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제너럴 매니저
허소윤 CP는 출근하자마자 호출을 받았다.
황영준 국장 사무실로 들어간 그녀는, 묘하게 가라앉은 그의 분위기를 감지했다.
“무슨 일 있으세요?”
황영준이 미간을 찌푸리면서 소파에 앉으라고 턱짓했다.
“설마, 시즌2 막혔어요?”
요즘 채널T 예능 중 가장 잘나가는 작품은 단연 <V.I.P>다.
꾸준한 효자 종목인 붙박이 예능들도 있기야 하지만, 최근 기세 좋은 예능을 꼽자면 빠질 수가 없다.
황영준이 레귤러화를 노골적으로 밀어붙이고 있기도 해서, 저런 표정이 나오게 할 일은 그 정도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건 아니고.”
하지만 황영준은 간단히 부정한 다음에, 소파로 와 맞은편에 앉았다.
“너도 이야기는 들었지? NBS에서 플랫폼 하나 만든다는 거.”
“어…… 예. 들었죠. 작년 말부터인가 솔솔 소문 돌았는데. 그게 왜요?”
“어제 그쪽 본부장이랑 우리 본부장이랑 미팅을 했나 봐. 거기서 채널T 콘텐츠도 넣는 걸로 이야기가 됐나 보더라고.”
허소윤이 덩달아 인상을 찌푸렸다.
“독점 제공은 아니죠?”
그녀도 관련 일이 돌아가는 것은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NBS 주도로 한국 방송업계 통합 OTT 플랫폼을 만들려고 하고 있는데, 채널T에도 그 협조 요청이 들어왔었다.
워낙 윗선에서 접촉이 이루어지고 있어서, CP라곤 해도 허소윤과는 딴 세상 일이었는데.
그 일이 눈앞에 나타나서 그녀도 당혹스러웠다.
“저희, 엘도라도랑 콘텐츠 제공 계약 맺은 것도 얼마 안 됐는데요.”
“나도 알아. 그래서 전부 독점은 아닌데…… 몇 개 콘텐츠는 독점으로 제공해 달라는 요구야.”
“몇 개라니……. 그 몇 개가 어떤 것들인데요?”
채널T에서 만드는 방송은, 종편답게 예능, 드라마, 보도 등을 총망라한다.
하지만 굳이 허소윤을 불러 놓고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의미가 따로 있을 것이다.
“설마 <V.I.P>를요?”
허소윤도 설마 해서 물었는데, 황영준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그게 말이 돼요? 엘도라도 오픈 리스트에 올린 게 엊그젠데? 본부장님도 그걸 모르시진 않잖아요?”
“아셔. 그러니까, 협상은 시즌2야. 새로운 시즌.”
황영준은 그 외 다른 예능들의 이름도 언급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전부 허소윤 CP가 담당하는 프로그램들이었다.
“허 참.”
허소윤이 노골적으로 비웃음을 지었다.
“거기 본부장, 곽성찬이랬나? 곽 본부장은 자기가 한 일 까먹었대요? 본인이 아이윌의 기획을 전부 까서 우리가 <V.I.P>를 할 수 있게 된 건데. 그걸 자기들 플랫폼에 제공해 달라고요? 독점으로?”
“그 플랫폼은 우리 채널T의 것도 될 거야. 투자는 이미 결정했다고 하니까.”
허소윤은 머리가 아팠다.
자본 논리로 굴러가는 업계이고 회사라는 것은 진즉에 알고 있었지만, 밑에서 지내는 사람들에게는 머리가 아팠다.
개인적으로는 강대한의 손을 들어 주고 싶지만, 회사의 입장이란 것을 무시할 수 없는 허소윤의 입장도 있어 그녀는 한숨을 진득하게 내쉬었다.
“……시간 있을까요? 강 PD에게 설명하고, 설득할 시간은 있어야죠.”
“시즌2 들어가기 전까지만 하면 되지 않을까? 나도 레귤러까지는 욕심 안 부릴 테니까, 네가 좀 잘 설득해 줘 봐.”
황영준도 힘없이 웃어 보여 허소윤은 더 좌절했다.
결국 저녁까지 고민하다, 허소윤은 강대한 PD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 번 연결이 안 됐다가, 두 번째 걸자 그가 전화를 받았다.
“예, CP님. 전화 온 걸 몰랐네요.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최종화 편집 중이죠?”
“아, 10화는 끝냈고, 지금은 감독판 편집 중입니다. 인터넷에 올릴 버전이랑 방송용 버전 만들고 있습니다.”
일 정말 빠르다니까. 허소윤은 감탄과 함께 슬쩍 자리에서 일어나 휴게실로 갔다.
“이야기할 게 좀 있는데, 볼 수 있을까요?”
“오늘요? 급한 일이시면 전화로 하셔도 됩니다.”
“아뇨, 보고 이야기해야 할 것 같아서.”
“예. 그럼 제가 지금 바로 상암으로 가겠습니다.”
“아니에요. 중간에서 만나죠. 합정 어때요?”
약속을 정하고, 허소윤은 바로 짐을 챙겨 일어났다.
PD들이 퇴근하려는 그녀를 찾아와 일을 던지려 했지만, 전부 밀어내고 곧장 합정으로 향했다.
밥을 먹을 일은 아니라서, 합정에서 잘 아는 조용한 카페를 찾았다.
대로에서 조금 떨어진 한적한 곳의 카페는 평소에도 허소윤이 미팅으로 자주 이용하는 곳이었다.
들어서자, 사장이자 바리스타가 그녀를 알아보았다.
“어서 오세요. 동행분 와 계십니다.”
“고마워요.”
안쪽을 가리키는 사장의 안내를 받아 들어가자, 룸에 혼자 있던 강대한이 일어나 그녀를 맞았다.
“일하는데 갑자기 불러내서 미안해요.”
“아닙니다. 불러내실 만한 일이겠죠.”
그 정도 믿음은 있다는 그의 태도가 고마웠다. 앞으로 할 이야기를 들으면 고맙지 않겠지만.
커피를 시키고 한 모금 마시면서 마지막으로 할 말 정리를 한 허소윤이 입을 뗐다.
“오늘 여기저기 기사가 떴더라고요. NBS에서 만드는 플랫폼 이야기가.”
“예. 저도 봤습니다. 이야기는 전부터 들었고요. 전략기획실에서 주도적으로 진행하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강대한도 그 건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오늘 기사가 뜨고, 전략기획실의 곽성찬 본부장이 주도를 하고 있고, 국내 방송업계 통합 플랫폼으로 만들려고 한다는 원대한 포부가 있다는 내용을 봐도 크게 와 닿는 것은 없었다.
그렇겠거니, 하는 마음만 드는 것이, 스스로 생각해도 NBS에 마음이 많이 떠났구나 하는 자각만 더 얻었다.
“거기서 채널T에도 콘텐츠 제공 요청을 했습니까?”
“눈치 빠르네요. 맞아요.”
“뭐,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니까 짐작은 했습니다. 다만…… 이렇게 찾아오신 일이라면, 단순 제공을 요청하는 건 아니겠군요.”
역시 눈치가 빠르다.
허소윤은 숨길 것 없이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눈앞의 이 남자는 그녀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나이로는 가늠할 수 없는 눈썰미와 통찰력이 있었다.
숨긴다고 해도 들킬 것이고, 어차피 길게 숨길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그렇군요. 독점 제공이라.”
“엘도라도와의 계약이 어긋날 일은 없어요. 거기도 독점을 원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공적으론 그렇겠지만, 엘도라도가, 라이언 킴 매니저가 맘 상해할 순 있겠죠.”
그게 허소윤의 입맛이 쓴 이유다.
강대한도, 라이언 킴도 괜찮은 사람인데, 윗선의 판단으로 양쪽에게 안 좋은 기억을 줄 수도 있는 것이다.
“미안해요.”
거듭 사과하는 허소윤이 강대한의 눈치를 살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쪽 빨아 먹는 그의 표정은, 그녀의 우려만큼 어둡지 않았다.
시즌2부터는 NBS가 만드는 플랫폼에 독점 제공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기분 나빠 할 것이라 여겼는데, 겉으로 봐서는 그런 티가 전혀 나지 않았다.
“미안해하실 거 없습니다. CP님 잘못도 아니잖아요.”
“그래도요. 내 위치가…… 이런 걸 막아 줘야 하는 위친데…….”
“지금까지도 충분히 배려해 주셨습니다. <V.I.P>가 이렇게 잘된 건 CP님 덕분이니까요. 시즌2 진행을 안 할 것도 아니고, 한다면 채널T에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해야죠.”
“아, 그럼…….”
“엘도라도든, 아니면 NBS 플랫폼이든, 괜찮은 쪽으로 진행해 주십시오.”
그때, 착각이었는지 모르겠지만, 강대한은 허소윤의 머리 위를 슬쩍 눈짓했다.
거기에 뭔가가 있는 것도 아닌데.
몇 번 그런 시선을 본 적이 있었기에, 단순한 습관이라고 생각하고 넘어갔다.
“다만.”
다시 시선을 내린 강대한이 허소윤에게 빈틈없는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시즌2는 제가 만들지 않을 것 같습니다.”
* * *
기사가 뜨기 하루 전.
최종화의 편집으로 편집실에서 거의 산 뒤, 편집 감독을 집으로 퇴근시키고 나서야 나는 내 자리로 돌아왔다.
시계를 확인하자, 아슬아슬하게 맞췄다.
“편집 끝났어?”
“예. 최종 확인만 하고 보내면 됩니다.”
“편집이 점점 빨라지네. 다음에 우 PD 것도 좀 도와줘.”
오늘도 촬영으로 자리에 없는 우철민 PD의 의자를 봐주고 나는 허허롭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가자.”
“예.”
서인하 선배는 내가 준비가 끝나자 곧장 일어났다.
오늘은 저녁 약속이 있었다.
아마 저녁 식사와 함께 반주가 있을 것 같아서, 나는 가는 길에 자양강장제와 숙취해소제를 들이켰다.
“누가 보면 오늘만 살고 죽을 것 같다. 미팅에다 그쪽 GP도 나오는 거니까, 그렇게 술은 안 마실 거야.”
“알고 있습니다. 그냥 제가 불안해서요.”
어쩌면 올해 들어 가장 큰 미팅 자리가 될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이렇게 긴장하고 있는 것이다.
막히는 길을 뚫고 강남에 도착했다.
지정된 빌딩에 주차를 하고서 상가 2층으로 올라가자 고급 한식집이 나왔다.
나도 TV에서나 몇 번 보던, 유명 셰프가 운영한다는 한식집이었다.
“일행이 있으십니까?”
“라이언 킴 님과 약속입니다.”
“와 계십니다. 들어가시죠.”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가자, 다소 어두운 조명의 룸이 나왔다.
룸 안의 6인용 테이블에는 2명이 도착해 앉아 있었다.
“어서 오세요, 강 PD님.”
한 명은 라이언 킴. 오늘도 멋들어진 캐주얼 슈트 차림이었다.
그리고 그의 옆에, 새파란 눈에 금빛 도는 갈색 머리가 전형적인, 미국인이 앉아 있었다.
그가 바로 엘도라도 한국지사의 제너럴 매니저, 매튜 본드였다.
라이언 킴에게 몇 번 이름만 들었는데, 그와 이렇게 마주 앉게 되는 날이 온 것이다.
“안뇽하세요. 매튜, 입뉘다.”
매튜 본드가 어색한 한국말로 인사를 건네왔다. 듣자 하니 한국말은 잘 하지 못한다고 해서, 오늘은 라이언 킴이 통역도 맡을 예정이었다.
“반갑습니다. 강대한입니다.”
“서인하입니다.”
미팅 짬이 넘쳐흐르는 서인하 선배도 조금 긴장한 얼굴이라서, 새삼 이 자리의 무거움을 일깨웠다.
자리에 앉아, 나오는 요리에 맞춰서 잠깐의 담소가 오갔다.
매튜 본드는 어설픈 한국말을 최대한 사용하려 했지만, 라이언 킴의 확인을 받아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노력하려는 모습이 계속 전해져서, 나와 서인하 선배도 절로 그에게 호감을 가졌다.
“오! 봤숩니다. <Undercover singer>, 아주 좋았습니다!”
라이언 킴이 내가 만든 방송 이야기를 전해서, 매튜 본드가 아주 반가워했다.
라이언 킴은 ‘몇 번 제가 말씀드렸는데 드디어 보셨나 봅니다’라고 부연 설명하면서 쓰게 웃었다.
“재밌게 봐주셨다고 하니 영광입니다.”
“그러타면…… 어…….”
한국말에 한계를 느낀 매튜 본드가 라이언 킴에게 뭐라고 영어로 전하자, 그가 통역해 우리에게 전달했다.
“<언더커버 싱어>를 엘도라도에서 만들어 보는 건 어떠냐고 하시네요. 어렵겠죠?”
“아…… 그건, 네. NBS 재산인 콘텐츠고, 그쪽에서 이미 다음 시즌 제작하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 말을 전하자 매튜 본드도 상심한 표정으로 끄덕였다.
“NBS에서 다른 방송사들과 만들고 있는 플랫폼이 꽤 진행되고 있다고 합니다. 저희와 오픈이 비슷할 수도 있을 듯해서, 저희도 조금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어요.”
교포에게는 어려운 표현을 쓰면서 더듬이처럼 손가락을 세워 보이는 라이언 킴의 제스처에 나와 서인하 선배가 웃음을 흘렸다.
“그쪽도 나름 열심히 준비하고 있을 테지만, 엘도라도 측에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너무 그렇게 금칠 안 해 주셔도 됩니다. 한국 방송계의 문이 두껍다는 걸 요즘 많이 느끼고 있거든요.”
“오픈이 밀린다거나 할까요?”
“최대한 그러진 않으려고 하는데…… 규제다, 제도다, 확실히 미국이랑은 많이 달라서요. 저희도 준비한다고 했는데, 예상보다 시간을 많이 잡아먹고 있습니다.”
여전히 가벼운 어투지만, 내용은 그렇지 못했다.
엘도라도 같은 거대 회사가 한국에 들어오는데 이런 이야기라니.
영등위 등의 방송 관계 기관들 이야기일 것이 뻔해서, 나와 서인하 선배도 묵묵하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한국에서 방송 만들고 서비스하려면 언제나 싸워야 하는 것들이죠.”
“이런 곳에서 그런 콘텐츠들을 만들고 계셨으니, 새삼 존경하게 됐습니다.”
인사치레겠지만, 우린 기쁘게 그 인사를 받아들였다.
“Anyway.”
우리 이야기를 필사적으로 알아들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던 매튜 본드가 화제를 전환했다.
당연스레 사용하는 유려한 영어 발음에 시선이 그쪽으로 돌아갔다.
그가 라이언 킴에게 뭐라고 속삭이고, 라이언 킴이 대신 입을 열었다.
“저희 제안은 생각해 보셨습니까.”
올 것이 왔다.
엘도라도 오픈 이야기나 하려고 모인 자리가 아님은 우리 서로가 알고 있었다.
서인하 선배가 나와 눈을 마주치고, 회사를 대표해 대답했다.
“엘도라도에 독점 콘텐츠를 제작, 제공하는 건.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분명 양사에 좋은 기회가 될 거예요.”
그 말을 매튜 본드에게 전하자, 그 또한 크게 웃으며 악수를 청해 왔다.
한바탕 악수가 테이블 위를 오간 다음, 내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기획안을 가져와 봤는데, 보시겠습니까?”
“기획안요? 벌써요?”
라이언 킴이 놀라워하고, 그 말을 들은 매튜 본드가 박수를 치며 손짓했다.
나는 가방에서, 방수정 PD의 도움을 받아 영어 버전으로 작성한 기획안을 두 사람에게 각각 넘겼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돈 많이 듭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걱정되는데요.”
“그만큼 투자해 주신다고 하셔서, 욕심 좀 부려 봤습니다.”
라이언 킴이 절로 긴장하는 얼굴을 하고서, 매튜 본드와 함께 기획안을 내려다보았다.
몇 초 안 되어, 첫 페이지의 제목만 보고서 매튜 본드가 급히 시선을 들었다.
“……Zombi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