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3
123화.
[카하!]
키메라의 복부에서 거대한 칼날이 수십 개 솟구쳐 정시우의 전신을 난자하려 들었다. 마나의 유동도 극히 미약하여 미리 예측할 수도 없는 공격. 정시우는 팔뚝을 세워 그것을 막아 내며 다른 팔로 라이플을 휘둘렀다.
라이플 자체는 전혀 날카롭지 않지만, 정시우의 마나가 집중되며 만들어 낸 마나의 날이 라이플의 힘을 싣고 놈의 몸을 베어 갈랐다.
[캬흐아아아아!]
“새끼 신음 한 번 괴상하네…… 칫.”
완벽한 타이밍에 막아 냈음에도 그의 팔뚝을 감싼 건틀렛이 완벽히 뚫리고 팔뚝에서 피가 솟았다. 수아린이 빠르게 치유했지만 데미지가 누적되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상처를 아예 안 입을 수는 없다. 놈의 공격은 지나치게 날카롭고 단단했다. 그럼에도 정시우는 케이나의 참전을 요청하지 않았다. 키메라는 강하고 빨랐지만 충분히 정시우가 뛰어넘을 수 있는 벽이었다.
[너는 신의 힘을 네가 모두 소화할 수 있으리라 믿느냐?]
“응.”
놈은 수다쟁이였다. 전투를 하면 전투에만 집중하면 될 것을 자꾸 정시우를 쓸데없는 말로 도발하려 들었다. 그 내용이 일일이 무시하기엔 제법 뼈가 있다는 것도 짜증나는 이유 중 하나였다.
[그 끝에 누구인지도 모를 신에게 삼켜져 너 자신은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진다 해도?]
“그거 네 얘기냐? 너도 무수히 많은 몬스터들에게 삼켜졌잖아. 그래서 지금 누가 주체인지는 알아?”
[……하하.]
키메라의 공격 패턴은 무척이나 다양했다. 신체를 자유로이 변형시키며 어디로든 이동하여 그에게 공격을 퍼붓는 키메라는 한두 마리 몬스터의 융합으로 이루어진 존재는 아닐 터였다.
그러나 정시우가 그것을 지적하자 키메라는 오히려 환하게 웃었다. 검은 그림자와 같은 얼굴에 쭈욱 금이 생기며 기분 나쁜 회색의 혀가 날름거리는 것이 무척 기분이 나빴다.
[그렇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던전의 생성 순간 무수히 많은 존재가 뒤엉켜 자아를 잃고 그저 육체의 덩어리가 되어 뒹굴고 있을 때 그분이 직접 내게 축복을 내려 주셨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지금 이곳에서 네놈과 싸우고 있다. 그분께서 너를 데려오라 명령하셨기에!]
자아가 없는 것을 오히려 즐긴단 말인가? 아니, 그 반대다. 메티모아에 의해 자신이 정의되었기에 그에게 충성을 다짐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그 충성심조차 만들어진 것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말이다.
[그러니 삼켜지거라!]
“누구 맘대로.”
놈과 격투를 벌이며 휘두르는 동안에 차지 샷을 충전한 정시우는 놈이 자신의 팔을 보자기 형태로 변환하여 그를 덮쳐오는 순간 그 중앙에 마탄을 쏘아 냈다. 끔찍한 파열음, 그 뒤를 이어 허광을 가르는 섬광에 키메라의 신체 일부가 완벽히 소멸되었다.
[주인님, 아무래도 느낌이 이상하다.]
대검을 회수한 케이나가 놈의 반격을 깔끔하게 피해 내고 뒤로 물러서며 그에게 속삭였다.
[놈은 여전히 여유를 감추고 있다.]
“그래, 내 눈에도 그렇게 보여.”
[이미 신체의 30% 이상이 소실되었어야 하는 데도 에너지의 총량에는 그리 큰 변화가 느껴지지 않으니 더욱 이상하다.]
어쩌면 놈은 더 큰 비밀을 감추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시우가 지닌 용의 감각에도 별다른 이상이 감지되지…….
“음?”
[캬하!]
정시우가 무엇인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떠올린 그 순간 키메라가 재차 돌진해 왔다. 제법 중요한 생각이 단박에 날아갈 만큼 빠른 돌진이었다. 마치 번개가 지상을 질주하는 것만 같다!
[벌써 지쳤는가! 움직임이 느리구나!]
“개소리……!”
그림자를 타고 이동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빠르게 공간을 가로지른 키메라가 블레이드를 내지른다! 그것을 피해 내자 그다음엔 오른발 끝에 돋아난 총구가 그의 목숨을 노렸다.
그 안에서 튀어나오는 것은 놈의 살점으로, 만약 그것이 몸에 박히기라도 하면 그 순간 침식이 시작되는 무지막지한 병기였다.
그 힘과 속도도 물론이지만 실시간으로 그의 공격 방식까지 분석해 자신의 방식으로 재현하는 모습이 실로 경악스러웠다. 대체 그 작은 몸 안에 얼마나 많은 가능성을 담았기에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오빠!”
“안 맞아!”
첫 한 발을 제법 여유롭게 피해 낸 정시우였으나, 그것은 시작에 지나지 않았다. 놈의 전신을 흐르는 마나가 갑자기 급가속하며 전신에 총구가 돋아나 살점 탄환을 일제히 난사해 왔다!
[아직 끝이 아니야!]
“크흣!”
그러나 정시우는 용의 감각을 필사적으로 이끌어 올려 저항했다. 아직 용의 감각을 익힌 지 얼마 되지 않은 까닭에 탄환을 일일이 감지하고 모두 피해 내는 것은 무리가 있었지만, 전부 피하지 못할 것을 알고 있다면……!
“하!”
이대로는 수아린의 치유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상처를 입을 것이라 판단한 정시우는 기어이 스톤 스킨까지 발동했다.
가뜩이나 전투질주를 상시 유지하고 있던 상태에 스톤 스킨까지 더해지니 마력의 운용이 복잡하게 꼬이기 시작했지만, 실전에서 송곳처럼 날카로워진 정시우의 의지는 그것을 어떻게든 통제하며 두 마나를 섞어 강화하기까지 했다. 어찌 보면 크루얼 차지의 방어형 발현인 셈이었다.
“크으아아아아!”
당장이라도 정시우의 육신을 침식하려 혀를 날름거리는 수십 발의 탄환이 그의 몸을 두드렸다. 그러나 정시우는 끔찍하기까지 한 충격을 전부 받아 내며 오히려 한 발짝 나아가 레이지 라이플을 휘둘렀다.
침식 탄환을 쏘아 내는 그 짧은 순간 동안 놈은 몸을 움직일 수 없는 것이다!
[큭!?]
설마 정시우가 그 포화를 뚫고 앞으로 튀어나올 줄은 몰랐던 키메라가 얼굴을 기이하게 일그러트렸다. 분명 그의 몸을 뚫고 들어가야 할 탄환은 또 어째서 그의 맨살을 뚫지 못하고 저지된단 말인가!
그러나 놈이 아무리 분해해도 그 이유를 설명해 줄 사람은 없다. 그 대신 정시우의 전력을 담아낸 통렬한 강타가 떨어져 내려 놈의 얼굴부터 몸통까지를 고스란히 으깨 버렸다.
[캭!]
“뒈져라!”
한 가지 더 빌어먹을 점이 있다면 놈의 회복력이 어지간한 트롤 저리 가라 할 정도라는 것. 레이지 라이플이 놈의 몸통을 가르고 지나간 다음 순간 놈은 몸을 회복했다.
전신에 돋아났던 총구가 말끔하게 사라진 대신 복부에서 근육질의 블레이드 암이 돋아나 조금 전 정시우가 휘두른 궤도를 정확히 반대로 되짚어 왔다. 놈의 블레이드와 레이지 라이플이 정면으로 충돌하며 굉음을 토해 냈다.
[메티모아 님의 축복을 받아 완성된 키메라는 싸울수록 성장한다. 모든 생물의 계보를 단체 안에 담았으니, 나머지는 외부의 자극을 받는 대로 새로운 가능성의 싹을 개화시킬 뿐. 너도 또한 나를 성장시키는 재료에 지나지 않아!]
“하, 힘이…… 어설퍼!”
전력을 다해 휘두른 다음 순간 날아든 공격이니 잠깐 뒤로 밀리는 것만은 어쩔 수 없다. 그러나 돌산을 들어 부순 정시우의 괴력을 그 단시간에 따라잡는 것은 불가능! 마력과 완력이 섞여 불가해의 경지에 이른 정시우의 힘이 그대로 놈을 찍어 눌렀다!
“하…… 읏!?”
바로 그 순간, 놈의 몸이 푸딩처럼 터져 버렸다. 소멸이 아니다. 단지 몸체를 넓고 얕은 보자기로 변화시켰을 뿐! 그 모습이 꼭 만두피 같았다. 정시우를 만두소로 삼으려는 실로 적극적인 만두피 말이다.
[그대로 하나가 되자!]
“어딜!”
정시우의 몸이 아래로 기우는 바로 그 타이밍을 노려 정시우의 전신을 덮으려 드는 키메라였으나, 여태껏 얌전히 있던 정시우의 도마뱀 꼬리가 두터운 마나를 두르고 솟구쳐 그것을 반으로 갈라 버렸다.
날이라곤 없는 레이지 라이플조차 대검 대용으로 삼는 정시우이거늘, 꼬리라고 검 대신 삼지 못할 리가 없었던 것이다.
[끄아아아아악!]
놈이 비명을 지르며 그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정시우는 꼬리를 이리저리 휘둘러 놈을 공격하며 레이지 라이플에 재차 차지 샷을 충전했다.
“자, 이번엔 꼬리도 따라해 보시지 그래.”
[하하하!]
그러자 놈은 정말로 그것을 따라했다. 그것도 한두 개가 아니라 순식간에 수십 개나 되는 꼬리가 튀어나와 그의 전신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그 정도면 꼬리가 아니라 촉수라고 불러도 부족하지 않은 수준!
“이 빌어먹을, 대체 그 작은 몸 어디에 그런 힘을 숨기고…… 잠깐?”
그러나 그것과 마주하여 기겁하며 몸을 놀리던 순간, 정시우는 아까 자신이 떠올렸던 사고의 끈을 다시 붙잡는 데에 성공했다.
지금 놈이 보인 현상은 아무리 놈이 키메라라고 해도 설명이 안 되는 일이었다. 구체적으로는, 놈의 육신이 지니고 있던 마나의 총량이 갑자기 확 불어 버렸다. 이것을 설명할 수 있는 가설은 단 하나뿐이었다.
“네놈, 혹시…….”
[이런, 벌써 알아챘느냐.]
용의 감각을 지닌 정시우가 지금 이 순간까지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은 너무 놈의 마나가 짙었기 때문인지, 그게 아니면 놈의 존재감이 너무 강했기 때문인지. 끝까지 자신의 상식에 얽매여 있었던 탓인지.
정시우는 차지 샷을 쏘아 내 수십 개의 촉수를 단숨에 터트리고도 무엇이 마음에 안 드는지 인상을 찌푸리며 자신이 디디고 있는 바닥을 발로 툭툭 차 보았다. 그리곤 확신했다.
“케이나…… 저놈 저거 페이크야.”
[음?]
“이 보스룸이 보스야.”
어지간해서는 알아먹기 힘든 말임에도 불구하고 케이나는 단박에 깨달았다. 직후 놈이 다시 돌진해 왔다. 그 양팔이 삽시간에 거대해져 그 끝에 망치를 매달고 있는 모습이, 마치 정시우가 던전 초반부 첫 번째 공동을 돌파하던 모습과 흡사했다.
[깨닫는다고 달라질 것이 있을 줄 아느냐!]
“네가 내 상상보다 더 끔찍한 혼종이라는 것만은 알게 된 셈이지!”
정시우와 놈이 재차 정면으로 충돌한 순간, 놈은 정시우가 쏘아 낸 크리티컬 불릿을 피하지 않고 해머 하나를 희생해 받아 내며 다른 손의 해머로 정시우를 공격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나는 필요한 모든 것을 얻었다.]
케이나가 돌진해 와 그것을 막고자 한 다음 순간, 그러나 놀랍게도 보스 룸 바닥에서 솟구친 촉수가 그녀의 전신을 붙들었다. 한두 개 정도는 얼마든지 그녀의 마나로 끊어 낼 수 있었지만 문제는 규모였다. 수백, 수천 줄기의 촉수를 단숨에 없애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이젠 모두 하나가 되는 것이다!]
놈의 괴성이 실로 섬뜩하다. 정시우의 꼬리로도 차마 막아 낼 수 없는 해머의 일격이 그의 몸을 한순간 허공으로 띄워 올리자, 그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보스 룸이 순식간에 압축되기 시작했다.
만두피는 키메라의 몸 따위가 아니다.
보스 룸 전체였던 것이다.
‘이 개새끼가…….’
정시우와 케이나는 결코 만만한 적이 아님에도 둘이 동시에 덤벼도 된다며 여유를 부린 까닭은 다른 데에 있지 않았다. 그들이 보스 룸에 발을 들인 순간, 말 그대로 그들을 제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있었으니 그런 태도를 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정시우와 정면으로 맞서 싸운 것은 자기 스스로 말한 대로 최대한 많은 가능성의 싹을 틔우기 위해서였겠지. 그리고 그것이 충분해진 지금, 정시우는 물론이고 케이나와 다른 일행들까지 한꺼번에 흡수하려는 것.
놈은 스스로가 완성되었다 말했지만 그것은 거짓말이다. 메티모아의 키메라는 결코 완성되지 않는다! 모든 것을 흡수해 끝없이 성장할 뿐이다!
“하지만…….”
그때 정시우의 양팔 위로 새겨진 문신이 짙은 붉은빛을 발했다.
용의 위엄이 일대를 진동시키며, 거대한 존재의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필요한 모든 것을 얻은 건…… 나도 마찬가지그든!”
정시우가 울퉁불퉁한 근육이 치솟은 양팔을 들어 올린 바로 그 순간 보스 룸이 완전히 응축되어 그들 모두를 감쌌다.
직후 대폭발이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