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
65화.
수아린은 주위를 둘러보고,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까지 와 보니 이젠 확실해졌어요. 전직 퀘스트는 우릴 이세계로 보냈던 거예요.”
“그걸 아직까지 확신하지 못하고 계셨다니 역시 선배님께서는 신중하십니다.”
“방금 비꼰 거죠?”
“싸우지 말고.”
전직을 마쳐서일까, 전직 과정이 특별했기 때문일까. 정시우의 모든 감각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이 상승한 상태였는데, 수아린이 호흡으로 마나의 밀도를 느꼈듯 정시우 역시 지금 오감으로 지금 환경과 지구의 차이를 감지하고 있었다.
“공기 자체가 달라. 호흡이 가능한 건 다행이다만……. 참고로 저번 전직 퀘스트로 갔던 곳과도 달라. 세상이 제법 여러 개가 있나 보지.”
“아까 그 작은 신전에서 느꼈던 신성력이 이곳에 굉장히 짙게 분포되어 있는 것이 느껴져요.”
수아린의 말이었다. 천장이 굉장히 높고, 복도도 무척이나 넓은 이 공간은 그러고 보면 아까 정시우가 산산조각 내었던 신전과 그 구조가 비슷해 보이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비록 그것과 비할 바 없이 거대하긴 하지만 말이야. 내재된 힘도, 그 안의 위협도…….”
정시우는 양손에 하나씩 슬레지 해머를 쥐었다. 조금 전까지 텐구산에서 상대했던 몬스터에 비할 바 없이 강력한 기운이 곳곳에서 느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정시우가 나타난 곳을 향해 몰려들고 있었다.
“고요하게 정체되어 있던 신전의 마나 흐름이 우리의 등장만으로 어그러져서 그래요. 그래도 정확히 우리 위치를 잡아내진 못했어요.”
“형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어떻게 할지는 이미 이전에 정했잖아.”
놈들이 정시우를 알아챘다고 해도 별 상관은 없었다. 비록 뭔가 있어 보이는 신전에 떨어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가 이 신전에 숨은 비밀을 탐구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냥 눈에 보이는 걸 다 부수면 되는 거야.”
정시우가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중얼거리는 순간 타이밍 좋게 그의 망막 위로 메시지가 떠올랐다.
[세상 에이리하에 존재하는 뇌신 라이아의 소신전에 진입했습니다. 이곳을 완벽하게 파괴하면 지구에 미치는 뇌신 라이아의 영향력을 3.6% 감소시킬 수 있습니다.]
“뇌신?”
어디서 많이 들어 봤는데, 하고 생각하던 그는 이내 자신이 지니고 있는 라이플이 뇌신의 신체 일부로 만들어졌음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감사의 마음을 담아 더욱 화려하게 신전을 부숴 주기로 결심하는 그때 그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나머지 문구가 망막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너무 소란스럽게 움직일 경우 뇌신 라이아의 은총이 가디언들에게 내려, 이곳의 위험도가 높아질 가능성도 있습니다.]
[지구로의 통로는 앞으로 다섯 시간 유지됩니다. 그 안에 최대한 신전과 가디언을 파괴하고 통로가 닫히기 전에 빠져나가야 합니다.]
“다섯 시간이라.”
정시우는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두 망치를 굳게 붙잡았다. 대략적이나마 공간의 규모는 감을 잡고 있었고, 다섯 시간 안에 이곳을 부수려면 소극적으로 움직이기만 해선 부족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애초에 파괴와 잠행이란 단어는 양립이 불가능하다. 이렇게 된 이상 뇌신 라이아의 은총이 어쩌고, 가디언 어쩌고 하는 말은 신경 쓰지 않는다. 파괴자답게 대살육과 파괴의 현장을 만들어 내면 되는 것!
“좋아, 그러면 시작해 볼까.”
“아, 역시 그거군요.”
“신전을 부수기에 그것만큼 적합한 것도 없기는 합니다만…….”
정시우가 인벤토리에서 꺼내 든 것은 바로 듀라한의 머리통, 케이나의 악의였다. 여전히 단단하고 날카로운 투구에 잘 보호되고 있는 그것은 무언가를 던져 맞출 때 파괴력이 극대화되는 투척무기! 모든 언데드의 원한을 담아 신의 힘을 부정해 주리라!
“물론 신성력 때문에 오히려 케이나가 소모될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지만!”
“이젠 애칭으로 부르시는군요. 마음에 드셨나 봅니다, 형님.”
“으으, 단면 보여 주지 마세요, 단면.”
정시우는 조만간 목에 액세서리라도 달아 공포감을 없애 보자는 얼빠진 생각을 하며, 바로 그다음 순간 거인의 비명을 풀 스윙으로 휘둘러 케이나의 악의를 쳐 날렸다!
“꺄아아아아악!?”
“혀, 형님! 그랬다간, 그랬다간……!”
그것이 지하 신전의 튼튼하고 거대한 기둥에 직격한 다음 순간 머리통을 중심으로 기둥에 거미줄 같은 실금이 내달리더니, 다음 순간에는 실로 웅장한 효과음과 함께 박살이 나 무너졌다!
[신전 파괴율 : 5%]
“역시 기둥뿌리부터 뽑아내야지!”
“천장, 천장 흔들려요!”
케이나의 악의는 기둥을 부순 직후 거랑의 앞발 앞에 소환되었다. 정시우는 곧장 슬레지 해머를 휘둘러 케이나의 악의를 쏘아 내곤, 한편으로는 거인의 비명을 있는 힘껏 내려쳐 신전 바닥을 부수었다! 그가 위치한 자리를 중심으로 쩍쩍 금이 가며 신전을 이루는 돌바닥이 파괴되었다.
[신전 파괴율 : 7%]
“뭐야 이거 쉽네!”
“퍽이나 쉽네요! 저기 몬스터!”
기둥이 통째로 아작 나고 바닥이 무너지는데 들키지 않을 턱이 있겠는가! 가뜩이나 침입자를 찾아 헤매고 있던 몬스터들이 곧장 소란이 나는 쪽으로 달려왔다!
놈들은 놀랍게도 지구인들이 변화했던 도마뱀 인간, 리자드맨과 굉장히 흡사하게 생겼는데, 단지 차이점이 있다면 그들보다 훨씬 거대하며 그들의 체구에 맞는 병장기를 들고 있었다는 것이다.
[침입자! 침입자다!]
[감히 신전을 파괴하다니! 놈을 파괴한다!]
[크르루루루루루루!]
“후.”
정시우는 놈들의 접근을 보며 거랑의 앞발을 휘둘러 케이나를 사선으로 날렸다. 맹렬한 기세로 솟구친 케이나가 천장을 깔끔하게 부수자, 그 파편이 고스란히 밑으로 떨어져 내리며 리자드맨들을 공격했다!
[신전 파괴율 : 8%]
[크아아아아아악!]
[서, 성스러운 신전을!]
“좋았어!”
“이 오빠는 왜 잠입액션 게임에서 혼자 슈팅 게임을 하고 있는 걸까…….”
정시우의 움직임에는 더 이상 그 어떤 망설임도 없다! 그는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때마다 바닥을 부수며, 케이나를 쉼 없이 쳐 내 신전 지하의 기둥과 벽을 연달아 파괴했다.
기껏 침입자의 모습을 포착한 리자드맨들은 그에게 접근하지도 못하고 쏟아지는 건물 파편에 맞아 죽어 가야 했다.
“쟤넨 달러랑 비드 루팅할 필요가 없으니까 편하긴 하다.”
“형님, 뒤에서도 옵니다!”
“그래? 흡!”
[캬아아아아악!]
그렇다면 케이나를 뒤로 날려 그쪽 천장도 부수면 해결된다! 이곳저곳에서 천장이 무너지고, 지하 기둥이 무너지고, 복도 벽이 파괴되면서 급기야는 일부 공간에 한해 지하와 1층이 통합되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정시우가 행동을 개시하고 불과 3분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신전 파괴율 : 11%]
[침입자가 저기에 있다!]
[죽여라! 침입자를 죽여!]
[지하 창고를 지켜!]
“지하 창고?”
마냥 신전 지하 확장 공사를 진행하던 정시우의 귀를 솔깃하게 하는 정보가 들려왔다. 그는 마나를 전신에 넓게 퍼트리는 것으로 감각을 확장시켜, 자신에게 달려드는 리자드맨들을 제외한 나머지 놈들이 어디로 움직이는지를 읽어 냈다.
“저쪽인가. 자세한 위치는 모르겠는데…… 쩝, 역시 오감을 스킬로 만들고 왔어야 했어.”
“그건 나중에 생각하고, 저쪽! 11시 방향에서 또 몰려와요!”
지하에 머무르고 있던 몬스터들뿐만이 아니다. 정시우가 천장을 뚫어 1층과 지하를 시원스레 연결한 덕에 1층에 있던 리자드맨들도 마구 아래로 뛰어 내려오고 있었다. 그는 적당히 그 근처 기둥을 하나 더 부숴 주며 지하 창고 쪽으로 내달렸다.
[인간이 눈치를 챘다!]
[놈을 죽여!]
[죽여!]
아무래도 신전의 가디언 가운데 마법사도 있었던 모양인지, 한순간 뇌전이 날아들어 정시우의 전신을 강타했다. 공격을 감지하고 있어도 피할 수 없을 만큼 빠른 일격! 본능적으로 스톤 스킨을 발동한 덕분에 타격이 크지 않다는 것이 위안이었다.
“저릿저릿한데…… 가만, 이 정도로 계속 맞다 보면 뇌전 내성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맞기만 한다고 내성이 생길 리가 없잖아요, 여유로운 생각하지 말고 피하기나 하세욧!”
“난 이제 피하지 않아. 다 부숴 버릴 뿐이지! 흡!”
정시우는 마침 눈앞에 보이는 거대한 기둥을 거랑의 앞발로 있는 힘껏 후려쳤다. 쾅! 폭탄 떨어지는 소리가 나더니, 마치 도끼를 휘둘러 나무를 무너트릴 때처럼 기둥이 앞으로 힘차게 기울어 무너졌다!
[신전 파괴율 : 13.5%]
[쿠엑!]
[키하아아악!]
마침 그의 뒤를 거의 다 따라잡았던 리자드맨 전사 무리가 무너지는 거대 기둥에 얻어맞고 맥없이 리타이어했다. 정시우가 뒤에도 눈이 달린 것처럼 기가 막힌 각도로 기둥을 무너트린 덕분이었다.
“역시 파괴는 요령이라니까.”
“맙소사, 한 방에 대체 몇 마리를…… 선배님, 혹시 쟤네 레벨이 낮은 걸까요?”
“아무리 낮게 잡아도 기갑 오크 이상이에요. 그보다도 이 신전 건축물, 대체 뭘로 만들어졌는지는 몰라도 내구도가 비정상적으로 높아서 그런지 공격력도 대단해요. 파편에 얻어맞는 리자드맨들이 아파하는 정도만 봐도 분명하죠.”
“그 괴상한 건축물을 형님은 지금…….”
“전직도 전에 기갑 오크 천부장을 잡았던 사람인데 뭘 새삼스럽게.”
정시우는 지금 마나와 힘을 아끼기 위해 괴력 스킬도 발동하지 않고 있었다. 그저 부여와 강타 스킬만 활용하는 정도로 신전을 부수고 있는 것이다!
패시브 스킬인 헤비 웨폰 배틀도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기는 했지만, 지금 그는 인간보다는 공성병기라는 말이 어울릴 법한 파괴력을 내고 있었다.
“이쪽은 다 정리됐어요. 아, 5시 방향에서 몰려오는 놈들이…….”
“놈들보다는 다른 쪽을 공략하자.”
그때 마침 회수된 케이나를 뒤로 쏘아 내 또 벽 하나를 무너트린 정시우가 신전 복도를 지나 왼쪽으로 커브를 돌자, 마침 저 너머 복도로 달려가는 리자드맨 무리가 보였다.
“좋아, 쫓자!”
“마나반응! 함정입니다!”
“알고 있어!”
하지만 뒤에서도 추적자들이 몰려드는 지금 여유롭게 함정을 하나하나 파괴할 시간은 없다! 정시우는 근처 기둥을 통째로 뜯어내 복도로 있는 힘껏 던져 냈다. 그것만으로 리자드맨들에게는 반응하지 않았던 함정이 일제히 발동되었다.
뇌신의 이름에 어울리는 번개 함정, 클래식하게 바닥이 무너지며 가시로 가득한 바닥이 드러나는 함정, 화살과 독가스가 날아드는 함정…… 그 모두가 광속으로 내던져진 신전 파편에 적중하여 그것을 너덜너덜하게 만들었다.
[신전 파괴율 : 16%]
“좋아, 이제 가자!”
“이렇게 무식한 함정 돌파는 처음 봐…….”
정시우는 혹시 몰라 신전 파편을 다시 뜯어내 앞으로 내던지며 그 뒤를 따라 내달렸다. 그런데 복도를 순조로이 돌파하는가 싶던 그때 복도의 양옆으로 난 벽이 무너지며 그 뒤에 숨어 있던 리자드맨 호위병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네놈은 여기서 죽는다!]
[뇌신의 의지를 맛보아라!]
놈들이 쥔 날카로운 장창이 정시우의 전신을 노리고 내질러졌다. 그 숫자만 족히 수십에 이르는, 푸르게 빛나는 마나로 강화된 장창이!
그의 전신을 가려주던 건물 파편은 이미 추진력을 잃고 무너진 후였으며, 만약 멈추어 섰다간 케이나로도 미처 다 죽이지 못한 추격자들이 따라붙어 곧장 그의 등짝에 창을 찔러 넣을 터였다. 애초에 놈들은 정시우를 유인해 죽일 생각이었던 것이다.
“흡!”
그러나 정시우의 선택은 언제나처럼 심플했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크루얼 차지를 발동하며 장창의 덤불을 향해 그대로 몸을 던졌다. 사실 돌진 속도가 너무 빨라 중간에 멈출 수도 없었다는 쪽이 정확했다.
[크루루루루루루루루!]
[죽어랏!]
“하!”
[크, 크룩?]
[쿠와아아아아아악!]
리자드맨들은 승리의 환호를 내지르며 그의 죽음을 기대했으나, 다음 순간 정시우와 충돌하며 볼링 핀처럼 튕겨 나갔다. 그들이 지닌 얇은 창 정도로는 도저히 격돌 순간의 충격을 해소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후, 아프다.”
“전혀 안 아파 보여요…….”
정시우는 복도를 완벽히 돌파하고 나서야 제자리에 멈추어 섰다. 그 뒤를 추격하던 리자드맨들은 전신에 창을 꽂고도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정시우를 보며 기겁해 물러났다.
[괴, 괴물…….]
[괴물이다…….]
“사돈 남 말하고 있네, 이 자식들.”
어쨌든 지금 리자드맨들은 그에게 위압되어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숨을 돌리려면 지금이겠지.
정시우는 용세하에게 경계를 맡겨 두고는 자신의 팔이며 복부에 꽂힌 창들을 뽑아냈다. 어떻게든 심장과 머리만 보호했는데 생각보다 방어구가 튼튼했던 건지, 크루얼 차지의 방어력 보정이 좋은 것인지 몰라도 뼈나 근육은 상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조금만 참으세요, 오빠.”
“어, 굳이 치유 안 해도 될 것 같긴 한데.”
“조용히 해욧.”
수아린의 치유 마법을 받으며 창을 다 뽑아낸 정시우는 그것을 그러모아 한 손에 쥐더니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리자드맨들을 향해 가볍게 뿌렸다. 그의 기세에 압도된 리자드맨들은 저항하지도 움직이지도 못하고 그것에 당해 사망했다. 오히려 놈들의 다음 움직임을 대비하고 있던 정시우가 허망해지고 말았다.
아니, 아무리 무서워도 그렇지 목숨이 위협받는데 움직이지 못한다고? 정시우는 그제야 자신의 패시브 스킬 용의 위엄이 놈들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서운 행동을 하면 그 효과를 극대화시켜 준다니…… 역시 좋은 스킬이네.”
“앞으로도 스킬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몸을 꼬치로 만들진 말아 주세요.”
“그건 나중에 생각해 보자.”
수아린의 투정을 상큼한 미소로 흘려보낸 정시우는 뒤로 케이나를 쏘아 내 자신이 지나 온 복도를 깔끔하게 무너트리고는 그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자 그곳에 있었다.
“오, 제법 그럴싸한데.”
[크르르르…… 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저열한 인간을 죽인다.]
[키하아아아아아!]
정시우가 지닌 시크릿 다우저를 맹렬히 반응하게 만드는 지하 창고와, 그것을 지키는 파수꾼이.