라 자연스럽게 왕위에서 물러나며 빅터 왕자가 아스타나 왕국의 국왕이 되었다.
"국왕이 바뀌었으니 아스타나 왕국도 한동안은 조용하겠지?"
"그럴까요? 빅터 왕자도 꽤 호전적인 사람이었던 것 같은데요."
"그래도 전쟁으로 인해 선왕이 쓰러진 것인데 조금은 눈치를 보지 않겠어?
자기네 힘이 아직 부족하다는 것도 깨달았을 테니 함부로 날뛰지는 않겠지."
아스타나의 국왕이 바뀌는 사이 베르겐 왕국에서도 브레튼에 강한 항의를 지속했다.
큰 피해는 없었지만, 작은 전투도 일어날 만큼 강한 항의였다.
하지만 브레튼의 백성들은 이미 베르겐 왕국 시절을 잊어버렸다는 듯 의회에 지지를 보내 주었기 때문에 베르겐 왕국도 조금씩 힘을 잃는 모습이었다.
"곧 보리스도 결단을 내리겠네."
"베르겐 왕국에서 결단을 내리면 바로 양쪽으로 사신을 보내겠습니다."
리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둘의 사이가 좋아야 아렌달에도 이득이 커지기 때문에 빠르게 화해시킬 필요가 있었다.
"보리스에게는 적당한 선물 몇 개 더 안겨 줘.
우리 쪽에 붙은 3개 영지 때문에 우리한테도 감정이 있을 테니까."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술 몇 가지를 알려 주면 되지 않겠습니까?
마법 공학 기술까지는 아니더라도 베르겐 왕국에 필요한 기술 몇 가지를 제공하겠습니다."
브레튼의 강력한 의지에 보리스가 결국 브레튼의 독립을 인정하고 물러났다.
중앙의 귀족들이 강렬하게 반대했지만, 이 상황을 길게 끌고 갈 수 없다는 것은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지방 영주들이 자신들의 영지민을 돌려 달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으니, 영주들을 달래기 위해서도 그들의 병력을 돌려줘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베르겐 왕국의 상황은 어때?"
"중앙의 귀족들이 보리스 국왕에게 책임을 물으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국왕을 끌어내리고 새로운 왕을 새울지도 모르겠습니다."
"음- 그건 조금 곤란한데…"
아렌달에 이어 브레튼까지 독립하면서 베르겐 왕국의 영토는 과거의 3분의 2수준으로 떨어졌고, 인구도 엄청나게 유출이 된 상태였다.
모두 보리스가 왕위에 있는 기간 동안 이루어진 일이었기 때문에 보리스의 책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물론 보리스가 잘못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하는 법.
다만 아렌달이나 브레튼의 입장에서는 다른 사람보다는 보리스가 계속 왕위에 앉아 있는 것이 나았다.
"내가 이런 말을 하기도 뭣하지만, 보리스에게 힘을 실어 줄 방법이 없을까?"
"보리스 국왕에게 힘을 실어 주신다고요?"
"보리스는 나와 성향이 비슷한 사람이잖아? 괜히 다른 성향의 사람이 베르겐의 왕이 되면 아렌달로서도 귀찮아질 수 있으니까."
빅터 왕자같이 호전적인 사람이 왕이 되면 나로서도 귀찮을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만 있으면 시비를 걸게 분명하니까 말이다.
"섣불리 힘을 실어 주려다가 왕국을 조롱한다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나는 보리스에게 힘을 실어 주고 싶었다.
"그럼 이렇게 하시죠."
"어떻게?"
"데우스님은 보리스 국왕과 혈연이지 않습니까?"
"베르겐에서 독립했다고 해도 아렌달 가문은 베르겐 왕국의 방계 왕족이기는 하니까."
말뿐만이 아닌 왕가의 족보에도 정식으로 들어간 왕족이었다.
"연방이 아닌 베르겐 왕국의 방계 왕족으로서 보리스 국왕에게 힘을 실어 주십시오."
보리스를 끌어내리고 다른 왕을 세운다고 해도 결국 베르겐 왕국의 왕족 중 한 명을 왕으로 세워야 한다.
왕족이 아닌 다른 이를 왕위에 올리려는 순간 반역이 될 테니까.
그럼 나 역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진짜 억지네."
"억지라도 명분은 됩니다. 귀족들에게는 명분이 가장 중요한 것 아니었습니까?"
리오의 말에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 * *
베르겐 왕국이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
불과 3년 전만 해도 베르겐 왕국은 뛰어난 기술력을 바탕으로 동대륙에서 가장 발전이 빠른 왕국이었다.
아니 동대륙에 국한될 것이 아니라 이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절대 아니었다.
아렌달이 독립하는 순간부터 베르겐 왕국은 퇴보를 거듭하고 있었다.
물론 아렌달이 없었다면 베르겐 왕국이 그렇게 발전했겠냐는 물음을 던질 수도 있었지만, 귀족들에게 그런 이야기는 들리지 않았다.
그저 국왕이 무능했기에 왕국이 3등분으로 쪼개지고, 영토와 바다와 인구를 잃었을 뿐이다.
귀족들에게는 그 책임을 짊어질 사람이 필요했고, 그 대상으로는 유약한 성품을 지닌 국왕이 제격이었을 뿐이다.
"이게 다 국왕이 무능해서 일어난 일입니다.
국왕이 똑바로 했다면 아렌달이 독립했겠습니까?
아렌달이 독립하지 않았다면 브레튼도 독립할 수 없었을 겁니다."
"독립이라니. 선왕 폐하의 시절에는 상상도 못 할 일입니다."
귀족들의 성토에 벨파스트 후작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과거 자신도 왕권을 갈아먹었던 귀족이기는 하지만, 저들처럼 헛소리를 내뱉지는 않았다.
그저 책임을 나누기 싫기에 아직 젊은 국왕에게 덤터기를 씌우려는 중앙의 귀족들에 역겨움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벨파스트 후작님. 이대로 있다가는 남부와 서부마저 독립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일 겁니다.
하루라도 빨리 새로운 국왕을 내세워 왕국을 단합시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네들은 그렇게까지 국왕 폐하를 끌어내리고 싶은 것인가?"
"그런 게 아니라 이대로 있다가는 왕국이 산산조각이 날까 걱정이 되어서 하는 말입니다."
"말은 잘하는군."
벨파스트 후작의 빈정거림에 중앙 귀족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보리스가 책임을 뒤집어쓰지 않는다면 중앙의 귀족들이 그 책임을 나눠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가뜩이나 지방 영주들의 권력이 강한 베르겐 왕국에서 그나마 가지고 있던 기득권마저 잃게 되면 중앙의 귀족들에게는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었다.
하루라도 빨리 보리스에게 책임을 뒤집어씌우고 새로운 왕과 권력을 나누어야 이들도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럼 벨파스트 후작님께서는 지금의 왕국도 괜찮다는 생각이십니까?"
"……"
"벨파스트 후작께서 국왕 폐하의 책임을 나누어 짊어지실 겁니까?"
귀족들의 물음에 벨파스트 후작은 기분이 나빴지만, 그래도 고개를 끄덕이지는 않았다.
사실 보리스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벨파스트 후작은 중앙에서 물러나지 않았던가.
지금 상황은 자신에게 묻는 귀족들의 책임이지 자신은 무엇하나 하지 않았었다.
"나는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내가 책임을 짊어져야 하는 건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신 게 잘못입니다.
벨파스트 후작님께서는 왕국이 어려울 때 돌아오셔서 왕국을 위해 목소리를 내셨어야 합니다."
분명 억지였지만, 중앙의 귀족들은 벨파스트 후작을 놓아줄 생각은 없었다.
보리스에게 책임을 뒤집어씌우려면 벨파스트 후작의 목소리가 필요했으니까 말이다.
"후우--"
벨파스트 후작의 긴 한숨에 중앙의 귀족들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에일로 백작의 말로는 빅토르 왕자가 선왕 폐하를 똑 닮았다고 하더군요."
"…에일로 백작에게 연락을 넣게."
"알겠습니다."
* * *
"에일로 백작이 중앙 귀족들의 부름에 왕도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정말로 보리스에게 책임을 뒤집어씌울 생각인가 보네."
"그게 아니라면 에일로 백작을 왕도로 부를 필요가 없었겠죠."
"빅토르 왕자가 몇 살이라고 했지?"
"이제 13살일 겁니다."
다음 왕위 계승권자는 보리스의 아이들이었다.
하지만 보리스를 끌어내리면서 그 아이들을 왕위에 앉히는 건 말도 안 되는 일.
그러니 보리스의 이복동생인 빅토르가 중앙 귀족들의 선택을 받은 것이다.
"빅토르 왕자의 성향은 알아봤어?"
"보리스 국왕과 다르게 선왕을 많이 닮았다고 합니다.
특별히 뛰어난 재주는 없지만, 부족한 것도 없다는 평입니다."
"왕위에 앉히기에는 나쁘지 않네."
"다만…"
"?"
"선왕을 닮아서 욕심이 많다고 합니다.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절대로 남에게 빼앗기지 않으려 하고, 자신의 것이 아니라도 자신의 배경을 이용해 탐내는 모습도 많이 보인다고 합니다."
그 말에 선왕의 모습이 떠올랐다.
선왕 역시 유능하지도, 그렇다고 무능하지도 않은 왕이었으며, 권위적이고 욕심을 부릴 줄 아는 왕이었다.
그 욕심을 살짝살짝 긁어 가며 아렌달이 취한 이득이 얼마나 많던가.
'그 덕을 보기는 했지만, 귀찮은 사람이었지.'
"대화 상대로는 별로겠네."
"보리스 국왕은 발전을 위해서는 대화가 잘되지 않았습니까?
빅토르 왕자가 왕위에 앉게 되면 보리스 국왕처럼 쉽게 대화가 되지는 않을 겁니다."
빅토르가 베르겐의 왕이 되면, 어린 왕을 휘두르려는 귀족들 때문에 귀찮은 일도 많아질 게 분명했다.
"그래도 보리스의 의향은 들어야겠지?"
"보리스 국왕이 의지가 없다면 저희가 도움을 준다고 해 봐야 의미가 없을 테니까요."
리오의 대답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중앙기사단장에게 메세지를 보내야겠군.
보리스와 조용히 이야기하고 싶다고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