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
102화.
“한 사람 한 사람이 신문 1면을 장식할 수 있을 법한 사람들이네.”
“그렇게 대단하지도 않아. 이제 세계 권력의 중심은 플레이어인걸.”
한국 플레이어 대표 회의도 대단했지만 UN본부 대회의장에 모인 면면들은 그와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들 모두가 정시우를 주목하고 있다는 것.
물론 타국에도 뛰어난 플레이어들이 많이 있지만 본신에 지닌 힘이나 그가 가진 여러 가지 유니크한 특성들이 그를 플레이어 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존재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팬텀바이크를 가지고 또 귀찮게 물고 늘어지는 놈이 없으면 좋을 텐데.”
“그때와 같은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엄밀히 말해 그것은 시우 님 본인에게 귀속된 권리이며 타인이 그것을 캐물을 권리는 없지요. 무엇보다도, 시우 님은 오늘 일반 참석자가 아닌 UN 초청 인사입니다. 원하는 말만 하시면 됩니다.”
세리아는 건물 안으로 들어온 순간 다가온 사무국 직원과 한참 얘기를 나눈 후, 두꺼운 서류 뭉치를 가져와 정시우와 이서희에게 내밀었다. 그들이 숙지해 두어야 할 사항과 ‘신의 힘’과 관련하여 멘트해야 할 것들이 중점적으로 기록된 대본이었다.
“물론 부족하다 싶으시면 추가해도 됩니다. ……사실 시우 님께서는 그곳에 계시며, 고개를 끄덕여 주시기만 해도 힘이 됩니다.”
“내가 이제 와서 이 사람들 앞에서 말 몇 마디 하는 걸로 쫄기라도 할 것 같아?”
“물론 아닙니다.”
마리나는 정시우에게 공손한 태도를 취하는 세리아를 실로 기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쟤가 원래 저런 캐릭터가 아니었는데. 아무리 신이라는 공동 투쟁의 대상이 있어도 그렇지 갑자기 이렇게 얌전해지다니…….”
“마리나 비셋, 네 텅텅 빈 뇌로 내 숭고한 결의를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는 처음부터 생각하지 않았어.”
“숭고한 결의…… 그거 정말 숭고한 거야? 응? 특히 네가 시우를 대하는 태도에 대해 깊이 물어보고 싶은데, 응?”
“그 천박한 얼굴 옆으로 치우지 못해?”
정시우는 언제나처럼 투닥거리는 두 여자를 적당히 무시하기로 했다. 지정된 좌석으로 향하니 친절하게도 수아린과 용세하의 자리까지 마련되어 있었지만 오늘의 메인은 그들이 아니었기에 굳이 강림하지 않았다.
“내가 정말 여기까지 와도 괜찮은 걸까.”
“신의 힘과 접하고도 멀쩡히 돌아온 것만으로도 자격은 충분하지. 긴장 풀어. 이 자리의 누구도 너를 무시하지 못할 거야.”
“그런 만화 주인공 같은 말을 태연히 할 수 있는 시우가 참 무서워.”
“오빠 옆에 있기도 부끄럽다고요?”
“그게 아니라!”
정시우는 양옆에서 들려오는 일행의 다툼을 한 귀로 흘려 넘기며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역시나, 그에게 강하게 질투의 시선을 보내 오는 김하룡의 모습이 가장 눈에 띠었다. 하지만…….
‘저건 아무리 봐도 라스트보스 느낌은 아니지.’
자고로 왕도를 걷는 최종보스란, 처음엔 주인공에게 친밀하게 굴어 아군인 척 오해하게 하다가 중간부터 얼굴이 조금씩 썩어 가며, 마지막에 깔끔하게 주인공에게 엿을 먹이며 최강자로 군림해야 포스가 느껴지는 법이다.
저렇게 처음부터 있는 대로 적의를 드러내면서, 여자한테 껄떡대기나 하는 놈은 결코 보스급 인재가 아닌 것이다. 아무리 힘을 감추었다고는 하지만 정시우에게 비 오는 날 먼지 나도록 얻어맞은 것도 그렇고, 한국 최강자라고 해서 기대를 많이 했었는데 솔직히 실망이 컸다.
‘한국이 32단계 던전을 최초로 클리어할 수 있었던 것도 아린이를 비롯한 플레이어들의 희생을 담보로 하는 무모한 작전과 마리나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지. 이미 각국에서 32단계 던전을 클리어했고, 33단계 던전 최초 클리어는 중국이 유력하다고 하니…… 애초에 우리나라의 최강자 따위에 신경을 쓸 필요는 없었던 거야.’
하지만 또 요즘의 작품에선 저렇게 대놓고 싼티 나게 등장한 적이 의외의 한 수를 펼쳐 주인공을 곤란하게 만드는 전개도 선호되니, 마음 놓고 있어도 안 될 것이다. 애초에 여유를 부릴 생각 따위는 없지만 말이다.
‘오늘 있었던 습격도 그렇고, 신의 힘과 관련된 자들은 다 요주의 대상이야. 문제는 다른 강자들이 신의 힘을 지니고 있는지 알 수 없다는 건데…….’
결코 세계 최강자라고 할 수 없는 김하룡조차 저렇게 신의 힘을 은닉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니 이 회장에 모여든 정상급 플레이어 중 몇 명이 신의 힘을 가지고 있든 정시우가 알아차릴 가능성이 얼마 없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전원 감시하는 수밖에 없다. 이전의 정시우에겐 불가능했던 일이지만, 지금은 가능했다.
‘전부 모여 봐. 비가시 모드로.’
정시우는 지금 이 순간도 세계 각지로 퍼져 열심히 몬스터들을 사냥하고 있는 유령 무리들을 한꺼번에 그의 눈앞으로 소환했다.
소울 포스 스킬에 의해 컨트롤되는 유령들은 마력의 집합체이면서도 영혼으로 묶여 고유의 힘으로 구체화된 존재, 마력을 아무리 잘 다루는 플레이어들이라고 해도, 작정하고 스스로의 기척을 감춘 유령들을 알아차릴 수는 없었다.
‘느리긴 해도 정말 꾸준히 성장하네. 이러다 정말 내 능력을 따라잡겠어.’
정시우는 비가시 모드로 모여든 유령들의 모습을 확인하며 감탄사를 내질렀다. 그 짧은 사이 전체적으로 레벨이 1,2씩 성장해 있었던 것.
물론 그들은 근본적으로 정시우에게 종속되어 있는 존재인 만큼 아무리 강해져도 정시우의 수준을 뛰어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레벨로 따지면 200 정도까지는 그의 스킬로 감당할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아마 그가 성장하면, 스킬이 성장하면 한계 또한 더더욱 넓어지리라!
‘자, 지금부터 한 놈씩 맡는 거다.’
되도록 레벨이 강한 놈들 위주로 유령을 선별하여 이 장소에 모인 79명의 다른 플레이어들에게 한 명씩 붙여 놓았다. 물론 단순 전투력 비교로는 한 주먹거리도 안 될 테지만, 유령들은 플레이어들에게 들키지 않고 무사히 그들 근처에 자리 잡는 데에 성공했다.
“시우, 왜 갑자기 인상을 찌푸려?”
“배고파서 그래, 배고파서.”
녀석들이 한꺼번에 몰려다녀 정보량이 적을 때라면 몰라도, 뿔뿔이 흩어진 녀석들이 포착한 정보를 한꺼번에 받아들여 봤자 그의 머리가 과부하로 터져 나갈 뿐. 그는 유령들에게 각 플레이어들이 이상한 행동이나 언사를 취할 때만 그에게 정보를 보내오도록 지시를 내렸다.
소울 포스 전원이 정시우에게 정신적으로 종속되어 있기에, 굳이 말로 할 필요 없이 그런 의사만으로도 완벽하게 행동을 지시할 수 있다는 것만은 무척 편했다.
“하긴 한국에서 먼 길 오면서 제대로 못 먹었지? 에너지바라도 먹을래?”
“그건 싫어.”
“기내식을 충분히 준비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에너지바라면 요 근래 들어 정시우도 충분히 많이 신세지고 있는 녀석이다. 그가 질색하며 거절하자 괜히 세리아가 죄송해했다. 참 재밌는 녀석이었다.
[친애하는 여러분, 모두 자리에 앉아주시기 바랍니다. 곧 제 1회, 세계 플레이어 대표 회의(World Player Representative Conference, WPRC)가 시작되겠습니다.]
얼마나 더 가만히 기다렸을까? 회의장에 방송이 흘러나오자 장내에 기이한 침묵이 감돌았다. 이 자리에 모인 모두가 역사적인 순간을 함께하는 것이다. 긴장도 감동도 아닌 압박감이 그들 전원을 속박하고 있었다.
“어머님!?”
“아주머니!?”
그런 가운데 수아린과 이서희만 화들짝 놀라 외쳤다. 정시우가 눈을 가늘게 뜨며 그녀들에게 타박을 주었다.
“야, 목소리 크다.”
“시우 오빠, 알고 있었어요!?”
“넌 왜 그렇게 태연해!? 저 방송 아주머니 목소리잖아!”
그렇다. 방금 흘러나온 방송은, 영어이기는 했으나 분명 정시우의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그녀들이 놀라는 것도 당연한 일. 하지만 정시우는 그리 놀라지 않았다.
“그야 엄마한테 유령을 붙여 두고 있었으니까 여기 와 있다는 건 알고 있었거든. 대충 뭔가 일을 맡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UN과 관련되어 있을 줄은 몰랐네.”
긴장감 없이 하하 웃는 정시우였으나 그의 말을 듣는 일행은 도저히 웃을 수가 없었다. 정시우 본인이 굉장히 특별한 인간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그의 가정도 평범하지 않았을 줄이야!
“뭘, 엄레이더라면 이 정도 일은 그리 놀랄 것도 아니지.”
“이상한 별명으로 부르지 말랬지.”
“아야.”
“어머님!”
“아주머니!”
어느 순간 뒤에 어머니가 다가와 있었다. 물론 그는 어머니의 접근을 알고 있었지만, 언제나 그래 왔듯 얌전히 어머니의 손바닥에 얻어맞아 주었다. 이서희와 수아린이 화들짝 놀라 부산스레 인사를 하는 것은 깔끔하게 무시했다.
“오오, 엄마. 그렇게 꾸미니까 40대 같은데!”
“원래 40대다 욘석아!”
정장을 입은 어머니는 단정하고 세련되어 도저히 주부로는 보이지가 않았다. 원래부터 이곳에서 일하던 사람처럼만 보였다. 어머니는 자신이 어떻게 여기 있는 것인지 말해 주지 않았고 정시우도 굳이 그것을 묻지 않았다.
이서희와 수아린은 이해를 포기했고, 한국어를 잘 알아듣지 못하는 마리나와 세리아는 그저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정시우가 짧게 설명했다.
“내 엄마야.”
“시우의!?”
“시우 님의!?”
둘이 수아린과 이서희보다도 더한 경악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머니는 환한 얼굴로 그들을 마주하며 한편으론 정시우에게만 들리도록 속삭였다.
“아들, 조만간 배에 칼 찔리지 않으려면 잘 정리해야겠다.”
“그런 거 아니거든.”
“그리고 네 아빠가 앞으로 가능하면 한국 애는 때리지 말라더라.”
정시우는 갑작스러운 어머니의 말에 잠깐 고민하다가는, 손가락으로 김하룡을 가리켜 보이며 대꾸했다.
“쟤만 빼놓고. 앞으로 한국 전력 계산할 때 쟤는 빼놓고 해야 할 거야.”
“……그래, 알겠다. 그러면 어쩔 수 없지.”
어머니는 쉬이 물러서지 않는 정시우의 말에 쓴웃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이고는 뒤로 물러났다. 처음부터 그 말을 하기 위해 다가왔던 모양이었다.
“그럼 엄만 이만 가 보마. 진지한 자리니까 애들이랑 너무 떠들지 마라.”
“초등학교 학급 회의도 아니고…….”
그는 손을 휘휘 저어 어머니를 떠나보냈다. 남은 이들은 얼떨떨한 눈으로 그를 보았으나, 당연하게도 그는 설명해 주지 않았다. 단지 고개를 갸웃하며 대수롭지 않게 말할 뿐.
“내 엄만데 평범할 거라고 생각했어?”
“명답이라고 해야 할지, 참…….”
그로부터 5분여가 지나 회의 참석자가 모두 제자리에 앉았을 때, 드디어 회의가 시작되었다.
한국 플레이어 대표 회의와는 비교도 안 되는 안건이 수시로 튀어나왔고, 아무렇지도 않게 논의되었다. 부결된 것도 많았으나 플레이어 대표들의 협의를 받아 가결된 사항도 제법 되었고, 그 하나하나가 흔들리는 세계정세에 막대한 영향을 끼칠 만한 것들뿐이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세계 플레이어 협의회 결성이었다. World Player Conference, WPC라고 불리는 기관의 창설! 이 자리에 모인 플레이어들을 각국 대표로 두며, 플레이어 전원을 소속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기관이었다.
각국 정부가 아닌 UN과의 협력 체제를 기반으로, 한 국가의 힘으로 대처가 불가능한 몬스터 발생 사태에 대비하여 플레이어들의 힘을 하나로 묶는 것이 목표였다. 다른 나라의 플레이어들에게 도움을 받아 놓고 발을 빼 버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협약이기도 했다.
“설악산에서 일 다 끝나니까 나타났던 용오름 길드처럼 나쁜 놈들을 그러지 못하도록 미연에 막는 일이구나!”
“마리나, 목소리 크다.”
앞뒤 안 가리는 건 수아린뿐인 줄 알았는데 마리나도 만만치 않았다. 대놓고 적대하기로 마음먹은 것일까,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녀석의 이마에 알밤을 먹였다. 그러는 동안에도 WPC의 발족을 위해 고안된 사항들이 여러 가지로 논의되고 있었다.
“UN은 하늘성 외부에 인공 섬을 띄워 올릴 것입니다. 그렇게 해도 민간인이 하늘성에 출입하지는 못하겠지만, 하늘성과 바로 연결되어 소통할 수 있겠죠. 또한 B&Y와의 합동연구로 이 인공 섬에 워프 게이트를 설치하고자 합니다. 세계 요지로 이동할 수 있는…….”
“오, 이런 계획을 세우고 있었구나.”
하늘성의 플레이어들은 좋겠구만, 정시우는 심드렁하니 회의 내용을 들었다. 그렇게 얼마나 오랜 시간을 기다렸을까, 비로소 그들의 차례가 왔다.
“다음으로, 지난 8월 말 USA 애리조나 주에서 있었던 사건에 대해…….”
정시우의 눈이 반짝였다.
본제가 시작되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