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3
103화.
회의장에 마련된 대형 스크린을 통해 거대한 협곡, 그곳을 가득 메운 언데드 몬스터들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울부짖는 금안, 금색 아우라의 세리아……. 스스로의 마나를 수습하여 평상시 차분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지금의 그녀와는 상당히 다른 모습. 이렇게 보니 확실히 ‘정상이 아니다’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 앞에서 의장이 차분하게 말했다.
“던전의 몬스터들이 떠받드는 신, 그들의 힘을 받아들인 결과 변화한 모습입니다.”
“뭐……!?”
“그게 정말 가능한 일이었단 말이야!?”
“엇, 저것 봐. 동영상이 진행되고 있잖아.”
영상은 그녀뿐만이 아니라 세리아의 길드원들의 변이 과정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인간의 형태를 유지하고는 있지만 이미 인간이라 부를 수 없는 언행을 하게 된 그들의 모습이 주는 이질감, 공포감이 스크린 너머로도 충분히 전해졌다.
“저렇게 가까이서 잡아내다니.”
“저것들, 대체 어쩌다 저 지경까지 이른 거야……?”
“일부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신의 축복]을 굉장한 히든 피스로 취급하며, 원하는 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보시다시피 신의 힘은 굉장히 위험하며, 이질적인 힘입니다. 힘을 받아들인 순간 서서히 육신을 잠식하여, ‘인간’이라고 부를 수 없는 존재로 만드는 것입니다.”
“잠깐만, 그렇다면 저 여자는 어떻게 원래대로 돌아온 거지? 설마 지금도 잠식당한 채야? 저 여자를 대체 누가 안에 들인 거야!”
회의장이 통째로 얼어붙은 가운데, 천천히 자리에서 세리아가 일어섰다. 정시우와 이서희 또한 마찬가지. 세리아는 의장으로부터 마이크를 건네받아 회의장 중앙에 서서는 입을 열었다.
“제가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여기 있는 지하 플레이어, 정시우 씨 덕분입니다.”
“또 저 사람인가.”
“이거 짜고 치는 거 아니야?”
이곳저곳에서 불만스러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러나 동영상 속에서 세트나크의 파편을 깔끔하게 부숴 버린 정시우가 일대 마나를 통제하여 흡수하는 모습을 보고도 더 이상 뭐라 말을 이을 수 있는 이는 없었다.
“이분에게 특별한 능력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단지 마나를 섬세하게 컨트롤하여, 나쁜 성질의 마나를 제거할 수 있었기 때문에 저를 도와주실 수 있었던 것이죠. 여러분도 마나 컨트롤 능력이 극에 이른다면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지금 그런 말도 안 되는 능력을 보일 수 있는 이는 단언컨대 없었다. 동영상 속에서 정시우가 세리아의 마나를 컨트롤하여 인위적으로 루이오스의 마나를 몰아내고 변형시키는 광경에 이르자 청중은 모두 침묵하고 말았다.
실제 상황이 아니기에 그가 정확히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가 타인의 마나를 조종하고 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즉, 정시우와 같은 능력이 없다면 신의 힘에 섣불리 손을 댈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경고하는 일이기도 했다.
“이 일이 있은 이후, 저와 정시우 님은 신의 힘이 인간의 자유의지에 간섭하는 굉장히 위험한 힘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지금 플레이어들의, 어쩌면 민간인 사이로도 퍼지고 있는 위험한 ‘민간 신앙’을 당장이라도 그만두도록 멈추지 않는다면…… 인간은 스스로의 손으로 스스로의 목을 조르는 꼴이 되고 말 것입니다.”
“당신들만 힘을 차지하기 위해 거짓말을 치는 것이 아닌가? 동영상 같은 건 얼마든지 위조할 수 있어!”
그런 질문은 어쩌면 예정되어 있던 것일지도 몰랐다. 아무리 증거자료가 준비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소용이 없다. 인간의 욕망은 쉬이 사그라지지 않고, 타인 또한 자신과 같은 욕망을 지니고 있으리라 지레 결론을 내려 버리기 때문이다.
“예. 하지만 사람의 죽음은 그리 쉬이 위장할 수 없죠.”
“그건…….”
“제가 엘리트 길드원들을 모두 죽여 가면서까지, 개인의 힘을 추구할 이유가 있습니까? 여러분이 좋아하시는 기회비용으로 설명해 주시면 좋겠는데요.”
“……끄응.”
만약 세리아가 엠퍼러 길드원들을 잃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그들의 악의 어린 질문에 제대로 대답을 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가 길드원들을 신의 힘 앞에 잃어버린 것도, 그 일이 있은 후로 미국 서부 최대의 영향력을 지녔던 길드를 해산시켜 버린 것도 분명한 사실이었다.
“우리가 오늘 이 자리에 선 것은, 신의 힘을 인류의 이름으로 부정하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의 힘이 필요합니다. 몬스터들을 이끄는 신에 대한 인식을 바로잡고, 그들을 몰아내지 않고선 지구는 내부에서부터 무너져 내리고 말 것입니다.”
“확실히…… 그렇군.”
“엠퍼러 길드의 공중분해에 설마 이런 이유가 숨어 있었을 줄이야…….”
제아무리 신의 힘이 크다 해도 원래 지니고 있던 최강의 세력을 버려 가면서까지 추구할 것은 못 된다. 단순히 저울에 놓고 비교해 보아도 그랬다. 욕망을 지닌 인간이기에, 욕망이 내놓은 답을 수긍하지 않을 수 없다.
“아니, 나는 그래도 믿을 수 없어. 결국 엠퍼러 길드도 몰래 신의 힘을 취했었단 얘기잖아. 그 안에 무슨 사정이 있는지 우리는 전혀 알지 못한다고!”
물론 그것으로 모두가 납득하는 것은 아니었다. 논리를 부정할 수 없으니 논리를 구축하는 데에 사용된 증거를 부정하는 것. 일행도 능히 그러리라 짐작했다. 그때 나선 것이 다름 아닌 또 한 명의 증인, 이서희였다.
“사례가 하나 더 있습니다. 일본 오타루에서 발생한 일입니다. 한국의 플레이어 이서희 씨께서 발언해 주시겠습니다.”
바턴이 이서희에게 돌아왔다. 이번에도 자료가 있었다. 이서희가 손수 마련한 조악한 영상이었으나 현장감을 전달하기엔 충분했다. 아니, 더했다.
“저, 저럴 수가.”
“허어…….”
인간이 리자드맨으로 변하는 광경, 그녀는 정시우가 모르는 사이 그것을 포착해두고 있었고, 보다 직접적인 재앙에 인간들은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었으니까.
“우리는 저것에 대해 보고받지 못했는데요!”
“그야 여기 정시우 씨가 완전히 박살을 내버렸으니까요.”
“또 정시우야!”
이쯤 되면 이 모든 사태의 뒤에 정시우가 있었다고 해도 의심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정시우는 어디까지고 당당했다. 드디어 그에게 마이크가 돌아왔다.
“내가 가는 곳에서만 이런 일이 일어난 게 아닙니다. 분명 지구 곳곳에서 이미, 신의 힘이 몇 번이고 드러났겠지요. ……단지 그게 은닉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입니다.”
“아니, 이 건에 관련하여 공표된 일은 하나도 없어! 모두 짜고 치는 거짓말이 아니라고 어떻게 증명할 텐가!”
“무엇으로 증명하든 믿고 싶지 않은 사람은 믿지 않겠죠. 위조의 흔적이 없는 영상과 사람의 증언을 믿지 않는 시점에서, 무엇을 자료로 가져오든 납득하지 못할 테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아르디초네 씨, 발언권이 주어졌을 때 발언을 부탁드립니다.”
“이 자식들…… 다 한통속인가!”
가장 곤란한 점은, 저렇게 분통을 터트리는 자에 한해 그리 나쁜 놈은 아니라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하고 비슷하게 힘과 권력을 탐하는, 지극히 평범한 성격의 플레이어.
만약 정말 나쁜 놈이었으면, 신의 힘에 대해 뭔가 알고 있는 놈이었다면 저렇게 대놓고 화를 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앞으로 저런 이들의 인식을 바꾸어 놓아야 하는 것이다.
“이 이상의 증명을 원하지는 말아 주세요. 모두가 믿을 수 있도록 모든 것을 증명하자면, 가장 단순하고 확실한 것부터 시작해도 우리 모두 죽기 전에는 끝나지 않을 테니까.”
“…….”
“우리가 이곳에 오기 전 습격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분도 계실 겁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신의 힘을 품고 있는 키메라들로부터 받은 습격이었습니다.”
정시우는 자신이 직접 회수했던 키메라의 사체를 하나 꺼내어 놓았다. 이미 죽어 있음에도 고레벨 몬스터의 사체답게 풍겨 내는 기세가 제법 험악했다.
하지만 단순히 그것이 품고 있는 마나가 대단할 뿐만이 아니다. 몬스터의 마나를 자세히 탐색하면 미약하게 감지할 수 있는 이질감, 신의 흔적!
모두가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세계를 대표하는 플레이어에 어울리게 세심하고 민감한 마나 감각을 지니고 있던 몇몇 플레이어들의 낯빛은 곧장 굳어졌다.
“우리는 던전에서 서로 다른 신을 섬기는 몬스터들이 충돌하는 모습을 몇 번 보았습니다. 하지만 지금 심각한 점이 무엇인가 하면, 이들이 지구에 쳐들어오기 위해 일시적으로 협력을 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점입니다. 여러분도 그런 기색을 몇 번이고 느꼈을 겁니다. 하늘성이 무엇으로부터 지구를 보호하려고 하는지 한 번이라도 고민해 봤던 사람이라면 아마도.”
“역시 그랬나. 나도 그에 동의한다. 분명 그런 기억이 있어. 몬스터들의 세력이 구분되어 있으며, 던전에서 몇 번이고 충돌을 반복하던 놈들이 지상에서는 서로 협조를 하던 기억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굉장히 의아했었는데, 놈들의 공동 목표가 있다는 가정을 하면 의문이 제법 간단하게 풀려 버리는군요.”
“맙소사…….”
좋아, 의식수준이 높은 플레이어들을 시작으로 옹호 여론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쉬이 접하기 힘든 신의 힘에 대해 피로하는 것보다도, 당장 많은 플레이어들이 직면한 몬스터의 위협과 연결 지어 설명하는 쪽이 효과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공동 목표가 지구인들을 신의 휘하에 끌어들이는 것이라고 한다면. 다른 신과 경쟁 관계에 놓여 있다 해도, 일단은 인간들이 ‘신의 힘을 원하게’ 만들어야 할 필요가 있었겠군.”
“몇몇 던전에서 신의 흔적과 조우한 적이 있어. 굉장한 감언이설이었지. ……신의 명을 따르는 몬스터들의 존재를 감안하지 않는다면, 말이야.”
성공했다. 정시우는 작게 미소를 지었다. 이것으로 충분하다. 신의 힘에 모두가 의심을 품게 만드는 것. 그것만으로도 이전과 같은 참사는 그리 쉬이 일어나지 않게 될 터였다.
“모든 신의 목표가 같다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지?”
그러나 그것은 정시우가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에서의 접근이었다.
“많은 신이 서로를 향한 투쟁을 벌이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지. 하지만.”
불의 신의 축복을 받았을 것이라 많은 이가 추측하는, 그래서 지금 가장 입지가 미묘해진 남자.
“그렇다고 해서 과연 우리는 모든 신을 부정할 수 있는가? 신들 사이에 뚜렷한 적대관계가 형성되어 있는 상황에서, 과연 그들이 한 마음으로 인간을 적대하고 있다는 보장이 있느냔 말이다.”
용오름 길드 마스터 김하룡의 말에, 다시 한 번 회의장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모든 신이 그랬…….”
“고작 몇 명인가. 표본이 너무 적지 않아? 뭣보다 당신도 당신 입으로 말했잖아. 신들이 서로를 적대하고 있다고. 그렇다면 지구를 침략하려는 신, 지구를 지키려는 신으로 파벌이 갈려 있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잖아. 아니, 오히려 이렇게 이해하는 쪽이 정상 아닌가?”
“그 모든 몬스터가 인간을 똑같이 적대했던 점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지? 지상으로 풀려 나온 몬스터들이 서로 협력했던 것은?”
“그 몬스터들이 모시는 신이 누구인지 하나하나 댈 수 있나? 그것이 일부 신들의 작당이 아니라는, 인간들의 편에 서려는 선한 신들의 존재를 가리기 위한 위장공작이 아니라는 보장은 있나?”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정시우는 반박할 수 없었다. 몬스터가 나타난 모든 현장에 가서 그들이 어떤 신을 섬기는지 캐물어 볼 수 없는 한은 말이다.
“나는 불의 신을 섬기고 있다. 그분으로부터 힘도 받았지. 하지만 난 여전히 인간이다.”
그가 순간적으로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해 침묵한 바로 그 순간, 김하룡의 전신에서 불꽃이 치솟았다. 압도적인 마력이 자아내는 신의 불꽃에 많은 이들이 혐오감 이전에 감탄사를 자아내고 말았다.
순수한 붉은빛으로 물든 그의 두 눈, 명백하고 또렷한 이성이 유지되고 있는 그 눈을 보며 정시우는 한 방 먹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처음부터 그랬듯 지금도 인간을 위해 움직인다. 불의 신께서는 인간을 지키고 싶어 하시기 때문이지! 정시우, 당신은 잘못되었어. 설령 몇몇 신이 인간을 멸하고 싶어 한다 해도, 그것을 일반화하는 것은 결단코 잘못이란 말이다!”
마치 정의로운 인간을 대변이라도 하듯 당당하게 선언하는 김하룡을 보며, 정시우는 피식 웃어 버리곤 생각했다.
역시 그때 저 새낄 죽여 놨어야 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