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
95화.
휴식처로 돌아온 정시우는 본격적으로 오감을 스킬로 만드는 수행을 시작했다.
“구체적으로는 어떻게 하실 건데요?”
“우선은 지금 내가 가진 두 가지 스킬을 수련하고 탐구해서, 패시브 스킬의 생성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졌는지를 파악해야겠지.”
굉장히 타당하고 합리적이며, 동시에 겁나 어려울 것 같은 발상이었다. 애초에 패시브 스킬의 효용이나 발전 가능성이 아니라 근본 원리를 탐구하는 것부터가 기존의 플레이어들에게는 없던 발상이었으니까.
“일단은 시각부터 해 볼까.”
“되게 오래 걸릴 것 같은데…….”
아직 1레벨에 머무르고 있는 시각 스킬의 능력은 크게 세 가지가 있었으니 바로 동체 시력 강화와 망원경, 현미경 능력이었다.
그 외에도 빛에 시야를 방해받지 않는 능력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눈과 관련된 모든 능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했다고 보면 맞았다.
“멀리 보거나 가까이 있는 걸 자세히 보거나 하는 능력은 굳이 갈고닦을 필요도 없겠지. 갈고닦을 수단도 없고.”
“그렇다면……?”
“동체 시력 쪽으로 궁리해 보는 수밖에.”
정시우는 잡티 하나 없이 뽀얀 수아린의 피부에서 억지로 시선을 떼어 내며 인벤토리로부터 탱탱볼 서른 개를 쏟아 냈다. 그리고 그중 하나를 집어 마나를 부여하고는 있는 힘껏 반대편 벽을 향해 던졌다.
“힉!”
마나가 부여된 탱탱볼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내던져져, 절대 파괴되지 않는 수련장의 벽에 부딪힌 다음 순간 마찬가지로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튕겨 나왔다.
그러나 정시우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옆으로 슬쩍 젖혀 그것을 피했다. 완벽히 눈으로 그것을 파악하고, 몸을 놀리는 두 가지 과정이 그 안에 함축되어 있었다. 수아린이 기겁하며 말했다.
“오빠, 이건 반사 신경 수련에 더 가깝지 않을까요……?”
“그뿐만이 아냐. 부여 스킬로 탱탱볼을 강화해 효력을 오래 유지시키는 연습까지 겸할 수 있어. 동체 시력에 반사 신경, 부여 스킬까지…… 완벽한 훈련 코스 아냐?”
수아린은 어린아이처럼 웃는 정시우가 참 귀엽다는 생각에 흐뭇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하지만 저는 굳이 수련장에서 수련할 필요 없으니까 빠질게요. 그럼 이만!”
“비겁합니다, 선배님!”
수아린은 용세하의 절규를 깔끔하게 무시하며, 여태까지 없던 눈부신 속도로 내달려 수련장을 빠져나갔다!
“세하 너는 여기서 해라.”
“크헉!”
수련장은 확실히 넓은 공간이지만, 그 안에는 각종 운동기구가 있어 탱탱볼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튈 확률이 더욱 높아졌다. 그 안에서 한가로이 창이나 내지르고 있다간 몸 이곳저곳 탱탱볼에 얻어맞아 멍이 들 것이다.
평범한 탱탱볼이라면 별 문제 없겠지만 정시우의 마력으로 강화된 탱탱볼이라면 얼마든지 그럴 가능성이 있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너도 같이 동체 시력 수련을 하자.”
“지금 이거 하나도! 어려운데요!”
수련장은 그저 파괴되지 않는 성질만 품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어째설까, 정시우의 마력을 품고 사방으로 튀어 다니는 탱탱볼은 벽이나 운동기구에 한 번 부딪혀 튕길 때마다 속도가 증가하고 있었다.
원래도 빨랐지만 지금은 더더욱 빨라져서, 조만간 빛의 속도를 돌파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물론 착각이다. 이제 겨우 미약한 소닉 붐이 발생하는 정도였으니까.
“살려 줘……!”
“좋아, 하나에 적응했으니 두 개로 늘린다.”
“형님, 잠깐…… 아아아!”
용세하가 헬프 요청을 보내든 말든 이제 더는 빠져나갈 수 없다! 정시우는 신이 나서는 탱탱볼을 던졌고, 강력한 마력을 품은 탱탱볼은 순식간에 여기저기 부딪히며 속도를 불리더니 어지간한 몬스터는 일격에 죽일 수도 있을 법한 파워를 품고 그들에게 날아들었다.
“흐아!”
“좋았어, 동체 시력이 좀 단련되는 것 같지?”
“생존 본능이라면 좀 단련되는 것 같습니다, 형님!”
이제 용세하는 그저 정시우의 마나 컨트롤 미숙으로 두 탱탱볼에서 마나가 빠져나가길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없었다. 정시우의 마나 컨트롤 능력은 동체 시력과 반사 신경을 단련하며 몸을 놀리는 순간에도 실시간으로 늘어나고 있었고, 기어이 일곱 개째의 탱탱볼에 마나를 주입할 때까지도 나머지 여섯 개의 탱탱볼이 살벌한 소닉 붐을 발산하며 수련장을 진동시키는 꼴이 되었다.
“용세하, 거기 피해!”
“으헉!”
“이런 한심한 놈, 그것도 못 피하고 얻어맞냐!”
“형님, 혹시 방금 허공에서 일부러 마나로 조종해서 운동 방향 바꾸신 게…….”
“변명은 필요 없다!”
“전 형님의 변명이 듣고 싶다구요!”
5분에 하나씩 추가되던 탱탱볼의 숫자는 여덟 개에서 잠시 늘어나지 않고 소강상태를 맞이했다. 제아무리 정시우의 마나 컨트롤 능력이 빠르게 성장했다 한들 한꺼번에 여덟 개의 움직이는 사물에 마나를 부여하고 완벽하게 유지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용세하는 탱탱볼에 수십 번 얻어맞아 몸이 탱탱하게 부어오른 끝에 간신히 여덟 개의 탱탱볼이 수련장을 누비는 상황에 익숙해지는 데에 성공했다. 비록 시각 스킬은 얻지 못했지만 동체 시력과 반사 신경은 단기간에 믿을 수 없을 만큼 성장한 것만 같았다.
“후우.”
“너 지금 내 능력이 부족하다고 비웃었냐?”
“그게 아니라 안도한 겁니다, 안도! 형님, 뭔가 연습할 때는 성격 달라지시네요!”
“내가 어떻게든 9개 부여하고 만다!”
“안 돼!”
“돼!”
그로부터 다섯 시간이 지났을 때, 정시우는 기어이 열 개의 탱탱볼에 각각 마나를 부여한 채, 그 안의 마나를 완벽하게 컨트롤할 수 있게 되었다. 바로 그 순간, 한동안 오르지 않던 부여 스킬의 레벨이 40으로 올랐다!
“아니, 시각 스킬이 올라야지 왜 이게 올라?”
“형님, 혹시 탱탱볼의 속도가 부족해서 그런 것 아닐까요? 아야.”
용세하는 탱탱볼을 피하지 못해 뺨에 얻어맞으면서도 정시우에게 충고했다. 정시우는 과연 그 말이 타당하다고 생각했다. 탱탱볼의 숫자가 많아지면 한 번에 잡아내기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었지만, 결국 평범한 재질의 탱탱볼은 마나로 강화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
시각 스킬의 힘을 지니고 있는 정시우는 아무런 어려움도 없이 각각의 탱탱볼의 위치와 운동 방향을 시야에 담고 움직이는 것이 가능했다.
“그래. 이대로 해 봤자 부여 스킬의 레벨이 오를 뿐 시각 스킬을 탐구하는 일은 지난하겠어.”
계속해서 시각 스킬을 구사하느라 감각이 예민해지긴 했지만 그 이상의 효과를 얻기는 힘들었다. 효율이 적다는 얘기다. 정시우는 판단을 내리고는 손을 뻗었다. 탱탱볼 열 개가 자유 운동을 멈추고 동시에 그의 손아귀로 빨려 들어와 차례차례 인벤토리로 수납되었다.
“그러면 탱탱볼의 위력을 근본적으로 강화하는 방법을 생각해 보자. 어쩌면 주방에서 가공이 가능하지 않을까?”
“설마 그쪽으로 생각을 전환하실 줄이야…….”
만약 그의 생각이 성공을 거두기라도 했다간 한결 더 빠르고 아픈 탱탱볼에 얻어맞는 신세가 될 것이다. 정말로 빠져나갈 길이 없다는 생각에 용세하의 볼에 또르르 눈물이 흘렀지만 정시우는 녀석의 등을 두드려 주며 방문을 열 따름이었다.
“아, 오빠. 이제야 휴식하시는 거예요?”
“어. 사소한 문제점을 깨, 닫…….”
소파에 앉아 지그시 눈을 감고 마나를 다루고 있던 수아린이 인기척을 느끼곤 고개를 돌려 그들을 맞이했다. 정시우는 한 손을 들며 가볍게 대꾸하다 말고 말을 더듬었다.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
[시각 스킬이 Lv2가 되었습니다.]
“왜 그러세요, 오빠?”
“형님?”
정시우가 그대로 굳어 움직이지 않자 이상하게 여긴 수아린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다급히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수아린이 볼을 두툼히 부풀리며 그를 붙잡았다.
“말도 안 하고 그렇게 고개를 돌리면 상처받잖아요.”
“아니, 네가 너무 예뻐서.”
“에윽.”
수아린의 얼굴까지 붉게 물들었다. 이건 설마 어쩌면 드디어 그의 마음을 확인할 찬스인가!? 아니, 그래도 그냥 별 생각 없이 던진 말일 수도 있으니 설레발은 금물이 아닐까!?
그의 말에 급격히 동요한 수아린이 순간적으로 그를 놓자 정시우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렸다. 물론 수아린이 예쁘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지만 진짜 이유는 그것이 아니었다.
“나 화장실 좀.”
“잠깐만, 이 타이밍에!?”
“형님……?”
수아린이 예쁜 것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새삼스레 미모에 놀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정시우의 반응은 명백히 이상했다. 정시우와 관련된 일이면 살짝 바보가 되는 수아린과는 달리 용세하는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정시우는 그들에게 답을 주지 않고 욕실에 틀어박혔다. 좌변기에 털썩 주저앉아 정시우는 좌절 자세를 취했다. 전혀 의도치 않았던 일이었으나 그것은 분명한 참사였다.
‘아린이한테 미안하게 됐는데.’
분명 그의 시각 스킬은 극도로 활성화되어 있었다. 그 상태에서 수련장 바깥으로 빠져나온 순간, 놀랍게도 시각 스킬이 단숨에 2레벨로 오르며 여태껏 없던 기능을 활성화시킨 것이다!
그렇게 새로 활성화된 기술이 무엇인가 하면, 바로 투시였다.
‘무슨 이런 야겜 주인공 같은 능력이 나한테…….’
워낙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인지라 방비할 틈도 없었다. 그는 시야에 수아린이 들어온 순간 그녀가 입은 옷을 가볍게 투시해 그녀의 나신을 포착했고, 워낙 인상적이었던지라 뇌리에 스캔하듯 새겨지고 말았다. 눈을 감고 있어도 생생하게 떠오를 정도였다.
‘예전부터 생각했지만 정말 약점이라곤 없는 녀석이구나. 몸매까지 그렇게 완벽…… 아니, 아니아니아니아니아니.’
정시우는 군대에서 죽어라 외웠던 반야심경을 되새겼다. 아무 소용없었다. 번뇌가 그의 뇌를 가득 채웠다. 결국 그는 옷을 다 벗어 던지고 샤워를 시작했다. 모두 흐르는 물에 씻어 내는 것이다!
“좀 낫네.”
그는 자비 없이 차가운 물을 전신에 들이부었다. 빙결 내성을 갖게 된 이후 이 정도 물은 그리 차갑게 느껴지지도 않았지만, 쓸데없는 사춘기 청소년 같은 생각으로 달아오른 몸을 식히기에는 충분했다.
“후…….”
머릿속을 진정시킨 정시우는 조금 진지한 생각을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수아린과 자신에 대해서였다.
녀석이 자신을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야 깨닫고는 있었다. 다른 여자와 엮일 때마다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도 그렇고 조금씩 노골적으로 애정을 드러내는 것이 눈에도 보일 정도였으니까.
사랑에 서툰 녀석이라 감정을 감추는 것도 서툴렀다. 정시우는 그것을 모를 정도로 바보가 아니었다. 아마 그들 사이에 용세하가 없었더라면 수아린은 보다 적극적으로 그에게 어필했을지도 모른다.
만약 정시우가 조금만 긍정적으로 반응해 준다면 그들의 관계는 순조롭게 진전되겠지. 그러나 정시우는 여태까지 그것을 애써 모른 척 하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두 말할 것도 없이 지금 그들이 처한 상황 때문이었다.
‘우리는 지금 지나치리만치 일방적인 관계야. 순조로이 발전한다면 그야 좋겠지만 만약 조금이라도 비틀린다면…… 그건 아린이한테 지나치게 가혹한 일이 되겠지.’
더욱이 수아린의 자신을 향한 감정이 사랑보다는 감사와 동경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그를 섣불리 행동하지 못하게 하는 이유였다. 거기에 더해 지금 자신의 상황이 사랑 놀음이나 하고 있을 만큼 여유롭지 않다는 것도 이유가 될 수 있겠지.
그런데 방금, 조금 지나치리만치 노골적인 방법으로 수아린의 매력을 어필당하는 바람에 그런 그의 마음이 어느 한쪽으로 급격히 기울고 말았다. 수아린도 정시우도 의도치 않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효과적이었다.
“안 되지, 안 돼.”
샤워기를 틀어 머리에 차가운 물을 더 들이부었다. 수아린의 이미지를 씻어 내기 위해 그저 흘러내리는 물에 시선을 집중하기로 했다. 그러자 물 내부의 투명한 결정체들의 집합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아니, 잠깐만.”
순간 자신이 포착한 것의 정체를 깨달은 정시우의 모든 사고가 정지했다. 수아린의 나신조차 한순간(이미 영구 저장소에 보존되었기에 완전히 잊는 것은 불가능했다.) 잊었다.
“물을 투시한다고!?”
정시우가 시각 스킬의 진정한 위용을 깨달은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