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
201화.
[레벨이 3 올랐습니다.]
[유고의 파편을 얻었습니다.]
“역시 어떤 신이든 그렇게 호락호락 크라켄 같은 강자를 내려보낼 수는 없었던 모양이네.”
정시우는 베히모스를 죽이고 얻은 기록과 마나의 양을 확인하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물론 에리우가 많은 데미지를 입혀 놓아 녀석에게 많은 양의 경험치가 흘러 들어간 것도 있지만, 그것을 감안해도 베히모스는 그 위세로 보나 권능의 질로 보나 크라켄에게 한참은 못 미치는 쩌리였다.
“이건…… 일단 가지고 있을까.”
결정적으로 놈이 남긴 신의 파편. 강한 땅의 기운이 느껴지는 그 파편은, 과거 정시우가 얻어 온 신의 파편들보다야 확연히 컸지만 헤데아의 그것에 비하면 조금 처지는 면이 있었다.
하긴 크라켄 같은 녀석들이 지구에 범람하고 있다면 제아무리 정시우라 해도 두 손 두 발 다 들었을 테지. 역시 크라켄이 별격이었던 것이다. 그 이유는 이제부터 천천히 탐구해 봐야겠지만.
[슈…… 이전에 보았을 때도 이미 충분히 강했는데, 훨씬 더 강해졌구나!]
한편 엘은 베히모스를 아무렇지도 않게 처리해 버린 정시우의 모습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은 모양이었다. 이전에 만났을 때보다도 눈을 반짝이며 그에게 감탄하는 엘의 모습에 정시우는 픽 웃고 말았다.
“네가 치명상을 입혀 놔서 깔끔하게 마무리할 수 있었던 것뿐이야. 원래는 네게 맡기는 게 제일 좋다고 생각했지만…… 그 이상 입을 나불대게 놔둘 수도 없어서.”
[고맙다. 큰 은혜를 입었어.]
정시우는 그 말에 아주 살짝 죄책감을 느꼈다.
“아니, 내가 유령 병력을 물리는 바람에 이렇게 밀리게 된 거니까.”
[그렇다, 찌! 그 부분을 확실히 말해 보는…… 꾸에엑!]
[나는 슈, 너를 믿는다. 사정이 있었겠지. 늦지 않게 와 주었으니 된 것이다.]
엘은 눈을 치뜨며 끼어드는 사리테를 가볍게 날려 버리곤 호탕하게 웃었다. 정시우는 녀석의 앞발에 살짝 맺힌 피를 보며 앞으로는 결코 그런 일이 없도록 해야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그리고 자신을 위해 희생한 사리테를 향해 짧게 묵념했다.
[그보다도 슈, 아직 전투가 끝나지 않았어……. 우릴 도와다오.]
“당연하지. 늑대 한 마리 잡았다고 뒷짐 지고 물러날 생각은 없어.”
그렇다. 담소를 나누는 것은 전투가 끝나고 나서도 늦지 않다. 정시우는 엘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곤 유고의 파편을 꽉 쥐며 돌아섰다.
손등의 문신이 빛을 발하는 순간 정시우의 주위로 유령들이 하나둘 소환되어 그를 호위하듯 정렬했다. 소울 포스 스킬이 성장하면 성장할수록 그가 유령들의 힘을 다루는 것도 점차로 자연스러워지고 있었다.
물론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아까에 비해 더 강해진 것 같아.]
엘이 놀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유령들이 뿜어내는 기세가 아까까지와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눈치챈 것이다.
정시우가 두 번째 고유능력을 각성하고 유령들을 자신의 일부로 통합하여 거인화를 이루는 과정에서 유령들은 단순히 그에게 종속되는 것 이상으로 깊게 그와 연결되었고, 그의 영향을 받아 진화에 가까운 변화를 이루었다.
정시우는 비로소 세트나크에게서 얻은 힘을 완전히 그의 방식으로 발현해 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따르라, 병사들이여! 이 땅을 넘보는 하찮은 신의 잡졸들을 짓밟고 으깨어 부수자!]
[우오오오오오!]
한편 케이나는 잔뜩 신이 나서는 유령들을 이끌고 전장으로 돌격했다. 다른 유령들보다 특히 눈에 띄게 강해진 그녀는 군단장으로서도 더욱 성장하여(비록 여태까지 군단장의 이름에 어울리는 활약을 한 적은 없지만) 유령들과 일시에 공명을 일으키고 있었다.
“뿌우, 뿌이이이!”
[음!? 저 아이는 설마……!]
그러나 베히모스를 단 두 방에 정리해 버린 정시우보다도, 보다 강하게 거듭난 수만의 유령을 이끌고 전장으로 돌진하는 케이나보다도 더욱 엘을 놀랍게 한 존재가 있었으니 다름 아닌 세이락시아였다.
녀석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물의 망치를 만들어 내어 그것을 양손에 쥐고는 몬스터들을 향해 마구 휘두르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영락없이 정시우와 닮아 있었다. 착각이 아니었다. 명백히 정시우의 움직임을 따라하고 있었으니까!
“뿌우우이이이이이이!”
“뿌이 녀석, 성대가 달려도 결국은 저 소리밖에 못 내는 건가…….”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우리와 같은 몬스터가 어떻게!?]
비록 지금은 완전한 인간의 모습을 취하고 있다지만 녀석이 본래 몬스터라는 사실을 엘이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다. 정시우는 경악한 표정의 엘에게 친절하게 답해 주었다.
“아무래도 날 따라 인간이 되고 싶었던 모양이야.”
[되고 싶다니…… 그런 마음만으로 쉽게 되는 것인가? 마치 돌이 모래가 되듯 그렇게……. 더구나 바다의 몬스터인 것처럼 보이는데 저토록 지상에서 자유로이 움직이며 힘을 발휘하고 있다니!]
그녀 자신은 이제 겨우 돌과 바위를 부수어 모래를 만들어 내는 정도인데 저 꼬마가! 엘은 아무래도 지상에서 활약하는 세이락시아의 모습을 보며 이런저런 의미에서 프라이드에 상처를 받은 모양이었다. 정시우는 당분간 녀석을 가만히 놔두기로 했다.
“그러면 나도 싸우러 갈게.”
[그, 그래……! 나도 싸워야지!]
정시우가 해머를 들고 돌진하는 모습을 보고서야 가까스로 엘은 현실을 자각했다. 그녀는 자신의 뺨을 두들기며 재차 전장으로 향했다.
놀라움과 당황은 있을지언정 더 이상 두려움과 머뭇거림은 없었다. 정시우가 보여 준 막대한 힘은 그녀에게 신의 계시처럼 강렬한 인상을, 승리에의 굳건한 확신을 안겨 주었으니까.
그로부터 몇 시간인가가 흘렀다. 베히모스는 자신이 소멸하더라도 그 뒤를 이을 자가 얼마든지 나타날 것이라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하루 안으로 새로운 신의 시종을 불러오는 것은 무리였던 모양이다.
그리고 에리우 측의 전력에 정시우의 힘이 보태진 이상, 그 ‘하루가 지나기 전’에 유고라는 자가 다스리는 군단, 유고와 협력하여 지구 육지의 패권을 노리는 신들의 세력을 싸그리 밀어 버리는 것은 그리 힘들지 않은 일이었다.
[놈들의 털 하나 남기지 말고 모두 이 지상에서 지워 버려!]
[더러운 신의 이름을 부르짖는 자들을 모두 추방하자!]
[모두 먹어 치워, 저들의 피와 살로 우리의 군단을 부강하게 하라!]
몬스터들 사이의 전투란 사실 에너지 보존의 법칙을 떠올리게 하는 면이 있었다. 전투를 거치며 아군이든 적군이든 전력이 줄어들고 어느 한쪽은 결국 전멸에 이르기도 하지만, 살아남은 이들은 사체를 모두 먹어 치우는 것으로 자신의 마나를 보충하고 격의 상승을 이룬다.
결국 결과물만 놓고 보면 마나의 총량에는 그리 큰 변화가 없거나 오히려 레벨이 오르고 각성하여 더욱 늘어나는 케이스가 부지기수. 더욱이 마나의 양 같은 단순한 수치가 아니라 개체의 전투력을 주관적으로 놓고 따지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었다.
[내 몸에 마나가 넘쳐흐른다!]
[내 육신이…… 육신이 강해지는 것이 느껴져!]
[에리우 님께서 우리를 이끌고 계신다. 무지몽매한 짐승에서 벗어나, 하나의 완성된 개체로서 탄생할 수 있는 가능성…… 그분께서 가르쳐 주신 것이다!]
엘을 따르는 몬스터들의 사기는 극도로 높아져 있었다. 반면 우두머리를 잃고 방황하는 몬스터 무리는 하나로 뭉쳐진 토종 몬스터들의 돌격에 맥을 추지 못했다. 그 결과 영혼을 잃고, 육신마저 포식당해 지구에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질 뿐이었다.
[이젠 너희가 정할 차례다.]
전장을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활보하고도 몸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은 엘이, 토종 몬스터의 편도, 이세계 몬스터의 편도 들지 않고 가만히 숨을 죽이고 있던 신생 몬스터 세력을 향해 외쳤다.
그녀의 몸을 중심으로 거대한 범위를 형성하여 휘몰아치는 모래의 회오리가 실로 위압적이었다.
[유예는 지금껏 충분히 주었어. 네놈들의 눈으로 확인할 기회도 주었다. 그러니 이제 나를 따르라. 너희가 선택할 수 없다면, 내가 직접 길을 정해 주겠다.]
[크, 흑…….]
[따, 따르겠습니다.]
본인의 힘도 무시무시할뿐더러, 엘에게 협력하는 정시우의 무력을 알고 있는 이상 더는 도망칠 길이 없었다. 더욱이 이세계의 신을 따르는 것보다는 정신적인 부담감도 적었다.
결국 지구에서 태어난 모든 몬스터들은 엘에게 따를 것을 맹세했고, 그로써 비로소 엘은 지구에서 탄생한 모든 토종 몬스터들을 다스리는 위치에 오를 수 있었다.
신을 따르지 않는 몬스터가 다른 몬스터들을 휘하에 넣고, 절대적인 지배자로 군림하는 것. 과거 다른 어떤 세계에서도 일어나지 않은, 일어날 수도 없었던 일이었다.
[놈들과의 전쟁은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이름도 모를 신의 이름을 부르짖는 무뢰배는 앞으로도 얼마든지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로 뭉쳐 저항하는 한 저들은 결코 저들의 뜻을 이룰 수 없을 것이다!]
[크오오오오오오오!]
[그아아아아아아!]
엘이 위풍당당하게 외치는 목소리에 몬스터들이 일제히 환호의 목소리를 높였다. 케이나는 그 광경을 보며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이러다 언젠가 신을 거부하는 몬스터들의 왕국이라도 세워질 것 같군…….]
“그것도 나쁘지 않지. 난 곧 이세계로 떠나야 하는데 이 녀석들이 나 대신 이세계의 침공을 저지해 준다면 든든하지 않겠어?”
[인간들은 공포에 질리겠지만…… 그래, 세상 전체의 미래를 위해서라면 나쁘지 않은 일일지도 모르겠어.]
오늘 전투를 보고 정시우는 그럭저럭 안심할 수 있었다. 엘은 충분히 강하고, 그녀를 따르고자 하는 몬스터들의 의지는 평범한 것이 아니다. 육신보다 정신을 먼저 공격해 오는 신들의 힘 앞에서 버틸 수 있을 만큼은.
“뿌이.”
“그래. 뿌이 네가 있으니 지구의 바다도 믿고 맡길 수 있지.”
“뿌우…… 뿌이이이!”
세이락시아는 정시우의 말을 듣더니 볼을 부풀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녀석은 정시우가 어디를 가든 따라오고 싶어 하는 모양이었다. 어째서 이렇게 정이 들어 버린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네가 있기 때문에 내가 마음 편히 떠날 수 있는 거야. 금방 돌아올 테니 집 잘 지키고 있어.”
“뿌우…….”
무척이나 납득하지 못한 표정이었지만 끝내 고개를 끄덕이는 세이락시아. 정시우는 재차 녀석을 쓰다듬어 주며 고개를 들었다. 아까 사냥이 끝난 후 방치해 둔 베히모스의 시체를 물고 엘이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이놈의 사체는 너의 것이다.]
“아니, 괜찮아.”
[그렇다면 가죽만이라도 가져가라. 우리에겐 그리 큰 필요가 없지만…… 슈, 너와 다른 인간들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을까?]
잠시 고민한 정시우였으나 이내 그것을 받아 들기로 했다. 베히모스의 가죽을 보아도 딱히 감응이 없는 것이, 이것으로 방어구를 만들어도 마룡의 완갑 때처럼 카오스 스케일로 흡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확실히 순수한 방어력만 따진다면 큰 도움이 되어 줄 수 있을 터였다.
‘아린이나 세하의 방어구도 새로 맞출 필요를 느끼고 있었고 말이지…….’
까지 생각하다가 간신히 떠올렸다. 아직 수아린과 용세하는 정시우를 걱정하며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크라켄과의 전투에서 혹여 정시우가 어떻게 된 것이 아닐까 걱정하며!
“그럼 이만 가 볼게. 인간들과의 대화에 대해선 근시일 내에 조금 더 대화를 해 보는 걸로.”
[음? 슈, 기다려라. 아직 승리를 축하하기 위한 연회를…….]
“나중에. 떠나기 전에 다시 한 번 들를 테니까!”
[슈? 슈! 나도 그 아이처럼…….]
“다음에 봐!”
그러나 엘의 말이 미처 끝나기 전 정시우는 일행을 모두 데리고 휴식처로 귀환해 버리고 말았다. 자리에 혼자 남겨진 엘은 살짝 시무룩해져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그 옆에서 사리테가 또 주둥이를 놀렸다.
[그렇게 쓸데없이 빙빙 돌아가는 말을 하니까 상대가 알아주질 않는…… 꾸에에에에에엑!]
지극히 한정적인 범위에 모래폭풍이 휘몰아쳤다. 엘은 다음 기회가 온다면 정시우에게 인간으로 변하는 방법에 대해 더욱 자세히 캐물으리라 다짐하며 재차 앞발을 휘둘렀다.
모래폭풍이 보다 거세어져, 그 안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던 사리테의 비명을 지워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