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7
127화.
“입장 허가를 내려주시면 제가 휴식처에도 들어갈 수 있는데.”
“나중에 내가 그쪽으로 넘어갈게.”
“쳇.”
요정상인 루타는 그가 얼결에 고개를 끄덕일 줄 알았던지 깔끔한 거절에 혀를 차며 뒤로 물러났다. 정시우는 코웃음을 치며 그녀에게 휘휘 손을 저어 보였다.
“지금은 일 정리할 게 있으니까 그 안에서 기다리고 있어라.”
“저는 무척 오랫동안 손님을 기다렸답니다! 손님의 생각보다도 무척 긴 시간이었어요!”
“기다린 김에 조금 더 기다려.”
“어쩜 이렇게 잔혹하실 수가…….”
정시우는 일어나서 거주지역으로 가는 문을 닫아 버렸다. 아마 케이나와 베토가 문을 느슨히 닫고 나갔던 모양이지. 그가 원하기 전까진 열리지 않도록 확실히 닫아 놓고는 소파로 돌아와 눈을 감고 앉는 정시우의 모습에 수아린은 박수를 쳤다.
“좋아요, 앞으로도 그렇게 단호하게 하시면 돼요!”
“선배님…….”
이젠 측은할 지경이다. 하지만 여기서 어떻게 하라고 훈수라도 두었다간 얻어맞겠지. 용세하는 조용히 다시 침잠했다.
정시우는 짧은 시간 동안 성장한 자신의 육신이 어떤 식으로 힘을 내는지, 어디까지 낼 수 있는지를 우선 점검했다.
그의 육신은 마나로 인해 각성하기 이전에도 이미 독자적으로 성장해 오고 있었다. 그것이 플레이어가 된 이후 다시 가파르게 성장했다지만, 결국 그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마나의 원조 없이 육신이 순수하게 낼 수 있는 힘, 기적에 이른 무력. 정시우는 어깨에서부터 발가락 끝에 이르기까지의 뼈와 근육을 세심하게 점검하며 그 힘의 한계를 스스로 측정했다.
‘내 육신이지만 이젠 조금 무서운데.’
던전 클리어 보상을 받기 전에 이미 거대한 돌산을 들어 올릴 수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그의 육신이 플레이어니 레벨이니 하는 개념을 떠나 있을 수 없는 경지에 이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어디까지나 원래부터 초인이었던 그가 마나까지 각성했기 때문이다. 혼돈과 혼돈을 곱해 완벽한 미지의 영역에 이른 것. 그 막대한 힘을 정시우 스스로도 용케 육신에 가두고 조절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신이라는 것들을 이겨 먹으려면 단순한 무력으로는 안 된단 말이지. 이 무력에 마나를 겹치는 법을 연구해야 해.’
결국 육신과 마나가 하나로 겹치지 못하면 초월의 경지에는 이를 수 없다. 용을 보며 깨달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꿈에서 보았던 용은 신을 넘을 수 있었을까? 그것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정시우는 용이 아니고, 그저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방법을 활용해 강해지기만 한다면 그뿐이다.
‘좋아, 그다음은 마나.’
마나에 대해서라면 요 근래 계속 탐구해 오고 있었으니 오히려 단순히 육체를 놀리는 것보다 쉽게 여겨질 정도다.
특히 주목할 사항은, 이젠 정시우가 어지간한 기본 스킬을 구사하며 소모하는 마나보다도 세상으로부터 빨아들여 충전하는 마나의 양이 더욱 늘어났다는 사실이다. 이젠 외부와 내부 마나의 소통을 제법 자연스럽게 행할 수 있었다.
물론 이것은 용의 감각 덕분이다. 자연히 외부 자극에 대한 반응도 빨라졌다.
‘그 덕에 마나가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어. 이제 정말 해도 될 것 같다.’
무엇을 하는가 하면, 바로 신체 마나의 공격적 활성화라 할 수 있는 전투질주 스킬의 상시 발동이다.
이전부터 마음만 먹고 시도하지는 못했던 것인데, 마나를 다스리는 데 탁월한 안정성을 부여하는 용의 감각이 있는 지금은 얼마든지 가능할 것 같았다.
‘좋아, 시작은 쉬워.’
처음엔 전투질주를 말 그대로 빠르게 질주하기 위한 스킬로 받아들였지만, 스킬을 곰곰이 분석하고 연구한 결과 신체의 일부분에 한정해 효과를 발휘하는 것도 가능해졌을뿐더러 딱히 빠르게 움직이지 않고 마나만을 전투질주의 형식으로 활성화할 수도 있게 되었다.
전투질주는 그 입수 난이도가 어렵지 않으면서도 가장 간단하고 효과적으로 마나의 성질을 변환시킬 수 있는 중요한 스킬 중의 하나다. 어쩌면 이 스킬을 계속 탐구하고 성장시킨다면 놀라운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전투질주를 상시 활성화하면서 신체의 움직임을 다스리는 수련을 하는 것으로 그의 육체도 또한 단련될 테니 일석이조라 할 수 있으리라.
‘그런데 이젠 여력이 남아.’
아마 수아린이 그의 생각을 알았더라면 욕을 했겠지. 하지만 실제로도 그랬다. 용의 감각을 활성화하여 외부 마나뿐만 아니라 내부 마나의 순환에 터무니없이 민감하게 반응하게 된 지금은 자면서도 전투질주를 유지할 수 있을 만큼 그의 감각이 예리해져 있었다.
‘으음, 너무 쉬운데. 수련이 안 될 만큼 쉬워.’
그렇다면 하나 더 하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정시우는 마력의 일부를 가지고 이번엔 전신을 뒤덮는 스톤 스킨을 발동했다.
전투질주가 공격적 활성화라면 스톤 스킨은 방어적 활성화. 마나의 성질을 변환하여 물리, 마법 공격으로부터 육신과 혼을 보호하는 기본적이면서도 필수적인 스킬이다.
정반대되는 스킬이지만 마나의 갈래를 나누어 발현한다면 동시에 두 스킬을 유지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했다.
정확히는, 용의 감각을 지니고 있는 정시우에게는 가능했다.
‘좋아, 된다.’
물론 난이도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마나의 순환이 꼬이지 않도록 감각을 곤두세워야만 했다.
마나의 공격적 활성화와 방어적 활성화를 동시에 유지하면서, 또 다른 방향으로 마나를 소모하여 전투를 치러야 한다면 보통 집중력으로는 안 되겠지. 하지만 이번 보스전에서는 그것이 가능했다.
그것을 앞으로도 가능하게 만들려면 우선 지금 이 상태에 익숙해져야 한다. 전투질주와 스톤 스킨을 유지하면서 다른 스킬들까지 자유자재로 사용하고, 나아가 마나 패턴을 상호교류할 수 있게 한다면 그때서야 비로소 정시우는 마나의 숙련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태클이 안 들어오니까 뭔가 심심한데…….’
수아린이 이 말을 들었더라면 마나의 숙련자는커녕 마스터가 되어도 힘들 것이라고 한 마디 해 줬을 텐데 태클이 안 들어오니 안 들어오는 대로 아쉽다. 이것이 길들여진다는 것인가. 정시우는 경악했다.
‘어쨌든 그러면 이 상태에서…….’
마지막으로 스킬들을 훑었다. 용의 감각이야 이미 그의 육신과 하나가 되었으니 새삼스레 점검할 것도 없고, 우선은 그의 내부에서 반짝이며 빛을 발하는 내성들을 차례대로 훑었다. 이어서 헤비 웨폰 배틀을 비롯한 전투적 성향의 패시브 스킬들.
그리고 이번에 업적 보상으로 얻은 새로운 패시브 스킬 타격 전이까지.
‘……이건 정말 완전히 모르겠는데.’
무려 10분 동안 새로운 별에 집중해 본 정시우였으나 깔끔하게 포기 선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가 아직까지 무지는 용감 스킬을 완전히 파악할 수 없듯이 타격 전이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모르는 영역에서 가공되어 주어진 스킬답게 그 원리를 조금도 알 수가 없었다.
그나마 어떤 식으로 그의 육신과 교류하며 어떻게 발현하는지는 파악했으니 다행이었다.
‘본능적으로 주위 공간의 적의를 탐지하고 데미지를 전이시키는 거구나. 전이시키는 방법을 알 수는 없지만…… 이렇게 되면.’
비단 붙어 있는 다수의 적을 공격할 때뿐만이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적을 공격할 때 놈에게 타격을 모두 먹이는 방법도 가능해진다는 얘기다.
개체가 아닌 공간을 감지하는 것이 이 스킬의 특성이기에 얼마든지 가능했다. 요는 타겟팅의 문제다. 10%의 데미지로 두 명을 더 공격할 수 있다 했으니 거대한 적을 공격할 때에 한해 그의 근접 공격은 120%의 데미지를 갖게 되는 셈이었다. 이런 경우를 바로 개이득이라 부른다.
그는 한참을 더 타격 전이에 집중했다. 그리고 이 정도면 실전에서 써먹는 데에는 문제가 없겠다는 판단을 내린 후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바로 액티브 스킬이다.
‘나머지 스킬은 됐고, 중요한 건 세 가지다.’
괴력, 긴급탈출, 마지막으로 은신.
괴력은 쓰면 쓸수록 그의 육신을 영구적으로 강화시킨다. 액티브와 패시브의 성질을 동시에 지니고 있으며, 마나를 얻기 전부터 지니고 있던 그의 육신의 특성과 잘 맞아떨어지는 스킬이다.
‘음…… 역시 아직 모르겠다. 내 전직과 관련된 스킬이기도 하고…….’
스킬과 육신이 교류하는 모습만을 보다 세밀하게 관측할 수 있었을 따름이다. 어떻게 잘 하면 이 스킬과 육신을 합일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었지만 아직 이른 생각이었다.
단지 자신의 생각을 현실로 이끌어 낼 수 있을 때쯤엔 그야말로 신이라는 작자들과 한판 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해 볼 따름이다.
나머지 두 스킬은 이번에 유령들이 내놓은 스킬이었다. 우선 긴급탈출은 정말 급한 상황에 빠르게 발동할 수 있는 스킬로, 대충 분석해 보자면 마나를 한 방향으로 빠르고 강하게 내쏘아 적을 공격하면서 동시에 그 추진력을 이용해 그 자리를 신속하게 탈출하는 스킬.
무척 단순한 스킬이라 생각했지만 스킬의 운용에 따른 마나의 움직임이 그리 간단하지만도 않아, 이 스킬을 연구하면 어쩌면 새로운 이동 계열 스킬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
마지막 은신은…… 아무래도 육체를 놀리는 요령이 많이 가미된 탓인지, 정시우가 휴식처 입장열쇠를 갖고 있어 은신에 익숙해져 있던 탓인지 얻는 순간부터 23레벨로 고착된 액티브 스킬이다.
마나를 활용하여 존재감을 죽이고, 최종적으로는 그 마나의 존재감마저 죽여 적에게 들키지 않도록 하는…… 굳이 따지자면 정면승부를 선호하는 정시우가 그리 선호하지 않는 스킬.
하지만 개미굴 전투뿐만이 아니라 이 세상에 나타난 다종다양한 몬스터들과 겨루어야 하는 현 상황에, 마음에 안 든다고 이 좋은 스킬을 익히지 않을 수는 없었다. 더욱이 은신 스킬은 은신 스킬대로 연구하여 더욱 좋은 스킬을 만들어 낼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는 긴급탈출 스킬과 은신 스킬을 차례대로 발동해 보며(한 가지 경악스러운 사실은, 그 와중에도 전투질주 스킬과 스톤 스킨 스킬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스킬의 현 능력과 발전 가능성에 대해 냉정히 판단해 보고는, 비로소 모든 점검을 마치고 만족하여 두 눈을 떴다. 이제 마지막으로 수련장에서 새로운 무기만 테스트해 보면…….
“어힉!?”
“주인님!”
워낙 내부에 깊이 침잠한 탓에 용의 감각을 지니고도 외부의 자극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코앞에 얼굴을 들이밀어 그를 놀라게 한 이는 다름 아닌 베토였다.
악의라곤 한 점도 찾아볼 수 없는 선한 인상의 미소년이 잔뜩 상기된 얼굴로 그를 똑바로 바라보는 모습에, 정시우는 화를 내는 것도 잊고 무심결에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말았다. 베토, 남녀를 가리지 않고 사랑을 받을 무서운 녀석이다.
“무슨 일이냐, 어…… 베토?”
“주인님, 대장간을 지을 수 있다는 말을 들었어요! 저도 주인님을 돕고 싶어요!”
정시우는 그 말을 듣는 것만으로 사태의 원흉을 파악했다. 빼꼼 열린 거주지역의 문으로 정시우를 힐끗 훔쳐보는 요정상인 루타의 모습은 불과 조금 전에 녹화해 놓은 영상을 재생해 놓은 것만 같다.
“그래, 가자, 가. 점검 끝났다그래.”
“야호!”
“야호!”
한마음으로 환호하는 베토와 루타. 정시우는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는 그들의 모습에 끝내 웃어 버렸다. 그는 무기의 점검은 나중으로 미루어 두기로 하며 그들의 뒤를 따랐다. 옆에서 얌전히 지켜보고 있던 수아린과 케이나도 피식 웃으며 그와 함께했다.
“어……?”
“왜 그러세요, 오빠?”
“아, 아냐. 중요한 일이면 다시 생각나겠지.”
다 함께 거주지역으로 넘어가려던 찰나 정시우는 뭔가 잊은 것 같다는 생각에 고개를 갸웃했지만, 이내 어깨를 으쓱하며 문을 닫았다.
기분 탓인지 이전보다 더 넓어진 것만 같은 거주지역이 그를 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