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4
214화.
정시우도 엘도 전투를 길게 끌 생각은 없었다. 서로를 죽일 셈은 아닌 것이다. 그저 자신의 모든 것을 빠르게, 확실하게 내보이는 것이 중요했다.
그런 의미에서 엘이 주력한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의 고유능력이었다. 태어난 순간부터 끊임없이 갈고 닦았으며 과거 정시우로부터도 도움을 받아 성장시킨, 지금에 이르러선 신의 권능이라 해도 믿을 수 있을 만큼 강력한 모래의 능력!
[하!]
베히모스와 싸울 때만 해도 자신의 움직임에 맞춰 고유능력을 발동했었는데 이젠 육체능력과는 완전히 별개의 리듬으로 고유능력을 다룰 수 있게 된 것인지, 그녀의 돌진과는 살짝 어긋난 타이밍에 땅이 뒤집히며 정시우를 지하에 가둬 버리려 들었다.
그러나 용의 감각으로 그것을 완전히 읽어 냈음에도 불구하고 정시우는 하늘로 떠오르지 않았다. 날개를 펄럭이며 바람의 질주를 발동해 그저 앞으로 돌진할 뿐이었다.
“후.”
수백 톤 규모의 모래가 거꾸로 솟구쳐 그의 눈앞을 어지럽히며 걸음을 막고, 그것이 제각기 다른 형상의 날을 만들어 동시에 그의 몸에 박아 넣으려 했으나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땅이 거꾸로 솟구쳐 그대로 지하로 추락하는 순간에도 정시우는 대지를 디디고 한 발짝 더 앞으로 나아갔다. 그로써 포효의 근원의 효과가 발동해 그에게 방어력을 더해 주었다.
거기에 카오스 스케일이 더해지자, 실로 충격적이게도 모래로 만들어진 수천, 수만 개의 병장기가 그에게 털끝도 상처를 입히지 못하고 바스러지고 말았다.
[그렇다면!]
사방이 무너져 내리고, 솟구치는 모래지옥을 태연하게 돌진해 오는 정시우를 보면서도 엘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다음 수단을 꺼내 들었다.
한 걸음 더 그들의 간격이 가까워진 순간, 이번엔 솟구쳤던 모래가 더한 무게를 품고 일시에 쏟아져 정시우를 완전히 매장해 버리려 했다!
“후.”
그러나 정시우는 꿋꿋이 돌진했다. 이번엔 날개를 펄럭이지도 않았다. 고유능력도 유령도 동원하지 않고 그저 순수하게 괴력과 카오스 크루얼 차지만을 발동한 상태에서 수백 톤 무게의 모래 세례를 통과한 것이다!
[아무리 네가 강인하다고 해도 그런 무모한 짓을……!?]
자신의 고유능력에 정시우가 대응하는 모습을 보며 다음 공격을 이어 가려던 엘은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혀 버리고 말았다. 정시우가 몸에 모래 한 톨 묻히지 않고 그곳을 빠져나온 것이다.
[내 마력을 품은 모래의 세례를…….]
“이걸론 안 된다는 걸 잘 알겠지? 네 고유능력은 무척 강력하지만, 적재적소에 사용하지 않으면 별 효과를 볼 수가 없어.”
정시우는 해머를 들어 마나를 집중시키며 가벼운 목소리로 말을 늘어놓았다. 이것이 바로 그가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방식이었다. 무척이나 재수 없었지만, 그만큼 강렬하고 효과적이었다.
“외부의 힘을 다룬다는 건 확실히 좋은 일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어찌 되지 않는 상대가 다른 세상에는 훨씬 많더라고. 결국 힘을 하나로 합칠 필요가 있다는 얘기지. 네가 가장 잘 다룰 수 있는 하나의 형태로.”
바로 지금의 자신처럼! 언제 발걸음을 옮겼는지도 모르게 엘의 눈앞에 도달한 정시우가 있는 힘껏 망치를 휘둘렀다.
친분 때문에 봐주고 그런 것도 없이 전력으로 내지른 망치는 엘이 어떻게든 공격 직전에 만들어 낸 모래의 방어막을 우습게 부수고 그녀의 몸통에 직격했다. 99레벨에 도달한 강타가 괴력에 힘입어 온전히 엘의 내장에까지 전달되며 폭발했다!
[칵!]
엘은 짧은 비명소리만 그 자리에 남기고 광속으로 튕겨 나갔다. 순식간에 1킬로미터를 날아간 그녀의 몸통이 모래의 벽을 관통하고 더 멀리로 날아갔다. 그녀의 권능이 해제되며 모래의 벽이 스르르 무너져 내렸다.
[……전투 시작한 지 1분밖에 안 됐다, 찌.]
“1분이나 지났어요? 오빠가 많이 봐줬네요.”
1킬로미터 밖에서 결과를 기다리고 있던 사리테가 어이없어 하는 말(사리테도 그간 영어를 배웠다.)에 수아린이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그러나 정시우는 호쾌하게 엘을 날려 버린 후임에도 해머를 거두지 않았다. 오히려 마나를 더욱 집중시켜 차지 스트라이크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아직 엘로부터 패배선언을 듣지 않았다.
“장외패는 없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렇지, 엘?”
[그…… 그렇다.]
과연 모래호랑이다운 맷집이다. 단박에 죽어 버려도 이상하지 않은 충격을 입었음에도 엘은 적어도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는 모습으로 다시 일어나 그와 마주했다.
[그러면 다시 해볼까. 얼마든지 덤벼라, 슈.]
실은 주저앉고 싶었지만, 거대한 몬스터 무리의 수장으로서 이렇게 허무하게 패배할 수는 없다는 의지만으로 버텨 냈다. 비록 상대와 자신의 격차를 알고 있다 해도, 자신을 상대에게 똑똑히 새겨 주지 않고선 무릎을 꿇을 수 없는 것이다!
엘의 사그라지지 않는 기세를 본 사리테가 기겁해 중얼거렸다.
[저러다 진짜 죽겠다, 찌.]
“죽진 않아.”
망치를 쥐고 선 정시우의 눈빛을 근래 들어 제법 많이 겪은 용세하가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죽기 직전까지 얻어터질 뿐이지.”
[경험이 우러나오는 목소리다, 찌.]
모래의 벽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달은 엘은 쓸데없는 데 힘을 낭비하는 대신 마력을 끌어 올려 스스로의 몸을 감쌌다. 원래 백색 바탕에 검은 줄무늬를 지니고 있던 그녀의 전신이 황금으로 물들었다. 정시우만은 그 정체가 무엇인지 금방 알아보았다.
“모래인가. 모래로 몸을 덮은 게 아니라 아예 신체를 모래와 동화시킨 건가? 그런 것까지 가능했었구나…….”
[슈, 네 조언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 내가 가장 잘 다룰 수 있는 한 가지의 방향으로 힘을 합치는 것…… 넌 항상 내가 생각해 보지 못한 방법을 제시해 주는구나.]
그저 엘의 상상력과 응용력이 지나치게 부족한 것뿐이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그것을 굳이 입에 담지는 않았다. 그것보다는 정시우에게 한 마디 말을 들은 것만으로 그것을 실현해 낸 엘의 잠재력이 더욱 놀라웠다.
[오지 않는다면 내가 간다!]
극히 짧은 한순간에 모래와 완벽하게 동화한 엘이 재차 바닥을 박찼다. 행동은 조금 전과 같았지만 기세는 확연히 달랐다. 정시우의 강타에 얻어맞고 체력적으로 약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래 위를 날듯이 달려오는 엘!
그녀가 지나간 길 위로는 어떤 흔적도 남지 않았다. 그들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사막을 구성하는 모래가 아주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빨려 들어가며 그녀의 몸집을 불려 주고 힘을 키워 주었다. 정직히 말하건대, 정시우도 거기까지는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
당초 그녀에게 성장의 단초만 전해 주고 전투를 빨리 끝낼 작정이었던 정시우는 그녀가 예상치 못한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을 보며 당황해 차지 스트라이크를 해제해 버리고 말았다.
고유능력을 이용한 거대화라면 지금 한창 정시우가 몰두하고 있는 화제가 아니던가. 비록 규모에서 한참은 부족하다지만 엘이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니 흥미가 가지 않을 수 없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힌트를 얻게 된 걸지도 몰라.’
정시우는 그 시점에서 엘에게 조금 맞아 줄 각오를 했다. 그녀의 집중력을 흐트러트릴지도 모르는 강한 기술은 금지다. 철저히 그녀에게 어울려 치고받고 하다 보면 요령을 훔쳐 오는 것도 가능하리라!
“더 재미있어졌잖아!”
그의 입가에 악동의 미소가 떠오르자, 전투에 휘말리지 않게 멀리서 그것을 지켜보고만 있던 용세하가 자신의 발언을 수정했다.
“저건 형님이 신기술을 만들어 낼 때의 표정이야.”
[신기술이 뭐냐, 찌. 지금 에리우 님이 보여 주시는 거냐, 찌?]
“비슷하지만 좀 더 무서워.”
[그 말만으로 이미 무섭다, 찌.]
삽시간에 수십 미터 크기로 불어난 엘과 아무런 방비도 하지 않은 채인 정시우가 격돌했다. 끔찍한 힘을 담은 앞발과 정통으로 격돌하는 망치!
똑같이 괴력과 강타의 힘을 담아냈음에도 불구하고 이번엔 당연하다는 듯이 정시우가 밀려났다. 엘은 스스로 이룬 결과임에도 불구하고 표정을 굳혔다.
[봐주는 것은 싫다.]
“봐주는 게 아냐. 네 능력을 최대로 끌어내 싸우고 싶을 뿐이야.”
[……그렇다면 원하는 대로 해 주지!]
엘의 몸집이 거기서 더 불어났다! 이건 완전히 RPG의 보스전 최종형태가 아닌가. 정시우는 사하라 사막을 이루는 모든 모래가 그녀와 교감하는 것을 느끼고 전율하며 용의 감각을 돋웠다.
그녀는 몸집을 불리면서도 실시간으로 정시우를 깔아뭉개듯 돌진했다. 다른 어디로 피해 봤자 모래와 동화하여 금세 덮쳐 올 터, 정시우는 당당하게 그녀를 맞이했다. 해머와 앞발이, 용의 날개와 험상궂게 드러낸 이빨이 격돌하며 폭탄 터지는 소리를 냈다.
“아직 부족해, 엘! 덩치에 비해 약하잖아!”
[크으…… 더 강해질 수 있어!]
고유능력을 통한 동화 및 거대화는 엘 또한 처음 도달한 경지였기에 마나의 운용이 불안하기 짝이 없었으며, 그 발현 방식 또한 정시우의 거인화와는 제법 차이를 두고 있었다.
[이건 어떠냐!]
“큭……!”
그래도 정시우는 엘과 육박전을 벌이는 과정에서 그녀의 고유능력이 발동하여 환경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그것들을 어떻게 자신에게로 끌어들여 동화하는지, 세상에 자신의 모습을 어떻게 새기는지 관찰하며 깨닫는 바가 컸다.
‘쯧, 스스로가 바보 같아서 견딜 수가 없네.’
알고 보면 그 해답은 자신도 진즉부터 알고 있던 것이었다. 비록 고유능력이 특수해서이기는 하나, 엘은 스스로의 육신을 모래로, 그리고 마나까지도 모래로 합일하며 그 둘의 구분을 없애고 있었다.
드래곤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열화되었지만, 어쨌든 그녀는 지금 마나와 육신의 합일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로써 보다 ‘자연’에 가까워져, 그 힘을 빌려 스스로를 불리는 것. 기반을 자연에 두는 그녀의 고유능력은 합일을 이루기 가장 적합한 능력이었다.
‘그래. 결국 이 능력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은 마나와 물질의 구분을 없애는 것…… 유령과 실체를 지닌 종속들로 균형을 맞추려고 했던 나는 출발점에서부터 틀려 있었던 거야.’
정시우가 이전에 했던 방식으로는 일시적으로 거대한 힘을 얻을지 모르나 약점이 지나치게 컸으며, 무엇보다도 그 한계가 명확했다. 완전하지 않았다.
그나마 보다 늦게 깨닫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이젠 거인화 능력을 어떻게 발전시켜 가야 할지 감이 확실하게 왔다. 물론 당장은 불가능하겠지만 말이다. 구체적으로는 체력과 마력을, 무엇보다도 고유능력을 성장시킬 필요가 있었다.
“좀 더 어울려 줄 수 있겠지?”
[언제까지 여유로운 말을 할 수 있나 볼까!]
새로운 힘을 깨닫고 자신만만하게 말하기는 했지만 사실 엘도 여유로운 것은 아니었다. 모래와 동화하는 것까지는 좋았지만 사막의 모래들을 자신과 동화시켜 몸집을 수십 배로 불리는 과정에서 끔찍하게 많은 양의 마나가 소모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유지시키는 것도 장난이 아니었다. 앞으로 남은 시간이 길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엘은 앞으로의 한 방에 모든 것을 걸기로 했다.
[정말로 죽을지도 모른다, 슈. 못 받아 낼 것 같으면 미련 없이 피해라.]
“걱정 말고 덤벼.”
정시우가 믿음직스럽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엘은 그를 믿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 순간 엘의 육신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적어도 정시우는 용의 감각으로도 그녀의 위치를 파악하지 못했다.
다음 순간, 고요하던 사막 한가운데에서 높이 수십 미터에 이르는 모래의 파도가 일어나 정시우를 덮쳐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