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
94화.
“이 자식이!”
기습에 제대로 당해 쓰러지기는 했지만 김하룡은 세계 최강을 꼽을 때 반드시 언급되는 플레이어 중 한 명. 곧장 마나를 활성화하여 방어 스킬을 발동한 김하룡은 정시우를 향해 돌아선 순간 그대로 크루얼 차지에 얻어맞아 허공에 떠올랐다!
“크악!?”
정시우의 돌진 한 번에 방어 스킬이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바스러졌다는 사실을 김하룡은 순간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는 그 대가로 허공을 한 바퀴 휘르륵 돌아 날아온 정시우의 꼬리에 거세게 얻어맞아 다시 바닥에 처박히는 신세가 되었다.
“이, 새……!”
“자, 이제 시작이야!”
정시우는 원래 전투에서 꼬리를 잘 사용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단순해서, 꼬리를 전투에 섞어 쓰는 것이 습관이 되면 바깥에서 전투를 벌일 때도 무의식중에 꼬리를 다루게 되어, 혹여나 그의 이질적인 모습이 다른 이들에게 들킬까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그는 이제 꼬리를 당당히 내놓고 다닐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더 이상 자신의 육신을 전투에 활용하는 일을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내 꿈을!”
“크학!”
정시우는 꼬리로 김하룡의 목을 휘감아 들어 올려 다시 한 번 내려쳤다. 기습으로 시작하는 전투의 기본은 상대가 저항할 틈을 주지 않는 것이다. 싸움이란 기세이며 동시에 흐름. 정시우는 그런 싸움에 아주 정통했다.
“내 꿈을 위한 여행!”
“크겍!”
어딘가 모르게 정겨운 느낌이 드는 멜로디를 부르며 김하룡을 마구 패는 정시우. 지켜보는 수아린의 속이 다 시원해지는 구타였다.
김하룡이라고 가만히 맞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마나를 활성화해 스킬을 발현하려 했지만, 경악스럽게도 정시우의 마나가 담긴 펀치에 얻어맞거나 꼬리에 목이 졸릴 때마다 마나가 흩어지는 바람에 스킬을 차마 완성시킬 수가 없었다. 김하룡은 지금의 자신이 도저히 따라할 수 없는 그의 마나 테크닉에 경악하고 말았다.
“어떻, 이럴…….”
“걱정 따윈 없어!”
노래가 절정을 향해 달려감에 따라 구타도 절정을 향했다. 연달아 주먹을 내지르는 정시우의 기세가 얼마나 섬뜩했으면 누구도 그를 붙들지 못했다. 수아린과 이서희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내 친구랑! 함께니까!”
“칵!”
그렇게 수십 발째의 주먹이 놈의 명치에 틀어박히는 순간, 놈의 심장부에서 섬뜩한 기운이 꿈틀했다.
“네, 놈이……!”
정시우는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는 김하룡의 시선, 이렇게나 압도적으로 쳐맞고 있음에도 어딘가 여유를 품고 있는 듯한 그 시선을 느끼며 마주 웃어 주었다.
흥겨운 멜로디가 멎었다.
“꺼내 봐. 어서.”
용의 위엄 스킬이 최고조로 활성화되었다. 용의 험상궂은 이빨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당장이라도 목줄기를 물어뜯길 것만 같은 공포가 김하룡을 덮쳤다.
“자, 어서.”
“……!”
김하룡의 등줄기에 오한이 내달렸다. 그는 직감했다. 타인의 마나에 간섭하여 스킬을 중간에 끊어 놓을 만큼 컨트롤이 뛰어난 사람이라면, 순간 꿈틀한 자신의 마나를 대충이나마 느꼈으리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런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면, 그는…….
“이렇게, 불합리한 폭력을…….”
“아, 그래. 모르는 척 하겠다고. 알겠어. 네 뜻을 존중해 줄게.”
결국 김하룡은 스스로의 내부 깊숙한 곳에서 피어나던 마나를 다시 잠재워 버렸다. 그것을 느끼지 못할 정시우가 아니었으나 그는 대수롭지 않게 그것을 넘겼다. 이러면 이러는 대로 좋다고 생각했다.
“어디, 우리 2절까지 다 불러 볼까.”
“큭……!”
공포란 물리적으로 새기는 것이 가능한 종류의 감정이다. 한 번 강렬하게 새겨진 그것은 낙인처럼 남아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다리가 묶인 채 자라난 코끼리가 자그마한 기둥 하나에 매여 움직이지 못하는 것처럼, 조건반사적으로 반응하게 된다.
단적으로 말하면, 더는 주제를 모르고 기어오르지 못하게 된다.
“칵, 커헉…….”
“후우.”
정시우는 무려 10분 이상을 더 김하룡을 두들기고서야 주먹을 거두었다. 2절까지만 부르겠다고 해 놓고 설마 엔딩곡까지 풀버전으로 부를 줄은 몰랐던 김하룡의 귓가에는 지금 다양한 포켓몬 친구들의 이름이 자동재생 되고 있었다.
“자, 여기 너희 대장.”
꼬리로 놈을 들어 올려, 안절부절 못하는 용오름 길드원들에게 내던져 주며 정시우는 씩 웃었다.
“나를 욕하는 놈은 죽인다. 하지만 아린이나 세하를 욕하는 놈은 죽지도 못하게 만들어 줄 거야. 기억해 두는 게 좋아.”
“서브마스터를 욕하지는 않았……!”
“그럼, 내 욕이냐?”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정시우는 나직이 혀를 차며 돌아섰다.
“용오름, 너흰 다음부터 내 눈은 피해 다녀라. 면상만 봐도 패고 싶어질지도 모르니까.”
“진짜 나빴다 오빠…….”
나빴다고 말하는 것과는 달리 수아린은 굉장히 흡족한 표정이 되어 정시우에게 달라붙었다. 용세하는 뭐라 말하기 힘든 묘한 표정으로 그를 일별하곤, 마찬가지로 돌아서서 정시우의 뒤를 따랐다.
누구도 그를 붙잡지 못했다. 김하룡이 간헐적으로 토해 내는 신음소리만 울려 퍼지는 가운데 충격과 침묵에 빠진 회장을 뒤로하고, 이서희만이 종종걸음으로 그를 쫓았다.
“그럼 이제 밥 먹으러 가자, 시우야.”
“넌 지금 상황에 날 따라 나와도 괜찮아? 앞으로 던전에 들어가려면…….”
“사실 플레이어들 사이에 국적은 별 의미가 없어.”
정시우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이서희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하늘성에는 모든 플레이어가 모이니까 굳이 한국 플레이어들 하고 모일 필요도 없고, 더욱이…… 아무리 용오름 길드가 32단계 던전을 최초로 클리어했다고 해도 그건 많은 타국의 엘리트 용병을 빌리고, 그러고도 무수한 희생을 기반으로 이룩한 것이라…… 상처뿐인 명예에 지나지 않아. 너무 신경 쓸 필요 없다는 얘기야.”
물론 그 말도 이서희가 뛰어난 능력의 플레이어이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저레벨의 평범한 플레이어라면 한국 출신이라는 공통점을 이용해서라도 어떻게든 용오름 길드의 눈에 들기 위해 노력할 테니까.
“아무래도 새로운 파티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아. 파티 리더가 누군지 알면 시우 너도 깜짝 놀랄 거야.”
“그 정도로?”
“아, 하지만 남자는 아냐.”
“그럼 마리나구나.”
“눈치도 빠르긴.”
“힌트를 다 줘놓고 무슨.”
마리나는 언제나 재능 있는 플레이어를 갈망한다. 정시우를 파트너로 점찍기는 했으나 그는 어디까지나 지하 플레이어인 만큼 하늘성 던전에서는 함께할 수 없다.
그러니 하늘성 던전을 클리어하기 위한 파티를 언제나 그녀 나름의 방식으로 구상하고 구성하는데, 아무래도 이서희가 그녀의 눈에 든 모양이었다. 능력도 독특하고, 재능과 근성도 겸비한 이서희이니 탁월한 선택이라 할 수 있으리라.
“다행이다. 그 녀석이랑 같이 있으면 쉽게 리타이어하진 않을 거야.”
정시우는 진심을 담아 축하해 주었다. 그런 모습을 빤히 지켜보던 이서희가 은근히 물어 왔다.
“많이 믿고 있나 보네. ……그냥 친구야?”
“그냥 친구.”
“그렇구나.”
이서희는 안도한 기색이 되어 고개를 끄덕이며 정시우의 팔짱을 끼었다. 정시우가 눈을 가늘게 떴다.
“홀로 서겠다며?”
“친구인걸. 팔짱 정돈 끼어도 되지?”
“하.”
정시우는 그저 어이가 없어 웃었고, 이서희는 겸연쩍은 듯이 미소 지으면서도 팔짱을 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수아린은 이를 득득 갈았다.
“형님.”
그러나 용세하만은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게도 심각한 목소리를 냈다.
“이미 늦었습니까?”
“……세하 넌 이상한 데서 감이 좋구나.”
“음?”
“응?”
수아린과 이서희가 고개를 갸웃했다. 정시우는 간단하게 설명하기로 했다.
“용오름 길드의 마스터 김하룡 얘기야. 정말 불의 신인지는 모르겠지만, 놈은 이미 신의 힘을 받아들여 변화한 후야.”
“……뭐?”
“맙소사, 겉으로 보기엔 똑같았는데!”
그녀들이 경악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정시우는 아까 한순간 자신을 섬뜩하게 할 만큼 짙은 살기를 품은 기운이 놈의 심장 안에서 눈을 뜨던 순간을 똑똑히 기억했다.
“틀림없어. 꼭꼭 감추고 있어서 알기 힘들 뿐, 이미 근본적인 변화가 끝났어. 제대로 힘을 드러내면 외형적인 변화도 동반될지 모르지. 만약 그놈의 전력과 붙으면 그야 이기긴 하겠지만, 아마 박진감이 넘칠 거야. 음음.”
“어휴, 자기과시.”
“보기와 달리 치밀한 남자였구나. 그렇게 욱해서 덤벼들던 순간에도 마지막 한 조각은 감추고 있었다니…….”
“내 실수야.”
정시우는 혀를 찼다.
“너무 알고 있다는 티를 냈어. 당해 줄 수도 있다는 듯이 행동했어야 놈이 방심했을 텐데. 앞으론 날 경계하겠지. 그건 또 그것대로 좋은 일이지만, 쩝.”
“형님…….”
“미안하다, 세하야. 그런데 걘 포기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세리아 윌슨처럼은…… 안 되는 겁니까.”
질문을 하면서도 용세하는 그것이 불가능하리라 이미 충분히 짐작하고 있었다. 역시나 정시우는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따름이었다.
“진행도도, 본인의 의지도 모두 달라. 최악의 경우 놈은 인간의 반대편으로 작정하고 돌아섰을 가능성마저 있으니까. 물론 판단은 신중하게 하마. 하지만 결론이 났을 경우엔…… 내 손으로 끝장낼 거야.”
“전 형님의 판단을 믿겠습니다.”
용세하는 낭패한 목소리로 대꾸하며 정시우의 품으로 꾸물꾸물 기어 들어갔다. 그야 어린 시절부터 그 남자를 믿고 의지하며 성장해 왔을 용세하가, 그의 변질에 충격을 받는 것도 당연하리라.
마찬가지로 어린 시절부터 함께했을 텐데도 꾸준히 그를 싫어하는 수아린의 경우가 오히려 특이했다.
“밥이나 먹으러 가자. 그땐 그때야. 벌써부터 생각할 필요 없어. ……화염 내성은 더 수련해 둘 생각이지만.”
“응.”
괜히 수아린과 이서희의 기분까지 축 처지고 말았다.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그들을 이끌었다. 그날 점심 식사는 무척 맛있었지만, 맛을 자세히 기억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럼 나 이만 가 볼게, 시우야.”
“그래.”
밥도 먹었고, 차도 마셨다. 이서희는 마음 같아선 좀 더 정시우와 함께 있으며 어리광을 피우고 싶었으나 분위기가 썩 좋지 않아 이쯤에서 물러나기로 했다.
“연락하면 받아 줄 거지?”
“언제든지. ……아.”
마냥 그녀를 보내기 불안했던 정시우는 문득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기다려 봐.”
“응?”
“후…….”
문신에 의식을 집중하자 몬스터를 찾아 떠돌고 있는 유령 무리를 완벽하게 감지할 수 있었다. 그는 그중 하나를 바로 자신 앞으로 소환했다. 막연히 되겠지, 하고 생각한 건데 정말로 됐다. 혼자로는 불완전한 혼이 언제나 정시우를 그리며, 그에게 종속되어 있기에 가능한 일!
갑자기 나타난 유령을 보며 이서희가 화들짝 놀라 물러섰다.
“뭐, 뭐야? 시우 네가 한 거야?”
“응. 이 녀석 데려가라.”
“…….”
만약 선물이라면 결코 받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정시우는 물러서지 않았다.
“던전 안에까지 들어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 근처까지 따라갈 수는 있을 거야. 그러면 네가 들어간 던전의 위치를 내가 대강이나마 파악하는 게 가능해.”
“그러면……?”
“그러다 네가 리타이어한다 싶으면 내가 곧장 달려가는 거지.”
“…….”
비록 유령이라는 매개가 중간에 있다는 것은 마음에 안 들었지만, 그만큼 정시우가 자신을 걱정해 주는 것 같아 이서희는 적잖이 마음이 따스해졌다. 그녀는 결국 작게 고개를 끄덕여 그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고마워. 시간에 맞추지 못하더라도 원망하지는 않을게.”
“그런 재수 없는 복선 깔지 말고.”
“그래그래, 알았어. 그럼 안녕.”
그녀는 피식 웃어 버리곤 돌아섰다. 유령은 주위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투명화하여 그 뒤를 따랐다. 정시우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부모님한테도 한 마리씩 붙여 놔야겠다.”
“이제 유령 하고 오빠 위치를 바꾸는 스킬만 익히면 완벽하네요.”
“그런 인법은 없어.”
어릴 적 보던 닌자 만화에 나왔었지, 하고 생각하며 멍하니 대꾸하던 찰나, 그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반대는 가능할지도 모르겠는데?”
“네?”
“생물의 동반 전이라, 당장 수련한다고 어떻게 될 일은 아니지만…… 좋아, 그건 나중에 생각하고 일단은 휴식처로 돌아가자. 일단은 오감을 수련해야지.”
“아니 오빠, 궁금하게 해 놓고 자세히 말도 안 해 주면 어떻게 해요?”
“이 정도 말해 줬으면 나머진 유추해서 알아맞힐 수 있을 거야. 힘내!”
“미워욧!”
일행은 투닥거리면서도 빠르게 휴식처로 돌아갔다. 아직 세계 플레이어 대표 회의가 열리기까지는 제법 많은 기간이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