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
200화.
[당황스럽군.]
지상의 그 누구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덩치와 힘을 보유한 백색 털의 호랑이, 에리우는 눈앞의 적을 앞발로 날려 버리며 중얼거렸다.
[굉장히 당황스러워.]
레벨 350을 초과하는 그녀의 일격은 비단 눈앞의 적뿐만이 아니라 일직선 경로 상에 놓인 수십, 수백 마리의 몬스터를 모래로 만들어 버리는 힘을 지니고 있었으나, 그 뒤로는 수백만 마리에 달하는 적이 그녀의 힘이 빠질 순간만을 기다리며 눈을 빛내고 있었다.
[처음부터 그럴 줄 알았다, 찌. 인간 놈이 에리우 님을 배신한 거다, 찌.]
[그럴 리가 없어. 그도 이 전쟁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다고…….]
이미 한참 전부터 거대한 전쟁은 예고되어 있었다.
지구의 크레센트 에이지로의 진입, 폭발적으로 증가한 이세계의 몬스터들과 그들을 이끄는 신의 목소리, 그리고 자신을 따르기를 거부하는 지구 토종의 몬스터들.
그들을 모두 규합하고 지상의 모든 몬스터를 하나의 거대한 무리 안에 복속시키는 것, 오직 그 목적만을 위해 에리우는 꾸준히 병력을 단련하고 스스로의 기량을 높이며 전쟁을 준비해 왔던 것이다.
[하지만 에리우 님이 대의를 품도록 부추기고,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겠다던 인간은 이 결정적인 순간 유령들만을 보내 왔다, 찌. 그리고 중요한 순간에 놈들을 모두 전장에서 도주시켰다, 찌. 에리우 님을 우습게 보고 일을 벌인 것이 분명하다, 찌! 이세계 몬스터 놈들과 우리를 공멸시키려는 거다, 찌!]
[닥쳐, 사리테. 슈는 그럴 인간이 아냐. 더욱이 그가 진정으로 그것을 원했더라면, 굳이 그런 피곤한 방법을 쓰지 않고 우리를 모두 상대했을 테지! 분명 뭔가 사정이 있을 터, 그런 헛소리를 할 시간에 눈앞의 적을 막아 내도록 해!]
[찌이…….]
아무래도 에리우 님은 완전히 그 인간에게 빠진 모양이다. 그렇게 생각한 사리테는 보스의 설득과 스스로의 생존을 깔끔하게 포기하고, 나중에 자신의 묘비에 적힐 말로는 어떤 문장이 가장 그럴싸할지를 고민하기로 했다.
역시 머리 검은 짐승은 믿으면 안 된다는 말이 가장 좋을 것 같았다.
[고작 이것인가. 무지, 무아의 몬스터 사이에서 태동한 변수에 긴장하지 않은 것도 아니지만, 결국은 이것이 네놈들의 한계로구나.]
지상의 토종 몬스터들을 에리우가 이끈다면, 이세계의 지상 몬스터들을 이끄는 몬스터 또한 전장에 나와 있었다.
아주 거대한, 에리우조차 고개를 들어 올려보아야 할 정도로 거대한 늑대. 놈은 스스로를 베히모스라고 칭했다. 심상치 않은 신의 흔적이 느껴지는 놈이었다.
[그 잡스러운 사령들은 더는 내보낼 수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이제 순순히 패배를 인정하고 유고 님께 충성을 맹세하라. 그분은 우리를 지탱하는 땅처럼 한없이 인자하신 분이시니, 네놈들이 여태껏 저지른 무례와 과오 또한 기꺼이 용서해 주실 것이다.]
[얼굴도 한 번 본 적 없는, 무의미한 지배욕으로 얼룩진 더러운 존재의 말을 들을 생각은 없다. ……무엇보다도, 내게는 이미 믿고 따르는 분이 있음이다!]
말을 마친 에리우가 번개처럼 앞발을 놀려 대지를 강하게 짓눌렀다. 그녀가 휘두른 앞발의 궤적을 따라 지면이 끔찍한 폭발을 일으켜 수천 마리에 달하는 몬스터들을 짓뭉개고 으깨어 버렸다.
그 가운데에는 레벨 300을 넘긴, 지금의 인류로서는 대항할 수단조차 없는 강한 몬스터도 섞여 있음을 생각한다면 그녀의 무력이 특출 나게 기이하다는 사실을 금방 이해할 수 있으리라.
[큭, 역시 기원의 힘을 다루는가……! 대체 어떤 신이지!? 어떤 신이 있어 유고 님보다 먼저 이 지구에 손을 뻗을 수 있었단 말인가!]
[뒤에 숨어서 종알대지 말고 사내답게 나와 결판을 내자! 이대론 피차 소중한 부하를 잃을 뿐이지 않은가!]
[항상 그렇게 남자 같은 말만 해 대니 에리우 님이 남자한테 인기가 없는…… 구에에에엑!]
에리우는 초를 치는 소리를 하는 사리테에게 모래를 끼얹어 버리고는 한 발 앞으로 나갔다. 베히모스 또한 픽 웃으며 앞으로 나섰다.
그녀의 도발이 먹힌 것인가!? 눈에 생기가 도는 에리우를 마주하며 베히모스는 재차 코웃음을 쳤다. 그녀의 수작 따위는 빤히 보인다는 듯한 태도였다.
[굉장히 빤한 수단이지만…… 좋다. 그 대신 내가 이기거든 너를 나의 첫 번째 아내로 맞겠다. 영광으로 받아들이도록 해라.]
[……호오.]
에리우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새겨졌다. 그녀 주위로 모래 알갱이들이 서서히 떠오르며 회오리를 형성하는 모습을 본 사리테는 전율하며 살짝 뒤로 물러섰다. 그녀가 얼마나 분노했는지 익히 짐작할 수 있었던 탓이다.
[이 에리우가 어지간히도 우습게 보였나 보군. 내가 싸우고자 하는 이유와 긍지를 네놈은 그 한 마디 말로 짓밟았다. 지독히도 독선적이고 위압적이며 역겨워!]
[그 말을 하고 싶은 것은 바로 나다. 유고 님의 대리자인 나를 어지간히도 얕보지 않고서야, 감히 나와 대등하게 겨루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을 리가 없지.]
놈은 그 말을 마치고는 잠시 시선을 다른 곳에 두었다. 토종 몬스터들과 이세계 몬스터들이 치열한 전투를 벌이는 한편, 전장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 제3의 몬스터 세력이 있었다.
[…….]
그것은 바로 토종 몬스터로 태어났으나 에리우에게 복속되는 것도, 유고에게 복속되는 것도 거부한 자들의 세력이었다.
크레센트 에이지로의 변화가 너무 급격히 일어난 나머지, 에리우가 지구의 토종 몬스터들을 모두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전 이세계 몬스터들과의 전면적인 대립이 시작되고 만 것이다.
이제 막 태어나 자아도 확립되지 않은 채인 그들은 누구를 따라야 할지 몰라 혼란스러워하고 있었고, 그들의 혼란에 종지부를 찍어 줄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전쟁뿐이었다.
[지켜보아라, 미물들이여. 이것이 위대한 토지의 신, 만물을 다스리고 축복하시는 유고 님의 힘이다.]
[이 땅에 오롯이 서기 위해, 오직 스스로만의 힘으로 땅을 디뎌야 한다는 사실…… 이 에리우를 보고 똑똑히 깨닫도록 해라!]
당장 그들이 다른 신의 목소리에 홀리는 일까지는 막아 냈으니 다행이라 할 수 있겠으나……. 만약 이 전쟁에서 이세계 몬스터들이 승리한다면, 그들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유고라는 자의 신도로 변모하게 되리라.
그렇게만은 놔둘 수 없었다. 지구의 미래를 위해서도,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도, 그리고 자신의 동맹을 위해서도.
[죽어라, 앞잡이!]
[널 죽이지는 않으마. 앞으로 내 곁에 두어야 하니까 말이야!]
호랑이와 늑대가 격돌했다. 평범한 호랑이와 평범한 늑대의 전투였더라면 결과를 볼 필요도 없었겠지만 고유능력을 타고난 거대 호랑이와 신의 축복을 한 몸에 가득 받은 거대 늑대의 전투는 한 치 앞을 예상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유고 님께서는 언제나 나와 함께하신다. 너에게 그 의미를 알려 주마!]
늑대가 땅을 박차고 내달리는 순간, 마치 지구가 놈에게 힘을 보태어 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놈의 전신의 마나 흐름이 폭발적으로 활성화되었다. 평범했을 터인 돌진 스킬이 갑작스레 터무니없는 위압감을 품고 닥쳐오자, 에리우는 이를 갈며 마찬가지 모습으로 땅을 박찼다.
[역시 네놈들은 땅에서 힘을 얻는가. 그렇다면 다시는 땅을 디디지 못하게 해 주마!]
땅에서 거대한 모래의 가시가 연달아 솟구쳐 돌진하는 베히모스의 몸통을 노렸다. 베히모스는 돌진 도중 피하지도 못하고 모든 공격을 몸에 받아 냈으나, 놈의 전신을 장악한 두터운 마나의 흐름이 모래 가시의 공격을 문자 그대로 깔끔하게 분쇄해 버렸다.
그러나 그런 놈 또한 재차 땅을 딛으려는 순간 그 일대의 땅 전체가 모래로 변해 지하로 확 꺼져 버리는 데에야 어쩔 수 없이 추락할 뿐이었다.
[간단하구나!]
[하…… 고작 이것인가!]
위를 점한 에리우가 앞발을 거칠게 휘둘러 모래의 회오리를 만들어 냈다. 그러나 저항도 하지 못하고 그 회오리에 당할 것처럼 보이던 늑대는 기어이 지하에 이르러 모래바닥을 밟고 솟구쳤다.
놈의 몸에 새로운 활력이 흐르는 바로 그 순간, 놈이 순식간에 지하에서부터 창공으로 솟구치며 그 궤적에 놓여 있던 에리우의 전신을 강타했다!
[큭!?]
[네가 아무리 땅을 깊게 판다고 한들, 그 밑에도 바닥이 있는 이상은 유고 님의 힘에서 벗어날 수 없다!]
[큭……!]
놈의 돌진에 제대로 얻어맞아 순간적으로 의식을 잃었던 에리우였으나, 이를 빠득 갈며 양 앞발을 내밀어 어떻게든 놈의 몸통을 붙잡았다. 그 끝에 모래의 힘이 응축된 결정이 어리며 베히모스의 움직임을 속박했다.
[하지만 어쨌든, 지금은……!]
두 몬스터의 거체가 허공에서 부유하는 실로 잠깐의 순간. 모래로 화한 지하로부터 실로 날카롭고 거대한 창이 솟구쳤다. 이것을 위해 미리 일대를 모래로 바꾸어 버린 것이 아닐까 싶을 만큼 거대하고, 웅장한 일격이었다.
[지금은 네놈이 허공에 있어!]
[놔, 놔라……!]
돌진 스킬이 성공으로 끝나며 드러난 찰나의 공백, 한 방향으로 폭주한 마나가 제자리를 찾기까지, 육신이 무방비해지는 바로 그 순간. 에리우의 고유능력이 극한으로까지 응축되어 만들어진 모래의 창은 그 틈을 노리고 솟구쳐 놈의 육신을 관통했다!
[크학!? 놓으란…… 말이다!]
[큭!]
물론 놈의 움직임을 억제하기 위해 달라붙어 있었기에 놈이 발버둥 치며 내지르는 스킬들을 고스란히 몸에 받아 낼 수밖에 없었으나, 에리우는 그 대가로 둘이 땅에 떨어지기 전까지 두 방의 공격을 놈에게 추가로 먹이는 데에 성공했다.
그때에는 베히모스 또한 방어 스킬을 활성화하고 있었으나 날아드는 창마다 첫 일격으로 드러난 상처를 집중적으로 공략하는 데에야 뾰족한 방어 수단이 없었다.
[굉장히 난폭하군……! 스스로의 고유능력만 믿고 몸을 놀리는 꼴이 천둥벌거숭이가 따로 없어!]
대지로 추락하는 그 순간 에리우가 번개같이 뒤로 뛰어 물러나자, 간신히 자유의 몸이 된 베히모스가 땅과 접촉하여 새로이 원기를 북돋우며 이를 갈았다. 자신이 생각했던 승부와는 상당히 질이 다른 더러운 진흙탕 싸움에 이골이 난 것이다.
그러나 에리우는 놈의 말에 코웃음을 칠 따름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내 소중한 부하들이 죽어 가고 있단 말이다. 기량을 자랑할 시간이 있으면 조금이라도 빨리 네놈의 숨통을 끊어 놓아야 해!]
[하, 하하!]
그 순간에도 모래의 힘을 구사해 베히모스를 노리는 에리우. 치명상을 입고 쇠약해진 탓에 그녀의 공격을 전부 피하지 못하고 새로운 상처를 입었음에도, 뭐가 그리 기쁜지 베히모스가 유쾌하게 웃었다.
[순진한 여자다. 그러나 너는, 정말 내가 패배하는 것으로 이들의 진군이 멈추리라 생각했는가?]
[……적어도 그들의 기세는 꺾일 터! 전쟁의 승리자는 우리가 될 것이다!]
[단념해라. 내가 죽어도 얼마 가지 않아 나를 대신하는 새로운 대장이 나타날 뿐이니까. 유고의 군단은 결코 기세가 꺾이는 일 없이, 무한히, 언제까지고 진군할 것이다!]
[뭐……?]
에리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베히모스는 그것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히죽 웃었다.
[그것이 바로 유고 님의 힘이다. 어디까지나 지구의 마나가 약해 나 같은 말단이 와 있을 뿐, 그분의 힘과 군단은 끝이 없는 것이다! 전투가 지속되면 될수록, 그렇게 해서 지구의 마나가 풍부해지면 풍부해질수록…… 더욱 많은, 더욱 강한 신의 군단이 이 지구에 찾아올 뿐이야!]
[그럴 수가…….]
그 시점에서 에리우는 처음으로 아득한 감정을 느꼈다. 눈앞의 늑대만 꺾는다면, 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둘 수만 있다면 지구의 평화를 수호할 수 있게 되리라 믿고 있었거늘.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승산이 없는 전투를 죽는 그 순간까지 반복할 따름이란 말인가?
“그거 아주 마음에 드는 말인데.”
그 순간 어디선가 들려온 목소리에 에리우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목소리는 하늘에서부터 들려오고 있었다. 상공에 수십 미터 이상 넓게 펼쳐진 흑색 용의 날개가, 어딘가 모르게 그녀에게 안도감을 주었다.
“더 많은 신의 힘을 먹어 치워 강해진다. 네놈들의 힘이 쌀알만치도 못하게 쇠하는 그 순간까지.”
[네놈……!?]
에리우보다 조금 늦게 전장의 난입자를 발견하고 베히모스가 바닥을 박차는 그 순간, 번개처럼 떨어져 내린 거대한 망치가 놈의 머리를 정확히 강타하며 끔찍한 굉음을 냈다. 천지가 울리고 만물이 침묵했다.
“얼마든, 언제까지든 오라 그래.”
정시우가 히죽 웃었다. 그 옆에서 팬텀바이크를 타고 그를 보좌하던 케이나는 또 시작이구나, 하고 멍하니 중얼거렸다.
용세하가 이르길 중2병, 그냥 듣고 있으면 코웃음이 나오지만, 정시우의 입에서 나오면 한없이 섬뜩하고 무서운 발언이 되고 마는 신기한 병.
“전부 먹어 치워 주지.”
“뿌이이이이이!”
지상에 강림한 용과 고래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늑대는 영원과도 같은 찰나의 고통 속에서 자신의 패배를 직감하고, 그만 눈을 질끈 감아 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