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
202화.
케이나와 세이락시아를 대동하고 휴식처로 돌아온 정시우는 거실의 소파에 가만히 주저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던 수아린과 용세하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들은 정시우의 모습을 확인하자마자 벌떡 일어서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오빠……!”
“정말 무사하셨군요!”
정시우가 크라켄을 물리친 순간, 그의 서포터 관계로 연결되어 있는 수아린과 용세하 역시 급격한 마력과 기록의 성장을 겪었기에 얼추 짐작은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실제로 정시우가 무사히 돌아온 것을 보니 새삼스레 실감이 났다. 정말로 정시우가 크라켄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는 사실이.
“어떻게든 이기고 돌아왔어.”
“어떻게든이라니, 어떻게…….”
“전 그놈이 신이었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음, 그러니까 말이지.”
크라켄의 거대한 크기, 놈의 끔찍한 마력을 상대로 살아남는 것조차 어려워보였는데 어떻게. 뭐라 형용하기 어려운 표정을 짓고 있는 수아린과 용세하를 보며 정시우는 쓴웃음을 짓곤 입을 열었다.
고유능력을 각성하고 새로운 능력에 손이 닿은 것, 크라켄을 물리치고 곧장 에리우를 도와주러 지상으로 나가야 했던 것까지 모두.
“……그래서 지상의 일까지 해결하시고 오느라 늦어진 거로군요.”
“그래.”
약 3분에 걸쳐 사정을 모두 설명한 정시우는 용세하는 몰라도 수아린이라면 잔소리를 늘어놓으리라 생각하고 그것을 담담히 기다렸으나, 그녀는 그에게 있었던 일을 모두 듣고도 그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저 살짝 아쉬운 투로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잠깐이라도 들러서 저흴 데려가셨으면 더 좋았을 텐데.”
“저도 형님께 도움이 되어 드리고 싶었습니다.”
“미안, 상황이 급해서 그럴 경황이 없었어.”
“……괜찮아요. 이해해요.”
정말 괜찮은 건가 싶어 머리를 긁적이는데, 문득 수아린의 눈이 붉게 충혈된 것이 눈에 들어왔다. 말아 쥐고 있는 그녀의 손이 떨리는 것도 보였다. 덤으로 목소리도 떨렸다.
그것을 보며 심장이 덜컥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쓸데없이 예리해진 용의 감각이 그녀의 감정을 읽어 냈다. 지금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감정은 분노도 체념도 아닌, 그저 한없이 절망에 가까운 무언가였다.
“플레이어로 활동하다 보면 이런 일은 흔하니까요. 오빠는 급박한 상황에 타당한 선택을 했을 뿐이고, 또 레벨 업 덕에 오빠가 무사하다는 것도 알 수 있었고…… 그러니까 괜찮아요.”
“어…….”
정시우는 생각했다. 큰일이 났다고. 제대로 지뢰를 밟아 버린 것 같은데 대체 어디서부터 실수한 것일까. 아마 크라켄을 발견하자마자 수아린과 용세하를 되돌려보낸 것이 문제의 시작이었겠지.
“그나저나 오빠는 정말 너무 규격 외라니까요. 그런 오빠를 표적으로 삼고 움직이는 괴물들도 괴물들이고……. 이래서야 서포터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 같네요. 헤…….”
“어, 음…… 그러니까 말이지, 아린아.”
“괜찮다니까요. 그런 표정 짓지 마세요.”
그녀를 어떻게 달래 주어야 할까, 고민해 보았지만 이것만은 정시우가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가 수아린을 단련시켜 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단련시킨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도 아니었으니까.
만약 크라켄 같은 녀석이 그들 앞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면 필시 정시우는 그때도 이번과 같은 선택을 하겠지…….
“그, 그렇지.”
그 순간 정시우의 머릿속에서 번뜩이는 생각이 있었다. 그는 스스로 생각해도 천재 같은 발상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글썽글썽 눈물이 맺힌 수아린의 눈가를 조심스레 닦아 주며 말했다.
“앞으론 굳이 너희를 따로 보호하지 않아도 괜찮을지도 몰라. 내가 조금만 더 거인화 능력을 숙달하면 어쩌면 서포터 관계로 나와 연결된 너희도 나랑 합체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르잖아!”
“하, 합체라니…… 바보!”
“컥!”
주먹으로 맞았다. 수아린이 얼굴이 빨개진 채 방으로 들어가 버리자 정시우는 그녀에게 맞은 뺨을 쓰다듬으며 옆에 선 용세하에게 물었다.
“혹시 나 말실수했냐?”
“선배님은 그렌X간을 보지 않으셨을 테니 남자의 로망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요…….”
“역시 세하 너는 이해해 주는구나!”
정시우에게는 실로 안타깝게도 용세하도 똑같은 바보였다. 남자 둘이 합체라는 주제로 달아오르는 것을 시베리아 동토에 부는 바람보다도 싸늘한 눈으로 바라보며 케이나가 말했다.
[기X 드릴 브레이크라도 한 방 먹여 주고 싶군.]
“뿌이?”
얼결에 휴식처로 같이 들어와 이 촌극을 지켜보게 된 세이락시아만이 아무것도 모르는 무구한 눈을 깜박이며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무척 귀여웠다.
“그런데 형님, 유고라는 신의 파편은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지금 내가 지니고 있는 스킬 중에는 마땅한 게 없어. 그러니 마신의 징벌에 바로 먹여버리는 것도 좋은 선택이겠지만…….”
정시우는 인벤토리 안에 들어가 있는 베히모스의 가죽의 존재를 떠올렸다.
처음엔 크라켄을 어떻게 활용해 장비를 만들어 볼까 하는 생각을 했지만 유고의 파편이 있는 이상 그것과 베히모스의 가죽을 활용해 방어구를 만드는 편이 보다 효과가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걸 만드는 김에 너희 방어구도 새로 만들자. 가죽이 엄청 크니 아마 우리 셋이 쓸 방어구 정도는 충분히 만들 수 있을 거야. 그리고 그게 완성되면 본격적으로 이세계를 탐방하는 거지.”
“전투에 공헌도 하지 못하고 결과물만 나눠 받다니 면목이 없습니다…….”
[사랑스러운 내 동생을 너무 부려 먹으려 하는 것 아닌가?]
케이나가 투덜거리는 목소리는 못 들은 것으로 하기로 했다. 일행은 그 길로 곧장 거주지역 안으로 들어가 베토를 찾아갔다.
“주인님, 어서 오세…….”
“영주님!”
베토의 대장간 입구에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파라솔을 펼쳐 놓은 채 루타가 차를 마시고 있었는데, 그녀는 정시우를 보자마자 베토를 제치고 나서며 기겁한 표정으로 외쳤다.
“세상에나 맙소사, 그런 끔찍한 녀석이 비겁하게 바닷속으로 숨어 들어와 있었다니!”
“아직 아무 설명도 안 했는데 어떻게 알았냐?”
“그야…….”
“뿌이?”
정시우의 눈이 가늘어지자 루타는 성큼성큼 다가와 세이락시아의 말랑말랑한 뺨을 만지작거리며 외쳤다.
“이 아이한테 헤데아의 힘이 다 주입되어 있는 걸 보면 견적이 다 나온다구요! 더욱이 이 정도로 거대한 흔적이라면…… 크라켄, 크라켄이로군요!”
“너 내 몸에 녹음기 같은 거 붙여 놨지?”
“하지만 그 덕에 영주님이 더욱 빨리 성장하셨으니 좋은 일이라고 생각해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루타는 정시우의 의혹 어린 시선을 깔끔하게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바다의 신, 헤데아는 세상을 가지고 땅따먹기를 하는 신들 가운데에서도 손꼽히는 존재랍니다. 혹시 왜 그런지 알고 계신가요?”
“그거 꼭 들어야 하는 얘기냐?”
“그렇답니다. 바로 헤데아가 무수한 신이 집합하여 탄생한 신이기 때문이지요!”
설명해 달라고 한 적도 없는데 말을 잇다니…… 하고 생각하던 중 정시우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무수한 신의 집합이라니 실로 공교로운 말이 아니던가. 그러나 그의 표정을 읽어 낸 루타가 손을 절레절레 저으며 추가로 설명했다.
“아, 영주님의 능력과는 다르답니다. 영주님은 다른 존재들을 지배하여 일시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불리셨을 뿐이지만, 헤데아는 바다에 근원을 두고 있는 신들이 저마다의 자아를 유지한 채 하나의 영육 안에 녹아든 형태를 취하고 있으니까요.”
“그거 그쪽이 훨씬 더 우월한 것 아냐?”
“전혀 그렇지 않아요. 다시는 되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주제에 결국 힘의 통일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덩치에 비해 힘의 질이 그리 높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지요.”
다만, 하고 루타가 말을 이었다.
“그래도 그 덕에 크라켄 같은 괴물을 탄생시키기도 쉽답니다. 바다의 집합신 헤데아를 이루고 있는 무수한 신들이 저마다 파편을 조금씩 떼어 내 탄생시킨 거대괴수 크라켄, 놈을 지구로 보내기 위해 필시 그들은 크라켄을 분해하고 재조립하는 과정을 거쳤을 거예요.”
정시우는 머릿속에 레고의 모습을 떠올렸다. 레고로 조립된 거대한 문어가 좁은 입구를 통과하기 위해 무수한 조각으로 나뉘었다가, 입구를 통과한 후 다시 조립을 거쳐 거대한 문어로 되돌아오는 모습을.
루타가 그의 상상을 듣곤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정확해요. 다만 그 과정에서 레고 몇 조각인가가 손실된다는 점, 그 행위가 지구에도, 헤데아에게도 상당한 타격을 입힌다는 점이 추가로 붙지만요. 덧붙여 우리 요정상인들은 그 행위를 ‘인위적인 세상의 진화 촉구 작업’, 줄여서 ‘개매너’라고 불러요.”
“줄여도 너무 줄였는데?”
“한 번 크라켄을 받아들인 지구는 그만한 괴물을 수용하기 위해 만물을 상대로 보다 빠른 성장을 요구하게 되겠죠. 그것은 지구에도 안 좋은 일이고, 물론 지구의 구성원들에게도 안 좋은 일이에요. 제아무리 헤데아라고 해도 그런 수단은 어지간해선 쓰지 않는데…….”
아마 영주님이 계시는 지구가 심상치 않은 전장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겠죠, 하고 루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나마 영주님이 놈을 빨리 처리해 지구에는 부담이 별로 가지 않았다는 것이 긍정적인 사실이네요. 지금쯤 헤데아는 밤에 잠도 제대로 오지 않을 만큼 화가 났겠지요. 하지만 크라켄 같은 녀석을 다시 보내려면 다른 신들에게 들킬 정도로 힘을 발휘하지 않으면 안 될 테고…… 여러모로 큰일을 하셨어요, 영주님!”
“……너 혹시 수중던전에 크라켄이 있다는 거 알고 있었냐?”
“에이, 설마요!”
루타는 능청을 떨었지만 정시우는 의심을 버리지 못했다. 루타가 정시우에게 악의가 있어서가 아니라, 정시우가 어떤 시련이든 반드시 이겨내고 성장하리라는 기이한 확신이 그녀에게 있는 것처럼 보여서였다. 그러나 루타는 금세 또 화제를 전환해 버렸다.
“그보다도 영주님, 지상에도 다녀오신 거죠? 그런데 그 지상 몬스터는 왜 지배하지 않으신 건가요? 분명 충실한 종이 되어 줄 텐데요.”
“동맹 관계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녀석이 자신의 의지를 지키는 모습을 보고 싶은 마음도 있고.”
“설마 아직까지 자아가 있는 존재를 지배한다는 사실에 거부감을 느끼는 건 아니시겠죠? 영주님은 처음 지하 플레이어로 거듭나신 순간부터 타인을 지배해 오신 존재랍니다? 이번에 확실히 각성하신 고유능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시지는 않겠죠.”
루타 이 녀석은 늘 들춰내고 싶지 않은 부분을 예리하게 찔러 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정시우는 뚱한 표정을 지으며 루타의 이마에 딱밤을 먹였다.
“굳이 할 필요가 없다면 하지 않는다, 그뿐이야. 너처럼 싸가지 없고 말도 오지게 안 듣는 요정이라면 조금 지배하고 싶어지긴 하지만.”
“그, 그런 대담한 말씀을…… 마음은 무척 기쁘지만 저는 아직 영주님을 받아들일 준비가, 아얏!”
쓸데없이 말을 곡해하며 볼을 붉히는 루타에게 재차 딱밤을 먹인 정시우는 녀석을 방치해 둔 채 베토와 상담을 개시했다. 결과는 무척 흡족했다. 베히모스의 가죽을 다룰 수 있다는 사실에 베토가 감격의 눈물을 찔끔 흘릴 정도였다.
하지만 정시우에게 있어 무엇보다도 기뻤던 일은.
“군단의 신 뒤세느의 흔적은 아니지만…… 이 정도로 진한 마나라면 마석 없이 이 사체만으로도 얼마든지 마탄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요!”
“좋았어, 이제 이긴 수 있다!”
“형님, 그 농담은 이미 한 번 하셨습니다.”
뜻하지 않은 낭보에 한껏 들뜬 그날 밤. 수십 시간을 연속으로 전투를 벌인 이도, 한순간도 긴장을 풀지 못하고 그 사람을 기다렸던 이들도 모두가 깊은 잠을 잤다.
잠을 자던 중, 문득 정시우는 침대 근처에서 뭔가가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들었으나 크게 신경을 쓰지 않고 다시 수마에 몸을 맡겼다.
따끈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그를 달콤한 꿈의 세계로 안내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