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9
169화.
“으그아아아아아아.”
그냥 레벨이 오르는 것만 해도 끔찍한데, 정시우는 헥토의 강림체와의 격전으로 인해 겉으로도 속으로도 잔뜩 곪아 있는 상태였다.
그 상처를 단숨에 회복하고 육체의 격을 높이는 과정에서 오는 고통에 정시우는 비명도 제대로 내지르지 못하고 바닥을 굴렀다. 아까 헥토의 공격을 버텨내는 것까지 더해져 경험치가 꽉 찬 건지 기어이 무지는 용감 스킬의 레벨까지 올랐다.
[무지는 용감 스킬이 Lv13이 되었습니다. 고통을 받을 때 힘이 늘어나는 비율이 추가로 상승합니다.]
그러고 보면 그런 것도 있었다. 아까 지나치리만치 쉽게 헥토를 파괴할 수 있었던 것도 단순히 괴력만이 아니라 무지는 용감 스킬이 작용한 덕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던 정시우는 슬슬 고통이 잦아드는 것을 느꼈다. 이것도 모두 무지는 용감 스킬의 레벨이 오른 덕분이다. 스스로도 깜짝 놀랄 만큼 전혀 기쁘지 않았다. 그는 제정신을 되찾고 일어서며 우선 수아린과 용세하를 챙겼다.
“후, 후우우…… 너흰 괜찮냐?”
“오빠보다는, 그래도, 간신히요…… 후우.”
“으욱, 내부 장기가 몇 번이고 뒤집어져서…… 한 차례 게워 내고 싶습니다, 형님. 우욱.”
“휴식처 갈 때까지 참아 줘, 제발…….”
그와 더불어 레벨이 오른 두 서포터를 진정시킨 후, 그는 던전 클리어로 인해 변한 것들을 확인했다. 우선은 그의 스테이터스였다.
[정시우]
[파괴자(Breaker)]
[Lv 172]
[근력 ? 737 민첩 ? 715 체력 ? 723 마력 ? 513]
[내성 ? 독 Lv12, 화염 Lv9, 저주 Lv9, 뇌전 Lv9, 빙결 Lv7, 바람 Lv9, 대지 Lv7, 침식 Lv7]
[패시브 스킬 ? 용의 감각 Lv5, 용의 위엄 Lv11, 카오스 테일 Lv4, 카오스 스케일 Lv4, 무지는 용감 Lv13, 소울 포스 Lv7, 헤비 웨폰 배틀 Lv16, 타격 전이 Lv7]
[액티브 스킬 ? 괴력 Lv9, 부여 Lv65, 강타 Lv64, 전투질주 Lv71, 크리티컬 불릿 Lv22, 워 크라이 Lv24, 크루얼 차지 Lv19, 긴급탈출 Lv11, 은신 Lv46, 부메랑 Lv14, 마나 드레인 Lv5, 반복재생 Lv1]
[고유능력 ? 강탈 Lv2]
레벨 172가 되고, 스킬들이 이래저래 성장하고, 용의 감각에는 이전에 없던 능력마저 추가되었지만…… 음, 고생을 했으니 성장을 하는 것도 당연한 일. 다만 평소였다면 더 기뻤을 일인데 지금은 그게 그렇지가 않았다.
보다 심각한 사안이 있기 때문이다.
“난 분명 헥토의 강림체를 잡았잖아!”
그것은 바로 클리어 랭크에 따른 추가보상. 이전 메티모아의 파편을 품은 개체(강림체와는 다르다.)를 사냥하고 보상을 취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얻었음에 분명한 신의 파편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헥토 대신 프루타라는 듣도 보도 못한 신의 파편이 주어진 거지?”
[추측하기론.]
정시우의 손바닥 안에서 연하게 푸른빛을 내고 있는 반투명한 돌을 빤히 바라보며 케이나가 조심스레 말했다.
[어쩌면 헥토는 과거 프루타라는 신을 온전히 취해 힘으로서 지니고 있다가, 자신의 힘을 내어주기 싫어 프루타의 힘을 떼어 내고 도망친 것일지도 모른다.]
“아…… 과연.”
정시우는 아까 자신의 고유능력으로 헥토의 육신과 에너지를 흩어 놓았던 순간을 떠올려 냈다.
그렇다. 헥토는 분명 모든 힘을 제 것으로 흡수해 버리는 능력을 지니고 있지만, 그렇다 해서 그 힘이 품고 있었던 과거의 흔적까지 모두 지워 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정시우가 고유능력을 발한 결과 모두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말았으니까.
“케이나의 말이 맞는 것 같아.”
어쩌면 헥토의 파편이 아닌 프루타의 파편이 남은 것도 정시우의 고유능력이 작용한 결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생각할수록 분해졌기 때문에 정시우는 더는 사고를 잇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내 고유능력이 헥토의 그것과 비슷하기도 하고. 차라리 다른 신의 파편을 얻어서 잘된 걸지도 몰라.”
[하지만…… 나는 그래서 더 기대했다만. 신의 힘을 오롯이 흡수한 주인님이 자신의 고유능력을 보다 깊이 깨닫고 활성화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말이다.]
물론 정시우도 그런 기대를 하고 있었다. 힘과 마나, 그리고 자신의 고유능력에 대해 한창 탐구하고 있는 정시우에게 있어 헥토의 힘이 담긴 파편은 더할 나위 없는 보탬이 되어 주었을 터였다.
하지만 결과가 이 모양인데 어떡하겠는가!
“아 몰라, 아무튼 이걸로 됐어. 헥토의 파편은 분명 시고 맛도 없을 거야.”
“오빠가 헥토의 힘을 신포도 취급하기 시작했어…….”
그런 점이 너무 귀엽지만 지금 그런 말을 했다간 정시우가 진짜로 삐질 것이다. 수아린이 간신히 웃음을 참고 있으려니, 정시우는 뚱한 표정으로 프루타의 파편을 만지작거리다가는 이내 품안에 집어넣어 버렸다.
“아직 정체를 모르겠으니 두고 파악해야겠다. 그냥 망치에 흡수시킬지, 내 마나로 환원할지, 아니면 다른 아티팩트에 써먹을지는 나중에 생각하자.”
[그 방법 외에도 있지 않은가. 소울 포스를 만들었듯 하나의 지정된 스킬로 만드는 방법이.]
“……그래, 그것도 좋을지 모르겠네. 어떤 스킬과 동화시킬 수 있을지는…… 역시 연구를 해야겠지만 말이야.”
강자와 전투를 벌일 때면 언제나 그렇지만 이번 전투는 특히 좀 아슬아슬한 면이 있었다. 단순히 완력만 가지고는 뛰어넘을 수 없는 전투, 혹은 상황. 아마 앞으로도 몇 번이고 이런 일이 닥쳐오겠지. 다종다양한 능력을 갖추고 있어 나쁠 것은 없었다.
또 여차하면 그 모든 힘을 하나로 합쳐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헥토와 싸우던 중 어렴풋이 자신에게도 가능할 것 같다는 느낌은 왔다. 그것이야말로 헥토와의 만남이 준 귀중한 깨달음. 그만큼의 격전이기도 했다.
‘그래도 이번엔 위험했지. 내 고유능력이 아니었더라면 꼼짝없이…….’
거기까지 생각하던 정시우가 문득 멈추어 섰다.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전투 와중 맞이했던 아찔한 순간이었다.
던전이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곳임을 알고도 함부로 자만했던 자신과, 그런 자신에게 제대로 한 방 먹였던 헥토의 힘, 권능…….
그는 이내 입술을 질끈 깨물고, 일행에게 돌아섰다.
“당분간은 좀 안전하게 가자.”
“그 말 저번에도 들었어요, 오빠.”
“아니, 진짜로 안전하게 가자. 최소한…… 그래, 세하가 내 반만큼은 할 수 있을 때까진.”
“그 경지도 까마득합니다만, 형님…….”
그러나 용세하는 그 이상 뭐라 말을 하진 않았다. 조금 전의 전투에서 정시우가 적잖이 충격을 받았음을, 그의 눈을 마주보며 깨달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용세하는 단지 이렇게 답했다.
“알겠습니다. 부단히 노력하겠습니다.”
“좋아, 같이 힘내 보자. ……이번 던전에서도, 무리하게 널 끌고 온 건 미안했다.”
“아니, 아닙니다, 형님. 제가 원했던 일입니다.”
정시우는 이번 던전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죄책감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용세하는 그것이 터무니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헥토가 본신의 권능을 드러내기 전까지 정시우는 놈을 상대로 전혀 밀리지도 않았고, 그 권능 또한 정시우가 지닌 힘으로 훌륭히 받아쳐 승리했으니까. 그의 행동에 문제는 전혀 없었다.
‘하지만 형님 스스로 납득하지 못하시는 거겠지. 적어도 지구에서만은 위험해질 일이 없다, 스스로 그렇게 강력하게 믿고 계셨는데 이런 일이 생겼으니까. 형님은 강한 힘을 지니신 만큼, 스스로에게 지나치리만큼 엄격하시다. 어쩌면 본인의 신변에 닥친 위협보다도 우리를 걱정하시는 걸지도 몰라…….’
정시우가 죽으면 다음 타겟은 바로 그의 서포터들과 케이나가 된다. 아니, 애초에 그를 매개로 살아가고 있던 그들이 정시우의 사후 어찌 될지도 당장 알 수 없지 않은가.
여태껏 그런 위험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도 않았던 정시우이니만큼, 더더욱 죄책감을 느꼈을 수도 있었다.
용세하는 여태까지 정시우가 그런 것에 무감각한 인물이라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정시우는 단지 스스로를 지나치게 믿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용세하는 그런 정시우를 굳게 믿고 있었으므로, 위기 앞에서 흔들리는 그를 어떻게 다잡아 주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괜찮아요, 오빠.”
그때 용세하와 정시우의 상념을 동시에 끊어 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아린이었다. 그녀는 그들이 무엇을 고민하는지 알면서도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번 전투에서 그녀의 목숨도 위험해졌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일까? 용세하가 무어라 말하려던 때, 수아린이 목소리에 힘을 주어 다시 말했다.
“오빠가 절 구해 준 순간부터 제 목숨은 오빠 거였는데요. 새삼스레 이제 와서 그런 자잘한 일 신경 쓰지 말고, 오빠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시면 돼요.”
“너…….”
“후흣, 어차피 결국 오빠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될 테니까 말이라도 이렇게 해서 점수 따려는 거예요.”
“그걸 본인 입으로 말하지만 않았으면 진짜 예뻐 보였을 텐데.”
정시우의 긴장이 조금 풀린 것처럼 보이자 수아린이 배시시 웃고는 덧붙여 말했다. ……실은 지금부터가 본론이었다.
“중요한 부분을 착각하지 마세요, 오빠. 이 세상과 던전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어디까지나 참고할 수 있는 자료일 뿐 절대적이지 않잖아요? 당장 이 던전만 해도 적의 정체가 제대로 드러난 순간 던전의 난이도가 급상승했고요.”
“……그랬지.”
맞는 말이다. 강림체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낸 순간 던전의 위험도가 보통에서 높음으로 급상승하지 않았던가. 던전이 주는 메시지만 믿고 있었다가는 낭패를 보았을 터였다.
얼핏 지구상에 존재하는 게임의 시스템을 따르는 것처럼 보여도, 하늘성과 개미굴은 결정적인 부분에서 막무가내였다. 수아린은 지금 바로 그 부분을 꼬집고 있는 것이었다.
“100% 안전한 던전 탐험 따윈 없어요. 아무리 철저하게 준비해도 결국에는 목숨을 걸고 나서야 하는 게 이 업종이라구요. 그리고 저도 용세하 씨도, 물론 케이나도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만약의 사태가 발생했다고 해서 오빠가 지금처럼 쓸데없이 기죽거나 하실 필요는 없단 얘기예요.”
수아린이 그에게로 날아와 다시 그의 품 안에 안착했다. 그녀가 전해 주는 자그마한 온기가 신비하게도 정시우의 마음속에서 솟아나던 미혹과 불안을 날려 버렸다. 참으로 신비하고, 고마운 일이었다.
“그러니 무슨 일이든 오빠 생각대로 하세요. 우린 그걸 믿고 따르겠어요. 설령 그 결과 우리가 죽는다 해도, 우린 결코 오빠를 원망치 않아요. 그건 오빠가 잘못되어서가 아니라, 변수가 개 같았을 뿐이니까.”
“……너 원래 이렇게 멋졌냐?”
“당연하죠. 이래 봬도 퍼스트 플레이어에, 세계 제일 치유사인데.”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정시우에게 시시콜콜한 일로 태클을 걸며 짜증을 낼 것을 알면서도, 수아린은 자신만만하게 그렇게 선언했다. 그것이 정시우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리라 믿고 있기 때문이었다.
용세하와 케이나도 그녀의 마음을 십분 이해했고, 그녀와 같은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본 정시우는 부끄러운 마음에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래. 너희가 가시밭길을 자처한다면 나도 사양할 수는 없지.”
“얘기가 그렇게 됩니까, 형님?”
“당연하지. 너도 분명히 고개 끄덕였어. 나중에 가서 무르기 없어.”
용세하는 제발 봐달라고 빌면서도 입가에는 미소를 띠었다. 의기소침한 정시우보다는 막무가내로 돌진하는 정시우가 훨씬 보기 좋았다. 그래, 그 곁을 따라 달리고 싶을 만큼 믿음직스러웠다.
“그러면 얼른 보상 받고 수중던전 탐색하러 가자.”
“그렇게 나오셔야죠.”
[정말 단단히 머리가 돌아 버린 주종이라니까.]
자신 또한 그 무리에 포함되어 있음을 실감하고, 즐겁게 한탄하며 케이나 또한 그 뒤를 따랐다.
그들 앞에는 아직 보상의 제단이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