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5
215화.
정시우는 사막에서 부는 마나가 섞인 모래바람에 용의 감각이 영향을 받는 것을 느끼며 경악했다. 그의 시선은 당장이라도 그를 집어삼킬 것만 같은 거대한 모래의 파도에 꽂혀 있었다.
‘이런, 미친……!? 진짜 힌트만 주면 답을 완성시켜 버리는 녀석이잖아, 저거!’
정시우는 엘의 능력에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 모래의 파도는 엘 그 자체였다. 자신의 육신을 자연과 일시적으로나마 완전히 동화시켜 그녀의 뜻대로 부리고 있는 것이다!
비록 모래사막이라는 한정된 환경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펼쳐 보이고 있는 기술을 낮게 평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피해라, 슈. 처음 사용하는 기술이기에 네가 얼마나 다칠지 짐작을 할 수 없다.]
“그렇게 말할 만하네.”
저것을 아까 그녀가 조종하던 모래의 창 따위와 똑같이 취급해선 큰일이 난다. 엘의 모든 마력과 존재가 모래의 해일에 담겨 있으니, 그의 피부에 모래 한 알이라도 닿는 순간 육체와 정신에 되돌릴 수 없는 데미지를 입게 될 터였다.
자신의 전부를 내던져 공격해 오는 것, 실로 엘에게 어울리는 방식이라고 정시우는 생각했다.
“후우…….”
정말 좋은 구경을 했다. 그녀와 전투를 치르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망설임에 종지부를 찍기 위한 과정이라 생각했는데,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수확을 많이 얻었다.
그러니, 그렇다면 이것을 그녀의 전력이라고 파악해도 되겠지.
……이제 그녀도 충분히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가능하면 방어해라, 엘.”
정시우가 해머를 앞으로 뻗었다. 거대화 옵션이 발동되어 순식간에 해머를 수 킬로미터 길이에 수백 미터 크기 추를 지닌 거대 해머로 만들어 냈다.
적어도 반년 전에는 만들어 낼 수 없었던 크기이며, 거인화를 하기 전에는 들 수도 없었던 무게였으나 지금 그는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쥐고 있었다. 마치 무게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것처럼. 물론 마신의 징벌이 이 반년간 성장했기 때문이었다.
[마신의 징벌]
[랭크 ? SS(파괴되지 않음)]
[공격력 ? 8,700 ? 10,200]
[숙련도 ? 15,983/80,000]
[속성 ? 1. 독염 S 2. 흑뢰 S]
[옵션 ?
1. 거대화 가능(소, 중, 대, 특대, 초거대, ???)
2. 주위 마나를 흡수해 차지 스트라이크 가능
3. 화염, 뇌전, 독, 어둠 속성의 마력을 흡수하여 망치 주위를 떠도는 해당 속성의 스피릿을 생성하는 것이 가능. 속성의 합성 또한 가능하다.
4. 마나로 주인과 연결되어 신체와 동화. 주인이 감당해야 할 무게까지 오롯이 타격 대상에게 전달한다.
5. ???]
[스스로 성장하는 자의 궤적을 쫓아 스스로 성장하는 신물. 그 연결이 더욱 깊어져 새로운 가능성을 추구하게 되었으나, 아직 그 길은 찾기 힘들다.]
[큿……!?]
해일과 동화되어 있던 엘은 그것을 보며 너무 동요한 나머지 동화가 풀릴 뻔했다. 그녀는 그제야 깨달은 것이다. 정시우의 해머가 지닌 가장 큰 능력은 거대화인데, 그것을 정시우는 여태까지 발휘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여태껏 그저 재롱을 부린 것뿐이란 말인가? 아무리 새로운, 강력한 힘을 얻어도…… 네겐 조금도 통하지 않는단 말인가!]
“아니.”
정시우는 무기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 거대한 병기를 지극히 가볍게 뒤로 당겼다가는, 몇 가지 스킬을 발동시키며 그것을 전방으로 휘둘렀다. 도시 하나를 그대로 가라앉힐 수 있는 규모의 모래 파도를 향해, 아무런 미련도 없이.
“그냥 내가 조금 더 강했을 뿐이야.”
[Lv8의 드레인이 발동합니다.]
[Lv54의 타격전이가 발동합니다.]
[Lv44의 반복재생이 발동합니다. 직전에 발동한 스킬을 최대 세 개까지, 최대 세 번 반복하여 발동시킵니다.]
괴력과 강타의 힘이 부여된 해머를 그저 앞으로 내지르는 한순간, 믿기지 않을 만큼 많은 일이 벌어졌다.
[……!?]
가장 먼저 발동한 스킬은 반년간 정시우가 애용한 끝에 마력뿐만 아니라 체력까지 빨아들일 수 있는 스킬로 진화한 드레인이었다. 숫자로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양의 모래에 모두 엘의 힘이 당겨 있었으니, 드레인이 발동된 해머를 향해 모래의 파도 자체가 끌어당겨진 것.
정시우를 향해 뻗어 나가던 모래의 파도가 순식간에 헝클어지며 방향을 선회하는 모습은 그것만으로도 장관이었으나 진짜 공격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
타격 면적만 수백 제곱미터에 이르는 해머가 파도와 정면으로 부딪힌 순간, 이번엔 타격전이 스킬이 발동하여 그 타격범위를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늘려 버렸다!
[크학!?]
물론 그것만으로는 파도를 모두 부숴 낼 수 없었지만 문제는 마지막 순간 발동한 반복재생이었다. 강타와 드레인, 마지막으로 타격전이가 세 번 겹쳐져 반복되자 삽시간에 모래 파도 전체로 강타가 퍼져 나갔다. 그 끔찍한 힘의 물결이 아지랑이처럼 눈에 보일 지경이었다.
[크아아아아아!]
해머가 아직 파도를 채 다 가르고 지나가기 전인데도 파도의 일각이 무너졌다. 엘이 끔찍한 비명을 내지르며 모래의 파도 속에서 뚝 떨어져 내렸다.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동화를 해제한 것이다.
“후우…….”
정시우는 기술을 연달아 사용한 대가로 찾아오는 피로감을 한숨으로 털어 버리며 해머를 회수했다. 세상을 두 동강 낼 것 같던 기세의 해머가 순식간에 미니 사이즈로 돌아오는 모습에 그것을 지켜보던 이들은 더한 공포감을 느끼고 말았다.
“아린아, 엘을 좀 치료해 줘.”
“저거 죽은 거 아녔어요?”
수아린이 기겁하여 묻는 말에 정시우는 태연하게 대꾸했다.
“힘 조절은 했어.”
“힘 조절을 하셨다고요!?”
“왜 그 부분에서 더 놀라는 거냐?”
마지막 순간 엘이 구사한 모래의 파도에 단점이 있다면, 대군이라도 쓸어버릴 수 있을 만큼 광대한 범위에 강력한 공격을 퍼부을 수 있는 만큼 피격 포인트도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난다는 것이다.
한 대로 끝날 것을 수천, 수만 대 동시에 얻어맞았으니 단방에 넋이 나가 버리는 것도 당연한 일. 그나마 정시우는 나름 살살 때린다고 때린 것이었다. 철저한 계산이 담긴, 초거대 규모의 알밤이었다.
“죽었을 것 같은데…….”
정시우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수아린은 못내 의심이 가는지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러면서도 곧장 날개를 파닥여 바로 엘에게로 날아가는 것이 귀여웠다.
“……그러면.”
한편 그 자리에 남은 정시우는 해머를 인벤토리에 던져 넣은 후, 지그시 눈을 감고 방금 있었던 전투를 복기했다.
엘이 보여 준 고유능력의 발현, 자연과의 동화…… 그에 따른 자아, 자신의 확장을. 짧은 전투 속에서 엘은 끝내 그 이상의 영역에도 잠시간 발을 걸쳤다. 만약 그 동화가 완벽했더라면 지는 것은 정시우였으리라.
‘나는 그것을 나의 고유능력으로서 이루어 내야 한다. 작게는 나와 자연을, 크게는 다른 존재들과 세상 모두마저도 내 안에 담아낼 수 있어야 해. ……그리고 그 끝에 마나와 육신, 영혼의 구별도 없는 진정한 합일을 이루어야.’
마음만 먹었다고 해서 바로 가능한 일은 아닐 터였다. 그러나 적어도 어떻게 노력해야 할지는 알게 되었다. 그것만으로도 수확은 거대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거인화 수련에 돌입하고 싶지만…… 그전에 해야 할 일들이 있다.
“지금 전투는 제대로 확인했으려나?”
정시우는 날개를 가볍게 퍼덕여 바람의 힘을 일으켰다. 이제는 거의 날개와 동화되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닌 바람의 질주가 발동되며 그의 몸을 날려 보내는 대신 사방에 흩날리는 모래들을 쓸어 내 버리고 깨끗한 하늘을 드러내 보였다.
그곳에는 더 이상 정찰기의 모습이 남아 있지 않았다. 어느 시점에서 튀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디까지 보았든 그들의 능력을 확인하기에는 충분했을 것이다.
[역시 일부러 그렇게 과장된 전투를 벌였던 것인가, 주인님?]
“나나 엘의 능력을 화끈하게 보여 주기 위해선 가장 좋은 방법이었지.”
전투가 완전히 끝난 것을 확인하고 조심스레 그에게 다가와 묻는 케이나에게 정시우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렇다. 전투를 이끌어 가기 위해서는 굳이 초거대 망치를 휘둘러 모래의 파도를 으스러트리는 것보다도 마나 소모가 적고 확실하게 이기는 방법이 많았다.
[난 주인님이 완전히 호랑이의 기를 꺾어 놓으려는 것인 줄 알았다.]
“넌 날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물론 상냥하고 훌륭하고 멋진 주인님이지.]
그럼에도 정시우가 이런 퍼포먼스를 선택한 것은 어디까지고 엘을 감시하고 있던 인간들이 그의 무력을, 더불어 그에게 맞서는 엘의 무력을 확실하게 인식해 주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자신들이 감히 누구를 협박하고 있는지는 알아야 할 것이 아닌가. 지상의, 하늘성의, 물론 지하의 그 누구도 정시우 위에 설 수는 없다는 사실을 똑똑히 인식해 두어야, 지금부터 그가 할 일들에 태클을 받지 않을 수 있을 것이 아닌가.
[오히려 영화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모르겠다. 현실에 존재하는 힘이라기엔 너무 거대했으니까. 왜, 요즘 나오는 어지간한 영화들은 특수효과가 현실과 구분할 수 없을 정도이지 않은가?]
“그러니까 넌 왜 그렇게 현대에 적응해 있냐고.”
[휴식을 취할 때마다 베토와 함께 자주 보곤 했으니까 말이지. 그런데 베토 녀석…… 요즘 나보단 넬 그 계집년과 함께 영화를 보겠다고……! 으드득.]
“아, 저리 가라 좀.”
“그런데 어째서 제 쪽으로 떠미시는 겁니까, 형님?”
한창 청춘인 소년과 소녀를 질투하는 브라콘 나이트를 근처에 있던 용세하에게 맡긴 후, 정시우는 수아린과 엘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축 늘어진 거대 호랑이와 그 호랑이의 가죽을 양손으로 붙잡고 힘겹게 날개를 퍼덕거리며 그들에게 다가오는 수아린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 좀 혼자 움직여 봐요!”
[움직일 기운이 하나도 없다.]
“마나 회복하고 있는 거 다 아는데 무슨!”
[흐으, 아무리 애써도 슈를 이길 수가 없다. 아무리 강해져도, 아무리 노력해도…….]
“오빠, 이미 정신적으로 끝난 것 같은데 그냥 버려두고 가죠?”
보는 사람이 먼저 지쳐 쓰러질 것만 같은 기다림 끝에 끝내 엘이 정시우의 눈앞에 도달했다. 정시우는 모래바닥에 축 늘어진 채인 그녀와 가만히 눈을 마주했다.
초점이 없는 채여도 납득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다행히도 신비롭게 빛나는 금색 눈이 그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넌 그대로 멈춰 있을 셈이야?”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엘이 답했다. 거대한 호랑이의 얼굴에는 어째선지 미미한 웃음기가 떠올라 있었다. 바로 방금, 절대로 넘어설 수 없는 거대한 벽을 조우한 자의 표정이라고 보기엔 지나치게 밝았다.
[나는 벽을 만난 것이 아니다. 평생을 믿고 따라갈 수 있는 주인을 만난 것이다. 내가 아무리 강해져도 나보다 강한 채로 남아 있어 줄, 절대적인 주인을 말이다.]
“굳이 날 주인으로 섬길 필요는…… 아니.”
결심한 게 언제라고 금세 또 도망칠 구멍을 파고 있던 정시우는 멋대로 지껄이던 자신의 입을 스스로 강하게 때렸다. 그리곤 후, 짧게 한숨을 뱉어 낸 후 말했다.
“그래, 알겠다.”
손에 들려 있는 것은 미리 준비해 둔 유고의 파편. 그는 그것을 지그시 앞으로 내밀어 엘의 이마에 놓았다. 그리고 다시 그 위에 자신의 손바닥을 얹으며 말했다.
“널 내 것으로 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