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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현대인-107화 (107/169)

107화

"왕위를 지키기 위해서는 아렌달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말인가?

왕국이 이렇게 된 것이 아렌달 때문인데…"

씁쓸하게 웃는 보리스의 모습에 에이스가 말했다.

"왕국을 위해서 의지를 가지셔야 합니다.

국왕 폐하께서 왕위를 지키셔야 왕국이 무너지지 않습니다."

"빅토르가 왕위에 오른다고 왕국이 무너지겠소?"

"겨우 13살의 빅토르 왕자를 왕위에 앉히려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국왕 폐하께서 물러나시면 귀족들의 손에 왕국이 무너지고 말 겁니다."

에이스의 말에 보리스는 길게 한 숨을 내쉬었다.

"나는 베르겐 역사상 가장 무능한 왕으로 기억되겠군."

"지금 이대로 왕위를 내려놓으시면 그렇겠지요."

"……"

"베르겐 왕국을 발전시킬 수 있는 기회라면 얼마든지 있습니다.

국왕 폐하께서는 아직 젊으시지 않습니까.

아렌달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베르겐 왕국을 발전시킬 역량이 국왕 폐하에게는 있습니다."

에이스의 말에 보리스의 눈동자가 빛났다.

'아렌달 이상으로 왕국을 발전시킨다…

그게 가능할까?

그래도 이대로 무능한 왕으로 기억되기는 싫다.'

왕국의 크기나 군사력 같은 것은 백성들에게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이야기였다.

백성들에게는 그저 배부르게 먹을 수 있고, 평화로운 일상이 계속되는 것만큼 중요한 게 없었다.

그런 면에서 베르겐 왕도의 백성들에게 보리스 왕의 시대는 그 어느 시대보다 좋은 시대였다.

보리스는 모르고 있겠지만, 그 역시 백성들의 지지를 받는 왕이라는 말이었다.

"베르겐 왕도에 아렌달의 상품을 대대적으로 보내 줘.

왕도의 백성들이 다 쓰고도 남을 정도로 말이야."

"왕도의 백성들이 다 쓰고도 남을 정도를 보내면 생각보다 훨씬 많은 돈이 들 텐데요?"

"그래도 보내 줘. 베르겐 왕국이 지금 같은 모습이 된 건 사실 아렌달 때문이잖아.

그리고 지금 보리스가 백성들의 지지를 확실하게 받는다면, 앞으로 10년은 보리스의 시대가 이어지지 않겠어?

베르겐 왕국과의 관계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 그 정도 투자는 아깝지 않지."

보리스의 시대가 앞으로 얼마나 이어질지는 모르겠지만, 보리스의 시대가 이어질수록 아렌달에도 이득이 될 것이 분명했다.

그것을 위한 투자라고 생각하면 지금 많은 돈이 든다고 아쉬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브레튼과의 대화는 어떻게 되었지?"

"브레튼에서도 아렌달과 같은 뜻을 보내 주기로 약속했습니다.

리즈 가문이 아렌달 가문과 같은 목소리를 낸다면 중앙 귀족들은 아무것도 못 할 겁니다."

아렌달 가문과 마찬가지로 방계 왕족 가문인 리즈 가문에서 보리스를 위해 목소리를 내 준다면 보리스의 왕위는 더욱 안전해질 것이다.

비록 왕국에서 나왔다고 해도 아렌달이나 리즈는 베르겐 왕국의 왕족.

왕족들의 지지를 받는 국왕을 감히 끌어내릴 수는 없을 것이다.

만약 보리스를 끌어내렸다가는 두 연방과의 관계가 험악해질 수도 있는 부분이었다.

귀족들이 그 책임을 감당할 리 없었다.

정말 오랜만에 아렌달 밖으로 나왔다.

독립하기 이전에 만들어 놓은 고속도로를 타고 달리기를 몇 시간.

"아렌달이 독립하고 처음인가?

몇 년이 지나지도 않았는데, 굉장히 오랜만인 것 같네."

"그렇군요. 벌써 오래전의 일처럼 느껴집니다."

멀리 베르겐 왕도가 눈에 들어왔다.

아렌달만큼은 아니더라도 베르겐 왕도도 제법 사람 살기 좋은 도시가 되어 있었다.

처음 왕도에 들어왔을 때 숨도 못 쉬었던 것을 생각해 보면 도시가 얼마나 깨끗해졌는지 느낄 수 있었다.

왕궁까지 이어진 도로를 달리는 차량 행렬에 왕도 백성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브레튼에 이어서 아렌달까지? 왕국에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이왕이면 백성들에게 좋은 일이었으면 좋겠는데."

"아렌달 공작님께서 저렇게 많은 차를 가지고 오셨으니 좋은 일 아니겠어?"

"공작님이라니? 아렌달이 독립한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공작님이라고 불러?"

베르겐 왕궁까지 차를 타고 들어온 나는 수많은 시선들을 느끼며 차에서 내렸다.

왕국기사단장인 에이스를 필두로한 기사들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중앙 귀족들. 그리고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던 브레튼의 사절단까지.

"어서 오십시오. 데우스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에이스의 인사에 고개를 끄덕인 나는 에이스의 뒤에서 미소 짓고 있는 브레튼의 사절단에게 고개를 돌렸다.

"오랜만이오. 아렌달 공."

"아렌달의 제안을 받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브레튼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 아닙니까.

오히려 아렌달에서 이런 제안을 해 주셔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리즈 백작의 말에 나 역시 미소를 지었다.

우리의 밝은 표정에 중앙 귀족들의 표정이 구겨지는 것은 당연했다.

나는 그들에게 씨익 웃어 주고는 기사단의 호위를 받으며 왕궁 안으로 들어갔다.

왕궁 안으로 들어가자 벨파스트 후작이 무표정한 얼굴로 나에게 다가왔다.

"완전히 뒤통수를 맞았군."

"누가 뒤통수를 맞았다는 말입니까?

설마 중앙 귀족들이 국왕 몰래 무슨 계획이라도 짜고 있던 겁니까?"

"......"

침묵하는 벨파스트 후작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빅토르 왕자는 너무 어리지 않습니까?"

"아렌달은 이미 독립하지 않았나?

이제 와서 왕국의 일에 관심이 많아지기라도 한 건가?

아니면 내정 간섭이라도 하겠다는 것인가?"

"베르겐 왕국의 일에는 별로 관심없습니다. 다만 베르겐 왕가의 일에는 관심을 가져야겠죠.

이래 봬도 아렌달 가문도 베르겐의 왕족 아닙니까.

그리고 내정 간섭이라니요. 베르겐 왕국과 아렌달의 발전을 위해서 찾아온 겁니다.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서 말입니다."

내 말에 벨파스트 후작이 허탈하게 웃었다.

"더 할 말이 없으시다면 이만.

다음에 또 뵙도록 하죠."

"다음. 다음이라...

다음은 없을 거네."

"그럼 작별인사를 해야 겠군요.

그동안 베르겐 왕국을 위해 수고 많으셨습니다. 벨파스트 후작."

내 작별인사에 벨파스트 후작은 고개를 젓고는 돌아섰다.

아렌달-베르겐-브레튼의 협약이 이루어졌다.

서로의 국경을 개방하고, 경제 협력을 통해 발전을 도모하자는 협약이었다.

이 협약으로 인해 브레튼은 확실한 독립을 이루게 되었고, 보리스는 왕권을 단단히 할 수 있게 되었다.

"다음에는 조금 더 좋은 일로 초대하겠습니다."

보리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보다 좋은 일이라니, 생각만으로 기대가 되는 군요."

"기대하셔도 좋을 겁니다. 베르겐 왕국은 이제부터 달라질 테니까요."

보리스의 자신감 넘치는 모습에 나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아렌달에서 보리스 국왕 폐하가 바꾸어 나갈 베르겐 왕국을 기대하겠습니다."

동대륙에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다른 대륙으로 원정을 떠났던 원정군들은 왕국으로 돌아왔고, 독립으로 인해 냉랭하던 기운은 협약을 통해 다시 원상태로 돌아왔다.

아렌달도 평화의 기운을 느끼며 평온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신도시를 건설하고, 상품을 만들어 수출하며, 문화생활을 즐기고, 새로운 탄생을 기다리고 있었다.

"백성들이 하는 말 들으셨습니까?"

"무슨 말?"

"아렌달 가문에 아이들이 많이 태어났으면 좋겠답니다."

뜬금없는 이야기에 가만히 리오를 바라보자 리오가 웃으며 말했다.

"아렌달 가문에 아이가 태어날 때마다 데우스님께서 휴일을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래서 백성들이 아렌달 가문에 많은 아이들이 태어났으면 좋겠답니다."

"참나-"

"그만큼 아렌달 가문의 아이를 백성들도 기다리는 것 아니겠습니까?"

곧 태어날 아이를 백성들도 기대하고 있다는 사실은 나도 잘 알고 있었다.

샤를로트의 산달이 다가오면서 부쩍 후계자에 대한 이야기도 많아졌고, 도시의 분위기도 축제 때와 마찬가지로 달아오르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이제 정기 휴일도 생겼으니까 특별 휴일 같은 건 없어도 되지 않겠어?

베르겐, 브레튼과 맺은 협약 때문에 상품 생산도 바쁘니까 말이야."

"……진심이십니까?"

"왜?"

"백성들이 셋째 아기씨가 태어나기를 손꼽아 기다려 왔는데…"

난감한 표정을 짓는 리오의 모습을 보니 이미 내 아이가 태어나는 날은 휴일이라는 공식이 만들어져 있는 것 같았다.

"표정을 보니 백성들만 기대하고 있는 건 아닌가 보네.

행정관들이 제일 기대하고 있지?"

"하하- 어떻게 아셨습니까?"

리오의 대답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그럼 샤를로트에게 가 봐야겠다."

"벌써 돌아가시는 겁니까?"

"어쩌겠어? 샤를로트가 건강한 아이를 낳아야 백성들이 좋아할 것 아니야?

샤를로트의 건강을 위해서 내가 곁을 지켜 줘야지."

내 말에 리오가 활짝 웃었다.

"그럼?"

"아이가 태어나면 관청에 연락 줄 테니까 기다려.

행정관들의 특별 휴일은 아이가 태어난 다음이다."

"하하- 미리 축하드립니다. 데우스님."

리오의 축하인사에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아리아가 태어날 때와 아리스가 태어날 때와는 사뭇 기분이 달랐다.

"셋째라 그런가 이제는 별로 긴장도 안 되네."

"그건 너무한 것 아니에요?

이 아이가 들으면 실망할 거예요."

"그, 그런가?"

내 말에 샤를로트가 웃었다.

"그런데 저도 조금 그래요. 아리스가 태어날 때까지만 해도 두근두근거렸는데.

이 아이는 배 속에 있으면서도 조용해서 그런가?

별로 긴장이 안 돼요."

"얌전한 아이가 태어나려고 그런가 봐."

"그럴까요?"

샤를로트는 부푼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번에는 아들이었으면 좋겠어요."

"……"

내 침묵에 샤를로트가 나를 보며 웃었다.

"후계자 때문이 아니라 그냥 아들도 있었으면 좋을 것 같아서 그래요."

"그렇게 생각한다면 뭐…"

"당신은 여전히 아들보다 딸이 좋아요?"

샤를로트의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아들이든 딸이든 어때?

그냥 건강하게만 태어나면 좋은 거지."

그 대답에 샤를로트가 환하게 웃었다.

"역시… 진짜 이상한 사람이야."

"이상해?"

"당연하죠. 그냥 건강하게만 태어나면 좋다니.

세상 어느 귀족이 그렇게 말해요?

아니 귀족이 아니라 평민이라도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요."

"그렇게 많이 이상한가?"

"네. 이상해요. 그래서 더 좋아요."

"……"

"지금 생각해 보지만, 처음 만났을 때 당신한테 도망치라고 하지 말 걸 그랬어요.

괜히 6년이나 기다렸잖아.

아버지 뜻대로 그날 밤 그냥 당신 방에..."

"그날 내 방에 샤를로트가 들어왔다면 내가 내쫓았을 거야."

"풉- 맞아요. 분명 쫓겨났을 거예요."

그날을 떠올리며 샤를로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시녀들에게 눈짓을 주었다.

"지금은 당신이 쫓겨날 시간이네요."

진통이 시작됐는지 조금씩 찡그려지는 샤를로트의 표정을 보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어디 가지 말고 기다려야 해요."

이날의 대화가 어떻게 와전이 됐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대단한 로맨티스트가 되어 있었다.

아렌달의 백성들은 물론이거니와, 베르겐이나 브레튼의 귀족들, 그리고 동대륙의 다른 왕국들을 포함해, 남대륙과 중앙대륙까지 나와 샤를로트의 대화가 퍼져 나간 것이다.

그리고 아내의 출산에 남편이 옆에서 기다리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게 되었다.

"참 별게 다 유행이네."

"샤를로트님을 동경하는 여성들이 그만큼 많은 것 아니겠습니다.

이제는 연방과 왕국을 넘어 대륙적인 스타가 되셨네요."

"그리고 나는 남자들의 적이 되어 버렸지."

"그래서 싫으십니까?"

볼튼의 물음에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어쩌겠어. 이게 스타의 삶이라는데 말이야.

이제는 즐겨 보려고 노력 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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