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5
225화.
“이것 봐, 기운이 다르다니까.”
그린란드에 발을 딛자마자 정시우의 입가에 씨익 미소가 그려졌다. 아직 그만큼 신의 기운에 민감하지 못한 수아린과 용세하는 대체 지금 그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도 알아듣지 못했다.
“뭐가 어떻게 다른데요?”
“헤데아와는 다른 신의 기운이야. 수중 몬스터들을 상대할 때만 해도 헤데아의 것과 비슷한가, 했지만 역시 달랐어. 정확히는 그렇게 위장을 했던 것 같은데…….”
그리고 지금은, 놀랍게도 대지의 신인 유고의 그것을 닮은 기운이 그린란드 전체에 가득했다.
만약 이곳에 서 있는 이가 정시우가 아닌 다른 이였더라면, 정시우라고 해도 북극해의 몬스터들을 겪지 못했더라면 감쪽같이 속아 넘어갔을지도 모르지만…… 그는 그 정도로 둔한 인물이 아니었다.
“다른 신들의 기척을 빌어 자신의 존재를 숨기고 있어. 다른 신들도 동의를 한 일일까? 아무래도 아닐 것 같은데…….”
“그렇다 해도 인류의 적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겠죠?”
“아마. 더 죄질이 나쁠지도 모르지.”
아르고스는 분명 모든 신들이 지구에서의 휴전을 합의하고 물러났다고 했지만…… 세상에 절대란 없는 것이다. 모든 신을, 정시우마저 속이고 발칙한 흉계를 꾸미고 있는 신이 있을지도 모르는 노릇. 정시우의 입가에 어린 미소가 점차 짙어졌다.
“자, 어디려나. 바다에 있으려나, 대지에 있으려나. 하늘은 아니겠지.”
[뿌이?]
“아, 그렇지.”
정시우는 육지에 내려선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세이락시아에게 돌아서 녀석의 콧잔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섬을 둘러보고 있을 테니까 너는 그동안 바다를 확실하게 확보하고 있으렴. 특히 이 묘한 기운의 진원지를 탐색하는 데 중점을 두고. 이젠 다른 애들도 냉기에 충분히 저항할 수 있지?”
[뿌이!]
[물론입니다, 대리자님!]
[배, 배불러…… 더 이상은 못 먹어…….]
한 시간 동안 금붕어 밥을 주는 데 집중한 효과는 확실했다. 북극해의 수중 몬스터들을 탐욕스럽게 먹어 치운 토종 몬스터들은 그들의 기록과 마나로부터 냉기에 저항하는 유효한 수단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고, 이젠 정시우가 그물로 적들을 낚아 올리지 않아도 저들끼리 훌륭한 사냥꾼 노릇을 할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자, 그러면 바다는 문제가 없을 것 같긴 한데…….”
“오빠가 뭘 생각하시는지 알 것 같아요.”
인간의 기척이라곤 찾을 수도 없고, 싸늘한 냉기와 대지의 기운이 결합된 기묘한 마나만이 두둥실 떠도는 그린란드의 새하얀 전경을 살피며 중얼거리던 정시우에게 수아린이 말했다.
“에리우를 불러오시려는 거죠.”
“응.”
에리우가 대지의 몬스터의 왕이 되었다고는 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남극 대륙과 북극 대륙을 제외했을 때의 얘기였다. 그나마 캐나다와 러시아에 접하고 있는 지역은 얼추 정복이 끝났지만, 그린란드를 비롯해 북극점 근처로는 진출을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엘의 말에 따르면 그녀가 몬스터를 이끌고 영역을 확보하게 되면 그곳과 사막의 낙원을 잇는 게이트가 새로이 만들어졌다고 했었으니까…….”
“이곳에서도 그게 가능할 것이라는 건가요.”
정시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그리고 남극까지.”
“지구 대탐험이네요…….”
정말로 한 수백 년은 지구에 돌아올 생각이 없지 않고서야 이런 대담한 결심을 할 수 없을 텐데. 수아린의 표정이 지극히 아득해지는 가운데 정시우는 그린란드의 대지 위에 휴식처의 열쇠를 꽂았다.
“좋아, 어쨌든 해 보자고. 엘한테도 일거리를 줘야지.”
휴식처가 8레벨로 성장하며 정시우도 어지간히 휴식처와 관련된 것들을 다루는 요령이 늘었다.
지금은 단지 휴식처와의 통로를 개방한 것만으로 거주지역까지 바로 연결하고, 거주지역에 위치한 게이트를 통해 재차 사막의 낙원과 통하는 게이트를 열어 낼 수 있을 정도였다. 레벨 5로 성장한 문의 힘이었다.
[음? 슈인가?]
“그래, 나와 봐.”
게이트를 통해 곧 엘이 기어 나왔다. 대충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인간 여성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그에게 반갑게 인사하며 곧장 달려들려다 말고 갑자기 자신의 몸을 끌어안았다.
“추, 춥구나.”
“북극의 그린란드야.”
“으으, 그런가. 잘 알겠다.”
엘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장 자신의 모습을 변환했다. 세이락시아가 자신의 사이즈를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게 된 것처럼 그녀 역시 평범한 덩치의 백호로 모습을 바꾸었다.
[한결 낫군. 날 여기로 안내해 주었다는 것은…… 내게 바라는 것이 전투인가?]
“맞아. 이곳뿐만 아니라 남극대륙까지 확실하게 끝내 버리자고.”
[역시 그런가…….]
어라, 꿈에 그리던 과업의 달성을 눈앞에 둔 지금 기뻐해도 모자랄 판국에 엘의 표정이 그리 좋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정시우가 그것에 대해 묻기도 전에 엘이 가벼이 한숨을 내쉬고는 그린란드의 대지 위에서 발을 굴렀다.
[음, 내 능력은 확실히 발휘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면 정예들을 위주로 불러내지. 물론 슈, 너도 도와주는 것이겠지?]
“그래야지. 이곳에서 찾고 싶은 게 있거든.”
[네가 뭘 찾고 싶어 하는 건지 대충 알 것 같다. 나도 흥미가 가는군.]
태어나서부터 줄곧 격전을 치러 온 엘에게 있어 몬스터 무리를 통합하여 아프리카 대륙에 왕국을 세운 이후의 나날은 제법…… 상당히 지루했다. 앞으로 신들을 따르는 이세계 몬스터 무리의 침입이 줄어들게 되면 더더욱 지루해지겠지.
그렇기에 더더욱 그녀가 지구에 남은 미답지를 정복하려 들었던 것이기도 했다.
[모두 나와라! 이곳에 아직 우리를 모르는 자들이 있다!]
[우오오오오오오오!]
정시우가 열어 둔 채인 통로를 통해 무시무시한 숫자의 육상 몬스터들이 빠져나왔다. 에리우와 함께 지상의 최전선에서 함께 전투를 벌이는 수만 마리의 엘리트 몬스터들이 뛰쳐나와 도열하는 광경은 실로 압도적이기까지 했다!
수아린은 그것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퍼뜩 떠오른 생각이 있어 정시우를 바라보았다.
“오빠, 이거, 혹시…… 다른 세계에서도 가능한 일이에요?”
“응, 아마?”
어쩌면 조금 힘이 부족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휴식처를 9레벨까지 올려 두면 확실하겠지. 남극까지 쓸어버릴 때쯤엔 얼추 거기에 필요한 만큼의 마석이 모일 것이다.
그의 대답을 들은 수아린은 이젠 더 이상 그에 대해 놀랄 일이 없으리라고 생각했던 스스로를 반성했다.
“휴식처를 통해 직접적으로 몬스터를 불러낼 수 있게 된다면…… 오빠는 아예 지구의 전력을 그 몸에 품고 다니는 것이나 다름이 없게 되네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 별 의미가 없는 일이라 그리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있었지만.”
의미가 없다는 것은 물론 간단한 얘기다. 휴식처와 거주지역을 단숨에 통과하는 게이트를 열어 수중 몬스터나 지상 몬스터들을 불러낼 수 있게 되었다고 해도, 그런 녀석들로 신의 파편을 품은 강적을 상대하기란 요원하다.
그렇다면 이 몬스터들의 무력이 통하는 놈들을 상대할 때 불러내자니 그 정도 놈들은 정시우가 얼마든지 가볍게 쓸어버릴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강한 놈이 약한 놈들을 떼거지로 몰고 나타난다거나, 하면 그땐 도움이 되겠지.”
“네에, 그야 물론 그러시겠죠…….”
수아린이 기가 막혀 대꾸하는 동안 드디어 정예 몬스터들이 모두 게이트를 빠져나왔다. 레벨이 300에 근접하거나 넘기는 놈들만 모아서 도합 6만 6천 마리, 집합하여 정렬하기까지 고작 3분도 걸리지 않았다.
[그럼 출발해 볼까. 슈, 내 등에 타겠는가?]
“정중히 거절하겠습니다.”
[어째서냐, 그 고래의 등에는 잘만 타면서!]
“너와 뿌이의 다른 점을 곰곰이 생각해 보렴.”
역시 라이벌 설정이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되어 있다고 생각하며 정시우는 카오스 윙을 힘껏 펼치고 날아올랐다. 그 뒤를 수아린과 용세하가 따르고, 대지에서는 살짝 삐진 에리우를 선두로 6만 6천여 마리의 지상 몬스터가 있는 힘껏 내달렸다.
“대기가 칼날처럼 피부를 찌르는 것 같아요. 역시 평범한 지구의 환경과 비교하면 이곳만 한 3스테이지 정도 더 위험한 곳 같은데…….”
“형님, 선배님, 보이십니까? 북극해를 떠다니던 유빙도 굉장했지만 눈으로 얼어붙은 대지는 더욱 강력한 변이를 일으킨 것 같습니다.”
그린란드의 대지는 과거 인간이 살고 있던 시절과는 격변하여, 눈과 얼음이 얼어붙은 대지가 마치 거울처럼 대지 위와 창공의 모든 대상의 모습을 깨끗이 비추어 보이고 있었다. 얼음이 거울처럼 변한 것이다!
그 모습이 무척 아름다워 볼리비아에 있다는 우유니 사막 위를 지나는 것만 같았지만…… 정시우는 겉으로 보이는 모습에 호락호락 쉽게 속아 넘어갈 이가 아니었다.
“대지 위에 신의 마력이 흐르고 있네. 흐음, 과연 대충 알 것 같기도 하고…….”
“저것만 보고 벌써 뭔가 깨달으셨단 말이에요?”
“겨울의 신…… 일까요?”
겨울의 신이라, 계절을 관장하는 신이 있어도 이상할 것은 없겠지만 정시우는 그것만은 아닐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만한 신이 있다면 여태까지 지구에 그런 신의 흔적이 남지 않았을 리가 없는 것이다. 세상에 어디 겨울만 있겠는가, 봄과 여름, 가을도 있지 않은가.
“애초에 계절은 인간이 바뀌는 자연환경을 넷으로 구분해 놓은 것에 불과하잖아. 물론 겨울에 더욱 강해지는 신은 있을지 모르겠지만 끽해 봤자 얼음이나 냉기의 신일 거야.”
“그럼 이곳에 숨어 있는 것도 그런 신일까요?”
“아니, 그런 녀석들은 아닐 거야. 곧 알게 될 테니까 기다려 봐. 사실 아직 나도 확신은 없거든.”
적은 금방 나타났다. 거울 같은 대지 위, 언제부터 생겨난 것인지 알 수도 없게 홀연히 모습을 드러내는 몬스터들! 상공에는 비행 몬스터들이, 대지에는 육상 몬스터들이 제각각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자 용세하는 더욱 큰 혼란에 휩싸였다.
“대체 저렇게 많은 종류의 몬스터를 한꺼번에 통솔하는 신이…….”
“그냥 지구에서 태어난 몬스터들 아녜요?”
“의심도 많네. 자, 그러면……!”
에리우는 적과 조우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시우에게 권속으로서의 예를 지키려는 것처럼 먼저 발톱을 내밀지 않고 놈들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것을 알아차린 정시우는 고개를 끄덕이곤 인벤토리에서 군멸포를 들어 있는 힘껏 방아쇠를 당겼다.
“사냥 시작해 볼까!”
[쿠와아아아아앙!]
하늘에서 쩌렁쩌렁한 굉음이 울려 퍼지는 것과 동시에 엘 역시 거울의 대지를 박차고 질주를 개시했다! 정시우의 예상처럼 땅에 강하게 깃든 신의 힘이 정체 모를 에너지를 발해 엘의 발을 붙잡으려 들었지만, 그녀는 자신이 지닌 대지의 힘으로 그것을 손쉽게 막아 내 버렸다!
그녀가 이끄는 몬스터 무리 역시 그녀가 지나가는 길을 따라 솟구치는 모래를 밟고 그녀의 뒤를 따라 일직선으로 질주했다. 과연 레벨 300이 넘어가는 몬스터들의 질주는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뻥 뚫리게 하는 호쾌한 면모가 있었다.
[전부 잡아 죽여라! 집어삼켜 먹어 치워라!]
[크하아아아앙!]
무리의 선두에 있던 몬스터를 단호히 앞발을 휘둘러 토막 내며 에리우가 울부짖었다. 적의 숫자는 수십만에 달했지만 열 배나 많은 숫자를 앞에 두고도 에리우가 이끄는 몬스터들은 물러나지 않고 용맹하게 덤볐다. 그녀와 함께하는 한, 대지에서 승리를 거두는 것은 바로 그들이 될 테니까!
“좋아, 보기 좋네.”
한편 정시우는 처음 군멸포를 꺼내 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미 수만 마리에 달하는 공중의 적을 모조리 꿰뚫어 죽여 버렸다. 수아린과 용세하가 뭘 해 볼 틈도 없이 정리가 끝난 것이다.
“방금 분명 엘리트 개체도 있었던 것 같은데.”
“아, 이놈 말이지.”
정시우는 하도 어부 놀이를 하느라 형태를 고착화하여 뽑아내고 다루는 것이 너무나 쉬워져 버린 영체의 그물을 가볍게 던져 허공에서 떨어져 내리는 공중 몬스터들의 사체를 확보했다. 그중 한 마리, 품속에 유독 강한 마석을 품고 있는 녀석이 있었다.
“으아, 확실히 본 적도 없는 빛의 마력이긴 한데…… 그래서 이게 어떤 신의 마력일까요?”
마석만 가지고 정체를 파악하자니 이 안에 깃든 신의 힘이 너무나 미약하다. 정시우가 신의 힘을 따라하는 것도 불가능할 지경.
하지만 정시우는 파편을 보는 순간 확신할 수 있었다. 진하게 느껴지는 바람의 신 프루타의 흔적을 걷어 내면 느껴지는 미약한 마나, 여기까지 오는 길에 마주한 수중 몬스터들과 지금 지상에서 피 터지게 전투를 벌이고 있는 지상 몬스터들의 마나까지…….
“이거, 일이 점점 더 재밌어지는데.”
“그거 지금은 설명 안 해 주겠다는 뜻이죠?”
“어쩜 똑똑하기도 해라.”
정시우는 수아린이 잔뜩 볼을 부풀리며 귀엽게 투정을 부리는 모습에 피식 웃어 버리며 손안의 마석을 굴렸다. 어쩌면 그린란드에서 찾을 수 있을까?
아니, 없더라도 남극에서는 반드시 조우할 수 있겠지. 벌써부터 그때가 기대되어 참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