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
111화.
죽음의 기사는 여태껏 정시우가 마주했던 적과는 질적으로 다른 모습이었다. 극도로 높은 밀도의 마나를 응축해, 그것에 형상을 입힌다면 이렇게 되지 않을까 싶었다.
가만히 있어도 느껴지는 예기는 상대가 무도를 수련한 이임을 짐작케 했고, 정시우보다 막대한 양의 마나가 그것과 조화를 이루면 상대하기 보통 까다롭지가 않을 터였다.
“으으, 레벨만 높은 플레이어였더라면 이 시점에서 리타이어겠는데요…….”
용세하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그는 자신이 리타이어했던 때를 떠올리고 있는 것이었다. 막연히 그것을 짐작한 정시우는 상쾌한 선언으로 그의 불안을 잠식시켜 주기로 했다.
“걱정 마, 저거 나보다 약해.”
[자신감이 넘치는군. 그러나 그 막강한 신성력의 방패, 언제까지 낼 수 있을까.]
얼음장같이 싸늘한 목소리로 협박하듯 내뱉은 직후, 죽음의 기사가 재차 그에게 돌진해 왔다. 칠흑의 갑주를 입은 그녀의 돌진은 흑표범의 그것처럼 민첩하고 날카로웠다.
하지만 아무래도 녀석은 한 가지 착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신성력 따윈 정시우의 주력이 아닌 것을!
“흡.”
정시우는 돌진하는 그녀에 맞서 강하게 발을 내뻗으며 힘차게 거인의 비명을 내질렀다. 직진해 오는 야구공이었더라면 필시 홈런타가 되었으리라. 그러나 데스나이트는 그것을 예상했던 것처럼 민첩하게 몸을 숙여 내 망치를 피해 내며 정시우의 품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본인은 그럴 셈이었을 것이다.
“커져라!”
“글쎄 그런 효과음은 필요 없을 텐데요!”
[카학!?]
그러나 궤도의 중간 지점에서 갑자기 망치가 거대화하는 바람에 데스나이트는 허망하게 그것에 얻어맞아 튕겨 났다. 마나를 부여해 강타를 펼쳤기에 그 데미지 또한 결코 무시하지 못할 수준!
단 한 가지 단점이 있다면 성의 최상층이 그리 넓지 않아 망치를 거대화하면 끼어서 움직이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좋아, 스타트는 좋고…… 음?”
정시우는 공격이 적중한 순간 다시 망치를 작게 되돌려 회수하며 방어 자세를 취했다. 당연히 올 줄 알았던 적의 반격이 오지 않았다. 신경 줄이 바짝 당기는 접전을 예상했던 그는 당황하며 데스나이트를 살폈다.
“뭐냐 그거?”
정시우는 어둠 속에서 눈을 밝게 빛냈다. 마법으로 은닉되어 있어 여태까지 포착하지 못했던 것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관……?”
[네놈…….]
데스나이트가 이를 갈았다. 그렇게 들렸다.
그녀는 등 뒤에 딱 인간이 들어갈 수 있을 법한 크기의 관을 지고 있었다.
“오빠, 혹시?”
“맞아. 저 안에 세트나크의 파편이 들어 있는 거야.”
아니…… 그 표현은 실로 적절치 못하다. 그는 자신의 말을 수정했다.
“저 관이 그 자체로 세트나크의 파편인가.”
[죽어라!]
데스나이트의 눈에 푸른 귀화가 거칠게 타오른 직후, 그녀는 이전과 비교도 안 되는 속도로 돌진해 왔다. 망치 거대화 공격은 이제 다시 통하지 않을 터, 정시우도 진지하게 마나를 끌어 올리며 그녀에 맞섰다. 이제부터가 진짜 승부다.
“흡!”
[크하!]
상대의 힘이 만전에서 조금 느슨해지는 순간을 노려 망치로 대검을 맞받는다! 놀랍게도 충돌 순간 해머 헤드가 파괴음을 내며 커다란 금이 갔지만, 뒤로 밀려나는 쪽은 데스나이트였다.
“흐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정시우는 망치가 부서지건 말건 신경 쓰지 않고 마력을 더해 데스나이트를 끝까지 쭈욱 밀어냈다. 그것에 저항하는 데스나이트의 마력은 끔찍했으나, 순수한 힘으로는 정시우가 그녀를 압도했다. 그의 힘은 마력과 상관없는 영역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인간이 어떻게…… 큿!]
힘 대결로는 밀린다는 것을 파악한 데스나이트가 곧장 태세를 전환했다. 그의 돌진에 못 이기는 척 빠르게 뒤로 물러나 그의 무게중심을 앞으로 쏠리게 하고는 그대로 대검을 휘둘러 그의 목을 후려친다!
“하, 제 실력 내야지 않겠어?”
[칵!]
그러나 허망하게 쓰러질 것 같았던 정시우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망치를 놓아 버리곤 오히려 한 발짝 더 나아가 데스나이트의 몸통을 강하게 들이박았다.
강인한 언데드답게 충격에 굴하지 않고 그대로 대검을 내리그으려던 데스나이트였으나, 그 팔이 뿌리 부분에서 정시우에게 붙들려 제대로 휘두를 수가 없었다. 애초에 정시우의 바디 태클부터가 빠르게 접근하여 팔을 붙들기 위한 초석에 지나지 않았다.
[인간……!]
그녀는 그제야 알아차렸다. 거대한 망치를 휘두르는 것만 보고 판단해 거리를 좁혔지만, 정시우에겐 무기가 없어도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하지만 이미 너무 늦은 깨달음이었다. 그는 그대로 그녀의 움직임을 제압하고, 급하게나마 전신으로 마기를 방출해 저항하는 그녀를 굴하지 않고 그대로 들어 올려 뒤로 찍어 버렸다!
“네가 지키고 있는 게 뭔지 확인해 보자!”
[커헉!]
생물이었다면 그대로 척추가 으스러지고 말 만큼 통렬한 백드롭! 정시우는 데스나이트를 뒤로 내동댕이쳐 무장해제 시킴과 동시에, 소중하게 싸매고 있던 관을 솜씨 좋게 빼앗았다.
툭 까놓고 말해 데스나이트가 얼마나 무술에 조예가 깊건 몸싸움에서 정시우를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
정시우는 한 손으로 검은 관을 들고는, 나머지 한 손으로는 자신의 복부를 쓰다듬었다. 새빨간 피가 묻어 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내장은 당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상당히 깊숙한 상처다. 순수하게 데미지 교환만 놓고 보면 정시우가 손해를 본 셈이었다.
“빌어먹을. 복부에서 칼 튀어나오는 건 반칙 아니야?”
“고위 언데드 중에는 흑마법을 다루는 녀석도 있다구요! ……저 녀석은 그 정도까지는 아닌 것 같지만요.”
수아린이 재빠르게 회복 마법을 구사하여 그를 회복시키며 타박했다. 짙은 사기가 어린 상처는 그녀의 신성력에도 불구하고 금세 회복되지는 않았지만, 바로 죽지만 않으면 괜찮았다. 고통을 견디는 정도는 그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걸 돌려줘!]
그러나 정시우가 상처를 살피던 그 짧은 순간, 구석에 내팽개쳐진 데스나이트가 깜짝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돌진해 왔다. 정시우는 바로 방금 입수한 흑의 관을 휘둘러 그녀를 후려쳤다.
[죽여 버리겠어!]
“음?”
그런데 어째 돌아오는 반응이 이상했다. 공격을 무시하고 그대로 공격해 올 것이라는 정시우의 예상과는 다르게, 데스나이트는 관에 맞닿으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기겁하며 물러서는 것이 아닌가.
“세트나크에게 반드시 지키라고 명령이라도 받은 건가.”
납득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 한 가지 남아 있다면.
“이게 네 갑옷보다 더 단단할 텐데?”
[넌 나를 화나게 했어!]
정시우의 질문에는 대꾸하지 않고, 데스나이트 베아체는 푸른 안광을 더욱 섬뜩하게 빛내며 전신의 기세를 끌어올렸다. 세트나크의 힘이 직접 닿아 강화된 엘리트 몬스터답게 여태까지의 충돌은 장난처럼 느껴지는 압도적인 마나의 격류가 그를 덮쳐 온다!
“후.”
정시우는 흑의 관이 토해 내는 끔찍한 마기를 어렵지 않게 받아들여 소화하며 그것을 양손으로 들었다. 하지만 무턱대고 삼킬 수는 없다. 세트나크의 힘은 데스나이트의 핵에 마나를 부여하는 데에 사용되어야 한다.
[그것을 손상시키지 마!]
지상에 검은 번개가 쳤다. 그렇게밖에 인식할 수 없는 속도로 베아체가 돌격했다. 조금 전보다도 더욱 빨랐다. 한심하지만 시각 스킬이 없었다면 파악하지 못했을 터였다.
“하!”
[크으으으으으으!]
정시우는 마치 망치 휘두르듯 관을 휘둘러 그녀를 공격했다. 또다. 그렇게 빠르게 돌진해 놓고 여력이 있었던 것인지 급히 방향을 선회한 데스나이트가 다시 다른 방향에서 그를 공격해 왔다. 아무래도 전투는 뒷전이고 그에게서 관을 회수할 생각뿐인 것 같았다.
“저거 바보 아니야?”
“바보 맞는 것 같은데요.”
세트나크의 설정이 잘못되었나? 아니, 데스나이트는 혼과 육체를 모두 갖고 있는 언데드일 터, 저 정도로 기초적인 상황판단을 하지 못한다는 것은 뭔가 문제가 있었다.
정시우는 시험 삼아 관을 일부러 큰 동작으로 휘둘러 보았고 베아체는 보기 좋게 그것에 걸려들었다. 정시우의 전력을 다한 걷어차기 강타가 북 터지는 소리와 함께 그녀를 다시 저 멀리로 날려 버렸다.
“이 새끼 처음 조우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제대로 싸우질 않잖아?”
“얼른 죽여 버리죠.”
“어차피 이기기는 내가 이겼어.”
정시우는 언짢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 여자가 정시우보다 앞서는 부분은 마력뿐이었다. 그나마도 그 마력을 형상화해 정시우에게 상처를 입힐 수단이 한정되어 있으니 그것을 모두 간파하면 그 순간 승부는 끝나는 셈이었다. 뭣하면 이대로 한 시간 정도만 질질 끌어도 죽일 수 있었다.
“하지만 재미가 없잖아.”
그는 순간순간의 격돌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전투 속에서 오감 스킬과 직감을 성장시키길 원했다. 그런데 이게 뭔가. 빼앗긴 관에만 집중해 달려드는 데스나이트를 상대로는 오감은커녕 직감조차 필요가 없다. 그냥 적당한 타이밍에 공격하기만 하면 죽일 수 있었다.
“관의 내구도는 데스나이트 본인보다 강하다. 설령 지키라는 명을 받았다 해도 닿는 것조차 기피하며 움직일 필요는 없다. 그렇다는 것은…….”
[흐아아아아아아아!]
정시우는 몸을 낮춰 데스나이트의 돌격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대검을 내던진 채 육탄돌격을 해 오는 데스나이트!
영 바보는 아닌지 그래도 몸동작에 페인트를 넣어 그를 방심케 하려는 것 같았지만, 상대를 깔보는 순간에도 진지함은 잃지 않는 정시우가 그따위 눈속임에 넘어갈 리가 없었다.
“내용물이지?”
[큭!?]
귀화가 일렁였다. 신기하게도 그 안에 담긴 감정을 읽어 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언데드인 데스나이트가 저렇게 노골적인 감정을 드러내는 것도 신기한 일이지만, 정시우는 그것은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쿠아아아아악!]
몸과 몸이 겹치는 그 순간, 정시우는 관을 높이 들어 올려 데스나이트의 공격을 빗나가게 하는 동시에 텅 빈 그녀의 몸통을 걷어찼다.
크루얼 차지와 강타의 힘을 동시에 담아낸 발길질이었다. 다리가 움직이는 그 짧은 궤적을 돌진으로 계산하여 스킬을 발동하는 경악에 가까운 마나 컨트롤, 그 궤적의 끝에 데스나이트는 지금까지 중 최대의 상처를 입고 쓰러졌다.
“오빠, 피! 뼈!”
“괜찮아. 힐이나 걸어 줘.”
타격 순간 아까처럼 베아체의 복부에서 칼이 솟아나 그의 발을 갈가리 찢어 놓긴 했지만, 그녀 본인이 입은 타격에 비하면 이 정도는 별것도 아니었다.
“내용물이 얼마나 소중하기에 그렇게 뻘 짓을 하는 거야. 세트나크의 파편 안에 진짜 세트나크라도 잠들어 있어? 아무리 내가 막 다뤄도 손상을 입히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너를 달려들게 만드는 거라면 네 주인님밖에는 생각이 나지 않는데.”
[너어르으으으으을……!]
데스나이트가 다시 덤벼들었다. 그 안에 지닌 마력만은 무지막지하지만 몸놀림은 이미 글렀다.
그것으로 정시우는 깨달았다. 이 녀석은 결함품이다. 세트나크가 무슨 짓을 했는지, 탄생부터 이미 글러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제대로 된 데스나이트가 아니다. 세트나크 이 자식, 폼은 더럽게 잡았지만 73마성은 정말 별 것 없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휴.”
일련의 판단 끝에 정시우는 흑의 관을 내던졌다. 그것은 빠르게 공간을 가르며 날아가 구석에 처박혔다. 데스나이트가 당황하며 그것을 쫓아 몸을 틀었지만 그 짧은 틈에 정시우가 꺼내 든 거랑의 앞발에 가로막혔다.
“저거 안 건드릴게.”
[뭐…… 라고?]
정시우의 바보 같은 말에 데스나이트조차 당황했다.
“그러니까 잡몹처럼 허무하게 뒈지지 말고 실력 좀 보여 봐.”
“오빠…… 바보예요?”
“아니.”
그는 눈빛을 바꾸는 데스나이트를 마주 보며 진지하게 전투 자세를 취했다. 오감이며 직감, 자신에게 있는 패시브 스킬들을 모두 최대로 활성화했다. 무지는 용감 스킬의 비호가 느껴졌다. 설마 방금 바보짓을 해서 활성화된 건 아니겠지.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여기서 어떻게든 오감 합일하고 간다. 아니, 직감까지 더해 육감인가.”
그리고 만약 정말로 죽을 것 같으면, 그땐 다시 관을 회수한다는 방법이 있는 것이다! 그는 굳이 그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았지만 수아린은 여유만만한 정시우의 표정을 보며 그가 품고 있는 생각을 얼추 짐작했다.
“정말 멋져요, 그래.”
[너는…… 이계의 기사인가.]
드디어 데스나이트로부터 정상적인 반응이 돌아왔다. 그가 정말로 관을 신경 쓰지도 않는 모습을 보이자 간신히 이성을 되찾은 것이다. 데스나이트인데. 이제야.
“뭐, 그런 걸로 하자.”
[……고맙다.]
놀랍게도 데스나이트의 고개가 그를 향해 숙여졌다. 서포터들은 상황 판단을 포기하기로 했다.
[그러면, 제대로 싸우자.]
데스나이트의 기세가 달라졌다. 처음 그를 기습했을 때와 같은 첨예한 기세가 돌아왔다. 정시우는 그것을 느끼며 흡족하게 웃곤, 덮쳐 오는 데스나이트의 대검을 맞이해 마주 돌진했다.
두 강자가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격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