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7
217화.
비 오는 봄날, 살짝 나른한 오후. WPC는 뉴욕 UN 본부 건물에서 중대한 발표를 앞두고 주요 인사들을 모두 소집했다. 바로 아프리카 대륙을 점령하고 세력을 심상치 않게 불리고 있는 몬스터 무리에 대한 마지막 입장과 대처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비셋, 그 양반 일가는 뭘 단단히 잘못 먹은 게 분명해. 여태까지 인류를 위해 쌓은 공헌도를 전부 깎아 먹고 있는 거나 다름이 없지.”
“지금만큼 한곳에 뭉친 몬스터를 처리할 수 있는 적기가 달리 또 찾아올 것 같아? 인류의 존망이 걸린 문제인데 대체 무슨 멍청한 소리를 하고 있는 건지…….”
사실 WPC, 아니 세계 각국 정부의 입장은 이미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엘의 힘을 두려워한 몇몇 나라만은 전면적인 교전을 반대하고 있었지만, 대다수 국가는 몬스터를 떼거지로 소탕할 수 있는 이 기회를 놓치고 싶어 하지 않았다.
“말하는 몬스터, 그게 저들이 배척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신들과 무엇이 다르다는 거지?”
“뒤통수를 맞고 나서는 늦…….”
“입장과 고향이 다르다니까!”
회의에 참가하게 된 고위 플레이어들이 저마다 뒷담을 하고 있던 중, 뒤에서 불쑥 작은 얼굴의 여자가 고개를 들이밀며 말참견을 했다.
“몇 번을 말해야 아는 거야? 다짜고짜 인류를 변질시키려는 것들하고, 외부의 적을 상대하기 위해 최소한의 동맹 관계를 맺자는 이들하고는 다르잖아?”
“마, 마리나 비셋…….”
“크흠…… 그건 오늘 회의에서 말해 주면 좋겠군요. 모두가 듣는 자리에서 말입니다.”
“흥, 깜짝 놀랄 테니 기대들 하라고.”
마리나는 자신의 얼굴을 보면서는 제대로 말도 못하는 플레이어들의 모습에 코웃음을 치며 그 자리를 물러 나왔다. 뒷담을 하던 플레이어들은 그녀가 그들로부터 멀어지고 나서야 간신히 숨을 몰아쉬었다.
“그 짧은 사이 더 강해진 것 같은데…….”
“42단계 던전을 고작 세 명으로 클리어했다는 말은 사실인 것 같아. 젠장, 아주 기세등등하네.”
아무리 요 반년간 플레이어들이 눈부신 성장을 거듭했다고는 해도, 플레이어라는 단어가 존재할 무렵부터 천재로 칭송받던 그녀를 따라잡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더욱이 솔로로만 활동하던 그녀가 세리아와 이서희라는, 자신 못지않은 능력의 동료들과 고정 파티를 맺고 나서는 그 격차가 더더욱 벌어졌다.
어쩌면 엘과 그 무리를 무조건 소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쪽에 무게가 실리는 것도 마리나가 엘과 비교적 원만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정시우와 마리나, 이 둘에 의해 세계 판도가 좌지우지되는 상황이 사람들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역전의 마지막 찬스야. 바보같이 몬스터들과 붙어먹는 놈들을 몰아내고…… 응?”
“뭔가 왔는데 그래.”
“링크야. 보나마나 뻔한 광고가…… 아니, 뭐?”
그것을 시작으로 장내가 순식간에 요란해졌다. 어떤 이는 그것을 무시했지만, 일단 한 번 링크를 클릭한 이들은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소리가 작아도 의식을 압도했고, 자그마한 화면으로도 영화관 이상의 충격을 안겨 주었다.
[좋아, 해보자고.]
그것은 X튜브에 올라온 영상이었다. 높은 곳에서 촬영한 사막의 영상. 바로 엘과 정시우의 전투 장면이 담긴 그 영상이었다.
정시우의 말 한 마디로 시작되는 거대 호랑이와 인간의, 마력과 육신을 총동원하여 벌이는 신화적인 전투. 차라리 조작이었으면 웃고 넘어갈 수도 있었겠지만 썩어도 준치인 고위 플레이어인 만큼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조작일 리가 없다는 사실을, 이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모두 순수한 인간과 몬스터의 마력과 물리력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나 참, 정말로 회의가 있는 이날까지 입들을 꾹 다물고 있을 줄이야.”
마리나 역시 그 영상을 보고 있었다. 물론 회장 내 사람들에게 영상 링크를 전달한 것도, X튜브를 매수하여 영상을 업로드하고 관리, 보호한 것도 그녀였다. 애초에 이 회의가 열리게 된 것부터가 정시우의 연락을 받아서였다.
당초 정시우는 사람들이 먼저 반응을 보일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것은 무른 발상이었다. 인간이 받아들일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선 힘을 관측하고 공포에 질린 사람들은 덮는다고 지워지지 않을 것임을 알면서도 그것을 외면하고 감추었던 것이다. 혹여나 그런 사태도 있을까 봐 미리 용세하에게 촬영을 지시해 두었기에 다행이었다.
“언제쯤 오려나. 이 영상이 끝나는 대로 오려나……?”
엘이 사람들 앞에 당당히 나설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하고, 한편으로 정시우 본인과 엘의 무력을 미리 알려 두어 ‘감히’ 그들에게 도전하고자 하는 무뢰배가 나타나지 않도록 사전에 차단한다. 아주 훌륭한 협박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지금 회장의 분위기를 보건대 그것은 충분한 성공을 거둔 모양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 마리나의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면.
‘시우가 이 정도로 만족할 사람이 아닌데.’
영상만으로도 충분히 전해지고도 남는 그의 박력에는 다시 한 번 반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이 공포와 의심으로 얼룩진, 어딘가 산만한 분위기마저 느껴지는 회장 내부의 공기는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여기서 짠, 하고 시우가 나타나도 극적인 효과는 주기 힘들겠지…….”
“목적은 달성할 수 있겠지만 말이야.”
“시우 님이 언제쯤 오신다고 했는지 들은 것 있어?”
그녀의 양옆에 앉아 있던 이서희와 세리아가 한 마디씩 거들었다. 그러나 마리나는 그저 어깨를 으쓱할 따름이었다.
“가늠하기 힘들 것 같다는 말밖에 못 들었어.”
“가늠하기 힘들다니…… 걸어서 오기라도 한단 말이야?”
“……창 밖에.”
이서희가 고개를 갸웃하며 반문하던 찰나, 세리아가 갑자기 살짝 굳은 목소리로 말하며 창밖을 가리켰다. 일행뿐만이 아니라 주위에 있던 다른 플레이어들까지 웅성거리며 창밖에 시선을 두었다.
“꺄아아아아악!”
“회오리…… 거대한, 회오리가.”
“토네이도……?”
그곳에서 모래 폭풍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것도 높이 수백 미터, 폭 수십 미터에 이르는 초대형 모래 폭풍이!
“우와아, 엄청 커! 역시 미국은 한국이랑은 다르구나!”
“뉴욕 시내에서, 그것도 저렇게 국한적으로, 주위 건물에는 피해 하나 끼치지 않고 자연적으로 생성된 모래 폭풍이 있을 리가 없잖아! 저건 마나야!”
드물게도 바보 같은 소리를 하는 이서희에게 세리아가 전력으로 딴죽을 걸었다. 그 즈음에는 다른 이들도 모래 폭풍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저, 저건 혹시…….”
“영상 속에 나왔던 그 호랑이란 말인가?”
“말도 안 돼, 저래서야 자연과 다를 바가…… 아니, 하지만 저기서 느껴지는 마나가!”
혼란과 공포에 가득 찬 상황 속에서 유일하게 냉정을 유지하고 있던 것은 다름 아닌 마리나였다. 이것이야말로 정시우가 바랄 법한 등장 방식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 그녀였기에 발견할 수 있었다. UN 본부와 접하고 있는 이스트 강변에서 심상치 않은 물의 격류가 이는 모습을.
“이스트 강변에 파도가 치고 있어!”
“이젠 마리나 너까지 이상한 소릴…….”
그러나 곧 세리아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폭풍우 몰아치는 바닷가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거대한 파도가 강변을 덮치는 모습을 그녀도 볼 수 있었으니까!
이것은 모래 폭풍과는 별개의 힘이다. 힘의 진동에 의한 파도가 가드레일을 박살 내고, 점차로 수면이 높아지는가 싶더니…… 끝내 그 안에서 거대한 고래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 저기 고래 머리 위에 시우 님이.”
“쓸데없이 상쾌한 표정을 짓고 있는걸…….”
“저 표정은 중간고사 시원하게 말아먹고 맥주 들이키던 때의 표정인데. 해탈이라도 한 걸까……?”
그렇다. 물론 거대한 고래의 정체는 세이락시아였다. 하나만으로는 섭섭하다고 생각했던 정시우가 한자리에서 일을 모두 끝내 버릴 요량으로 엘과 세이락시아를 모두 대동하고 온 것이다! 물론 그가 무엇을 해탈했는지는 굳이 말할 것까지도 없다.
“고래!? 어째서 고래가!?”
“모래 폭풍이 본부 건물로 점점 다가오고 있어! 보수 끝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아니, 잠깐만…… 저기 있는 건 정시우?”
“정시우가…….”
“착지했다!”
도심 속 모래 폭풍과 강변의 해일을 앞에 두고 넋이 나간 사람들. 정시우가 세이락시아의 머리에서 폴짝 뛰어내려 UN본부 앞 공원에 착지하자 건물 안에 있던 이들은 물론, 난데없는 재앙에 대피하던 모든 이들의 시선까지도 전부 그에게 집중되었다.
“이걸로 됐어.”
정시우가 가볍게 손짓하자 그 순간 해일과 모래 폭풍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물론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모래 폭풍과 해일은 어디까지나 주역의 등장을 고조시키기 위한 장치에 불과했으니까!
“고래가…… 사람으로?”
“그것보다 저길 봐, 모래 폭풍 안에서…….”
“헉.”
거대한 고래가 빛무리에 휩싸이는가 싶더니 그 안에서 깨물어 주고 싶을 만큼 귀여운 푸른 머리의 미소년이 나타나는가 하면, 완벽하게 잦아든 모래 폭풍 속에서 뚝 떨어져 정시우 옆에 착지한 것은 키로 보나 가슴으로 보나 터무니없는 비율을 자랑하는 은발의 미녀가 아닌가!
“설마 저것들이…… 몬스터란 말인가?”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마법일 거야. 마법으로 우릴 속이고 있는 거야.”
“그것보다도 어째서 정시우가 저것들과 동행하고 있는 거지? 역시 그도 몬스터였단 말인가?”
“저 고래는 일전의 태평양 항해 당시 어렴풋이 본 기억이 있는데…… 그때 우리들을 도와주었던 몬스터야. 이봐, 기억 안 나?”
“설마 그때 이미 정시우가 저 몬스터를 길들였단 말이야? 젠장, 대체 일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가슴 크다…….”
“방금 누구야!”
“하지만 진짜 크다…….”
영상이 퍼졌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회장이 들썩였다. 차라리 몬스터들만 나타났으면 모르되 정시우가 그들을 이끌고 있는 모습이 지극히 충격적이었던 것이다.
혹시 정시우가 아닌가 의심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를 양옆에서 호위하듯이 날개를 펄럭이고 있는 수아린과 용세하의 모습이 그 의문을 불식시켜 주었다.
“젠장, 정시우!”
“반년간 어딜 가 있었나 했더니 혹시 그동안 몬스터들을…….”
“그는, 정시우는 대체…….”
아직 정시우는 회장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자신의 모습을, 엘과 세이락시아의 모습을 과시하듯 느긋이 걸어오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회장의 분위기는 이미 극적으로 반전되어 있었다. 다들 깨닫고 있는 것이다. 엘이 이끄는 몬스터 무리를 적으로 규정한다는 것, 그것이 어떤 의미를 띠게 되었는지.
그것은 즉 정시우를 적으로 돌린다는 의미이고, 동시에 바다의 무수한 몬스터를 이끌고 있는 세이락시아를 적으로 돌린다는 의미이다. 엘로도 모자라 그 둘을 상대하게 된다면 인류의 허리가 아작나고 말 것이다.
“어쩐지 조용하다 싶더니 그새 이런 말도 안 되는 짓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젠장…… 제기랄!”
설령 정말로 정시우가 인간의 적이고 몬스터라고 한들,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었다. 그들과 적대하면 죽을 테니까. 인류의 반대편에 정시우가 서 있다면, 그것만으로 인류는 패배하고 게임이 끝난다. 비셋 가문과 적대하는 것 정도가 문제가 아니게 된 것이다.
회의는 아직 시작하지도 않았다. 회장에 모여든 이들이 서로 충분히 대화를 나누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어느덧 그 자리에 모인 이들의 생각은 한 점으로 수렴해 있었다.
“이제 우리에게 가능한 일이 있다면…….”
“정시우가 인간의 편이길 기도하는 것뿐인가……?”
그로부터 5분이 지나 비로소 정시우가 회장에 당도했다. 이미 자신의 목적을 이루었음을 확신하는 짙은 미소와 함께.
“구텐 모르겐! 다들 오랜만이지? 그럼 회의를 시작해 봅시다!”
패왕의 발걸음에는 더 이상, 조금의 망설임도 남아 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