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4
224화.
“세리아, 나 뺨 좀 꼬집어 줘.”
“그런 거라면 맡겨.”
세리아 윌슨이 자신의 손을 마나로 강화하여 있는 힘껏 마리나 비셋의 뺨을 꼬집었다. 마리나가 금세 죽는다며 비명을 질렀다.
“아팟! 꿈 아니잖아!”
“난 처음부터 꿈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럼 왜 꼬집은 거야!”
“후우, 시우 님이 그 이후 평범하게 숨어 지내시리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이건 정말 터무니없는걸…….”
“야아아!”
두 사람…… 이서희를 포함한 3인은 WPC 회의가 해산한 후 곧장 42단계 던전에 한 번 들어갔다 무사히 클리어하고 나와, 휴식 겸 앞으로의 일을 논의하기 위해 일단 마리나의 자택에 모인 참이었다.
“둘 다 갑자기 왜 그래? 어머…….”
셋 중 가장 차 끓이는 솜씨가 좋은 이서희가 차와 과자를 내오다 말고 거실에 걸려 있는 TV화면을 발견하곤 눈이 콩알만 해졌다. 두 사람이 왜 난리를 피웠는지도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이게 대체…… 판타지 영화는 아니지?”
“나도 그렇게 믿고 싶지만 현실, 그것도 실시간이야.”
세리아가 단호히 대꾸하며 TV의 음량을 키웠다. 이서희의 귓가에 아나운서의 한껏 당황한 목소리가 꽂혀 들었다.
[현재 정시우 씨가 이끌고 있는 몬스터 무리는 이미 대서양과 인도양을 지나온 것으로 확인이 되고 있습니다. 북극해로 맹렬히 질주하고 있는 수중 몬스터의 첨단에 보이는 고래의 등 위에…….]
“아니, 무리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잖아. 저게 대체 몇 마리야……!?”
화면은 인공위성에 의해 촬영된 영상을 비추고 있었는데, 감히 셀 엄두가 안 나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수중 몬스터들의 행진이 그곳에 있었다. 물론 그들을 이끄는 것은 정시우였다.
인도양에 이어 대서양까지 정복한 그는 어차피 지구상의 수중 몬스터들이 그들을 알아차린 이상 숨어 이동하는 것도 무의미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당당하게 바닷바람을 맞아 가며 수면을 가르고 나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거대 고래의 등을 타고!
“나두 저기 있고 시픈데…….”
마리나가 팅팅 부어 오른 볼을 붙잡고 낑낑거리며 말했다. 세리아는 그녀를 무시하고 이서희에게 답했다.
“수면에 보이는 것들이 전부가 아니야. 오히려 수중에서 시우 님을 따르고 있는 몬스터의 숫자가 더 많을지도 몰라.”
“저것도 시우 나름의 무력시위일까? 이미 충분하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지…….”
“글쎄, 처음 그분이 자신이 아닌 지상 몬스터의 왕의 입지를 굳히려고 했던 점에서 미루어 생각해 본다면…… 지금 저것은 자신이 아닌 수중 몬스터의 힘을 과시하시려는 것일 수도 있겠지. 정말 모든 일을 터프하게 하시는구나.”
세리아는 그렇게 말하며 피식 웃었다. 반면 이서희는 뚱하니 찻잔을 쥐며 중얼거렸다.
“저 중의 10분의 1만 있어도 세상에 두려울 게 없겠는걸. ……하아, 이제 시우는 정말 내가 필요하지 않은 것 같네. 여태껏 필사적으로 힘을 키워 온 게 바보처럼 느껴져.”
“그런 마인드로 붙잡아 둘 수 있는 분은 아니지.”
“나, 나는 그냥 이제 친구로서…… 잠깐만. 세리아 너 지금 시비 거는 거 맞지?”
“글쎄, 어떨까.”
그 신분에는 걸맞지 않을지 몰라도 그 나이대 여성에게는 지극히 어울리는 화제로 여자들이 시끄럽게 떠들 때쯤, 정시우는 많은 여자가 자신으로 인해 괴로워하건 말건 한창 북극해로 진입하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어느 순간 공기가 확실히 달라진 느낌인데…… 이쪽으로는 뉴 에이지 이래 인간이 전혀 접근해 오지 못했겠지?”
“남극해도 그렇지만, 지구에 마나가 깃들기 시작하면서 추운 지역은 특히 더 추워졌으니까요……. 그린란드 같은 곳은 빠르게 대피하지 못한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고 해요.”
정시우는 수아린의 말을 멍하니 듣다가 허공에 손을 내밀어 보았다. 차디찬 냉기가 그의 손에 머물며 온기로 화하는 것이 선명하게 느껴졌지만, 단지 시원하다는 감상이 남을 뿐이었다.
여태껏 냉기가 강조되는 던전이나 환경에 내던져진 적은 없지만 이곳에 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냉기는 자신에게 어떠한 부정적인 영향도 끼치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진격의 반팔로 불리던 시절을 떠오르게 하네.”
“형님, 그 별명 혹시 겨울에도 붙어 다니던 거였습니까?”
정시우의 몸이 원체 튼튼하여 어지간한 추위는 느껴 본 적이 없지만 아무리 그래도 영하 40도를 반팔로 버텨 내는 깡다구는 없었다. 그는 플레이어로서 성장하며 어느덧 이전의 자신과는 완전히 달라져 버리고 만 것이다. 그 사실을 새삼스레 실감했다.
[뿌우우우오오오오오오!]
바로 그 순간 세이락시아가 길게 울었다. 정시우의 낯빛이 험악하게 굳었다.
“적이 옵니다!”
“말 안 해도 알아!”
정시우는 곧장 용의 감각을 최대로 활성화했다. 비록 그는 수면 위로 나와 있지만 수중에 있는 몬스터 모두를 커버해야 하는 입장이었으니까! 한없이 깊은 바다로부터 어떤 위험이 다가올지 파악하기 위해선 단 한시도 긴장을 풀 수 없었다.
[샤아아아……!]
[약한 놈들이…… 온다……!]
‘일단은 앞에서 밀려오나 본데. 이대로 한 번 부딪힐까?’
그러나 용의 감각을 더 뻗어 내 북극해에 살고 있는 수중 몬스터들의 기세를 가늠해 보던 정시우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인도양에 처음 진입했을 때와 같다. 단단히 벼르고 그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 이대로 부딪쳐 봤자 손해를 입는 것은 이쪽이 될 것 같았다.
“더욱이…… 이것들 마나의 느낌이 평범한 수중 몬스터와는 아예 다른데.”
정시우의 인상이 점차로 찌푸려졌다. 추운 북극의 환경에 적응한 수중 몬스터들은 아무래도 다른 지역보다 대체적으로 강인했으며, 선천적으로 냉기를 타고나는 경향이 있었다. 헤데아가 아닌 다른 신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헤데아가 아닌 다른 신……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오빠?”
“……아니. 아무것도 아냐. 나아가 보면 알게 되겠지.”
아르고스는 이미 자신을 제외한 모든 신의 파편이 지구에서 물러났다고 했으니, 이곳에서 얻을 수 있는 것도 별로 없을지도 모르지만…… 정시우는 인도양이나 대서양에서는 받지 못했던 기이한 기대감이 부풀어 오르는 것을 느끼며 한 손을 내밀었다.
“아, 그거.”
“아아.”
수아린과 용세하가 형용하기 어려운 표정을 지으며 물러섰다. 그들은 이미 인도양에서 한 번 저 말도 안 되는 기술을 본 적이 있는 것이다. 소울 포스라는 능력에 회의감을 갖게 만드는 저 기술을……!
“그럼 어디 한 번 낚아 볼까!”
그의 손등의 낙인이 밝게 빛을 발한 다음 순간, 놀랍게도 그의 손바닥으로부터 찬란한 빛을 발하는 그물이 튀어나왔다. 바로 영체로 이루어진 그물이었다.
정시우는 기세 좋게 그것을 앞으로 내던졌다. 그가 다스리는 영체들을 일시적으로 변형하여 만들어 낸 영체의 그물은 끊어지는 일도 없이 계속 튀어나와 깊은 바다로 잠수했다. 단지 그것뿐이라면 이 자리에 정시우가 아니라 어선이라도 가져다 놓으면 되겠지만…….
[큿!?]
[이까짓 그물……! 크앗!?]
정시우의 초월적인 집중력으로 탄생한 영체의 그물은 어지간한 충격으로는 훼손되지 않았다.
놀랍게도 이 기술은 거인화의 변형된 형태 중 하나로서, 영체의 그물과 정시우과 영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만큼 정시우 본인을 으스러트릴 충격이 아니고서야 그물에 손상을 입힐 수가 없는 것이다!
“아직 많이 남았어!”
정시우가 다스리는 유령은 족히 수만, 그 수만을 전부 그물로 만들어 냈으니 크기를 말해 무엇하겠는가. 어지간한 바다라면 통째로 담아낼 수도 있을 법한 크기의 그물이 북극해로 퍼져 나갔다.
물론 그물은 그의 의지를 받아 움직이기 때문에 의사를 품고 적이 있는 곳으로 퍼져 나가 대상을 묶어 가두는 능력까지 겸비하고 있었다.
[그래 봤자 인간이다! 인간 한 명의 힘으로 우릴 상대하려 하다니 가당치도 않아……!]
[물러설 수는 없다. 우리는 이곳을 지켜 낸다!]
그러나 불가능했다. 수 킬로미터에 이르는 그물이 풀려나 그 안에 무수한 숫자의 수중 몬스터를 가두기까지 그물을 빠져나올 수 있는 몬스터는 없었다! 수십만을 호가하는 몬스터들의 힘을 합쳐 한 명 인간의 완력을 이겨 낼 수 없었던 것이다!
정시우는 그물을 한계까지 뻗어 낸 후 양손으로 그것을 붙잡고는 음, 약간의 신음을 토해 냈다.
“확실히 인도양보다 손맛이 센데.”
“이미 오빠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모르겠어요.”
[뿌우우이이이이이.]
그물 전체에 가해지는 몬스터들의 강한 저항에 세이락시아가 죽는 소리를 냈다. 정시우도 그 이상 버티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그는 괴력을 있는 힘껏 끌어 올려 내며, 카오스 윙을 펼쳐 하늘로 비행했다!
“으랏차아아아아아아아아!”
“이야아아…….”
용세하가 영화라도 보고 있는 것처럼 감탄사를 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광경이었다. 피막의 날개를 펼쳐 하늘로 떠오르는 인간, 그 인간이 붙들고 있는 영체의 그물.
[크아아아아아아아아!]
[날 놔줘, 날 놔줘!]
[이 인간을 반드시 죽여 버리고 말겠어!]
그리고 점차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내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그물에 갇혀 아우성치고 있는 무수한 괴물들! 한 마리만 등장해도 플레이어 파티의 생존을 위협할 수도 있을 고위 몬스터도 그 안에 심심치 않게 끼어 있었다.
“이어서 그대로…….”
정시우는 어느덧 까마득한 상공으로 솟구치고 있었다. 수십만 마리의 몬스터가 갇힌 그물과 함께! 그러던 한순간 정시우는 그물을 단단히 붙잡고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물 안에 갇힌 몬스터들의 비명을 BGM 삼아 열심히 회전운동을 시키다가, 그대로 그물을 허공으로 내던졌다!
[끄아아아아아아아!]
[이 안에서 풀려나기만 하면……!]
허공에서 회전하던 도중 그물이 거대한 공으로 모습을 변환시켰다. 단 한 마리의 몬스터가 빠져나갈 틈도 없이 촘촘한 그물의 공이 완성된 것이다.
한편 정시우는 바다에 파랑을 일으키며 수면 위에 사뿐히 착지한 후, 중력에 따라 공이 하강하는 것을 지켜보며 재차 한 손을 뻗었다. 그 손에 잡히는 것은 물론 그의 애병 마신의 징벌!
정시우는 순식간에 초거대화 공정을 마친 망치를 수면 위로 길게 늘어트려 잡으며 세이락시아에게 당부했다.
“다들 맘마 먹을 준비하라고 해라.”
[뿌이!]
세이락시아의 기운찬 대답에 고개를 끄덕여 주고, 양손으로 망치 손잡이를 꽉 움켜쥐고, 그물의 공이 마침 적당한 위치로 떨어지는 것을 파악한 즉시 정시우는 망치를 있는 힘껏 위로 내질렀다.
하늘에서 무서운 기세로 떨어져 내리던 그물의 공이 망치와 접촉하는 그 순간, 하늘이 쪼개지는 것만 같은 굉음이 터져 나왔다!
[카학!]
그 단말마는 누구의 것이었을까, 그리 중요하지는 않았다. 공에 갇혀 있던 누구나가 그 비슷한 단말마를 내질렀을 테니까.
공이 허공에서 화려하게 폭발했다. 물론 정시우의 혼과 이어져 있는 것들인 만큼 그의 공격에 데미지를 입는 일은 없었다.
그물의 공은 정시우의 망치가 준 충격을 온전히 몬스터들에게 전달해, 최소 빈사에서 최대 사망에 이르기까지, 그물에 갇혀 있던 몬스터를 빠짐없이 전투불능 상태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아, 아아…….”
[뿌우이이이이이이!]
[하늘에서 양식이 떨어진다!]
수중 몬스터의 사체가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져 내리고, 그것을 기다리고 있던 토종 몬스터들이 우르르 몰려와 그것을 받아먹었다. 수아린은 그 광경을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생각하다가 이내 금붕어 어항에 물고기를 주면 이렇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좋아, 그러면 앞으로 나아가 볼까. 너희, 아직 먹이 많이 남았으니까 배는 적당히 비워 둬야 한다.”
[알겠습니다, 대리자님!]
그로부터 꾸준히 북극해를 나아가길 한 시간, 정시우 일행은 드디어 죽음의 섬 그린란드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