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신뢰의 형태
“…….”
“…….”
잠깐.
지금 내가 제대로 들은 건가.
“예?”
난 무심결에 되묻고 말았고, 방 PD가 기획안에 선을 슥슥 긋다가 나를 쳐다보았다.
“뭐가?”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그러겠다고 했는데?”
어라, 잘못 들은 게 아니네.
두 번째로 확인하기 위해 서인하 선배를 봤더니, 그 표정으로 이미 설명해 주고 있었다.
“수정안으로…… 가겠다고?”
“예. 2번으로 찍고, 1번은 좀 더 다듬을게요. 그럼 되겠죠?”
“어, 그, 그렇지.”
“그럼, 네. 그렇게 하는 걸로 알고 있을게요.”
방수정 PD는 대번에 말을 정리하고는 먼저 일어났다.
우리는 멍한 시선으로 그녀의 등을 쫓다가, 그녀가 자리에 가서 앉은 다음에야 정신을 차렸다.
“이렇게 쉽다고?”
서인하 선배가 허어, 한숨 소리를 내면서 등받이에 깊숙이 기댔다.
“또 대판 싸울 거 각오하고 대한이 널 부른 건데 말이다. 네가 한마디 했다고 저렇게 맘을 바꾸다니.”
“거의 맘 돌리셨던 거 아닙니까?”
“너를 괜히 불렀겠냐? 정말 안 들어먹어서, 네 의견이라도 들어 보자 하고 부른 거야. 너는 내 편 들어줄 것 같았고. 그런데…….”
그런데 내 말 한마디에 방수정 PD가 금방 고집을 꺾었다는 것이다.
결코 그런 사람이 아닌 것을 서로 잘 알기에, 아니 나보다는 서인하 선배가 더 잘 알기에 황당함은 더 지속되었다.
“아무래도 수정이가…… 너를 많이 믿고 있나 보다.”
“방 PD님이요?”
“원래 남의 이야기 잘 안 듣는 애인데, 네 말은 기획 초안부터 시작해서 잘 듣잖아.”
그런가.
나도 스스로 믿기는 힘들어서 볼을 긁적였다.
스승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내 말을 이렇게 신뢰해 주니 기쁘기는 한데, 한편으론 무한대로 부담스러워서 죽겠다.
“어쨌든 잘 풀려서 다행입니다. 덕분에 다른 기획도 나오겠네요.”
“너는 어때. 잘되고 있어?”
“저야 뭐. 8화까지 촬영도 마쳤고, 이제 마무리만 생각하면 됩니다.”
“시즌2 떡밥 넣어 달라고 했지?”
“마지막 촬영 때, 스튜디오 멘트에 집어넣을 예정입니다. ‘다음 시즌에는 또 누가 여러분의 VIP가 될까요’ 하는 식으로요.”
황영준 국장은 여전히 레귤러를 밀고 있긴 한데, 아이윌에서는 시즌제로 하고 싶다는 뜻을 전달해 둔 상태다.
시즌2를 하더라도 아마 곧바로 진행이 될 것 같긴 하지만, 레귤러보다는 일정 진행에 부담이 덜 되어서이다.
“<V.I.P>도 잘 굴러가니 다행인데…… 이제 남은 건 우 PD 쪽이군.”
들어온 김에 우리는 그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우철민 PD의 입봉작인 웹드라마.
제목은 <나인틴스 미스터리>로 결정되었다.
2000년대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학교에서 일어나는 미스터리한 사건들을 주인공이 해결하는 청춘 미스터리물이었다.
웹드라마 특성상 10~20분 내외의 짤막한 분량이지만, 30편의 편성이라서 총 길이는 꽤 되는 편이었다.
엘도라도에서 온 제안에 따르자면, 1시간 내외의 이야기로 재편집하여 전 세계로 방영될 예정이기도 하다.
<미션 트립> 쪽이야 워낙 베테랑인 방수정 PD가 맡아 주고 있어서 별 문제가 생기지 않지만, <나인틴스 미스터리>는 조금 사정이 다르다.
“지난주부터였나? 촬영 들어간 게.”
“예. 우 PD님이 메인으로는 처음 들어간 거라 많이 긴장하고 있었습니다.”
“가서 좀 체크해 줘야 하는 거 아냐?”
“음, 그게…….”
나는 괜시리 볼을 긁적였다.
가서 체크를 하고 싶은 마음은 있긴 한데.
내가 뭐라 이야기를 못 하자 서인하 선배가 피식 웃었다.
“민희 때문에 그래? 여친 챙기는 것처럼 보일까 봐?”
“음. 솔직히 그렇습니다. 우리 식구만 있는 것도 아니고, 눈치가 좀 보이네요.”
“뭘 그런 걸 따지고 그래? 넌 지금 팀장이자 CP인 위치야. 우 PD가 나이가 많다고는 해도 이제 입봉이면 너한테 도움을 받아야 할 위치이고. 드라마이긴 하지만 어쨌든 네가 가서 체크하는 것은 나쁜 게 아냐. 그리고.”
서인하 선배가 피식 웃었다.
“여자친구 좀 챙기겠다는데 누가 뭐라 그러겠어. 너무 티 내는 거 아니라면 괜찮아.”
서로 다르게 일했을 때는 모르겠지만, 민희는 이제 본격적으로 아이윌에 합류해서 일하고 있다.
작가팀장으로서 작가진을 관리하면서, <나인틴스 미스터리>의 메인 작가로도 있다.
마찬가지로 입봉작이기도 해서 지금도 현장에 나가 있는데, 그렇다 보니 내가 얼굴 비추는 것이 괜히 찜찜한 것이다.
하지만 대표님께서 이렇게 이야기를 해 주시는 거면.
“그럼 오늘 한번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분위기 좀 보고 와.”
회의실을 나서서 곧장 짐을 챙겼다.
촬영장이 어디인지는 스케줄 공유가 되어 있어서 잘 알고 있었다.
가방을 둘러메자 옆자리에서 방수정 PD가 은근히 말을 걸어왔다.
“내 밑에서 일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젠 팀장 역할도 곧잘 하네.”
“방 PD님이 조금 덜어가 주시면 좋을 텐데 말입니다.”
“응, 싫어. 수고해.”
그렇게 농담 따먹기를 나눈 다음에, 나는 회사를 나섰다.
드라마 촬영장은 관악구에 있는 고등학교였다.
내비게이션이 표시하는 대로 찾아 들어갔더니, 학교 입구에서부터 기재를 실은 트럭이나 발전차들이 주르륵 서 있었다.
“지금 촬영 중이라 못 들어가십니다.”
외주 협력사의 FD로 보이는 남자가 내 차를 막아서, 나는 명함을 꺼내 보여주었다.
“아이윌 강대한입니다.”
“……아! 강 PD님이시군요! 들어가세요!”
내 명함보다 얼굴을 알아본 티를 내면서, 그가 즉각 닫힌 철문을 열어 주었다.
안쪽으로 들어가 주차장에 차를 대자, 운동장 외곽에 벤치에 제작진이 몰려 있는 것이 보였다.
주차를 해 놓고 잠깐 차 안에서 우철민 PD와 민희가 어디 있는지를 찾았다.
그들은 벤치에 배우들을 앉혀 놓고 다음 찍을 장면을 설명하는 듯했다.
그 설명이 지나고, 배우들에게 스태프가 붙어 준비를 시작하는 틈을 타 스리슬쩍 접근했다.
“잘 되어갑니까?”
“응? 어라, 웬일이야?”
가장 먼저 고개를 든 것은 민희였다.
나를 보자 얼굴에 활짝 미소가 도는 것이, 잘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 PD 왔어? 안 그래도 대표님이 올 거라고 하던데.”
카메라 감독이랑 이야기를 한 다음 우철민 PD가 아는 체를 해 왔다.
그들이 내어주는 간의 의자에 앉으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우리 직원들에게 인사도 하고, 또 안면이 있는 외주사 직원들에게도 고개 인사를 하면서 분위기를 살폈다.
“별일 없죠? 촬영 진행은 잘 되고 있는 것 같은데.”
“뭐야, 촬영 잘 하고 있나 감시하러 온 거야? 나 보러 온 거 아니고?”
민희가 장난스레 히죽 웃자, 옆에 있던 여자 스태프들이 우웩 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그것도 있고. 촬영 시작되었는데 한 번도 오지 않은 것 같아서, 잘 하고 계신가 하고 왔지.”
“역시 감시 맞네.”
민희가 입을 삐죽대자, 다시 주변에서 웃음이 터졌다.
다행히도, 꽤 뒤에 합류한 민희이지만 스태프 사이에 잘 녹아들어 있는 것 같았다.
워낙 싹싹하고 호방한 성격이라서 어딜 가나 잘 적응하긴 하지만, 그래도 여자친구라고 좀 걱정을 했는데. 다행이었다.
“안 그래도 한번 물어볼까 했는데. 잘 왔어, 강 PD.”
“네?”
그때, 모니터링을 하던 우철민 PD가 손짓해서 나를 모니터 앞으로 불렀다.
그가 모니터로 보이는 카메라 시야를 가리키면서 물었다.
“여기 4번이랑 5번. 각도 어때 보여?”
“음…… 다소 앵글이 좀 겹치는 것 같아 보이는데요. 빛 받는 것도 그렇고. 누가 한 명 서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
내 말에 우철민 PD가 후배 PD를 시켜서 카메라 앞에 세웠다.
그가 멀뚱히 서 있는 장면을 카메라들이 잡아내고, 그 상태에서 나는 몇 개의 카메라 각도를 조정해서 구도를 만들었다.
“음, 이렇게 하면 겹치지도 않고 표정이 좀 더 세밀하게 잡힐 것 같네요.”
“오케이. 고마워. 역시 강 PD야.”
우철민 PD가 엄지를 척 들어 보이는 것을, 나도 엄지 척으로 맞장구쳐 줬다.
AGD 앱의 도움도 없이, 이제 이런 앵글 조정은 얼마든지 할 수 있게 되었다.
드라마인데도…… 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촬영이 다시 재개되었다.
방해되지 않게 내가 뒤로 물러난 사이 민희도 덩달아 물러났다.
“너는 왜.”
“나야 뭐 대본 체크만 하면 되니까.”
그래서 벤치 뒤쪽, 촬영장이 보이는 각도에서 둘이 나란히 서게 되었다.
괜히 주변 시선이 신경 쓰이긴 하는데, 다행히도 내가 걱정하는 만큼 주목하지는 않았다.
여자친구라서 괜히 혼자 설레발 친 거였나 하는 좌절감도 살짝 드는데,
“새롭게 보이더라.”
“응?”
문득 옆에서 민희가 툭 내뱉은 말에 고개를 돌렸다.
“아이윌에 오고 나서 보니까…… 새삼 네가 새롭게 보이더라고.”
눈을 끔뻑이다가 되물었다.
“다시 고백하는 건가?”
“아니거든.”
민희가 옆구리를 퍽 소리 나게 쳐서 소리를 지를 뻔했다.
부끄러워하긴, 하고 한 번 더 도발하려고 했다가 진지한 표정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NBS에 있을 때 팀 움직이는 걸 보긴 봤지만…… 뭐랄까, 아이윌에서는 이 팀 저 팀 전부 관여하고 컨트롤하잖아. 그런 게 가능한 것도 신기하고, 그걸 네가 하고 있다는 게 대견하기도 하고. 그래서 새롭게 봤다는 거야.”
음, 이것도 칭찬인가.
요새 왜 이리 대놓고 칭찬하는 사람이 많은 거지.
그런 칭찬에 익숙지 못해서 영 껄끄러운데, 그게 또 여자친구라서 뭐라고 하지도 못하겠고.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냥…… 내가 본 대로 하는 것뿐이야.”
“본 대로 한다 해도, 그걸 못 하는 사람이 더 많을걸. 좀 전에도, 카메라 앵글 잡아 주는 건…… 예능과는 분명 다를 텐데도 아무렇지 않게 하잖아.”
“그건…… <더 라이벌>의 경험도 있고, 그러면서 금완승 감독에게도 어느 정도 배웠고, 그래서 가능한 일인 거지. 주변 사람들이 다 잘 가르쳐 줘서 그래.”
그런 내 변명 아닌 변명에, 민희가 나를 보더니 히죽 웃었다.
“그래, 이런 건 하나도 안 변했네.”
“또 뭐가.”
“너 밖에서 엄청 돌아다닌다는 소문, NBS 안에서도 많았거든. 나야 알지만, 그걸로 나쁘게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고. 하지만…… 이런 건 안 변해서 다행이야.”
음,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이건 이거 나름대로 칭찬인 것 같아서 또 부끄럽다.
나는 주변을 슬쩍 살핀 다음, 그녀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시끄러. 일이나 하러 가. 난 좀 보다 갈 테니까.”
“훗, 부끄러워하긴. 네네, 그러시죠. 잘 보고 가셔.”
민희가 손을 흔들면서 다시 연출팀으로 합류했다.
모니터 옆에 앉아서 금방 촬영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니, 내 걱정이 얼마나 기우였는지 새삼 다시 깨달았다.
서인하 선배가 걱정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매끄럽게, 촬영은 진행되었다.
잠깐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제작진도 그렇고 배우들도 그렇고, 모두가 열심히 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이 팀이 만들고 있는 웹드라마가 얼마만큼 잘될지는 AGD 앱을 보지 않는 이상 모르겠지만, 나는 그저 그 훈훈한 정경을 지켜보기만 하기로 했다.
* * *
『[특집] ‘V.I.P’는 누구인가? 보이지 않는 VIP의 세상』
『채널T ‘V.I.P’ 최종화 앞두고 시청률 7%대 안착!』
9화 방영 직후 올라온 시청률 기사에 허소윤 CP와 나는 일찍 축포를 터뜨렸다.
“시즌2 확정 났어요. 빨리 준비하죠, 우리.”
“일단 마무리에 집중하고 나서, 기획 잡아서 보여 드리겠습니다.”
좋은 소식에 스리슬쩍 한 발을 뺀 다음, 또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여행 예능의 마술사’ 방수정 PD, 또 통했다! ‘미션 트립’ 호평 출발!』
『<시청률is> ‘미션 트립’ 2% 시청률로 출발! 아직 갈 길이 멀다!』
『‘미션 트립’ 효과? 여행지 문의 쇄도……』
토요일 오후 5시라는 괜찮은 시간대임을 감안하면 아쉬운 시청률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그전 프로그램은 1%대도 나오지 않았기에 KSB 내에서도 거는 기대가 있었다.
무엇보다, 방수정 PD의 귀국 후 첫 프로그램에 급한 제작 일정임에도 소기의 성과를 거뒀으니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판단이었다.
“아직 아냐.”
하지만 우리의 방수정 PD는 고개를 저었다.
“아쉬운 부분이 많아. 시간이 좀 더 있었다면, 편집으로 재밌게 살릴 수 있는 부분이 있을 텐데.”
“파일럿이잖습니까. 감독판 형식으로도 살릴 수 있을 겁니다.”
“아니, 재방송부터 고쳐야겠어.”
방수정 PD는 결국 편집실에서 편집 감독을 들들 볶아 재편집본을 만들고야 말았다.
KSB에서야 감독판이라고 이름 붙여서 인터넷에 올리고 재방송을 돌리니, 그걸로도 또 괜찮은 수치가 나왔다.
오랜만에 돌아온 방수정 PD는, 정말 예전보다 더 능력자가 되어 있었다.
『아이윌 웹드라마 ‘나인틴스 미스터리’ 티저 공개!』
『<금주의이슈>레트로+청춘+미스터리, 복합 장르 웹드라마 ‘나인틴스 미스터리’에 주목하는 이유!』
웹드라마 <나인틴스 미스터리>도 드디어 티저 공개로 시작을 알리고, 아이윌의 작품이 하나씩 이름을 얻어가는 그때.
『‘듀플릭스’ ‘엘도라도’를 겨냥하는 토종 OTT 플랫폼 오픈 초읽기!』
내 뇌리에서 꽤 사라져 있던 소식이 기사로서 눈앞에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