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6
126화.
할 일을 모두 마친 일행은 느긋한 마음으로 휴식처로 돌아왔다. 그런데 휴식처 중앙에 익숙한 인영이 서 있었다. 다름 아닌 베토였다.
“누나!”
[베토?]
케이나는 휴식처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베토의 모습에 당황했으나 빠르게 갑옷의 마나를 회수하여 평상복으로 돌아왔다. 갑옷을 저렇게 해제하는 거구나, 하고 정시우가 멍하니 생각하고 있으려니 베토가 있는 힘껏 그녀의 품에 다이브했다.
“누나아!”
[그래, 그래. 혼자서 쓸쓸했구나.]
하긴 던전 하나 돌고 오겠다는 생각으로 나가 22일 만에 돌아왔으니 베토가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정시우는 케이나가 희미한 미소를 띠며 베토를 달래는 모습을 보곤 웃어 버렸다.
“이래서야 누나가 아니라 엄마네.”
[흥, 주인님 마음대로 생각해라.]
그의 말에 조금 삐진 듯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던전에서 보이던 모습과는 영 딴판이었다. 확실히 기사이던 시절의 기억이 남아 있어서 그런지 전투를 할 때와 아닐 때의 구분을 짓는 것이 인상적이다.
“오빠도 충분히 그런데요.”
“응? 뭐가.”
정시우는 수아린이 어이없다는 투로 하는 말에 고개를 갸웃하며 방어구를 벗어 던졌다.
이젠 휴식처에도 어지간히 익숙해져, 열리라는 생각만으로 저 너머에서 스르륵 열린 서랍 안으로 단숨에 방어구를 골인. 그 후 최대한 가벼운 차림새로 욕실로 직행하기까지 고작 10초였다.
“전투를 할 때면 늠름하니 참 멋진데 왜 적이 눈앞에 없으면 단숨에 저렇게 백수로 변신하는 걸까.”
“형님은 본능적으로 컨디션을 조절하시는 맹수이시니까요. 그러면 저도 실례하겠습니다.”
남자라는 이유로 정시우와 함께 욕실을 쓸 수 있는 용세하가 히죽 웃으며 그녀를 지나쳐 욕실로 향했다.
혼자 남겨진 수아린은 옆에서 부둥켜안고 있는 가짜 남매를 일견하곤, 그대로 둬도 한 다섯 시간 정도는 움직이지 않을 것만 같은 모습에 에휴, 한숨을 쉬며 소파에 앉아 버렸다.
“이번 던전 전투 복기나 해야지.”
전투 복기란 일류 플레이어에게 있어서의 필수 덕목이다. 던전에서 나타난 무수한 상황과 전투를 되새겨, 자신의 행동에서 잘못된 점을 찾고 개선하는 것.
일종의 마인드 트레이닝인데, 언제 어느 때든 본능적으로 최선에 가깝게 움직이는 야성의 맹수인 정시우와는 달리 그녀에게는 한 번 던전에 들어갔다 나오면 며칠이고 전투 복기에 매달리는 것이 필수 과정이었다.
‘음, 이번에도 딱히 눈에 띄는 실수는 없었어. 뭣보다도 오빠가 너무 강해서 내가 순간 긴장의 끈을 놓는다고 해서 별 변수도 생기지 않기 때문이지만…… 그렇다고 느긋하게 있을 수는 없지. 사제의 최우선 덕목은 파티원을 치유하는 것이지만, 그 정도로 만족할 수는.’
예를 들면 보스전에서도, 수아린이 정시우와 조금만 합을 맞출 줄 알았더라면 신성 공격 마법으로 그를 도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수아린은 정시우가 무슨 생각으로 전투에 임하는지조차 알 수 없었기에 제때 원조를 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오빠는 치유만으로 충분하다고 늘 말하고 있지만…… 역시 나 자신이 만족할 수 없어. 나도 운동신경이 조금만 더 좋았더라면 좋을 텐데.’
그게 아니라면 마나 컨트롤이라도 더욱 숙련해야 한다. 적어도 정시우의 마나를 북돋워 줄 정도로는 성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언제나의 결론에 도달한 수아린은 소파에 앉은 채 집중하여 마나를 움직였다.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 했던가, 정시우만의 기묘한 마나 컨트롤을 옆에서 보아 온 덕에 서서히 그녀의 마나 호흡도 그를 닮아 가고 있었으나 아직 그녀 스스로는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시원하다…… 아린아, 너도 샤워…… 음.”
샤워를 마치고 나온 정시우는 수아린이 마나 컨트롤에 집중하고 있는 것을 보곤 그녀를 건드리려던 것을 멈추었다. 마찬가지로 김을 모락모락 피워 올리며 고개를 갸웃하는 용세하에게 가볍게 고개를 저어보였다. 그녀를 방해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좋아, 밥이나 하자. 매번 아린이한테 얻어먹었으니 가끔은 보답을 해야겠지.”
“형님, 괜찮으시겠습니까?”
정시우가 요리를 하려 할 때마다 수아린이 그를 뜯어말렸던 것을 생각하며 불안한 표정을 짓는 용세하였으나 정시우는 히죽,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플레이어가 되겠다는 일념만으로 10년간 온갖 쓸데없는 짓을 섭렵한 내가 요리도 안 배웠을 줄 알았어?”
“던전에서 취사가 필요하다는 걸 알고 계셨군요…… 아니, 온갖 쓸데없는 짓이라고 스스로 말씀하시면 서글퍼지잖아요, 형님.”
그러나 정시우는 혼자 훌쩍 부엌으로 떠났다. 용세하는 여전히 서로만 보고 있는 남매와 소파에서 혼자 열심히 마나를 순환시키고 있는 수아린 사이에 남겨져 쥐죽은 듯 얌전히 대기해야만 했다.
그로부터 2시간이 지나 수아린은 부엌에서 나는 향긋한 냄새에 문득 제정신을 차렸다.
“일어나셨으면 먼저 씻으세요, 선배님.”
“아, 네……? 네, 그래야죠…… 으으음?”
수아린이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일단 샤워를 하고 나오니 정시우가 마침 식사 준비가 되었다며 그들을 불렀다. 적절하게 구워 낸 스테이크에 토마토소스 파스타라는, 실로 간단하면서도 깊이 있는 메뉴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빠 양식 전문이었어요!?”
“장어 덮밥도 해 주랴?”
“어, 아뇨……. 그건 그냥 제가 해 드릴게요.”
“와! 주인님, 맛있어요!”
3주 동안 간단한 것들로(물론 녀석을 위한 식량이 충분히 준비되어 있었지만, 베토는 대장일이나 마법에 대해선 알아도 요리에 대해선 잘 몰랐다.) 배를 채워 온 베토가 가장 신이 나서는 그릇을 비웠다.
그런 녀석을 흐뭇하게 보며 스테이크를 자른 케이나도 그 절묘한 굽기 정도와 부드러운 식감, 풍부한 향에 동생 못지않게 놀랐다.
[기사이던 시절에도 먹을 것에는 큰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지구의 식문화는 굉장하군.]
“설마 내가 아니라 지구를 칭찬할 줄이야…….”
사실 대단한 요리가 아니라 지구의 조리법과 향신료가 활약한 부분이 크니 뭐라 반박할 수도 없다는 점이 실로 분하다. 정시우는 그 앞에 놓인 특대 스테이크를 한 번에 150그램씩 잘라 입에 던져 넣으며 흥, 코웃음을 쳤다.
“쉽게 먹을 수 있는 고기가 아니니 감사하며 먹도록.”
“……오빠, 이거 대체 무슨 고기예요?”
“휘, 휘이이.”
스테이크를 씹던 수아린의 눈매가 그의 말을 듣곤 돌연 날카로워졌으나 정시우는 애써 나오지도 않는 휘파람을 불며 그녀를 외면했다. 수아린은 그의 멱살을 붙잡고 흔들어서라도 물어보고 싶었지만 자신의 힘으론 그를 1미크론도 흔들지 못할 것을 알고 포기했다.
“안심해, 독은 없어. 용의 감각을 지닌 내가 보증하는 것이니 믿어도 좋아.”
“됐어요. 차라리 어떤 몬스터 고기인지 말하지 마세요. 이대로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겨 주세요.”
불안한 마음으로 시식해 본 파스타도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다. 마침 양식에는 이상하게 요령이 붙지 않아 자신이 없었던 수아린은 이렇게 되면 요리 분담이 적절해서 좋겠구나, 하고 생각하다가는 혼자서 얼굴을 붉혔다.
혼자 청춘인 수아린을 놔두고 나머지 일행은 맹렬하게 요리를 해치웠다. 그렇게 딱 10분 만에 정시우가 준비한 모든 요리가 거덜 났다. 넉넉하게 50인분 가까이 준비했음에도 불구하고!
던전에서 돌아온 플레이어들이란 으레 이런 법이었다. 그중 30인분을 정시우 혼자 해치웠다는 것이 실로 경악스러운 점이긴 했지만!
“아…… 흐, 그렇지.”
정시우는 산처럼 쌓인 설거지거리를 보곤 히죽 기분 나쁘게 웃으며 수아린에게 말했다.
“이번엔 내가 요리했으니까 설거지는 네가 할 거지?”
“네, 그럼요.”
“응……?”
수아린이 너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여 정시우는 외려 김이 빠지고 말았다. 반면 용세하는 그것을 보며 픽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의 행동이 수아린을 기쁘게 할 뿐이라는 사실을 정시우 본인만이 모르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까 다음에 또 요리해 주세요. 무척 맛있었어요.”
“어, 응. 알겠어……?”
콧노래까지 부르며 설거지를 시작하는 수아린을 두고 일행은 우선 휴식처의 거실로 나왔다. 베토는 케이나에게서 떨어지려 하질 않았으니 둘은 그냥 놔두기로 했다.
“저는 제법 졸립니다만…… 형님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형님 평소 패턴이라면 이제 주무실 때 아닌가요? 그리고 또 용꿈을 꾸시고 랭크 업 하는 거죠.”
“뭔 놈의 용꿈을 매번 꾸냐. 이젠 좀 안 나왔으면 좋겠구만. ……그리고 지금은 한가로이 잘 때가 아냐. 육체 밸런스를 점검해야 하거든.”
이번 던전에서의 성장은 레벨 업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무수한 플레이어 유령과의 계약을 동시에 달성하게 되면서 그들의 기록과 마나로 인한 스테이터스 성장도 있었고, 스킬들도 성장했을뿐더러 새로운 스킬까지 얻지 않았는가.
스스로의 상태를 파악하는 것은 언제나 중요한 일이다. 정시우는 아까 수아린이 그랬듯 마나 컨트롤을 시작으로 육신을 점검할 생각이었다. 그 다음은 새로운 스킬 확인과 연습, 마지막은 새로운 무기 연습까지!
“저는 아직까지 그런 것들은 잘 모르겠지만…… 형님이 하신다면 한 번 같이 해 보겠습니다.”
“너도 이미 리타이어 이전의 무력을 뛰어넘었잖아. 마나의 한계, 스킬의 한계, 육체의 한계, 그 모두를 점검하지 않으면 유사시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알 수 없게 될 거야.”
“명심하죠.”
솔직히 말하면 아직까지 감이 오지 않았지만, 용세하에게 있어 롤모델인 정시우가 한다면 어떻게든 따라 한다! 둘은 나란히 소파에 앉아 육체를 관조하고 마나를 순환시키기 시작했다. 베토와 함께 거실로 나온 케이나가 그 모습을 보며 실소를 터트렸다.
[자신을 그렇게 쉽게 파악하고 점검할 수 있는 시점에서 이미 충분히 놀라운 경지인데…… 왜 그러니, 베토. 너도 해 보고 싶니?]
“나는 슬슬 대장간이 짓고 싶어, 누나. 나도 주인님께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하고 싶어.”
[주군을 섬기는 자세만은 이미 훌륭한 기사로구나. 좋아, 그럼 우선 나와 함께 터를 보러 가자.]
케이나는 순수한 미소와 함께 그렇게 말해 오는 베토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며 녀석과 함께 거주지역으로 넘어갔다.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오직 세 사람만 남은 휴식처, 그곳에선 당분간 접시가 물과 부딪히며 달그락거리는 소리만 정겹게 울려 퍼졌다.
“대체 언제까지 어깨춤을 추게 하실 거예욧!”
그러나 평화는 고작 5분 만에 깨지고 말았다.
“뭐야?”
실눈을 뜬 정시우는 뒤를 돌아보곤 자신의 집중을 방해한 이의 정체를 깨달았다. 거주지역과 통하는 문이 빼꼼 열려 있어, 그 안에서 휴식처로 고개를 내밀고 있는 은발의 소녀의 아름다운 얼굴이…….
“어?”
정시우는 그 정체를 파악하곤 놀라 외쳤다.
“너 왜 커졌냐!?”
“원래 이 사이즈예요!”
소녀가 떽떽거리며 외쳤다. 아무래도 거주지역에서 휴식처로 넘어오는 것만은 원천적으로 금지되어 있는지 안으로 들어오진 못했지만, 신비로운 빛을 발하는 가벼운 프릴 원피스 차림의 소녀의 정체를 몰라보지 못할 수는 없었다.
“오빠, 이번엔 또 어떤 여자…… 아.”
빠르게 설거지를 마치고 튀어나온 수아린이 소녀를 보곤 깨달음의 목소리를 냈다.
거주지역으로 찾아온 요정상인 루타의 모습이 그곳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