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0
110화.
만약 세트나크가 지금의 정시우를 보고 있었더라면 아마 박장대소를 터트렸을 것이다.
“오빠, 응용력 한 번 좋으시네요.”
“아니, 일단 살아야지.”
정시우는 침착하게 대꾸했다. 그는 어디 한군데 다친 구석이 없었다. 물론 용세하와 수아린도 마찬가지였다.
[기이이이이…….]
유령 집합체가 일으킨 대폭발은 정시우의 존재를 통째로 집어삼키고도 남을 법한 파괴력이 있었다. 그러나 폭발이 일어난 바로 그 순간, 정시우는 본능적으로 자신에게 남아 있던 유령 군단을 하나로 뭉쳐 그를 보호하는 방어막을 만들어 냈다.
성공적으로 폭발 공격을 막아 낼 수는 있었지만, 그것으로 유령 군단은 모두 깔끔하게 사라졌다. 반면 세트나크의 유령 집합체는 여력이 남아 아직 허공을 떠돌고 있었다. 가만히 놔두면 곧 2차 폭발을 일으킬 것이다.
“영체를 막아 내는 데에는 영체가 특효라는 거지…… 세트나크 놈, 다 알고 했다는 점에서 실로 악취미야.”
“소멸한 이들은 이제 다시는 불러낼 수 없는 건가요?”
“아니, 역소환된 것뿐이야. 그들은 어디까지나 내게 종속되어 있기에, 내가 소멸하지 않는 한 완전히 소멸하지는 않아. ……쳇.”
이것도 저것도 모두 유령이 그저 그가 다룰 수 있는 조금 특이한 힘의 형태일 뿐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 같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물론 그는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 강해지기 위해서라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할 셈이었지만…….
아마도 세트나크는 그런 그의 이중성과 가식을 지적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내숭 따위 떨지 않고, 민낯을 내놓고 자신이 지닌 힘을 거리낌 없이 다루길 촉구했던 것이다. 그리고 정시우는 아주 훌륭하게 거기에 넘어갔다.
“신이라는 작자에게 놀아난 것 같아 아주 더럽긴 하지만……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지.”
유령들은 개개의 존재로 인정하며 존중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그곳에 가만히 놔둘 것이라면, 애초에 자신의 뜻대로 부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들을 에너지로 만들어 전투에 써먹을 수 있다면 그는 앞으로도 그렇게 할 터였다.
그렇게 해서 정시우는 유령들을 인정하는 동시에 자기 자신을 인정했다.
무수한 혼이 지닌 개성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그들을 제 뜻대로 부리는 지배자의 업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것은 지극히 무겁지만, 지극히 달콤한 왕좌이다.
“다 역소환돼서 당분간 못 부리지만.”
“오빠, 저것들 다시 부풀어 오르려는 것 같은데요……!”
“괜찮아.”
정시우는 인벤토리에서 여태까지 한 번도 쓴 적이 없는 아티팩트 하나를 꺼내어 쥐었다. 아니, 엄밀히 말한다면 여태까지는 다루지 못했던 것이다. 잘 다룰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원혼의 대검]
[랭크 ? B++]
[공격력 ? 1,850 ? 2,250]
[숙련도 ? 0/1,000]
[속성 ? 저주 B]
[옵션 ? 1. 영체를 흡수해 성능 강화 2. ???]
[무수한 영체가 강제로 초월적인 의지에 의해 억압되어 굳어진 무기. 그 혼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는 자는 무기를 들더라도 그대로 삼켜질 뿐이다.]
하늘성이나 개미굴에서 얻게 되는 아티팩트들은, 그것들을 착용하거나 사용하기 위한 제한 조건이 표기되어 있는 경우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조건이나 대가가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주어지는 정보를 대상으로 플레이어 자신이 판단하여 주의 깊게 사용해야 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세트나크의 파편을 지키던 고스트 나이트를 죽이고 정시우가 손에 넣은 이 원혼의 대검은, 도저히 당분간은 다룰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설명부터가 으스스하기 짝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영혼의 힘을 제대로 다룰 수 있게 된 지금은 다르다. 정시우는 망치 대신 익숙지 않은 대검을 쥐며 눈을 날카롭게 빛냈다.
그가 대검을 쥐는 순간, 이미 뭉개지고 탁해져 제대로 된 의지조차 남지 않은 무수한 혼의 집합체가 그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무시한다.
“내가 직접 거두지 않은 너희들까지 신경 써 주기엔 내 인생이 너무 짧다!”
정시우가 지닌, 그 양은 결코 많다 할 수 없지만 질적으로는 그 누구의 것보다도 폭발적인 마나가 유령 대검으로 타고 흘러가 그것을 강화시켰다. 대검을 든 순간 이미 그는 대검의 주인이었다. 대검은 그의 의지를 거스를 수 없었다.
‘만약 이 대검을 나의 육신과 같이 여기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면, 그땐 어쩌면…….’
정시우는 순간 떠오른 생각을 곧장 지워 냈다. 지금 할 생각은 아니었다.
대신 그가 지닌 무기의 두려움을 알고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려는 영혼 집합체를 향해, 아무런 망설임 없이 대검을 내질렀다. 수년간 검도를 숙련한 그의 내려치기 자세에는 절도와 패기가 함께했다.
“머리!”
“저거 머리 없잖아욧!”
수아린의 태클이 통렬하게 작렬한 다음 순간, 대검이 가르고 지나가는 궤적을 따라 유령 집합체가 깔끔하게 반으로 나뉘더니 직후 스르르 녹아 대검에 빨려 들어왔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좋았어.”
어떻게든 생각하던 대로 풀렸다. 정시우는 작게 주먹을 쥐며 대검을 그대로 인벤토리에 던져 넣었다. 넣기 전 대검의 정보를 확인하니, 대량의 영혼을 흡수해서 그런지 최소 공격력과 최대 공격력이 각각 50씩은 올라 있었다.
“어라, 성이 조금 흔들리는 것 같은데요…….”
“흔들리는 게 맞아. 이제 무너질 거야.”
정시우는 용세하의 의문에 가볍게 긍정하며 자연스럽게 불러낸 팬텀바이크에 올라탔다. 직후 그들이 발을 딛고 있던 4층 공간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세트나크의 73마성 파괴율 : 45%]
[세트나크의 73마성 파괴율 : 46.5%]
“꺄악!”
“이 영혼 집합체는 마성의 균형을 유지하는 핵의 일부이기도 했거든. 정확히는 하층과 상층을 이어주는 연결고리라고 해야 하나. 그런데 그게 없어졌으니…….”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진 성의 4층부터 1층까지는 전부 무너져 내릴 수밖에. 그 과정에서 정시우가 미처 마무리 짓지 못했던 무수한 숫자의 하급 언데드가 상큼하게 박살이 나면서 다시 한 차례 그의 레벨이 올랐다. 레벨 올리기 한 번 쉽다.
“이렇게 되면 5층부터가 그냥 허공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네요.”
“실제로도 그래.”
1층부터 4층까지의 공간은 이제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깔끔하게 유리된 5층부터의 마성이 허공에 둥둥 떠 초월적인 광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쉬이 실감하기 힘든 이유는, 분명 4층까지의 공간이 뚫려 바깥이 보여야 하거늘 여전히 깊은 어둠만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직 세트나크의 마력의 영향권에서는 벗어나지 못했다는 얘기지. ……시간만 많았으면 5층에 난입해서 또 차근차근 진행해도 되었겠지만.”
그러기엔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 마성의 구조를 대충 파악한 이상, 그는 최대한 효율적으로 마성의 핵심을 깨부수고 붕괴 미션의 최단시간 클리어를 노리기로 했다.
그것을 위해선 최상층으로 곧장 돌격해야 했다.
“가 볼까!”
“꺄아아아아악!”
팬텀바이크가 수직으로 솟구쳤다. 원통형의 공간을 타고 순식간에 몇 개의 층을 건너뛰려는 것이다!
상층으로 올라갈수록 어둠의 마력이 가해 오는 압력이 더해졌으나 그는 그것을 적극적으로 체내에 받아들이며 바이크의 속력을 높였다. 이내 공동의 천장이 보였다. 정시우는 더더욱 속력을 높였다. 바이크는 거의 수직으로 위를 향하고 있었다.
“이러다 떨어지겠어요, 오빠!”
“나는 몰라도 너흰 날개 있잖아!”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뾰족하게 튀어나온 프론트 펜더가 정시우의 마력을 주입받아 푸른 스파크를 튀겼다. 정시우는 크루얼 차지를 발동하는 동시에 바이크에 자신의 마력을 부여해, 기체의 능력을 최대로 끌어 올렸다.
“돌입한다!”
“저 너머에 뭐가 있기는 있어요!?”
“그럼.”
정시우는 씩 웃었다. 이 일대의 마력은 이미 오감 스킬로 인해 파악이 끝났다. 이곳 전체가 짙은 농도의 마나에 뒤덮여 있지만 그 가운데 유독 그의 코를 찌르는 짙은 사기가 느껴지는 장소.
마성의 최상층, 이 기형적인 마성이 버티고 있도록 하는 마도 공학 기술의 핵심! 그곳에 또한 이 마성에서 찾을 수 있는 한 가장 강력한 몬스터가 있을 터였다.
“가장, 강력한……?”
“그래. 심지어는 내가 간접적으로나마 접한 대상이기도 해.”
“간접? 앗, 설마…….”
그러나 수아린은 말을 잇지 못했다. 스파크를 튀기는 프론트 펜더와 여태까지 공동의 크기에 비해 상당히 좁은 공동의 천장이 맞부딪힌 순간, 끔찍한 굉음과 함께 충격이 일행에게 전달된 탓이었다.
“꺄아아아아아악!”
“꽉 붙잡아!”
정시우는 격렬하게 저항하는 세트나크의 마력을 한없이 끌어당겨 흡수하여 약화시키며 재차 바이크로 천장을 찍었다.
놈의 힘이 농축되어 담겼던 파편을 직접적으로 흡수했을 때와는 경우가 달라 자신의 마력을 영구적으로 증가시키는 일은 불가능했지만, 적어도 그 방대한 마나를 일시적이나마 제 것으로 만들어 공격력에 더하는 일은 가능했다!
[크루얼 차지 스킬이 Lv11이 되었습니다.]
크루얼 차지 스킬이 오랜만에 성장한 직후, 그의 전신을 내던진 돌격이 끝내 결실을 맺었다. 천장에 깔끔하게 구멍이 뚫리고, 일행은 곧장 그 너머의 공간에 내동댕이쳐졌다.
겁나 깔끔하고 빠르게 마성의 최상층에 안착한 것이다. 아니, 안착이라는 표현에는 어폐가 있었지만.
[세트나크의 73마성 파괴율 : 51.8%]
“꺄아아아아아악!”
“수아린, 실드!”
“시, 실드!”
정시우의 다급한 외침에 수아린은 뭣도 모르면서 다급히 실드를 영창했다. 뿌옇게 그들의 몸을 감싼 신성 방어막에 돌연 끔찍한 압력이 닥쳐왔다.
그 공격에 적의와 함께 담긴 소름끼치게 날카로운 예기가 그들의 몸을 두 동강 낼 것만 같았으나, 수아린이 필사적으로 만들어 낸 방어막은 다행히도 그것을 아슬아슬하게 버텨 내고 소멸했다.
[빠르고 단단하군.]
그것은 거칠고 탁하지만 분명 젊은 여성의 것으로 들리는 목소리였다. 정시우는 허공에서 신성 방어막이 박살 나며 몸이 회전하는 짧은 시간 동안 팬텀바이크를 인벤토리 안에 구겨 넣고는 수아린과 용세하를 제때에 확보해 바닥에 착지했다.
“후우…… 어떻게든 성공했나.”
“이걸 성공이라 부르다니…….”
수아린은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어떻게든 제 목이 붙어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삐죽거렸다. 반면 용세하는 적의 모습을 인지하려 필사적으로 애를 썼고, 곧 그 정체를 파악하며 신음했다.
“설마 형님, 저 언데드는…….”
“맞아.”
정시우는 어떻게든 슬레지 해머를 하나 정도 휘두를 정도의 공간이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거인의 비명을 꺼내어 쥐었다. 반면 그들이 맞이한 최후의 적은 첫 번째 공격이 막히자마자 뒤로 물러나 거리를 확보하며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데스나이트야.”
[나는 죽음의 기사, 베아체.]
단단하기 그지없는 흑색의 갑주, 섬뜩하게 날이 선 대검. 시커먼 투구 안에서 타오르는 푸른 귀화…… 무엇보다도, 정시우가 지닌 데스나이트 케이나의 핵에서 느껴지던 그 마나를 닮은 기척.
[성역에 침범한 모든 이는, 죽인다.]
최소 레벨 250으로 추정되는 ‘진짜’ 강적이 나타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