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9
219화.
[수중던전으로 진입합니다.]
[이미 클리어된 지역은 차후 지구의 바다로 편입됩니다. 일부는 거주지역에 통합될 것입니다.]
[두 번째 진입입니다. G구역과 H구역이 바다의 신의 세력에 의해 수복되었습니다. G-2구역으로 진입합니다.]
“오.”
정시우는 수중던전에 진입하자마자 눈앞에 떠오르는 메시지에 작게나마 감탄사를 내질렀다.
실은 수중던전의 구역이 나뉘어 있고, 해당 구역의 몬스터를 정리할 때마다 던전에 미치는 신의 힘이 완벽하게 사라지는 것을 보며 얼추 예상을 하기는 했다. 그리고 혹시나는 역시나가 되었다.
바다의 신, 아마도 헤데아가 수족을 동원하여 수복한 지역을 제외하고는 전부 지구로 편입된다니! 만약 크라켄을 처치하고 정시우가 그곳에서 버티며 몬스터들을 더 처리했더라면 G구역과 H구역까지도 완벽히 지구의 영역으로 만들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얘기다.
[뿌이.]
“그래, 이전보다 기운이 많이 옅어졌지?”
물론 그것은 정시우가 일행을 이끌고 이 지역을 한 번 쓸어버렸기 때문이다. 그가 수중던전을 찾지 않은 지난 몇 달간 아주 천천히 던전에 새로운 몬스터들이 들어왔고, 지금 G구역은 이전 그가 처음으로 수중던전에 들어왔을 때의 A, B구역에 버금가는…… 쉽게 말하면 초보구역이 되어 있었다.
“이런 곳까지 일일이 돌아볼 필요 없어. 바로 핵심으로 가자.”
“그러다가 또 크라켄 같은 녀석이 나오면요?”
“그게 지금 내가 가장 바라는 바야.”
정시우는 루타의 말을 기억했다. 헤데아를 이루고 있는 많은 신들…… 그들의 파편이 고스란히 지구로 넘어와 크라켄과 같은 괴물을 만들어 낼 수 있었지만, 그런 만큼 힘을 회수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지금 지구에서 이세계 신들의 위협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헤데아만은 그러지 못할 터, 단서를 얻을 수 있다면 분명 이곳이리라. 그는 생각을 정리하는 것과 동시에 세이락시아에게 명했다.
“뿌이, 쓸어버려.”
[뿌우우우우우오오오오오오오!]
거대 고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세이락시아가 힘차게 포효했다. 지난 세월 자신을 따르는 수중 몬스터들과 함께 전 세계 바다를 떠돌며 완숙해진 고유능력의 발동! 일대를 이루고 있는 바닷물이 세이락시아의 의지를 이기지 못하고 거센 흐름을 만들어 냈다.
“꺄아아아악!”
“좋아, 신나게 밟아 보자고!”
[뿌이이이이이!]
제트코스터라고 불러도 무리가 없을 격류! 그것은 정시우 일행을 빠르게 앞으로 쏘아 보내는 동시에 곳곳에서 숨죽이며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심해의 몬스터들을 신속하게 갈아 버렸다. 이동과 공격을 동시에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뿌이 녀석, 이전부터 강했지만 정말 어마어마하게 강해졌군요……!”
“바다의 패자를 자칭하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지.”
[뿌이!]
정시우의 말에 세이락시아가 자랑스럽게 웃었다. 사실 지구의 바다라면 몰라도 헤데아의 힘이 퍼져 있는 수중던전에서 바닷물을 마음대로 조종한다는 것은 지금 일행의 생각보다도 굉장한 일이었다.
반년 전 정시우가 생각 없이 던진 말 한 마디에 세이락시아가 얼마나 빡센 노력을 거듭해 강해졌는지, 그들은 차마 짐작할 수도 없을 것이다.
[H구역에 진입합니다.]
[I구역에 진입합니다.]
“좋아, 여기까진 아직 별 거 없어.”
레벨 200 이상의 수중 몬스터들이 득시글거리는 H구역을 눈 한 번 깜짝할 사이에 통과하고, 최소레벨 250 이상의 몬스터들만이 존재하는 I구역에 들어서서도 일행의 표정은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당장 대한민국 영해에 I구역의 몬스터들만 풀어놓아도 나라 멸망에 준하는 대재앙이 일어나겠지만, 지금 일행의 무력 수준은 지구의 평균을 아득히 넘어 있었다.
“신들이 다스리는 세상에서 한껏 강화된 녀석들만 보다가 이런 애들을 보니까 조금 반갑기까지 하네요.”
“레벨로는 우리와 별 차이가 없지만 말입니다.”
항상 정시우에게 도움이 안 된다며 좌절하는 수아린과 용세하만 해도, 정시우의 레벨이 오를 때마다 꼬박꼬박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본인들만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거기에 어떻게든 그들이 정시우에게 보탬이 되기 위해 아득바득 노력해 성장시킨 스킬까지 더해지면 정시우만 제외하고는 지구최강임을 자처하는 마리나마저 내려다볼 수 있을 정도였다.
[뿌이이!]
“좋아, 그다음 구역으로 넘어간다. 뿌이, 그전에 저것들 다 던전 바깥에 던져 버려.”
I구역을 완전히 클리어하고 J구역으로 넘어가는 그 순간 던전의 틈새가 드러나고 바깥으로 빠져나갈 수 있는 출구가 생성된다. 정시우가 지시를 내린 것도 바로 그 순간!
[뿌우우우우우!]
세이락시아는 여태까지 본인이 만들어 낸 급류에 휩쓸려 허무하게 목숨을 잃은 수중 몬스터들의 사체를 한순간에 전부 그 출구로 내보내 버렸다. 아마 바다 생물과 토종 몬스터들의 좋은 먹이가 되어 줄 것이다.
[I구역이 완전히 클리어 되었습니다. 근시일 내에 신의 힘으로 수복되지 않는 한 천천히 지구의 바다에 편입됩니다.]
[J구역에 진입합니다. 거대한 기척이 느껴집니다.]
“음……?”
그리고 드디어 그것이 왔다. 한없이 불길하고도 거대한 기척이, 으레 요구레벨이 높은 던전에 들어갔을 때 도전자들을 맞이하는 ‘감히 너 따위가 나의 잠을 깨웠는가?’ 같은 뉘앙스의 압박감을 담고 그들을 덮쳐 온 것이다. 그 기세를 느끼자마자 수아린이 기겁하여 중얼거렸다.
“정말로 크라켄 말고도 뭔가 거대한 놈이 있었잖아욧……!?”
“딱 보면 모르냐, 크라켄은 이상하게 등장시기가 빨랐다니까. 아무리 봐도 중간 보스였잖아.”
“우으…… 이렇게 된 이상 RPG에서 흔히 있는 패턴인 ‘던전의 어려움을 강조하려다 보니 중간 보스가 보스보다 더 강해져 버렸다’ 같은 상황을 기대하는 수밖에…….”
정시우는 당장이라도 예시가 몇 가지나 떠오를 법한 발언을 하는 수아린은 애써 무시하고 심해를 헤쳐 나아갔다. 이전 크라켄과의 일전에서 배운 것이 있는 만큼 미리 세이락시아의 머리에 손을 얹어, 녀석의 고유능력을 강화해 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보다 깊숙한 영역으로 들어갈수록 사방에서 느껴지는 헤데아의 힘이 그들을 거부하고, 밀어내려고 했다. 세이락시아는 자신의 고유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하여 적지에서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했고, 정시우는 고유능력 강탈로 그것을 도왔다. 착착 맞아떨어지는 그들의 연계는 마치 마법을 보는 것만 같았다.
[네놈들이구나.]
그로부터 조금 더 어두운 물살을 가르며 나아가자 비로소 그들의 귓가에 직접 목소리가 꽂혀 들어왔다. 늙은 남성의 목소리였지만 정시우는 이미 목소리로 상대를 판단하는 것은 포기하고 있었다.
“요즘 좀 어때?”
[가증스러운 미소는 집어치우는 것이 좋다. 크라켄을 죽인 것이 바로 네놈이 아니던가.]
정시우와 세이락시아가 확보한 영역 너머로부터 문득 거대한 촉수 하나가 날아들었다. 그러나 금방이라도 정시우의 몸통을 꿰어 버릴 것만 같던 그 촉수는 정시우가 가볍게 내민 손에 맞닿는 순간 형체를 유지하지 못하고 산산조각으로 터져 나갔다. 정시우가 다루는 힘이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성장했음을 보여 주는 일수였다.
“거무죽죽한 것이 크라켄보다 더 징그럽네.”
[……크라켄에 이어 내게 있는 힘까지 빼앗으려고 찾아온 것이냐?]
크라켄과 전투를 벌였던 때보다도 정시우의 능력이 크게 성장했음을 파악한 놈의 목소리에 더욱 큰 경계의 기색이 깃들었다. 정시우는 솔직히 대꾸했다.
“그것도 그거지만, 요즘 지구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 때문에 묻고 싶은 게 있어서 말이야.”
[지금 당장이라도 서로를 죽여 마땅할 지경에 그렇게 태연한 말을 지껄이다니 정말 어처구니없는 인간이군. 아니, 이미 인간이라고 보는 것은 무리가 있는가…….]
놈은 기가 막혀 중얼거리는가 싶더니 잠시간 침묵에 빠졌다. 그러나 일행이 역시 촉수괴물과의 대화 따위는 무의미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을 즈음, 갑자기보다 깊은 곳에서부터 천천히 무엇인가가 떠오르는 것이 보였다.
[반년 전의 네놈이었더라면 무시했겠지만…… 필멸자의 몸으로 초월자의 격을 넘보고 있는 지금의 네놈에게라면, 최소한의 예의는 갖추는 것이 맞겠지.]
“우와아아아아.”
어둠 속에서 떠오르는 것의 실체를 파악한 수아린이 형용할 수 없는 신음소리를 냈다. 그들을 촉수로 공격해 왔으니 물론 촉수로 구성된 몸일 것이라고는 생각했지만,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놈의 형상이 그녀의 생각보다도…… 더욱…….
[나는 헤데아 님의 권속 가운데, 아직 화신의 반열에 들지 못한 추종자…… 아르고스다.]
“……헤데아의 권속은 다 이 모양이야?”
[인간의 심미안으로 나를 판단하고 있는가. 그렇군, 아직 관념은 인간의 그것에 묶여 있는가.]
“버릴 필요가 없는 것들은 가져갈 생각이야. 지금 네 모습을 보고 있으면, 너희네 관념이야말로 지나치게 단순한 것 같은데.”
딱 잘라 말하자면, 놈은 앞뒤, 위아래를 도저히 구분할 수가 없는 형태를 띠고 있었다.
정시우가 용의 감각을 얻게 되면서 전신으로 사물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던가? 놈은 용의 감각이 없어도 능히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눈과 코와 귀가 사방에 달려 있어 360도 모든 방향을 커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르고스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도 충분히 짐작이 갔다.
놈은 거기에 팔과 다리를 대신하는 촉수가 수십만 개 이상 돋아나 있어, 크라켄이 귀여워 보일 만큼 흉악한 외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설마 그걸 마나와 육신의 합일이라 주장할 생각은 아니지?”
[육신에서 기인하는 감각과, 마나에서 기인하는 감각…… 둘을 일치시키기 위해서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다. 그로서 마나와 육체의 움직임 또한 일치될 수 있다.]
이런, 녀석은 완벽하게 엇나가고 있었다. 정시우는 자신이 이렇게 되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곤란한 것은 잘못된 방식으로 쌓아 왔다고는 해도 이 괴물 놈의 마력과 육체능력만은 확실히 끔찍히 강하다는 것. 아차 하는 순간 동료를 잃을 수도 있을 것이다.
“좋아, 어느 쪽이 옳은지는 싸워보면 알 수 있겠지.”
정시우는 언제든 거인화를 할 준비를 하며 마력을 돋웠다. 용의 감각은 이제 반쯤 그의 육체와 동화되어 있어, 그가 경계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극도로 활성화되어 날카로워졌다. 보지 않고도 수아린의 피부에 돋은 솜털의 개수까지 셀 수 있을 정도였다.
[나 역시 싸우지도 않고 목숨을 내놓을 생각은 없으나…… 그전에 먼저 네놈의 의문에 답해 주지.]
“음?”
[지금 지구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관해 궁금한 것이 아닌가? 네놈이 무엇을 의문으로 삼는지는 충분히 알고 있다. 그러니 답해 주겠다는 것이다.]
“……으음?”
그런데 기껏 전의를 고조시키고 있던 정시우를 놈의 차분한 목소리가 진정시켰다. 설마 순순히 질문에 대한 답을 들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당황한 그를 향해 아르고스가 설명을 이었다.
[썩 만족스럽지 못한 상황이지만, 네놈이 이것을 알고 있는 편이 헤데아 님께도 도움이 될 터이니…… 듣거라. 지금 여러 신들은 지구에 손을 대는 것을 ‘보류’하고 있다.]
“뭐?”
상상도 못한 대꾸에 벙 찐 정시우가 입을 헤 벌렸다. 아르고스의 말이 이어졌다.
[그것이 모두 네 공이다. 성스러운 신의 힘의 흔적은 물론 병력까지, 투입하는 대로 네놈에 의해 말살되고 있으니…… 지금 당장 지구에서 벌이는 전쟁에는 의미가 없다는 판단을 내린 신들이 지구에서의 휴전을 선언한 것이다.]
“휴전이라니…… 어느 정도나?”
아르고스는 머뭇거림 없이 답했다. 그 대답을 듣는 순간, 정시우는 과연 자신이 아직까지 ‘인간의 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사실을 단단히 깨닫게 되었다.
[5천 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