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8
168화.
놈과의 충돌 순간,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달은 정시우는 다급히 긴급탈출 스킬을 발동했다. 자기 자신의 신체를 마나로 붙들어 내던지는 난폭한 스킬이지만, 그만큼 신속하게 위급한 상황으로부터 그를 보호해 줄 수 있는 스킬!
[안 어울리게 도망치는 재주까지 있구나. 하지만 늦었어.]
“컥!”
그럼에도 놈의 공격을, 놈의 권능을 완벽히 피해 낼 수는 없었다. 내동댕이쳐진 정시우의 전신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생애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는 격통이 그의 전신을 짓눌렀다.
이 고통을 무어라 표현해야 할까. 수만 개의 가위로 자신의 전신을 토막 내는 느낌, 혈관에 바윗덩어리를 끼워 넣는 느낌, 뼈를 긁어내고 불태우는 느낌, 혹은 뇌를 잡아 뜯어 짓이기는 느낌?
고통에는 익숙했지만, 그 모든 종류의 고통이 동시에 덮쳐 오니 제아무리 정시우라도 태연히 버틸 수가 없었다. 무지는 용감 스킬이 없었다면 이보다 얼마나 더 아팠을지 상상하기도 싫을 지경이었다.
[혹 나의 권속들의 능력을 보고 이 헥토의 힘을 모두 판단해 버린 것은 아닌가, 열등종자여.]
헥토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사실은 무어라 말하는지도 잘 알 수 없었다. 자신이 망치를 통해 일으켰던 독염이 아주 자연스레 놈의 명을 따라 정시우의 전신을 불태우고 독으로 녹였으니까.
만약 카오스 스케일을 일으켜 전신을 뒤덮고 있지 않았더라면 그 순간 승부는 끝났을 터였다.
“크흐으…….”
비틀거리며 몸을 추스르고 일어나는 정시우의 뇌리에 이거 혹시 이길 수 없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솟아났다.
던전의 통합 과정에서 신의 힘이 개입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괜한 만용으로 던전을 하나로 만들어, 자신과 다른 소중한 이들의 목숨을 내던진 것이 아닌가 하는 불길한 망상이 머리 가득 들어찼다.
어지간해서는 약한 생각을 하지 않는 그에게, 헥토는 단 일격만으로 두려움을 안긴 것이다. 소실에 대한 두려움을.
[나는 모든 힘을 내 것으로 만들어 지배한다. 힘, 네가 힘이라고 부르는 그 모든 에너지! 나는 난폭하며 강압적이고 욕심이 많아. 모두 내 것으로 삼지 않고는 참을 수가 없어.]
헥토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전신을 짓누르는 끔찍한 고통을 느끼면서도 정시우는 외부에서 공격이 날아든다는 사실을 간신히 감지해 냈고, 용의 감각에 의지해 필사적으로 공격을 피해 냈다.
헥토는 자신의 공격에 정통으로 당하고도 그가 감각과 활동을 유지한다는 사실에 적지 않게 경악했으나 아까처럼 동요를 겉으로 드러내는 실수를 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놀라운 재능을 지닌 너 또한 내 것으로 삼아야겠다. 너의 힘은 나의 능력과 무척 상성이 좋을 것 같군. 어쩌면 너는 나의 사랑하는 사도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개, 소리를…….”
스스로 움직여 놈의 공격을 피해 낸 덕분에 간신히 스스로를 재인식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귀는 여전히 막혀 있었지만 전신으로 외부와 소통하는 용의 감각의 힘은 외부의 진동을 소리로 해석하여 그에게 전달해 주었다.
[네가 어떻게 생각하건 그것은 상관이 없다. 단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내가 너를 갖기로 결심했다는 것이지.]
외부의 힘이 결집한다. 신전 내 모든 마나가 몰려드는 것이 느껴졌다. 어쩌면 저것은 정시우에게 있는 마나 드레인 스킬과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정말로, 놈은 정시우와 닮은 면이 많았다. 인정하기는 싫었지만 말이다.
……잠깐만. 그렇다면 어쩌면.
[하지만 아무래도 일격으로는 부족했던 모양이군. 일단 널 고분고분하게 만들 필요가 있겠어.]
목소리의 진동. 그것에 이어 느껴지는 보다 거대한 진동과 열기, 압력의 집합체. 일단 저것에 얻어맞으면 다음 기회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자 정시우의 머릿속이 분주해졌다.
‘어떻게든 그전에 지금 내가 떠올린 생각을 현실화시켜야 해.’
한 가지 다행한 점이 있다면, 기갑 오크에 강림한 채 행하는 권능에 무리가 따르는지 놈의 공격이 그리 빠르게 이루어지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여유는 불과 몇 초의 시간에 불과했지만 그 안에 성공적으로 해내야 했다. 아니.
반드시, 해낸다.
“후우…….”
[마지막 기도인가? 앞으로 기도는 내게만 바치게 될 것이다.]
정시우는 헥토의 개소리를 무시하며 지그시 눈을 감고 집중했다. 만신창이가 된 몸 상태와는 달리 아직 펄펄 끓어 넘치는 마나가 그의 혈관과 뼈, 근육을 타고 질주하며 그의 정신과 감각을 최고조로 예리하게 가다듬었다.
그의 고유능력을 깨워냈다.
“오빠……? 적이 공격해 오는데 왜 가만히 서 계시는 거예요, 오빠!”
“혹시 방금 격돌로 형님께서 큰 타격을 입으신 걸까요?”
그들의 공방이 너무나 빠르고 고차원적이었기에 용세하와 수아린은 지금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몰랐다.
겉으로 보기에 정시우의 전신을 뒤덮은 카오스 스케일은 마냥 멀쩡해 보였고, 그냥 정시우가 한 방 먹어 구른 것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았으니까.
수아린의 치유에도 반응이 없었는데, 치료할 부분이 없어 그런 것이 아니라 그녀의 치유가 통할 레벨을 단숨에 넘어섰기 때문이었다.
[이런, 위험해……!]
하지만 그와 영혼으로 연결되어 있는 권속인 케이나는 달랐다. 그녀는 방금 일어난 경악스러운 힘의 흐름을 읽어 냈고, 비늘 안에 감춰진 정시우의 육신의 상태가 상당히 심각한 지경에 이르러 있다는 것도 파악할 수 있었다.
[내가 주인님을 대신해 참전하겠다!]
전투권이고 뭐고 개입하지 않으면 되돌릴 수 없는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겠다는 판단을 내린 케이나가 즉각 움직이려 했으나,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다는 사실을 동시에 깨달았다.
어째선지는 굳이 물을 것도 없다. 정시우가 막은 것이다. 동시에 그의 짧은 사념이 그녀에게만 들려왔다.
‘네 힘으로는 대적할 수 없어.’
그렇지만 지금 정시우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그렇게 대꾸하려던 케이나는 순간 멈추어 서고 말았다. 정시우가 팔을 들어 올리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힘없는 저항이 아닌, 승리의 확신을 품은 움직임이었다.
“됐다. 지금!”
[음?]
당장이라도 정시우를 부수고 짓누를 것처럼 쇄도하던 헥토의 전투 도끼.
그 끝에 응집된 끔찍하리만치 웅장한 에너지의 결집이, 순식간에 와해되었다.
[고유능력, 강탈이 Lv2가 되었습니다.]
[이게…….]
힘의 주인 헥토가 당황한 목소리를 냈다. 그가 의도한 것이 아니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힘을 모아, 제 것으로 만들어, 다루는 그 모두가 오직 헥토에게만 허락된 일인 것을. 힘을 지배하며 다스리는 그의 권능이거늘!
“후우…….”
정시우가 눈을 떴다. 독염이 워낙 강력하여 후유증이 남은 탓에 아직까지 시야가 제대로 확보되진 않았지만, 용의 감각을 동원하면 헥토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돌멩이 하나하나 개수를 세는 것도 가능했다.
놈의 공격은 그에게 닿지 않았다. 닿지 않을 것이다. 놈이 자신의 ‘권능’만 믿고 있는 한, 더 이상은.
“역시 아직 내게 가져오는 것은 불가능하구나.”
[네놈, 설마……?]
방금 일어난 기적의 행사자가 누구인지 깨달은 헥토가 두 눈을 부릅떴다. 자신의 권능에 간섭하여 와해시키다니, 그것은 같은 권능의 소유자가 아니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인 것을!
“집중 유지하는 거 아직 많이 힘드니까, 빨리 끝내자.”
[끝까지 나를 기만하다니…… 네놈의 고유능력은 완력이 아니었던가!]
“하, 그래서 내가 말했잖아. 넌 나를 모른다고.”
그사이 정시우가 삐걱거리는 전신의 고함소리를 무시하며 재차 망치를 들고 자세를 취했다. 그의 몸에 새겨진 헤비 웨폰 배틀 스킬의 힘이 그를 도왔다.
독염을 대신해 해머 헤드를 뒤덮는 것은 스파크를 튀기는 검은 뇌전. 헥토의 권능이 그 힘을 앗기 위해 득달같이 달려들었으나, 정시우는 한껏 집중하여 발현한 그의 고유능력 강탈로 그의 힘을 정면으로 밀쳐 내는 데 성공했다.
[네놈, 설마…….]
“아직 내 힘으로 네 것을 취할 수는 없지만, 네 힘을 흩뜨리는 정도는 가능해.”
그것도 서로가 닮았기에 가능한 일이다. 다른 힘들을 무차별하게 흡수하여 제 것으로 만드는 폭군을 상대하기 위해선, 이쪽에서도 거침없이 그의 것을 가져올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능력이 부족하여 상대의 힘을 스스로에게 가져오지 못하니 온전한 강탈로서 성립될 수 없지만, 그럼에도 상대의 의지와 힘을 박살 낼 수는 있으니 완벽한 카운터.
하나로 뭉치고자 하는 의지를 산산조각 흐트러트리니, 스캐터(Scatter)라고 불러 마땅한 기술이었다.
‘고유능력의 일부 효과, 그것도 내가 미숙한 탓에 벌어지는 일이니 스킬로 따로 취급되지도 못할 민망한 능력이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불완전하게 강림한 헥토를 상대하기에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놈의 권능을 무시하고, 놈을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려보내기에는!
정시우의 입가에 승자의 미소가 떠오르자 헥토의 얼굴에는 굴욕이 깃들었다.
[설마 끝까지 나를 농락할 줄이야, 네놈은 대체 무엇이기에!]
“적어도 명탐정은 아냐!”
정시우가 돌진했다. 아까와 같은 힘을 품고, 보다 더한 기세로! 헥토는 급한 대로 자신의 힘을 끌어 모아 정시우에게 대항했으나 이내 그 힘마저 산산이 흩어지는 것을 깨닫고 경악했다. 더욱 속도가 빨라지지 않았는가!
[그 짧은 시간에, 이렇게까지……!]
“미안해.”
바닥을 박차 놈에게 근접한 정시우가 눈을 깜박였다. 정시우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 이상으로 활성화된 그의 고유능력이 헥토의 전신을 뒤덮어, 그가 다른 외부에서 강탈한 모든 것을 뿔뿔이 흩어 버렸다!
그렇게 되니 그 장소에 남는 것은 애초에 힘으로 그를 넘어설 수 없었던 초라한 기갑 오크의 잔해와, 설령 하늘이라도 으깨어 버릴 듯한 괴력이 집중된 마신의 망치!
“내가 좀 천재라서.”
[그렇구나.]
여태까지 헥토에게 속절없이 밀렸다고는 믿겨지지 않을 만큼 뻔뻔한 자만과 자기과시! 그러나 재수 없는 자랑질에 불과한 그의 말을 듣고서야 간신히 헥토는 납득했다.
[우리의 기원은 같은 곳에 있었구나, 나의 오랜 동포여!]
“미안, 난 지연이나 혈연 같은 거 싫어하는 타입이라!”
직후, 강타 스킬의 힘을 품고 번개처럼 내리쳐진 마신의 징벌이 헥토의 강림체를 철저하게 부수어 버렸다. 한순간 정시우에게 죽음마저 각오하게 했던 적은 검은 다이아몬드와 작은 비드 하나를 남기고 완전히 소멸하고 말았다.
고유능력과 괴력으로 동시에 놈의 근원을 뒤흔들었으니, 지구에 남아 있던 그의 힘은 물론이고 어쩌면 그의 본체에까지 유효한 타격을 가했으리라!
[힘의 신 헥토의 강림체를 철저하게 파괴했습니다. 그의 본체에 힘의 손실을 입힙니다.]
[지구에 끼치는 헥토의 영향력이 6.5% 줄어듭니다.]
정시우는 망치를 회수하여 간신히 바닥에 착지하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역시, 세트나크와 비등할 정도로 강한 힘을 지닌 헥토임에도 불구하고 한 번의 전투로 놈의 영향력을 6.5%나 깎아 내는 데 성공했다. 이전에 비해 그만큼 정시우가 성장했다고 봐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후, 어찌 되나 했네…… 으잇!”
“오빠!”
정시우는 안도하여 중얼거리다가는 제자리에서 비틀거렸다. 차마 끔찍한 힘의 충돌에 끼어들지 못하고 전전긍긍하고 있던 수아린과 일행이 기겁하여 그에게 달려왔으나 정시우는 고개를 휘휘 저어 보일 뿐이었다.
“이제 곧 회복되니까 걱정 마.”
“알았으니까 그거 비늘 좀 벗겨 내 봐요. 얼른요.”
“괜찮다니까.”
수아린의 예리한 말에 정시우는 그저 희미하게 웃으며 버텼다. 어차피 회복될 거 괜히 더 걱정시킬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그와 그녀의 미묘한 기싸움이 얼마나 지속되었을까? 곧 그가 기다리던 순간이 다가왔다.
[던전 클리어]
[소요 시간 11일 5시간 38분 48초 86]
[리틀 자이언트 3,856, 그레이 자이언트 2,029, 기갑 오크 1,867, 기갑 오크 엘리트 206, 기갑 오크 만부장 1, 기갑 오크 군단장 1 처치]
[특수 업적 ‘거울을 부순 용사’ 달성]
[추가 보상, 플레이어 스킬 진안(패시브) 획득]
[진안 스킬이 용의 감각 스킬에 흡수됩니다. 진실과 거짓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게 됩니다. 용의 감각 스킬이 Lv5가 되었습니다.]
[클리어 랭크 ? EX]
[추가 보상 ‘프루타의 파편’ 획득]
[경험치 정산 완료. 레벨이 18 올랐습니다. 근력과 체력이 추가로 10 오릅니다.]
됐다, 신의 파편도 획득했고 레벨도 어마어마하게 올랐다!
적어도 도전을 한 의미는 있었다는 생각에 불끈 주먹을 쥐던 정시우는, 그러나 다음 순간 추가 보상으로 제시된 파편의 이름을 보며 눈을 깜박였다. 프루타? 웬 프루타?
“잠깐만, 난 분명 헥토를 족쳤는데 웬 프루, 으갸아아아아!”
그러나 그의 사고는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단숨에 레벨이 폭등하는 것으로 인한 변화가, 이전보다 더한 격통이 되어 그를 덮쳐 왔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