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7
167화.
[던전의 위험도가 ‘높음’으로 조정됩니다. 부디 주의하시길.]
늦어도 한참 늦은 메시지가 정시우의 망막을 간지럽히고 사라졌다. 그러나 그것도 어쩔 수 없으리라. 개미굴, 혹은 하늘성의 시스템과 정시우가 보스의 진정한 정체를 알아차린 타이밍이 완전히 같았으니까.
이 던전을 만들어 내는 존재, 혹은 시스템의 힘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이 증명된 셈이었다.
[나를 알아차렸다는 것은…… 그래, 이미 다른 신의 강림체와 싸워 본 적이 있다는 얘기로군.]
“그렇지. 물론 그것보다 네놈이 훨씬 더 강한 것 같긴 하지만 말이야.”
정시우는 과거 라이아의 강림체와 싸운 적이 있지만, 그 녀석은 헥토의 강림체와 비교하기 미안할 만큼 수준이 처지는 놈이었다.
엘리트 몬스터이긴 했으나 급히 강림하느라 능력이 여러모로 떨어지기도 했고, 몬스터의 수준도 기갑 오크에 비하면 상당히 낮은 편이었으며, 결정적으로 그 안에 깃든 신의 힘의 본질이나 환경이 달랐다.
반대로 말하면 지금 헥토는, 정시우가 통합 던전이라는 무대를 깔아 준 것까지 절묘하게 이용하여 지구라는 세계에서 자신의 힘을 드러낼 수 있는 가장 좋은 무대를 차지하고 나타났다는 얘기였다.
“그래서 대체 어떻게 한 거지? 통합 던전도 결국 시스템의 지배를 받는 만큼 스스로 강림하는 것은 지나치게 난이도가 높았을 텐데…….”
[개미굴 던전의 생성 원리 따위는 이미 오래전에 꿰뚫어 보았다. 던전의 매개가 되는 게 무엇인가? 바로 네놈들이 말하는 플레이어의 흔적이다. 자, 그러면 이제 알겠는가?]
그것으로 충분했다. 정시우는 던전 생성 당시 유령 하나가 던전 안으로 들어갔다는 어떤 유령의 보고를 떠올려 냈고, 납득했다.
과연, 통합 던전 생성부터 헥토의 강림까지, 이 모두가 헥토의 파편을 품은 플레이어의 유령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 플레이어의 유령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물어볼 필요도 없을 것이다.
[나의 이름으로 지배되는 신전에서 나의 힘은 증폭된다. 물론 여기 이 자리에 강림한 것은 내 힘의 지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지만…… 지금, 나의 혼과 마음이 오롯이 이곳에 집중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야. 그만큼 내가 지구의 전사, 너 정시우를 높게 평가하고 있다는 얘기지!]
헥토가 감추고 있던 기세를 온전히 드러내어 정시우를 압박했다. 본디 격이 아득히 높은 존재는 그 사실만으로도 격이 낮은 다른 존재를 능히 무릎 꿇릴 수 있는 법! 그러나 그런 놈과 마주한 정시우의 안색은 상당히 태연했다.
“지금 나랑 기 싸움 하자는 거 아니잖아?”
[음……!?]
틈 하나 없이 그의 몸을 꽁꽁 감싼 비늘 위로 푸른 스파크가 튀긴다는 생각이 든 다음 순간, 허공으로 뻗어 나와 정시우의 육신을 감싸고 들던 헥토의 마나가 가닥가닥 끊기고 말았다.
헥토가 눈을 크게 뜨며 놀라는 찰나 정시우가 우직하게 놈을 향해 돌진했다.
“슬슬 제대로 붙어 보자고!”
[제대로? 하!]
어째서 자신의 혼에 새겨진 액티브 스킬, 신의 위엄이 통하지 않았는가, 극심한 의문에 사로잡힌 헥토였으나 전투광으로서 신의 위에 이른 몸답게 금세 전투에 집중했다.
원인을 규명하는 일은 나중에도 가능하다. 정시우를 죽여 놓고 그의 시체를 회수하고 나서도 얼마든지!
[크하!]
“칫……!”
그대로 놈을 박살 낼 의도로 내질러진 해머가 절묘한 타이밍에 치켜든 도끼에 보기 좋게 가로막혔다. 정시우는 해머를 타고 느껴지는 적의 힘이 보다 강화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를 악물었으나 뒤로 물러나지는 않았다. 오히려 점차 놈의 몸을 뒤로 밀어내기 시작했다!
제아무리 육체를 조종하는 것이 신이라 해도 베이스는 기갑 오크. 호흡 패턴과 근육의 긴장까지 뜯어고칠 수 없는 한, 더는 근접전으로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설마 이게 전력은 아니겠지?”
[두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구나. 정말 그렇게 생각하느냐?]
그러나 정시우의 같잖은 도발을 여유롭게 받아치면서도 헥토는 내심 경악하고 있었다.
지금 지구는 간신히 뉴 에이지에 도달한 상태. 모름지기 세상이 품을 수 있는 마나의 용량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고, 침입자들이 대놓고 자신의 강림체를 마구 들이거나 본신으로 난입하거나 하지 못하는 것도 바로 그 탓이었다.
“뒈져라!”
[큭!]
그리고 그것은 세상의 내부에 살고 있는 인간과 몬스터도 예외가 아니어서, 개인차는 있을지언정 종의 한계는커녕 세상의 한계를 초월하는 개체는 없어야 정상이었다.
세상이, 세상이 품은 마나가, 세상을 이루는 다른 개체들이 그것을 허용하지 않아야 했다.
[그런데 어째서!]
“역시 신쯤 되면 같은 패시브 스킬도 다른 효율로 다룰 수 있는 건가…… 하지만 언제까지 한눈을 팔면서 날 상대할 수는 없을 거야!”
[칫!]
믿을 수 없는 신력을 품은 해머가 한없이 올곧은 궤도로 날아드는 것이 보인다. 피하기에는 지나치게 빠르니 결국 막을 수밖에 없으나, 제아무리 효과적으로 공격을 막아 내도 그 안에 담긴 거력이 헥토가 강림한 육체에 타격을 주며 그를 뒤로 밀어낸다.
100분의 1초마다 패턴을 바꾸어 움직이는 기계장치들이 천변만화하며 데미지를 경감하기 위해 애쓰지만 그것은 붕괴의 시간을 늦출 뿐, 이대로는 정해진 결말을 맞게 된다!
[후우, 크합!]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그의 안일한 판단이 낳은 실수였다.
근래에 이르러 헥토는 본신을 움직여 전장에 나선 일도 적으며, 강림했을 때에도 그 기세만으로 능히 적을 꺾었기에 실제로 몸을 놀릴 일이 없었다. 나태해진 정신으로 강림체의 육신을 완벽히 제 것으로 만들지 못해, 이렇게 적에게 농락당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제아무리 지금 지구에 실시간으로 마나가 차오르고, 생물과 무생물이 모두 변화하며 빠른 속도로 세상이 취해야 할 다음 단계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지금 이 인간이 품은 힘은 이상하리만치 강했다. 이것은 풀 에이지의 최전선에 서 있는 투사에게나 어울리는 힘이 아닌가!
“흐오오오오오!”
[크핫! ……가, 가만……!]
수십 번의 반복된 격돌 끝에 신전을 이루는 기둥까지 거세게 밀쳐져 부딪힌 그 순간 비로소 헥토는 다른 신들에게서 들었던 말을 떠올려 냈다. 그것은 바로 정시우가 고유능력을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얘기였다.
이제 막 마나를 깨우친 땅에서 기원을 깨달은 자, 고유능력의 소유자가 나타났을 리 없다고 생각해 그들의 이야기를 무시했었으나, 상황이 이렇게까지 되었는데도 그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고유능력……. 그렇구나, 완력의 고유능력이로구나. 너는 정말로 이 땅에서 탄생한 신의 후보였어!]
“신의 후보고 자시고…… 제대로 보고 있지 못한 건 너 같은데.”
놈을 보스 룸의 거의 끝까지 몰아넣은 정시우가 마음껏 놈을 비웃으며 재차 돌진 자세를 취했다.
그러자 그의 양팔에서 시작되어 스킬 레벨이 오른 지금은 거의 반신을 뒤덮은 문신이 붉게 빛나며 최대 활성화되었다. 그의 기세가 일순간 두 배 가까이 증폭되었다.
“난 여태 전력이 아니었거든!”
[큭!?]
그렇다.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니지만, 보스 룸에 진입하여 기습으로 전투를 개시하고 지금까지, 정시우는 괴력의 패널티에 시달리는 채였다.
그리고 패널티 타임의 절반 이상이 흐른 지금에서야 다시 괴력을 발동한 것이다.
“하!”
[위험……!]
뭔가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헥토가 다급히 내지른 도끼가 정시우의 망치 강타에 튕겨 난 바로 그 순간, 정시우는 마찬가지로 튕겨지려는 망치를 필사적으로 붙잡아 그대로 다시 놈을 강타했다!
강타의 반동을 굳이 생각하지 않더라도 지나치게 빠르고 강한 공격, 그 이유가 곧 정시우의 망막 위로 나타났다.
[액티브 스킬에 쓰인 마나를 고유능력으로 억지로 붙잡고 유지하여, 위력이 조금 감소된 수준으로 재차 발현하는 방법을 익혔습니다.]
[플레이어 고유스킬 반복재생(액티브)을 익혔습니다. 현 시점에서 자신이 보유한 액티브 스킬에 대해 제한적으로 적용 가능하며, 추가로 마나를 소모하지 않고 최대 1번까지 스킬을 반복하여 발동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게 되네!”
“보통은 안 되지만요!”
비록 순간적인 번뜩임으로 각성한 스킬이었으나 효과는 굉장했다! 놈의 왼팔을 뒤덮고 있던 기계장치의 대부분과 본능적으로 비껴든 도끼의 대부분이 파스락 소리를 내며 부서지고 말았다. 신이 강림하여 진정한 의미로 육체와 조화를 이룬 기계장치가!
“자, 이제 슬슬 숨기고 있는 걸 내놓으시지. 아님 그대로 바이바이하든가.”
[후, 후하…….]
처음 드러낸 위용에 어울리지 않게 처참하게 밀려, 부서지고 처박힌 헥토의 강림체를 오시하며 정시우가 당당하게 말했다. 설마 하등한 존재를 상대로 선점을 내주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던 헥토는 어이가 없어 그저 웃고 말았다.
[확실히…… 나는 안일했고 나의 권속의 육체는 약하다. 사실, 기갑 오크는 강화하고 합일해 봤자 기갑 오크지. 이놈은 그중에서도 약한 기갑 오크였다.]
놈이 갑자기 제 종속을 가차 없이 까기 시작했다! 전투를 시작하기 전에 그랬으면 몰라도 지금 저런 말을 하니 추해 보이기까지 했지만, 정시우는 겉으로 보이는 허술함과 허접함에 굴하지 않고 외려 자세를 굳히며 긴장을 높였다. 그때 놈이 말을 이었다.
[인정하마. 기갑 오크로서는, 내가 패배했다.]
“앗, 숨겨 둔 수를 드러낼 때의 전형적인 패턴이에요, 오빠!”
“조언 고마워. 나도 막 비슷한 생각을 하던 참이야.”
헥토가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실로 충격적이게도, 부서지고 망가진 놈의 몸에 신전의 파편들이 달라붙어 흡수되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신전으로 몸을 보수하는 충격적인 광경을 앞에 두고도 정시우는 기대된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가 잔뜩 들떠 놈에게 물었다.
“그러면, 지금부터가 신의 영역이냐?”
[역시 눈치가 좋구나.]
헥토가 긍정하며 기계와 살점, 돌덩이로 범벅이 된 양팔을 한껏 넓게 펼쳤다.
그것이 본격적인 스타트 신호였다. 놈의 전신에서 미증유의 에너지가 끓어오르는가 싶더니, 아직까지 신전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던 보스 룸 내의 기물을 모두 마나로 환원하여 끌어당겨 흡수하기 시작했다!
“저게 헥토의 진정한 힘인가…….”
“오빠, 왜 지금 공격을…… 꺄악.”
자칫 정신을 팔았다간 자신의 육체마저 산산이 분해되어 흡수될 것만 같은, 치가 떨릴 만큼 압도적이며 무차별적인 폭력! 정시우는 본능적으로 수아린을 감싸며 뒤를 돌아보았다. 케이나가 자신과 마찬가지로 용세하를 보호하는 것이 보였다.
[사실 나는 네가 제법 마음에 들었다.]
“미안, 나는 내가 별로 너랑 닮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
보나마나 우린 제법 닮았지, 하는 말을 꺼낼 것 같아 정시우가 먼저 선수를 치니, 그것마저 예상했다는 듯이 헥토가 클클 웃음소리를 냈다.
[그렇게 잘난 체하며, 뭐든지 먼저 알아차린 체하며, 심리적으로 우위에 서 있음을 애써 어필하려는 그 가여운 안간힘…… 실로 마음에 드는구나. 그것이 나와 닮았어.]
“큭.”
실로 아픈 부분을 찔렸다. 설령 다른 이가 정시우의 허세를 꿰뚫어 본다고 해도 보통은 그에게 묵사발이 되기에 입으로 내뱉지는 못하는데, 놈은 달랐던 것이다.
지금 이 순간도 놈의 훼손된 몸이 실시간으로 복원되는 것이 보였다. 그 공백을 채우는 것이 생물이건 무생물이건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니다. 그 안에 깃든 힘이 중요했다.
[와라. 네가 예상치 못한 힘을 보여 주었으니…….]
“아린아, 물러나. 케이나한테 가 있어.”
“하지만 오빠…….”
“얼른.”
새로 돋아난 놈의 팔 너머, 새로 돋아난 거대한 전투 도끼가 잡혔다. 오직 헥토의 힘만으로 생겨난 일회용 무기에 불과했으나 그것은 지구의 플레이어 그 누구도 꿈꿀 수 없는 견고함과 예리함, 권능을 갖춘 신기의 영역에 이르러 있었다.
[그 답례로서, 나 또한 네 인지가 닿지 않는 영역의 ‘힘’을 보여 주마.]
이래선 마치 보스전을 새로 치르는 것만 같다. 게임에서도 꼭 플레이어한테 처참하게 당한 보스가 순식간에 HP를 전부 회복하고는 기고만장해지던데!
물론 게임의 결말은 언제나 플레이어가 승자지만, 현실은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서로 전력으로 부딪혀 승패를 가를 따름!
“흐오오오오오오오!”
그것을 피하려는 생각 따위는 없다. 오히려 그의 생애 내내 추구해 오던 것이라 말해도 틀리지 않았다. 정시우는 마신의 징벌을 양손에 쥐고, 눈앞에 있는 것이 신이건 신 할아버지건 그대로 박살 낼 기세로 돌진했다.
그런데.
“컥!?”
괴력으로 한없이 강화되어 그대로 놈을 밀어 버릴 것 같았던 정시우의 돌진은, 그러나 한순간 전원공급이 끊긴 로봇처럼 그대로 멈추어 버리고 말았다.
“큭…….”
[그 용력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나.]
헥토의 입가가 사악하게 비틀렸다. 헥토의 힘으로 탄생한 도끼는 자신에게 가해지는 힘까지도 흡수하여 적에게 되돌려주는 신기로 진화한 상태, 지금 이 세상에 존재하는 힘의 형태로는 대적이 불가능하다.
[‘진정한’ 힘은 그것만으로는 막아 낼 수 없어!]
놈의 손에 들린 도끼가 붉고 검은 빛을 토해 내는 순간, 상식을 부정하는 불가해의 힘이 이 공간에서 작용하는 모든 힘의 방향을 오직 정시우에게로 전환했다.
그대로 정시우를 공간과 함께 압축시켜 죽여 버릴 수도 있을 법한 폭력의 격류가 휘몰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