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홀로 로그인-218화 (218/260)

# 218

218화.

당연하게도, 사전에 준비한 순서대로 회의가 진행될 수는 없었다. 적국 수장을 앉혀 놓고 그 나라를 상대하기 위한 대책을 논의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겠는가. 결국 상황은 이전 정시우가 지하 플레이어임을 밝혔던 그때와 비슷하게 흘러갔다.

“미스터 정께 물어봐야 할 것이 많습니다. 반년의 공백은 그렇다 쳐도,”

“미스터 정, 혹시 당신과 함께 있는 여성분은……?”

“대체 누구야? 정말로 그 거대 호랑이가 맞는가?”

“확실히 거대하긴 하지만…… 아니, 이 말은 잊어 줘.”

회장은 그리 나쁘지 않은 느낌의 동요로 일렁이고 있었다. 벌써부터 효과가 나고 있다는 생각에 정시우의 입가에 득의의 미소가 걸렸다.

인간이란 이렇다. 비록 내용물이 같다는 것을 알고 있어도, 보기만 해도 위협적인 거대 호랑이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과 한눈에 반할 것만 같은 매력적인 미녀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에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

비단 이 자리에서만이 아니라, 앞으로 그녀를 마주하게 될 다른 일반인들의 관점에서 특히, 말이다.

“이, 한심한 것들이…… 마법으로 인간처럼 보이게 만들었을 뿐이잖아! 그렇게 넋 놓고 있을 테야!?”

“마법이 아니다.”

마리나, 정시우에 대한 악의로 똘똘 뭉쳐 목에 칼이 들어와도 그들을 부정할 준비가 되어 있던 몇몇 이들이 목소리를 높이려던 그때, 늦지 않게 엘 본인이 입을 열었다.

무척이나 매끄럽고 정확한 영어 발음, 그 안에 은은하게 담긴 그녀의 위엄이 대부분의 사람들을 입 닥치게 했다.

“내 이름은 에리우. 지구에서 태어나 지상의 몬스터들의 왕이 된 모래 호랑이다. 인간의 모습이 된 것은 나의 주인의 힘이다.”

“주인이라니…….”

“슈…… 정시우다. 그와는 본래 동맹을 맺고 있었으나, 서로 뜻이 맞지 않아 전투를 벌인 끝에 그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따라서 지금 나는 그의 뜻에 절대적으로 따른다.”

“지배, 라니…….”

“정말로 그 많은 몬스터를 정시우가……?”

대충 예상은 하고 있었던 일이었지만 직접 들으니 그 충격이 더욱 지대했다.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 짐작하고 눈을 질끈 감아 버리는 이, 엘과 정시우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이, 반발심을 억누르지 못해 입을 뻐끔거리는 이…… 수많은 인간군상 앞에서 엘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인간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다음은 나한테 맡겨.”

정시우가 엘의 어깨를 두드려 주고는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 단상에 섰다. 원래 그곳에 설 준비를 하고 있던 사회자가 화들짝 놀라 물러서며 자리를 양보해 주었다.

“어째서 내가 이 자리에 서 있는지는 다들 알 거라고 믿습니다. 에리우와 그녀를 따르는 몬스터들이 전쟁을 원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이 그들을 공격하려 한다는 얘기를 듣고, 우리는 이곳에 왔습니다.”

자신의 정체를 스스로 밝히고, 정시우와의 관계를 확실히 한 것만으로도 엘의 역할은 끝났다. 그녀 스스로 정시우의 수하가 될 것을 자청한 이상, 지금부터는 정시우의 차례다. 그가 해야 할 일이라고 해도 남은 잔불을 확실하게 짓밟아 끄는 정도만 남아 있었지만.

“그들이 앞으로 인간을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고 어떻게 장담하지? 무려 수억을 넘는 규모의 몬스터인데!”

“간단해. 인간을 공격해서 얻을 이득이 없거든. 이들을 이세계의 신들을 따르는 몬스터들과 동일하게 취급하면 안 되지. 애초에 이들이 인간에게 동맹을 요청했던 것도 함께 이 땅에서 살아가기 위해서였어. 살아가는 것, 지금 우리 인간의 목표와 동일하다고.”

그렇다. 이 모든 이야기의 출발점은 ‘생존’이 아니면 안 된다. 공동의 적을 상대로 하는 투쟁에서, 인간과 토종 몬스터가 같은 편에 서 있음을 납득시켜야 했다.

……그것이 정시우의 최초의 목표였다.

“저들은 몬스터입니다. 저들의 말을 어떻게 믿는다는 겁니까?”

하지만 그 생각은 인류에 의해 부정된 지 오래. 그들에게 있어 이세계의 몬스터들과 지구에서 태어난 몬스터들은 다를 바가 없는 적이었고, 지구의 몬스터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설령 그들과 동맹을 맺는 것이 이성적인 판단이라고 해도, 본능적으로 몬스터를 거부하고 마는 것이다. 그것은 이제와 엘이 인간의 모습으로 변했다 한들 단숨에 바꿔 놓을 수 없는 절대적인 인식이었다.

“에리우는 지상 몬스터의 왕이며 그녀는 내게 복종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정시우도 강수를 꺼내 들었다. 이미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진 사회, 인간들이 애써 유지하고 있던 문명세계의 형태마저 완벽하게 바스러트리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녀의 모든 것이 나의 것이며, 나에 의해 완벽히 통제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특별히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나의 소유물에 흠집을 내려는 자들은 나 역시 가만히 놔둘 수가 없습니다.”

“협박…… 지금 전 세계를 대상으로 협박을 하고 있는 겁니까?”

“하, 협박이라니.”

정시우는 피식 웃곤 대꾸했다.

“소유자로서 당연한 권리를 주장하고 있는 것뿐이야.”

소유자. 아프리카 대륙을 뒤덮고도 남을 만큼 압도적인 숫자의 몬스터 왕국의 소유자. 그 선언이 지니는 힘에 감히 숨도 쉬지 못할 지경이다. 그러나 그 분위기 속에서도 용감하게 손을 들어 올리는 이가 있었다.

“당신의 말을 믿는다고 쳐요. 하지만 우리는 지금 당장이 아니라, 앞으로 수십 년, 수백 년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당신이 없어지면, 혹은 몬스터들의 우두머리가 바뀌면. 그때 우린 어떻게 하면 되죠?”

“그건 그 시점에 지구에 살고 있는 인간과 몬스터들한테 맡겨야지, 왜 나한테 수백 년 후까지 책임지라는 거야? 장난 치냐?”

“히익.”

“뭔가 착각하고 있나 본데, 더 이상 당신들은 에리우와 동맹에 대해 이야기할 자격이 없어. 그 자격은 네놈들이 에리우를 거부하고, 내가 그녀를 거둔 순간 박탈난 거라고. 지금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단 한 마디야. 이 이상, 내 걸 건들지 마.”

정시우 역시 알고 있다. 자신이 얼마나 폭군처럼 보일지, 이날 이후 얼마나 많은 것들이 바뀔지.

그럼에도 해야만 했다. 그들을 둘러싼 모든 상황이 바뀌었는데 언제까지고 소꿉장난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아프리카는 인간의 영역입니다. 미스터 정, 정말로 그녀의 주인이라면 당신은 그들이 아프리카에서 물러나도록 확실하게 지시해야 합니다.”

“아프리카가 인간의 것이라고 주장하려거든, 애초에 잘 지켜 냈어야지. 아프리카는 지금 지상 몬스터의 소유야. 뭐 다르게 보면 내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

“뭐……!? 당신은 지금 당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습니까!”

알고 있다.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보다도 잘.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느냐고.”

정시우가 한 손을 들었다. 그의 손바닥 위에서 번개가 튀고, 모래의 회오리가 몰아치더니, 그것이 물 덩어리로 변하고, 불꽃이 되더니, 마지막으로 바람이 되어 회장 전체로 흩어졌다. 그 안에 담긴 거력을 알아차리지 못할 사람은 적어도 이 자리에는 없었다.

“세상이 변했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거다, 머저리들아. 다른 무엇보다도 생존의 가치가 가장 높아진 시대, 지금부터 당신들이 맞이해야 할 시대를 말하고 있는 거야.”

“…….”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 이상 정시우에게, 그리고 엘에게 무어라 함부로 말을 할 수 있는 이는 없었다. 현실을 외면하기 위해 누구나가 뒤집어쓰고 있던 가면을 정시우가 강제로 벗겨 버린 것이다.

그들은 기존의 방식으로는 더 이상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했다. 그것이 신들의 일부가 되어 버린 세상과, 그들의 전장으로 전락해 버린 세상을 보며 정시우가 내린 결론이었다.

“나와 엘 이야기가 정리되었으니, 이제 마지막 남은 녀석을 소개해 줘야겠네.”

“뿌이?”

정리라기보단 초토화라는 말이 더욱 잘 어울리는 상황이었지만 정시우는 개의치 않고 다음 순서로 넘어갔다. 묵묵히 정시우에게 달라붙어 있던 세이락시아를 살짝 앞으로 내밀며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이 녀석은 지금 바다 몬스터의 우두머리 격인 몬스터야. 육지와는 달리 사정이 상당히 빡세서 바다의 패권을 완전히 찾아오지는 못했지만 곧 그렇게 될 거야. 이쪽은 인간들 앞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지만, 엘의 존재를 알리는 김에 같이 해 두라고. 세기는 얘가 좀 더 세.”

“큿…….”

“뿌이!”

어딜 어떻게 보나 훌륭한 무력과시였지만 물론 사람들은 묵묵히 그것을 듣는 수밖에 없었다.

엘과 세이락시아가 확보한 영역만 해도 인간들이 소유하고 있는 영역보다 거대했고, 힘의 규모로 따지는 것은 이미 부질없는 수준. 그리고 그 둘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정시우.

이쯤 되면 굳이 그에게 영상의 진위를 캐묻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무슨 대답이 돌아오든 두려움에 떨게 될 테니까. 그 분위기를 파악한 정시우 역시 고개를 끄덕이곤 마이크에서 손을 놓았다.

“후, 그러면 나는 여기까지. 부디 앞으로는 서로 오해하고 싸우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 다들 같은 편이니까 말이지.”

“……미스터 정의 발언이 끝났으면, 본격적으로 회의를 시작합시다.”

장내가 완전히 고요해진 가운데 사회자가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회의는 무슨 회의? 회의의 궁극적인 목적이 이미 완벽하게 파탄이 났는데! 짙은 피로감에 절은 눈을 한 플레이어들을 앞에 두고, 사회자는 사전 준비했던 자료 가운데 엘과 그녀가 이끄는 몬스터의 전력에 대한 자료만 쏙 빼놓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금 이 순간도 실시간으로 지구에 발을 들이고 있는 이세계의 무리들에 대한 회의입니다. 최근 들어 이세계 몬스터의 침입률이 낮아졌다는 보고가 있어, 그것에 대한 자료를 취합했습니다.”

“아.”

그러고 보면 그랬다. 인간들이 엘이 이끄는 몬스터들을 상대로 핵이니 화학 무기니 사용해 가며 공격하려고 했던 것은 지금 인간들이 이세계 몬스터들을 크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만큼 여유로웠기 때문이지 않던가!

엘과 세이락시아의 입장만 정리해 두고 돌아갈 생각이었던 정시우의 귀가 사회자의 목소리를 들으며 쫑긋거렸다.

“그냥 우연히 그런 시기인 것 아녔어?”

“그게 그렇지가 않아, 슈.”

“슈라고 하지 마라.”

패왕의 포스를 뿜어내던 것이 거짓말이라는 듯이 자리로 얌전히 돌아와 앉은 정시우에게 마리나가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한편 엘은 세이락시아를 견제하느라 다른 일에는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정말 어째선지는 모르겠는데 요즘 게이트가 열리는 일이 줄어들었어. 그렇다고 하늘성 던전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나 하면 그런 것도 아니거든?”

“수중던전은 지상이나 하늘과는 완전히 별개의 영역이니, 그 얘기를 해 봤자 별 의미는 없고…… 역시 일시적인 현상 아냐?”

“최소한 3달 이상 된 일인걸.”

실제로도 그랬다. 취합된 자료를 보니 세계 각지의 몬스터 발생 빈도나 ‘신의 흔적’과 관련된 사건 발생이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현저히 줄어들고 있었던 것이다.

세 달이라, 기나긴 세월 동안 전쟁을 치러 온 신들의 관점에서 보면 별로 길지 않은 시간이었다. 신들 대다수가 말려든 커다란 전투라도 있었더라면 그 정도의 공백은 설명이 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정시우는 어딘가 걸리는 것을 느꼈다.

‘놈들은 나를 피하기 위해서 자신들이 다스리는 세상에서도 힘을 빼내고 있었지. 그렇다는 건, 설마…….’

정시우가 두려워 지구로의 침입을 포기하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스스로 생각하고도 어이가 없어 실소가 나왔다.

‘하지만 만약 이 현상이 그대로 유지된다고 한다면…… 좀 더 확실하게 알아볼 필요성은 있겠지.’

생각을 마친 정시우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무런 실속도 남지 않은 회의에 집중하는 척하던 플레이어들이 일시에 움찔하는 모습이 상당히 재미있었지만 이미 충분히 너덜너덜해진 이들을 더 괴롭히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가 볼게.”

“어디로?”

“수중던전.”

지금 지구상에서 아직 정시우가 완벽하게 정복하지 못한 유일한 영역. 크라켄조차 일정한 구역의 수문장에 불과한, 깊고 넓은 심해. 분명 그곳에 가면 헤데아의 다른 종자를 만날 수 있으리라.

“뿌이!”

“그래, 같이 가자.”

“슈, 나도 간다!”

“넌 바닷속에서 견딜 수가 없잖아.”

“그럴 수가…….”

“뿌우이이이.”

기껏 인간이 되어 정시우와 함께 있을 수 있게 되었다고 기뻐하던 엘이 축 늘어졌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세이락시아가 엘을 따라하며 웃는 목소리를 냈다. 정시우는 웃으며 녀석들을 쓰다듬어 주고는 날개를 펼쳤다.

지구에 마지막 남은 미답지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